전화기 너머로 딱딱한 통화 안내음이 울렸다.“지금 고객님께서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없는 번호?!성도윤은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나 피하려고 일부러 전화번호까지 바꾸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그는 다시 차설아와의 채팅창을 열어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하지만 문자를 보낸 순간 수신이 거부되었는데 아마도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단한 듯했다.“젠장!”성도윤은 싸늘한 얼굴을 보였다.‘정말 독한 여자네. 이렇게 철저하게 연락을 끊겠다고?’그들이 이혼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차설아는 벌써 성대 그룹의 클라이언트를 모두 채갔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 밤 여러 클럽을 누비면서 매번 다른 남자와 즐기곤 했는데 그야말로 최고로 자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심지어 이제는 남자와 방까지 잡는다고 하니 ‘전 남편’은 아예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성도윤은 큰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한참 고민에 잠긴 후 곧바로 비서 진무열에게 전화를 걸었다.“30분 뒤에 해안시의 모든 호텔이나 모텔의 투숙객 정보를 알아야겠어!”진무열은 어리둥절한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갑자기 투숙객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혹시... 불륜을 잡으려고 하시는 겁니까?”“내가 너한테 보고해야 해?”“아닙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하지만 진무열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한마디를 보탰다.“그리고... 사모님은 그냥 즐기려는 마음이 있는 것뿐이지, 다른 남자와 방을 잡지는 않았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성도윤의 안색은 한껏 어두워졌다.“닥쳐!”30분 후, 진무열은 한 묶음의 호텔 투숙객 정보를 가져왔지만 그 안에는 차설아의 체크인 기록이 없었다.“대표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얌전하고 본분을 지키시는 사모님께서 대표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다른 남자랑 방을 잡겠어요? 전에 클럽을 돌아다니고 젊은 남자들과 어울려서 찍힌 사진들도 아마 일부러 대표님의 질투를 유발하려고 했을 겁니다.”진무열은 방관자로서 조리 정연하게
차설아의 산뜻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마치 무슨 재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내가 정말 게으른 버릇은 고쳐야 한다니까. 이미 이사를 결심했으면서 왜 아직도 집을 안 찾아보고 버티고 있었던 거야? 바로 맞은편에 살아서 아무리 애써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오늘처럼 이렇게 마주하게 되잖아!’차설아는 한참 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성도윤은 긴 팔을 내밀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왜? 나 만나기 부끄러워? 즐길 것 다 즐기더니 이제 양심에 찔려?”양심에 찔린다고?그 말은 차설아의 승부욕을 자극했다.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엘리베이터를 나서더니 고개를 들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성도윤 대표님,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즐겁게 살고 있는 게 뭐 어때서? 내가 무슨 남의 물건을 훔치기라도 했어, 아니면 뺏어오기나 했어. 내가 왜 양심에 찔려야 하는데?”“오히려 한 회사의 대표인 당신이 늦은 밤에 자지도 않고 왜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집 앞에 서 있는 거야? 마침 나한테 들켰으니 양심에 찔려야 하는 쪽은 그쪽이 아닌가?”성도윤은 논리적인 차설아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차가운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당신이 얼마나 막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당신 신분을 명심하라고. 요 며칠 다른 남자들과 연예면 기사 난 걸 자랑으로 생각하는 거야?”차설아는 더 화가 나지도 않았다.‘이 남자는 정말 언제나 이렇게 오만방자하네! 내가 전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웠지, 이런 남자를 4년 동안이나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말이야. 괜히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로 되었잖아? 그래도 다행이지,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까. 더는 성도윤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더니
성도윤은 눈을 떴다. 깊은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비쳤고, 약간의 짜증과 함께 차갑게 말했다.“튕기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적당하면 귀엽지만, 도를 넘으면 재미가 없지.” 말을 마친 후, 성도윤은 더욱 강한 카리스마로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성도윤은 당연히 차설아도 원하면서 그의 소유욕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튕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에 차설아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런 마음이 어떻게 금방 사라질 수 있겠는가?급해 난 차설아는 핸드폰을 꺼내 잘생긴 남자의 차가운 얼굴에 들이밀며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성도윤, 당신 정말 미쳤어!”“내가 연예계 뉴스에 올라서 당신 망신을 줬지? 경고하는데 지금 당장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면 내일 법률 뉴스에 오르게 될 거야!”성도윤은 허리를 곧게 세웠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뭘 하려는 거야?”차설아는 대답하지 않고 사진을 찍은 뒤, 112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훌쩍이며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이죠? 살려주세요. 여기 샘천 레지던스인데요, 어떤 변태가 쫓아와서 저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해요. 빨리 와서 저 좀 구해주세요!”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부부 싸움이니 경찰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하려 했지만, 갑자기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래서 법적으로 지금 성도윤의 행동은 성추행에 속하기에 충분했다.성도윤이 멈칫하는 모습을 본 차설아는 자신감을 갖고 말을 이어갔다.“이봐요. 성 대표님, 여기서 2킬로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파출소가 있답니다. 만약 경찰이 올 때까지 계속 이러고 계신다면, 옛정이고 뭐고 난 당신을 감옥에 넣을 거예요.”차설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성우에게서 배운 법조를 읽었다.“형법 237조에 근거, 여성을 추행한 정도가 엄중한 자는 징역 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성우는 이 방면의 사건을 다루는 전문가야. 한번 직접 확인해 볼래?”성도윤의 눈은 점점 차가워지더니, 마치 잠복해 있는 맹수처럼 위험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그제야
성도윤은 차설아의 경고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차설아가 다른 남자를 빌미로 자신을 화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성도윤은 계획대로 골드 찻집에 도착해 소씨 그룹의 사장 소건우와 만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소씨 그룹은 중국 전역에서 전자 제품 분야의 4대 유통 업체 중 하나이다.소씨 그룹과 함께 이름을 날린 회사는 바로 성대 그룹과 긴밀히 협력했던 남우 그룹이었다.지금 남우 그룹은 차설아에게 빼앗겼으니, 성도윤은 빠른 시일 내로 새로운 협력 상대를 찾아야만 성대 그룹이 생산한 전자 제품의 판매 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찻집의 최고급 룸에서 소건우는 이미 오랫동안 기다렸다.성도윤을 보자 바로 일어나 악수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도윤아, 오랜만이구나. 내가 드디어 너랑 차 한 잔을 마실 자격이 되는구나.”“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아저씨.”성도윤은 몸을 곧게 펴고 여전히 차갑고 거리감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덤덤하게 소건우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도윤아, 어서 이 차를 마셔봐. 중국의 대홍포인데 한 입만 마셔도 입안에서 풍미가 돌아.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소건우는 열정적으로 또 정성스레 차를 따랐다.업계의 이치대로라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소건우이다. 하지만 성대 그룹의 강력한 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성도윤은 적어도 소건우보다 20살은 어리지만, 타고난 카리스마가 강해서 소건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무엇보다 성대 그룹이 생산하는 전자제품은 퀄리티가 애플에 버금간다는 입소문을 타고 확고한 팬층을 확보한 상태였다.성대 그룹의 유통 업체가 된다는 건 아시아 전역의 전자제품 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몇 년 전, 남우 그룹에게 그 기회를 빼앗기고, 오늘 드디어 소씨 그룹의 차례가 되었으니 당연히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남해진 그 늙은 여우가 성대 그룹을 마다하고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랑 손을 잡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미련하기 짝이
이 말을 들은 소건우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오해야, 어르신은 모래밭을 누비며 적을 쓰러 눕힌 영웅이셔. 그런 분을 내가 존경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마찰이 생길 수 있겠어?”“사실인가요?”성도윤은 담담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날카로운 눈으로 소건우 말의 진위 여부를 판단했다.사실, 성도윤은 이미 소씨 그룹에 대해 많은 사전조사를 했다. 확실히 두 가문 사이에 그 어떠한 마찰도 조사해 내지 못했다.할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서, 성도윤을 문전 박대를 하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당연히 사실이지.”소건우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지만, 켕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기껏해야 내가 젊었을 때, 자네 아내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미 돌아가신 자네 장인어른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을 뿐이야.”“차설아의 아버지요?”성도윤은 싸늘한 눈으로 계속 물었다.“그분과 어떤 마찰이 있었죠?”“참, 성인 남자들 사이에 뭔 문제가 있겠어? 당연히 사업 문제, 그리고 여자문제지.”“아주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자네 장인어른이 장모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원래 사업상 라이벌이었지. 계속 대적하다가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여자 때문에 크게 싸워서 인연을 끊었지. 그런데 그 독한 여자가 우리 사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져버렸어...”당시 일을 언급하던 소건우는 분노에 차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차설아 아버지와의 마찰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두 남자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 여자 때문에 분한 것이었다.“도윤아, 여자는 말이야, 고양이를 가장한 호랑이야. 사람을 속이기로 작정을 하면 혼까지 빼앗아 가니 무조건 조심해야 돼. 절대 여자에게 사로잡히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소건우의 말에 성도윤은 왠지 차설아가 떠올랐다.이혼 전과 후의 모습이 확연히 다른 것을 생각하면, 소건우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었다.여자는 확실히 변장에 능한 동물이다!“안심하거라, 소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진무열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이 여자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왜 그래, 도윤아? 마누라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이미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하던 소건우는 진무열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또 자리에 앉았다.찻집에는 당연히 TV가 있었고, 성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직원에게 켜라고 했다.TV에서 차설아는 수수한 옷차림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수백 곳의 언론사 앞에 나타나 성도윤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가엽게 발표했다.“안 좋은 소식으로 인사를 드려 죄송하지만, 저랑 성도윤 씨는 4년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합의 이혼을 했음을 발표합니다. 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분도 행복하길 바랍니다.”밑에 있던 기자들은 우수수 손을 들며 차설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차설아 씨, 성도윤 씨와의 결혼 파탄은 제3자의 개입과 연관이 있나요?”“차설아 씨, 전에 라이브 방송에서 성도윤 씨의 내연녀가 아기까지 가졌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배씨 가문의 여섯째 도련님, 배경수 씨와 자주 외박을 하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남편분과 맞바람을 피우신 건가요?”차설아는 눈을 늘어뜨리고 조용히 흐느끼며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저랑 성도윤 씨는 같은 세계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맞지 않았어요.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에요. 그리고 다른 것들은...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차설아는 비록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임대옥에 버금가는 억울한 표정으로 모든 걸 말해주었다.이 기자회견이 끝나면 성대 그룹에 향한 부정적인 평가와 질타가 봇물 터지듯 쏟아질 것이다.사실, 차설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재벌가의 이혼이 언론에 알려지면 반드시 큰 파장을 일으킨다.그래서 차설아의 이런 행동은, 일부러 성도윤을 욕보이게 하고, 어젯밤 그의 ‘지나친’ 행위에 대해 복수를 한 것이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소건우는 진심으로 성도윤을 동정하며 서둘러 직
성도윤은 어이없이 한숨을 내쉬고 차를 몰고 본가로 향했다.소씨 그룹과 협력하기로 선택한 후부터 할아버지의 반대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이따가 한바탕 혼이 날 것이다.마침 이 기회에 소씨 가문이 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물어볼 수 있다.성도윤이 저택에 들어가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글렀어, 그 자식은 글렀어. 돈에 눈이 멀어서 다른 건 안중에도 없어. 오늘 반드시 때려죽일 것이니 아무도 나 말리지 마!”성도윤의 등에 난 채찍 상처가 낫지도 않았다. 성도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조여왔다.성주혁은 군인 출신이라 후손들을 단순 폭력적으로 교육해 왔다.그래서 성가의 후손들은 모두 품행이 단정했고, 성도윤도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유독 차설아에 관한 일에서 그는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할아버지.”성도윤은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무거운 걸음으로 별장 로비로 들어갔다.집사는 아주 기뻐했다.“어르신, 화 좀 푸세요.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어요.”성주혁은 고개를 들고, 치타 같은 매서운 눈으로 성도윤을 노려보더니 “쾅” 찻잔을 내리쳤다.“너 이 자식, 무슨 낯짝으로 굴러들어 와?”성도윤은 어이가 없었다.“할아버지께서 부르셨잖아요?”“이것 좀 봐. 이 자식은 틀려먹었다니까. 내 앞에서 감히 말대꾸를 하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이 늙은이는 안중에도 없는 건지! 이것도 손주라고 키웠으니, 짐승만도 못한 놈!”어르신은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일찌감치 익숙해진 성도윤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혼이 났다.성도윤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집안 식구들이 괜히 오랜 세월 동안 할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뜻을 거역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어르신이 일단 화가 나면, 막무가내로 모든 것을 틀렸다고 나무라기 때문이다. 숨 쉬는 것조차 죄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내가 성대 그룹은 절대 그 집안과 협력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 않았느냐? 절대 소건우와 접촉
성주혁은 차설아의 기자회견 녹화분을 보고 한참이나 침묵했다. 주름진 얼굴에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성도윤은 말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속으로는 할아버지가 드디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좋아했다.물론, 성도윤은 차설아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상처를 줬었다.하지만, 차설아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성도윤은 임채원과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척 한 것이지만, 차설아와 배경수는 진심이고 아이까지 낳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들의 이혼은 분명히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인데 왜 성도윤만 모든 것을 뒤집어써야 하는가?“할아버지, 보셨다시피 설아는 저와 이혼하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 그래야 그 잘난 배경수와 떳떳한 사이가 되죠. 아니면 우리 이혼 소식을 벌써 공식 발표할 리가 없잖아요.”성도윤의 얼굴은 차가웠고, 목소리에는 화가 가득 차서 말했다.“할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순수한 여자 아니에요. 모두 위장된 겉모습에 속았다고요.”TV를 응시하던 성주혁은 성도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흰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말했다.“네놈은 그렇게밖에 이해를 못 하는 거야?”“어쩐지, 학교 다닐 때 다른 과목은 만점을 받으면서, 국어만 약하더라니. 독해력이 너무 떨어져!”“멍청한 놈!”성주혁은 성도윤의 등짝을 후려쳤다.“보고도 모르겠어? 설아는 널 잡고 싶은 거야!”성도윤은 어이없게 한숨을 내쉬고 거리낌 없이 반박했다.“제가 눈이 부실해서 몰랐네요.”“넌 당연히 모르지, 넌 눈이 멀었으니까!”성주혁은 돋보기 안경을 밀고, 녹화 영상의 어느 한 장면으로 돌아가 화면을 가리키며, 마치 학술 연구를 하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봐봐. 이 말의 핵심이 무엇이냐. 설아가 너와 4년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하지 않냐. 이 말이 무슨 뜻인 것 같아?”“무슨 뜻인데요?”“바로 널 잊지 못했고, 너와 재혼하고 싶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거지!”성주혁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성도윤은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서씨 가문 서은아였다. 서은아는 그동안 차설아를 감시하고 있었다. 차설아가 식당에 밥 먹으러 간 사이에 차성철이 있는 병실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수술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차성철은 살짝 다쳐도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서은아는 병실 침대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작은 물건을 차성철 베개 옆에 올려놓고는 산소마스크를 벗겼다.“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안해. 당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당신 여동생도 기가 죽어서 나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박성훈이 와서 당신을 살렸지 뭐야? 성도윤이 박성훈한테 부탁한 거라면서? 정말 어이가 없더라. 보나 마나 차설아가 성도윤한테 부탁한 거겠지. 뻔뻔스러운 년이...”서은아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날 탓하지 마. 탓하려면 그 못난 여동생을 탓해. 차설아는 내가 성도윤과 약혼한 사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성도윤한테 달라붙으면서 날 괴롭혔어. 동생이 저지른 잘못은 오빠인 당신이 책임져야지. 안 그래?”서은아는 말을 마친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식당에 앉아 있던 차설아는 바람이 포장한 음식을 보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먹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이야. 다른 식당에서 하는 건 눅눅해서 맛없지만 이 식당에서 하는 건 바삭하잖아. 바람 씨가 널 위해서 사 온 건데, 한 입이라도 먹어 봐.”배경윤은 불안해하는 차설아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이 식당에 줄을 서려고 아침 일찍 깨어났어. 하지만 스파크가 좋아하는 거라면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사러 가야지.”바람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차설아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쯧쯧. 바람 씨한테 설아를 맡겼다가는 뚱보가 되겠어. 한 달 안에 10킬로 찐다는 것에 내 머리카락을 걸겠어.”“스파크는 살이 쪄도 예뻐서 괜찮아. 지금처럼 귀여울 거
배경윤은 박성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박성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윤이 데려온 의사라는 말에 성도윤처럼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경계했다.“경윤아, 그러지 마. 박 선생님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오빠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준 분이야. 오빠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차씨 가문의 은인이 될 분이거든.”차설아는 다시 일어나더니 박성훈한테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박 선생님, 죄송해요. 경윤이는 늘 저를 아껴주고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 이런 일에서는 예민하게 굴거든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병원에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죠. 만나본 보호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저는 이해해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저 말고 성 대표님께 고맙다고 해야죠. 저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는데 성 대표님이 간절하게 부탁했고 제가 좋아하는 바다낚시까지 같이 해주셔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바다낚시 내기에서도 졌으니 성 대표님 말대로 수술해야 했어요.”“성도윤이 어렵게 모신 분인 건 알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가 깨어나면 인사하려고요.”“잘 생각했어요.”박성훈이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말을 이었다.“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힘들 거예요. 사실 생각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일은 없으니 마음 편안하게 먹고 환자분이 깨어나길 기다리세요.”말을 마친 박성훈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오후 4시라서 박성훈이 말한 시간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배경윤은 차설아가 또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밥부터 먹자.”“괜찮아. 난 배고프지 않아. 오빠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오빠가 일어나야 내 마음도 편해질 것 같아.”차설아는 병실 밖에 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차성철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도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배경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그 나쁜 놈은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차설아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도 도움받았잖아.”“아...”배경윤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뭇거렸다. 차설아한테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는 목적, 증언, 사건 발생 시간으로 보았을 때 성도윤이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성도윤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꺼냈다가 차설아와 성도윤이 싸우게 된다면 손해 보는 건 차설아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성도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설아야,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성도윤을 너무 믿지 마. 성도윤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진심을 드러내지 말고 계속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지?”배경윤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했다.“나도 알아. 지금까지 성도윤을 용서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오빠 얼굴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성도윤이 떠올라서 화가 솟구쳐 오르거든... 성도윤이랑 잘 해볼 생각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의사를 데려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수술실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눈에 핏줄이 가득 서렸지만 차성철이 나올 때까지 쉴 수 없었다. 성도윤에 관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차설아의 마음이 아팠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선을 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더 마주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더 이상 그 사람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항상 경계해야 해. 그 사람이 얼마나...”“알겠어. 곧 수술이 끝날 테니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빠가 무사히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자.”차설아는 배경윤의 말을 끊었다.“그래. 같이 기다려보자.”배경윤은 슬픔이 가득 서려 있는 차
사도현은 턱을 쳐들더니 거만하게 말했다.“내가 바로 배경윤 남자 친구예요.”사도현의 말에 같이 식사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회사 대표가 당당하게 공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뭐?”배경윤은 어이가 없었다. 사도현이 미친 짓을 저지를 줄 예상 못했는지 사도현을 향해 부르짖었다.“사도현, 너 정말 미친 거야?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남자 친구라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찬영 오빠 앞에서 공개하다니...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내 미래의 남자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한테 알려주려고 작정한 거야!’“내 말이 틀렸어? 우리 사귀는 사이 맞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온 첫 번째 날에 어떻게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잤겠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사도현이 피식 웃더니 부르짖는 배경윤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의 시선을 느끼면서 이제야 자신의 것을 되찾은 것 같았다.“그, 그건...”배경윤은 말문이 막혔다. 설명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때 진찬영이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약 두 사람이 한방에 들어가는 것이 사귄다는 증거라면, 사도현 씨는 배경윤 씨가 아니라 윤설 씨의 남자 친구인 것 같은데요? 윤설 씨 곁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도대체 두 분 중에서 누구의 남자 친구인지 헷갈리네요. 아니면 두 분을 속여서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닐까 싶어요.”진찬영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반격할 수 있는 틈을 찾았다. 그러고는 도덕적인 면에서 사도현을 비난하기 시작했다.“맞아요! 같은 방을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날에 남은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랬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외양간에서 자기 싫었거든요. 그날 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윤설 씨랑 사도현 씨 사이는 각별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여자랑 사귀는 것 같은데 왜 나를 언급하고 난리야! 난 너처럼 미친놈이랑 사귈 바
그 말을 들은 장윤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윤태가 다급히 뜯어말렸다.“집에 갈 정도로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죠! 그런 설정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찬영이도 커플 설정을 원하지 않을 테니 강요할 수 없었거든요.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장윤태는 게스트들이 말하는 커플 중 한 쌍이 진찬영과 배경윤임을 확신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진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장 감독님,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배경윤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개인적인 일로 해안시에 다시 돌아가야 해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정말 재밌었어요. 게다가 찬영 오빠랑 커플로 촬영할 수 있다고 하면 더 행복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해요.”“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나 보지?”말을 마친 사도현은 혼자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장윤태는 배경윤을 설득하지 못하자 재빨리 다른 제안을 했다.“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곧 연애 예능 촬영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되면 우리 찬영이랑 같이 게스트로 출연하지 않을래요?”“좋아요!”배경윤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진찬영과 함께 촬영할 수 있다면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무조건 출연할 것이다. 진찬영과 떨어지려니 아쉬웠지만 돌아가서 차설아의 곁을 지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배경윤 씨랑 같이 출연한다면 저도 좋아요.”진찬영은 배경윤을 향해 말했다. 애초에 진찬영은 배경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이 마을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배경윤이 있는 곳에 꼭 따라갈 것이다.“그럼 두 사람이 사인한 계약서 말고 다른 계약서를 준비할 테니 이제 만나서 얘기해요. 조건을 구체적으로 적으면 이 프로그램 계약서대로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장윤태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술을 마시면서 껄껄 웃었다.“안 돼요.”사도현이 차갑게 말했다.“배경윤은 너무 바빠서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시간이 없을 거예요.”배경윤
사도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가 진찬영을 밀어주든지 상관없이 배경윤에게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재벌가 아가씨의 마음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윤설 씨가 사도현 씨한테 빌붙어서 드라마 여주인공 역만 맡는 것처럼요?”진찬영이 말을 이었다.“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도 사도현 씨랑 같은 줄 알고 섣불리 판단할 수밖에 없겠죠. 더 이상 의미 없는 대화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진찬영이 가마뚜껑을 열어보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추어탕 안에 청양고추를 넣으니 배경윤이 좋아하는 매콤한 추어탕이 완성되었다. 사도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할 때, 진찬영이 추어탕을 옮겨 담고는 주방을 나섰다. 사도현은 불을 피우면서 흘러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두 남자의 대결은 사도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여러분, 오늘 메뉴는 추어탕이에요! 어서 드셔보세요!”진찬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쉬고 있던 게스트들을 불렀다. 배경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와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진찬영이 해준 밥을 먹어서 기쁘긴 했지만 웃을 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진찬영은 직접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다시 생각해요. 배경윤 씨를 위해 만든 건데, 한 입도 먹지 않으면 좀 속상할 것 같거든요.”“아, 죄송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어요.”배경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어탕을 먹기 시작했다.“먹어봤던 추어탕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당연히 그렇겠죠. 추어탕에 진찬영 씨의 사랑이 가득 들어갔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요. 우리 같은 구경꾼들은 배경윤 씨가 부러워 죽겠다니까요!”“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직접 미꾸라지를 손질했다니깐요. 보통 정성이 아니에요! 그 여자 덕분에 저희도 이렇게 맛있는 추어탕을 먹어보네요.”추어탕을 맛보던 게스트들이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진찬영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들으면서 배
윤설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나는 그렇다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더 알려줄 것도 없고요. 정말 궁금하다면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배경윤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배후가 밝혀진 마당에 더 캐묻는 건 멍청한 사람이나 할 짓이었다. “그리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새겨들어요. 도현 씨랑 성도윤은 생사를 함께 겪은 형제이니 도현 씨를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현 씨는 성도윤 편을 들 테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차성철이 수술했다는 것을 성도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성형외과 의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윤설은 배경윤의 반응을 지켜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성도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성도윤이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그게 결국 성도윤의 일이 되는 거지. 난 사실만 말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 배경윤, 이제는 도현 씨 곁에서 떨어져!’“난 성도윤이 그런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윤설의 말을 들은 배경윤은 모든 것이 성도윤과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고 사도현이 성도윤을 도와주었다고 여겼다. ‘계속 여기에 남아있어서는 안 돼. 얼른 해안시로 돌아가서 설아한테 알려줘야지. 그놈 때문에 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어! 설아야, 조금만 기다려줘!’주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은 두 남자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진찬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올린 채 두부를 썰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멋있어서 여자든 남자든 진찬영에게 반하고 말 것이다.하지만 부뚜막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는 사도현은 진찬영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사도현은 장작을 진찬영의 팔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토막으로 끊이고 불 속에 집어넣더니 차갑게 말했다.“우리 둘밖에 없으니 솔직하게 말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돈 때문이라면 원하는 만큼 줄 테니 말해봐요. 얼마면 되
배경윤은 윤설이 단둘이 얘기하자는 말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이 일은 차설아 친오빠의 목숨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윤설의 의도를 알면서도 함정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내 방으로 가서 단둘이 얘기해요.”배경윤은 앞장서서 사도현과 지냈던 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은 윤설을 방까지 부축한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윤설은 울퉁불퉁한 방바닥, 구멍이 난 천장과 낡아서 당장이라도 망가질 것 같은 침대를 보면서 말문이 막혔다.윤설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현 씨랑 이런 방에서 같이 지낸 거예요?”“네. 침대도 푹신하고 공기가 좋아서 잘 잤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배경윤은 윤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먼저 꺼낼 줄 몰랐다. 사도현은 배경윤과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윤설 곁을 지켰다.‘이런 것까지 질투하는 건가?’“쓰레기 소각장 같은 곳에서 도현 씨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도현 씨는 결벽증 때문에 이런 곳에서 자지 못했을 거라고요.”“쓰레기 소각장이라고요?”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방이 아니면 외양간에서 소랑 같이 자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꽤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윤설 씨가 결벽증인 것 같아요.”“도현 씨가 배경윤 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네요. 배경윤 씨를 위해서 이런 누추한 방에서 자고 더러운 진흙으로 들어가 배경윤 씨를 안아 들다니... 내가 배경윤 씨를 얕잡아 봤네요.”윤설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배경윤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본론만 얘기하세요. 배후가 누구기에 성형외과 의사한테 전화하게 된 거죠?”“말해도 배경윤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걸요?”윤설은 차갑게 웃더니 거만한 눈빛을 하고서 배경윤을 훑어보았다. 배경윤이 목을 치려고 하는 배후는 손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하더라도 알 건 알아야겠어요.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배후가 누구인
게스트들은 사도현의 표정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불을 피우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 같은데요?”옆에서 듣고 있던 배경윤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네가 불을 피운다고?”그러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너처럼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장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불을 피우다니, 네가 듣기에도 웃기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주방에서 나오는 게 도움이 되겠어.”배경윤은 불을 피우고 진찬영이 요리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몹시 당황했다.‘사도현은 왜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야! 찬영 오빠랑 같이 경운기를 타려고 할 때, 찬영 오빠랑 미꾸라지를 잡을 때, 찬영 오빠랑 같이 요리하려고 할 때 계속 방해만 하잖아. 명색이 엔터테인먼트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거야?’“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 피우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아니면 여자가 옆에 있어야 요리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에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잖아.”사도현은 팔짱을 낀 채 진찬영을 쳐다보면서 배경윤한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사도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도현은 일부러 진찬영을 저격했다.“너 자꾸 함부로 말할 거야?”배경윤은 화가 나서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팬으로서 누군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여우 같은 놈, 여자가 없으면 요리를 못하는 놈이라고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괜찮아요.”진찬영이 피식 웃더니 배경윤의 팔목을 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배경윤 씨가 옆에서 보고 있어야 안심이 되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혼자 하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던데요?”진찬영은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사도현 씨께서 불을 잘 피울 수 있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죠. 다들 쉬고 계세요.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진찬영과 사도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마당에 앉아 있던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