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남자랑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성도윤을 빼닮은 얼굴은 무한히 확대되었다.차설아는 숨을 죽이며 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그는 성도윤과 똑같이 깊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모든 속셈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굳이 두 사람의 차이를 구별하자면 성도윤의 분위기에는 카리스마가 더해졌고, 그와 반대로 지훈은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눈망울에 차가움과 우울함이 묻어나 있었다.‘참 신기하다니까. 사람은 정말 이상한 동물이야, 왜 항상 똑같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지?’4년 전 그녀는 성도윤에게 첫눈에 반했었다.4년 후의 지금, 그녀는 또 성도윤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도대체 자신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잘생긴 남자인지 성도윤인지 차설아 본인조차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무슨 생각 해요?”남자는 차설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지훈의 낮은 목소리는 오래된 와인처럼 감미로웠고 매혹적이었다.“아니야, 난 이만 갈게.”차설아는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남자는 긴 팔로 손쉽게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는 당신 남편을 닮은 것뿐이지, 당신 남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두려워해요?”“두려워하지 않았거든!”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그래, 이 녀석은 그저 도윤 씨랑 비슷하게 생긴 것뿐이야, 도윤 씨도 아닌데 내가 왜 겁을 먹었지? 다른 애들은 내가 성도윤의 아내라는 걸 알고 모두 도망갔는데 이 녀석은 도망가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도발하고 있잖아? 그럼 성도윤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점만으로도 제대로 즐겨야 하겠는걸?’이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녀는 수줍은 자태를 거두고 오히려 당당하게 남자의 턱을 치켜들고는 입꼬리를 올렸다.“너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네가 나한테 겁을 먹을까 봐 걱정돼!
차설아는 택시를 잡아 지훈과 함께 차에 올랐다.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말한 후 불과 20여 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도착했으니까 내려.”차설아는 강아지를 이끌듯 남자의 넥타이를 잡으며 차에서 내렸다.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둥그런 돔 모양에 형광색 지붕의 작은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어둠 속에서 작은 집은 그윽하고 차가운 빛을 뿜어냈는데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아 꽤나 낭만적이었다.“어때? 널찍하고 예쁘지?”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지훈을 보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는 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비밀 아지트야. 웬만한 사람한테는 알려주지 않는다고!”“비밀 아지트요?”지훈은 여러 개의 집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들며 흥미를 보였다.“재밌네요.”직원은 가까이 다가오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차설아 님, 안녕하세요. 그전처럼 3호실을 고르실 거죠? 물건은 다 준비해 드렸습니다.”3호실은 거리가 가장 멀었지만 시설이 최고급이었고 또 조용했기에 방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차설아는 익숙한 듯이 곧바로 3호실로 향하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들어와, 너 오늘 밤 나랑 놀아주기로 한 거다?”지훈은 이곳이 도대체 어떤 분위기의 모텔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안이 벙벙했다.“여...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바보야, 보면 모르겠어?”차설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으로 달려가고는 최신형 기계식 키보드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반짝였다.“이 XF 키보드는 수많은 게이머들이 2년을 꼬박 기다린 신제품이야. 키 입력할 때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아주 뚜렷하고 부드러워. 타이핑에 따라 LED 조명이 커졌다 꺼졌다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반응 속도가 정말 대박이야. 최상급 서버와 모니터만 있다면 그 어떤 게임에서도 우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지훈은 차설아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5분이나 걸렸다.“그러니까 여기는 모텔이 아니라... PC방이에요?”“모텔?”차설아는 지훈의 이마를 툭 치며 인상
전화기 너머로 딱딱한 통화 안내음이 울렸다.“지금 고객님께서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없는 번호?!성도윤은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나 피하려고 일부러 전화번호까지 바꾸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그는 다시 차설아와의 채팅창을 열어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하지만 문자를 보낸 순간 수신이 거부되었는데 아마도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단한 듯했다.“젠장!”성도윤은 싸늘한 얼굴을 보였다.‘정말 독한 여자네. 이렇게 철저하게 연락을 끊겠다고?’그들이 이혼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차설아는 벌써 성대 그룹의 클라이언트를 모두 채갔다. 그뿐만 아니라 매일 밤 여러 클럽을 누비면서 매번 다른 남자와 즐기곤 했는데 그야말로 최고로 자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심지어 이제는 남자와 방까지 잡는다고 하니 ‘전 남편’은 아예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성도윤은 큰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한참 고민에 잠긴 후 곧바로 비서 진무열에게 전화를 걸었다.“30분 뒤에 해안시의 모든 호텔이나 모텔의 투숙객 정보를 알아야겠어!”진무열은 어리둥절한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왜 갑자기 투숙객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혹시... 불륜을 잡으려고 하시는 겁니까?”“내가 너한테 보고해야 해?”“아닙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하지만 진무열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한마디를 보탰다.“그리고... 사모님은 그냥 즐기려는 마음이 있는 것뿐이지, 다른 남자와 방을 잡지는 않았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성도윤의 안색은 한껏 어두워졌다.“닥쳐!”30분 후, 진무열은 한 묶음의 호텔 투숙객 정보를 가져왔지만 그 안에는 차설아의 체크인 기록이 없었다.“대표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얌전하고 본분을 지키시는 사모님께서 대표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다른 남자랑 방을 잡겠어요? 전에 클럽을 돌아다니고 젊은 남자들과 어울려서 찍힌 사진들도 아마 일부러 대표님의 질투를 유발하려고 했을 겁니다.”진무열은 방관자로서 조리 정연하게
차설아의 산뜻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웃음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마치 무슨 재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다.‘내가 정말 게으른 버릇은 고쳐야 한다니까. 이미 이사를 결심했으면서 왜 아직도 집을 안 찾아보고 버티고 있었던 거야? 바로 맞은편에 살아서 아무리 애써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오늘처럼 이렇게 마주하게 되잖아!’차설아는 한참 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문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성도윤은 긴 팔을 내밀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왜? 나 만나기 부끄러워? 즐길 것 다 즐기더니 이제 양심에 찔려?”양심에 찔린다고?그 말은 차설아의 승부욕을 자극했다.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엘리베이터를 나서더니 고개를 들고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성도윤 대표님,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즐겁게 살고 있는 게 뭐 어때서? 내가 무슨 남의 물건을 훔치기라도 했어, 아니면 뺏어오기나 했어. 내가 왜 양심에 찔려야 하는데?”“오히려 한 회사의 대표인 당신이 늦은 밤에 자지도 않고 왜 여자 혼자 살고 있는 집 앞에 서 있는 거야? 마침 나한테 들켰으니 양심에 찔려야 하는 쪽은 그쪽이 아닌가?”성도윤은 논리적인 차설아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차가운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당신이 얼마나 막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당신 신분을 명심하라고. 요 며칠 다른 남자들과 연예면 기사 난 걸 자랑으로 생각하는 거야?”차설아는 더 화가 나지도 않았다.‘이 남자는 정말 언제나 이렇게 오만방자하네! 내가 전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웠지, 이런 남자를 4년 동안이나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말이야. 괜히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면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로 되었잖아? 그래도 다행이지,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까. 더는 성도윤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없을 거야!’차설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더니
성도윤은 눈을 떴다. 깊은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비쳤고, 약간의 짜증과 함께 차갑게 말했다.“튕기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적당하면 귀엽지만, 도를 넘으면 재미가 없지.” 말을 마친 후, 성도윤은 더욱 강한 카리스마로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성도윤은 당연히 차설아도 원하면서 그의 소유욕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튕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에 차설아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런 마음이 어떻게 금방 사라질 수 있겠는가?급해 난 차설아는 핸드폰을 꺼내 잘생긴 남자의 차가운 얼굴에 들이밀며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성도윤, 당신 정말 미쳤어!”“내가 연예계 뉴스에 올라서 당신 망신을 줬지? 경고하는데 지금 당장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면 내일 법률 뉴스에 오르게 될 거야!”성도윤은 허리를 곧게 세웠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뭘 하려는 거야?”차설아는 대답하지 않고 사진을 찍은 뒤, 112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훌쩍이며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경찰이죠? 살려주세요. 여기 샘천 레지던스인데요, 어떤 변태가 쫓아와서 저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해요. 빨리 와서 저 좀 구해주세요!”성도윤은 할 말을 잃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부부 싸움이니 경찰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하려 했지만, 갑자기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래서 법적으로 지금 성도윤의 행동은 성추행에 속하기에 충분했다.성도윤이 멈칫하는 모습을 본 차설아는 자신감을 갖고 말을 이어갔다.“이봐요. 성 대표님, 여기서 2킬로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파출소가 있답니다. 만약 경찰이 올 때까지 계속 이러고 계신다면, 옛정이고 뭐고 난 당신을 감옥에 넣을 거예요.”차설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성우에게서 배운 법조를 읽었다.“형법 237조에 근거, 여성을 추행한 정도가 엄중한 자는 징역 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성우는 이 방면의 사건을 다루는 전문가야. 한번 직접 확인해 볼래?”성도윤의 눈은 점점 차가워지더니, 마치 잠복해 있는 맹수처럼 위험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그제야
성도윤은 차설아의 경고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차설아가 다른 남자를 빌미로 자신을 화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성도윤은 계획대로 골드 찻집에 도착해 소씨 그룹의 사장 소건우와 만나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소씨 그룹은 중국 전역에서 전자 제품 분야의 4대 유통 업체 중 하나이다.소씨 그룹과 함께 이름을 날린 회사는 바로 성대 그룹과 긴밀히 협력했던 남우 그룹이었다.지금 남우 그룹은 차설아에게 빼앗겼으니, 성도윤은 빠른 시일 내로 새로운 협력 상대를 찾아야만 성대 그룹이 생산한 전자 제품의 판매 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찻집의 최고급 룸에서 소건우는 이미 오랫동안 기다렸다.성도윤을 보자 바로 일어나 악수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도윤아, 오랜만이구나. 내가 드디어 너랑 차 한 잔을 마실 자격이 되는구나.”“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아저씨.”성도윤은 몸을 곧게 펴고 여전히 차갑고 거리감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덤덤하게 소건우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도윤아, 어서 이 차를 마셔봐. 중국의 대홍포인데 한 입만 마셔도 입안에서 풍미가 돌아.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소건우는 열정적으로 또 정성스레 차를 따랐다.업계의 이치대로라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소건우이다. 하지만 성대 그룹의 강력한 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성도윤은 적어도 소건우보다 20살은 어리지만, 타고난 카리스마가 강해서 소건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게 되었다.무엇보다 성대 그룹이 생산하는 전자제품은 퀄리티가 애플에 버금간다는 입소문을 타고 확고한 팬층을 확보한 상태였다.성대 그룹의 유통 업체가 된다는 건 아시아 전역의 전자제품 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몇 년 전, 남우 그룹에게 그 기회를 빼앗기고, 오늘 드디어 소씨 그룹의 차례가 되었으니 당연히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남해진 그 늙은 여우가 성대 그룹을 마다하고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랑 손을 잡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미련하기 짝이
이 말을 들은 소건우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오해야, 어르신은 모래밭을 누비며 적을 쓰러 눕힌 영웅이셔. 그런 분을 내가 존경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마찰이 생길 수 있겠어?”“사실인가요?”성도윤은 담담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날카로운 눈으로 소건우 말의 진위 여부를 판단했다.사실, 성도윤은 이미 소씨 그룹에 대해 많은 사전조사를 했다. 확실히 두 가문 사이에 그 어떠한 마찰도 조사해 내지 못했다.할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서, 성도윤을 문전 박대를 하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당연히 사실이지.”소건우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지만, 켕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기껏해야 내가 젊었을 때, 자네 아내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미 돌아가신 자네 장인어른과 약간의 마찰이 있었을 뿐이야.”“차설아의 아버지요?”성도윤은 싸늘한 눈으로 계속 물었다.“그분과 어떤 마찰이 있었죠?”“참, 성인 남자들 사이에 뭔 문제가 있겠어? 당연히 사업 문제, 그리고 여자문제지.”“아주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자네 장인어른이 장모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원래 사업상 라이벌이었지. 계속 대적하다가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여자 때문에 크게 싸워서 인연을 끊었지. 그런데 그 독한 여자가 우리 사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져버렸어...”당시 일을 언급하던 소건우는 분노에 차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차설아 아버지와의 마찰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두 남자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 여자 때문에 분한 것이었다.“도윤아, 여자는 말이야, 고양이를 가장한 호랑이야. 사람을 속이기로 작정을 하면 혼까지 빼앗아 가니 무조건 조심해야 돼. 절대 여자에게 사로잡히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소건우의 말에 성도윤은 왠지 차설아가 떠올랐다.이혼 전과 후의 모습이 확연히 다른 것을 생각하면, 소건우의 말은 지극히 일리가 있었다.여자는 확실히 변장에 능한 동물이다!“안심하거라, 소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진무열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이 여자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왜 그래, 도윤아? 마누라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이미 일어나서 떠날 준비를 하던 소건우는 진무열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또 자리에 앉았다.찻집에는 당연히 TV가 있었고, 성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직원에게 켜라고 했다.TV에서 차설아는 수수한 옷차림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수백 곳의 언론사 앞에 나타나 성도윤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가엽게 발표했다.“안 좋은 소식으로 인사를 드려 죄송하지만, 저랑 성도윤 씨는 4년간의 결혼생활을 끝으로 합의 이혼을 했음을 발표합니다. 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분도 행복하길 바랍니다.”밑에 있던 기자들은 우수수 손을 들며 차설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차설아 씨, 성도윤 씨와의 결혼 파탄은 제3자의 개입과 연관이 있나요?”“차설아 씨, 전에 라이브 방송에서 성도윤 씨의 내연녀가 아기까지 가졌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배씨 가문의 여섯째 도련님, 배경수 씨와 자주 외박을 하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남편분과 맞바람을 피우신 건가요?”차설아는 눈을 늘어뜨리고 조용히 흐느끼며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저랑 성도윤 씨는 같은 세계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맞지 않았어요. 헤어지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에요. 그리고 다른 것들은... 말씀드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습니다.”차설아는 비록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임대옥에 버금가는 억울한 표정으로 모든 걸 말해주었다.이 기자회견이 끝나면 성대 그룹에 향한 부정적인 평가와 질타가 봇물 터지듯 쏟아질 것이다.사실, 차설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재벌가의 이혼이 언론에 알려지면 반드시 큰 파장을 일으킨다.그래서 차설아의 이런 행동은, 일부러 성도윤을 욕보이게 하고, 어젯밤 그의 ‘지나친’ 행위에 대해 복수를 한 것이다.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소건우는 진심으로 성도윤을 동정하며 서둘러 직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