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진짜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아까 저도 도윤 씨를 위해 사정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저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으셨어요. 제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도윤 씨랑 같이 벌을 받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저도 달리 방법이 없다고요.”차설아는 전처로서 이미 할 만큼 했다.그렇다고 쓰레기 전 남편을 위해 자기까지 희생할 생각은 없었다. 성도윤을 향한 그녀의 감정은 그 정도로 깊지 않았으니.차설아가 마음이 약해진 것 같자 집사는 마음이 조금 놓였고 이내 서둘러 말했다.“어르신께 사정하실 필요 없어요. 사모님은 그냥 도련님을 잠깐 도와주시면 됩니다.”“어떻게요?”“그러니까 우리 도련님을 몰래 돌봐주시겠어요? 이건 사모님밖에 할 수 없어요. 이 일이 어르신께 들켰더라고 해도 어르신은 사모님을 예뻐하시니 벌을 내리시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라면 얘기가 달라지죠.”집사는 미리 준비해둔 약과 저녁이 담긴 바구니를 차설아에게 건네고는 말을 이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는 모두 사모님에게 달렸습니다. 제가 먼저 성씨 집안 대신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네? 이건 좀...”차설아는 거절해야 할 걸 알면서도 손은 다른 사람에게 통제된 것처럼 저도 모르게 바구니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두 다리도 저절로 집사를 따라 성씨 가문의 사당으로 향했다.이게 바로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인다는 증거가 아닐까?‘정말 못 났어, 나 자신!’깊은 밤.사당은 성씨 가문의 본가 옆에 지어졌는데 하나의 독립된 건물이었다.낮에는 청소를 책임지는 청소부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오직 켜진 흰 등불 두 개만 있었다. 그래서 유난히 한산하고 음산해 보였다.차설아는 멀리서 허리를 곧게 펴고 성씨 가문 사당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성도윤을 발견했다.흰 셔츠는 피로 물들여졌는데 집사가 찍은 사진보다 고통이 더 생생히 전해졌다.“바보 아니야? 그걸 진짜 다 맞은 거야? 허리는 왜 또
“정말 은혜도 모르는 놈, 피해망상 있는 거 아니야?”차설아는 씩씩거리며 사당을 나서고는 불만을 토로했다.‘내가 정말 정신이 나가서 저런 놈을 도와줄 생각이나 했지. 괜히 사서 고생이나 하고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돌아갔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드라마 보는 내 시간을 다 낭비했잖아.’집사는 사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설아가 사당을 나서는 것을 본 그는 다급하게 쫓아와 물었다.“사모님,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어요?”“음식을 갖다주는 내 좋은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나를 원망하니 내가 계속 거기에 남을 필요가 있겠어요?”“그럴 리가 있나요!”집사는 계속 불쌍한 얼굴로 사정했다.“도련님의 성격을 사모님도 잘 아시잖아요. 모진 말을 내뱉지만 속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한 번 도와주기로 하셨으면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도련님에게 음식을 주고 상처에 약도 발라주세요. 아니면 분명 오늘 밤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싫어요!”차설아가 벌컥 역정을 내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도윤 씨가 그랬어요, 자기가 죽든 말든 나랑 관계없다고요.”“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도련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집사가 다급하게 불렀다.“사모님, 사람 살리세요... 이러다가 도련님께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차설아는 눈을 질끈 감고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다시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성도윤, 내가 전생에 너한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왜 나를 이렇게 괴롭혀!’성도윤이 바닥에 쓰러진 건 사실이었다. 그는 회초리에 맞은 상처 때문에 식은땀을 뻘벌 흘리고 있었다.“왜 또 돌아왔어? 당장 꺼져!”성도윤은 몸이 허약했지만 여전히 차가운 말로 차설아를 쏘아붙였다.“닥쳐, 입만 살아가지고.”차설아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성도윤의 옷을 벗겼다.남자의 등은 태평양처럼 넓었다. 힘이 넘치는 근육에 완벽에 가까운 각선미, 그리고 구릿빛 피부에 더해진 회초리 상처 자국은 유난히 매혹적으로 보였다.“쿨럭쿨럭.”차설아는 몸이 달
일주일 후.이혼을 한 차설아는 곧 싱글 라이프에 적응하게 되었다.낮에는 열심히 돈을 벌었고, 저녁에는 신나게 놀며 자유로운 생활을 보냈다.그리고 오늘, 그녀는 드디어 남우 그룹과 새로운 계약서를 체결했다.남해진은 차설아의 요구에 흔쾌히 수락했는데 ‘천신 그룹’에 6000억 원을 개발 자금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천신 그룹은 첫 번째 연도에 수익을 10조 원을 보장해야 했는데 이를 어길 시, 천신 그룹은 계약서대로 30%의 지분을 배상금으로 양도해야 했다.계약 조항을 본 배경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남해진이란 사람도 정말 너무하네. 우리가 얼마나 큰 선물을 줬는데 말이야. 죽은 딸을 위해서라도 성의를 보일 줄 알았는데 이 계약서에는 온통 함정이잖아. 우리한테 전혀 유리한 것 없다고.”그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차설아를 보며 말했는데 당장이라도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보스, 이거 완전 우리한테 굴욕적인 계약서잖아, 왜 이 계약을 체결했어? 겨우 600억 원을 누가 못 내놓을 줄 알아?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하지만 차설아는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우리가 져도 겨우 30%의 지분을 잃는 것뿐이야. 하지만 우리가 이기면 남우 그룹의 5년 연속 투자를 받는 거라고. 매년 최소 2조 원의 투자액을 받을 수 있어. 난 엄청 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남해진 사장님도 성의를 보이셨고.”“성의를 보이긴 개뿔. 천신 그룹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회사야. 제대로 된 제품 하나 없다고. 하이 테크 분야에서 1년에 10조 수익을 내는 게 쉬운 줄 알아?”배경수는 이마를 짚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전 세계의 3대 하이 테크 그룹에서도 매년 20조의 수익을 내고 있어. 우리 같은 스타트업 회사는 1년에 1조의 수익을 내도 대단한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남우 그룹한테 작정하고 지분 30% 내주겠다는 거 아니야?”하지만 차설아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차설아가 언제 도
“얌전했다고?”성도윤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서류를 읽어보더니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도대체 그 여자한테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거야?”“오해라고 할 수는 없죠.”진무열은 마음을 다잡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몇 년 동안 사모님께서는 확실히 성실하고 본분을 다하셨습니다. 대표님에게도 일편다심이셨고요. 집안에서는 얌전히 시키는 일 다 하셨고, 밖에서도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표본이셨습니다. 사모님께서 갑자기 바뀌신 건 아무래도... 대표님 때문인 것 같습니다.”성도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나 때문이라고?”“물론이죠!”진무열은 해고당할 위험을 무릅쓰면서 차설아의 편을 들어줬다.“요 몇 년 동안 대표님은 사모님에게 쌀쌀맞게 구셨잖아요, 결국 불륜까지 저지르시고요. 사모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아니면 사모님은 배경수 같은 바람둥이와 어울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배경수와 천신 그룹을 설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 성대 그룹과 대립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겠죠...”“저는 사모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월반하던 천재시고 물리 전자파 분야의 전문가시잖아요. 사모님은 대표님을 너무 사랑하셔서 일을 그만두시고 요리하며 청소하며 대표님을 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은 그런 사모님을 아끼시고 사랑하시기는커녕 배경수 같은 바람둥이에게 당하고 말았죠. 정말 안타깝습니다!”성대 그룹에서 잃은 클라이언트 회사는 모두 천신 그룹과 계약했다. 심지어 성대 그룹과 다년간 합작한 남우 그룹마저 말이다.무서운 상승세를 보인 천신 그룹은 배경수가 재미로 설립한 회사는 절대 아니었다. 천신 그룹에서 계속 이 속도로 성장하고 발전한다면 3년이나 5년 후, 하이 테크 분야에서의 점유율은 성대 그룹과 대등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하지만 사모님의 변화보다 저는 배경수 그 바람둥이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명 해안시에서 이름난 바람둥이이잖아요. 명문가의 아가씨나 여자 연예인들과 가깝게 지내던 그였는데 사모님을 위해 다른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채워진 룸 안에는 한껏 꾸민 남자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차설아를 본 그들 중에 눈을 찡그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거나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또 차도남처럼 차가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이, 이게 무슨 상황이지?”차설아는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들을 보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전화기 너머로 뿌듯함이 담겨 있는 배경윤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룸에 도착했어? 내가 준비한 선물 어때? 다 엄청 잘생겼지?”룸 입구에 서 있던 차설아는 어안이 벙벙했다.“경윤아, 이게 다 뭐야?”“잊었어? 그날 밤에 언니 이혼하는 거 축하할 때 언니 스카이 클럽 앞에서 말했었잖아. 성도윤보다 잘생긴 남자는 널리고 널렸다고, 원하는 남자 다 가질 거라고.”“하하하, 오늘 언니를 위해 거금을 들였으니까 원하는 스타일 한 번 마음껏 골라봐. 그리고 내가 특별히 오빠도 따돌렸으니 마음 놓고 즐겨. 내가 언니 동생으로서 준비한 거니까 너무 감동하지는 마.”“배경윤, 너 너무하는 거 아니야?”차설아는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 나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거야. 내가 어떻게 감당한다고 그래...”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룸 안에 있는 남자들을 훑어봤다.‘역시... 경윤이는 내 찐친이야. 내 취향을 참 잘 알아.’룸 안에 있는 남자들은 서로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모두 얼굴이 예술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잘생긴 얼굴에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됐어, 지금 바쁘니까 먼저 끊을게. 다음에 봐.”차설아는 다가올 상황이 너무 기대가 되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누나, 안녕하세요!”겨우 스무 살 되어 보이는 잘생기고 풋풋한 남자애가 차설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누나, 수고하셨어요. 제가 누나를 위해 맛있는 디저트랑 과일을 준비했으니까 얼른 들어오세요!”차설아는 남자애가 유난히 눈에 익었다.“쪼꼬미, 널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이 남자애뿐만 아니라 룸 안에 있는 다른
“뭐라고 부르는데?”차설아는 남자애에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눈을 ‘차도남’에게서 뗄 수 없었다.이런 설레는 기분은 워낙 오랜만이라 차설아는 온몸이 저려왔다. 요 몇 년 동안 그녀는 이런 감정을 오직 ‘누군가’에게서만 느꼈었는데 말이다.“지훈이 형의 얼굴이 너무 잘생겼잖아요. 성대 그룹의 대표님이신 성도윤 님과 비슷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팬분들은 지훈이 형을 ‘리틀 성도윤’이라고 불러요...”“성도윤?”그 말을 들은 차설아는 흥미가 뚝 떨어졌다.‘왜 어디서나 그 사람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거야? 영혼이 나를 따라다니나?’남자애는 차설아가 성도윤을 모르는 줄 알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누나 혹시 성도윤 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아세요? 모르신다면 여기에 사진이 있어요... 우리 지훈이 형이랑 많이 닮으셨죠?”차설아는 사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재수 없어! 이혼하고 겨우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리틀 성도윤이라니, 너무 재수 없잖아!’리틀 성도윤은 예쁜 손가락으로 스위치 버튼을 누르면서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차설아에게 눈길 한 번 주질 않고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당연히 성도윤이 누군지 아시겠지, 저분 남편이니까.”“뭐라고? 그럼 예쁜이 누나가... 성도윤 님의 아내분이셨어요?”남자애는 깜짝 놀라더니 뒤로 물러서면서 차설아와 거리를 뒀다.다른 남자들도 맹수를 피하듯 차설아와 멀리 거리를 두려고 했다.“돈 벌기 정말 쉽지 않네. 우리 아이돌들은 걸핏하면 기획사에게 손님 접대나 강요받고, 심지어 오늘은 성대 그룹 대표님의 아내분까지 모셔야 한다니, 자칫하면 앞날을 망칠 수 있다고...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하겠어!”“나도 안 할래, 안 하겠어!”그러더니 꽃미남들은 잇달아 제복을 벗으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차설아는 다급히 그들의 마음을 달랬다.“다들 너무 겁먹지 마. 남편이 워낙 오픈 마인드라서 괜찮아. 남편도 다른 여자랑 놀고
“그게...”남자랑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성도윤을 빼닮은 얼굴은 무한히 확대되었다.차설아는 숨을 죽이며 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그는 성도윤과 똑같이 깊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모든 속셈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굳이 두 사람의 차이를 구별하자면 성도윤의 분위기에는 카리스마가 더해졌고, 그와 반대로 지훈은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눈망울에 차가움과 우울함이 묻어나 있었다.‘참 신기하다니까. 사람은 정말 이상한 동물이야, 왜 항상 똑같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지?’4년 전 그녀는 성도윤에게 첫눈에 반했었다.4년 후의 지금, 그녀는 또 성도윤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도대체 자신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잘생긴 남자인지 성도윤인지 차설아 본인조차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무슨 생각 해요?”남자는 차설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지훈의 낮은 목소리는 오래된 와인처럼 감미로웠고 매혹적이었다.“아니야, 난 이만 갈게.”차설아는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남자는 긴 팔로 손쉽게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저는 당신 남편을 닮은 것뿐이지, 당신 남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두려워해요?”“두려워하지 않았거든!”차설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그래, 이 녀석은 그저 도윤 씨랑 비슷하게 생긴 것뿐이야, 도윤 씨도 아닌데 내가 왜 겁을 먹었지? 다른 애들은 내가 성도윤의 아내라는 걸 알고 모두 도망갔는데 이 녀석은 도망가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도발하고 있잖아? 그럼 성도윤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점만으로도 제대로 즐겨야 하겠는걸?’이 생각에 차설아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그녀는 수줍은 자태를 거두고 오히려 당당하게 남자의 턱을 치켜들고는 입꼬리를 올렸다.“너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네가 나한테 겁을 먹을까 봐 걱정돼!
차설아는 택시를 잡아 지훈과 함께 차에 올랐다.택시 기사에게 주소를 말한 후 불과 20여 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도착했으니까 내려.”차설아는 강아지를 이끌듯 남자의 넥타이를 잡으며 차에서 내렸다.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둥그런 돔 모양에 형광색 지붕의 작은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어둠 속에서 작은 집은 그윽하고 차가운 빛을 뿜어냈는데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별과 같아 꽤나 낭만적이었다.“어때? 널찍하고 예쁘지?”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지훈을 보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는 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비밀 아지트야. 웬만한 사람한테는 알려주지 않는다고!”“비밀 아지트요?”지훈은 여러 개의 집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들며 흥미를 보였다.“재밌네요.”직원은 가까이 다가오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차설아 님, 안녕하세요. 그전처럼 3호실을 고르실 거죠? 물건은 다 준비해 드렸습니다.”3호실은 거리가 가장 멀었지만 시설이 최고급이었고 또 조용했기에 방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차설아는 익숙한 듯이 곧바로 3호실로 향하고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들어와, 너 오늘 밤 나랑 놀아주기로 한 거다?”지훈은 이곳이 도대체 어떤 분위기의 모텔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안이 벙벙했다.“여... 여기는 뭐 하는 곳이죠?”“바보야, 보면 모르겠어?”차설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으로 달려가고는 최신형 기계식 키보드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반짝였다.“이 XF 키보드는 수많은 게이머들이 2년을 꼬박 기다린 신제품이야. 키 입력할 때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느낌은 아주 뚜렷하고 부드러워. 타이핑에 따라 LED 조명이 커졌다 꺼졌다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반응 속도가 정말 대박이야. 최상급 서버와 모니터만 있다면 그 어떤 게임에서도 우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지훈은 차설아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5분이나 걸렸다.“그러니까 여기는 모텔이 아니라... PC방이에요?”“모텔?”차설아는 지훈의 이마를 툭 치며 인상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다부진 몸매에 끌려 그대를 쭉 지켜보게 되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대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왔어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대가 유독 빛나 보였거든요. 그대는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하늘은 배경윤이 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서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성 참가자 중에서 진찬영이 텔레비전에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진찬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사도현은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고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첫인상 1위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대라고 하고 싶어요. 하늘 씨, 앞으로 우리 잘 지내봐요. 하늘 씨랑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요. 하늘 씨의 마음도 궁금해요. 단둘이 얘기 나누고 싶어요.”편지를 다 읽은 하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늘은 부끄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고 배경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경윤 씨, 언제부터 저한테 호감이 생긴 거예요?”하늘을 포함한 게스트들은 전부 두 눈을 크게 뜨고 배경윤을 쳐다보았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배경윤은 사도현, 진찬영이 아닌 뜬금없는 하늘한테 고백했던 것이다.[지금 사람 마음 갖고 장난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마.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다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거야?][이거 대본 맞지? 대본의 냄새를 맡았어. 제작진한테 너무 실망이야.][대본이든 말든 나는 사도현과 배경윤이 이어지길 기도할 거야.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이러다가 진짜 이어져서 결혼할 수도 있어.][결혼이라니, 너무 앞서간 거 아니야? 사도현이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아. 배경윤은 진찬영을 더 좋아한다고!]네티즌은 댓글 수백 개씩 달면서 열렬하게 토론했다. 진찬영의 평온한 얼굴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사도현도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사도현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내가 열렬하게 구애했는데도 하늘 씨한테 졌어요. 정말 아쉬워요.”“사도현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경윤 씨가 장난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저는 오늘 경윤 씨랑
배경윤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찬영은 배경윤이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했다.배경윤은 그동안 진찬영과 지내면서 연예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열정적인 팬에서부터 진찬영을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다.가끔 진찬영과 손을 잡고 천천히 늙어가는 평화로운 삶을 그리기도 했었다.진찬영은 자신을 향해 뻗은 배경윤의 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쾌함을 전부 씻어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그런데 이때 사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경윤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빠지면 안 된다고 했어요.”말을 마친 사도현은 진찬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배경윤을 데리고 게스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이 손 안 놔? 누구 마음대로 내 손을 덥석 잡는 거야? 때리기 전에 놔줘.”배경윤은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사도현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사도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진찬영과 배경윤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훼방했다.“내가 잡고 싶어서 잡은 줄 알아? 제작진이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사도현은 게스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왔다. 그러고는 사회자 최빈을 향해 말했다.“다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죠.”최빈은 뒤쪽에 서 있는 진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찬영 씨,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곧 고백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은 매일 밤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진심이 담긴 편지를 써야 했다. 다 쓴 편지는 추첨함에 넣고 제작진이 지목한 게스트가 나와서 뽑은 편지를 읽으면 되었다.낯부끄러운 시간이었지만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게스트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주 궁금했다.마음을 편지에 담아 공개하기에
배경윤은 초가집의 뒷문으로 나온 뒤에 일부러 바닷가를 돌아서 바비큐 파티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게스트들은 배경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반가워했다.“경윤 언니, 오셨어요?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경윤 언니가 와서 너무 기뻐요.”장유빈이 머무는 숙소는 배경윤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장유빈은 바비큐 파티에 같이 참가하자고 했지만 배경윤은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못내 아쉬웠던 장유빈은 배경윤을 발견하고는 신나서 벌떡 일어났다.“모두 참가했는데 저만 빠지면 그렇잖아요. 저만 유별난 것도 아니고요. 아무튼 늦게 와서 죄송해요.”배경윤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경윤 씨, 이것 좀 봐요. 찬영 오빠가 경윤 씨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고기만 구웠어요. 경윤 씨가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더라고요.”소수민은 불판에 올려진 고기를 보면서 부러운 어조로 말했다.“같은 여자라도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요. 저희는 먹고 싶은 걸 구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구웠어요. 그런데 경윤 씨가 고기를 좋아하니까 찬영 오빠가 양념 고기, 불닭 소스 고기, 허니 고기를 준비했대요. 먹음직스러워서 침이 저절로 고였어요.”배경윤은 진찬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미안했다.“찬영 오빠, 고기를 굽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제가 오빠를 위해서 뭐라도 할게요.”배경윤은 진찬영의 옆으로 걸어가서 같이 고기를 굽고 양념을 발랐다.“조심해요!”진찬영은 튀어 오르는 숯불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숯불은 그대로 진찬영의 손에 튀었다.“찬영 오빠, 괜찮아요? 이 고귀한 손으로 왜 막은 거예요!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발라요.”소수민은 입을 틀어막고 기겁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찬영 오빠, 저...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가 다쳤어요.”깜짝 놀란 배경윤은 어쩔 줄 몰라 했다.“괜찮아요. 덴 것도 아
사도현은 배경윤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 가서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그러지 마!”배경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사도현의 팔을 꼭 붙잡았다. 사도현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이상한 소리라도 낸다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배경윤은 진찬영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찬영과 시작해 보지도 않고 끝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뻔뻔스러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인성은 늘 그렇듯 욕심이 끝도 없었다.“안에 누구 없어요? 없으면 문 열고 들어갈게요.”쾅!소수민은 문을 점점 세게 두드렸고 허술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흔들거렸고 먼지가 떨어졌다.배경윤은 사도현을 끌어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고 이 난감한 상황이 빨리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도현은 잔뜩 긴장해 있는 배경윤이 우스웠다.어쩐지 기분이 언짢았던 사도현은 일부러 배경윤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하하하!”배경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문밖에 서 있던 진찬영과 소수민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소수민은 큰 소리로 물었다.“계세요?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세요. 저기요!”배경윤은 입을 틀어막고는 사도현을 노려보았다. 사도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약을 올렸다.“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가봐요. 쉬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진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겠어요. 찬영 오빠는 참 다정해요.”소수민은 짜증이 밀려왔지만 진찬영과 같이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희미해지자 배경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주먹으로 사도현을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사도현, 너 진짜 미친 거지! 일부러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잖아. 이러고도 네가 남자야?”“사람들은 이미 우리를 한 쌍의 커플로 보고 있어. 커플이 같은 침대를 쓰는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사도현은 굳은 표정을 하고서 배경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경윤이 진찬영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신경이 거슬렸
“그, 그게...”배경윤은 입술을 깨물면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배경윤은 사도현을 아직도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감정이 드는지도 몰랐다.‘내가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설레는 순간은 있었어.’배경윤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졸여야 하는 사도현보다 잔잔한 물결 같은 진찬영이 더 좋았다. 진찬영은 다정하고 친절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진찬영과 진지하게 만나서 결혼할 생각도 있었다.만약 이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대로 진찬영한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었다.사도현은 빛이 나는 태양이라 열정적이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치는 건 결국 배경윤이었다.진찬영은 차가워 보이지만 어둠으로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달이었다. 달을 바라보고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도현아, 사실 나는...”배경윤은 심호흡하고는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배경윤의 입을 막아버렸다.“읍!”배경윤은 또다시 사도현과 입을 맞추게 될 줄 몰랐다. 요트 위에서 나눴던 키스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가볍게 부딪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도현은 두려워했고 비굴하게 보이더라도 배경윤한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화가 나서 밀치려고 했던 배경윤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이 세상에 불쌍하고 가엾은 강아지 같은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을 거야. 그저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사랑을 퍼부었다. 몸이 달아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너의 대답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사도현은 배경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도현아, 혹시 아까 그것도 작정하고 그런 거야?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나는 네가 미워!”배경윤의
당장이라도 별이 쏟아질 것처럼 몽환적인 순간이었다. 배경윤은 사도현의 어깨에 기대고는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 몇 년 전에 보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배경윤은 제일 빛나는 별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눈으로 사도현을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별을 본 건 대학교 시절에 나, 우리 오빠와, 설아까지 셋이 외국에 여행 갔을 때야. 높은 산과 낮은 산 사이에 있는 구역에 차를 세우고 텐트를 쳤어. 밤만 되면 두 설산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그 별을 따라 가면 이 은하의 끝에 닿을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보기도 했어.”“네 말을 들으니까 상상이 돼.”사도현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원지대에서 보는 별을 사뭇 다르다고 들었기에 늘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삐 돌아치는 바람에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배경윤의 말을 들은 사도현은 마치 고원지대에 간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그때의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없이 행복하게 지냈어. 시간이 나면 운전해서 바람 쐬러 갔고 등산도 자주 갔었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지. 별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변했을까?”배경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했던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도현은 고개를 돌려 배경윤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평소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긍정적인 여자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진지하고 우울한 면이 있었네?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되었어.”배경윤은 사도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똥별이 한 획을 긋고 떨어지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너는 모든 사람이 너처럼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줄 알아? 사람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는 말도 모르냐고!”“공주님이 웬일로 울고 있어? 그렇게 슬
“응. 보고 싶어. 그게 어딘데?”배경윤은 진지한 표정을 한 사도현을 바라보았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래서 겨우 진정하고 태연하게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가볼래?”사도현은 배경윤한테 손을 내밀면서 부드럽게 물었다.“이 시간 때에 가야 볼 수 있어. 너만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배경윤은 사도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자! 혼자서 심심했었어.”“나의 공주님한테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야.”사도현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데리고 자신만의 아지트로 달려갔다.두 사람이 멀어진 뒤로 배경윤이 처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이었다.사도현은 자신이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준 모습에 배경윤이 감동했을 것이라고 여겼다.몇 분 후, 두 사람은 섬의 다른 한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도현이 지내는 초가집이었고 마당에서 게스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모여 앉아 해산물을 구워 먹고 기타를 쳤다.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흘렀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설마 제일 예쁜 풍경이 저 사람들이 해산물을 구워 먹는 모습은 아니겠지?”배경윤은 멀리서부터 한곳에 모여 놀고 있는 게스트들을 발견했다. 사도현한테 속은 것 같아서 화가 솟구쳐 올랐고 배신감이 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진지한 척만 하고 항상 나를 놀리고 싶어 했지. 내가 또 속을 줄 알아?’“그쪽 말고 여기로 가자.”사도현은 배경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초가집 안에 들어갔다. 배경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도현을 노려보았다.“고작 초가집을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거야? 그럴 바에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노는 게 낫겠어. 너는 왜 항상 나를 놀리는 건데?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지할 수는 없어?”“잠깐만 기다려 줘. 곧 보게 될 거야.”사도현은 배경윤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껐다.“사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또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소리 질러서 너를
[재벌가 도련님과 암컷 돼지의 은밀한 관계!][사도현의 정신 상태 우려스러워...]사도현의 부드러운 노랫소리 덕분에 암컷 돼지는 첫 번째 새끼 돼지를 순리롭게 낳았다.“드디어 아기를 낳았어! 돼지야, 너는 정말 멋진 엄마야. 다른 아기도 힘내서 낳자!”사도현은 새끼 돼지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낡은 옷에 감싸안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마음이 뭉클했다.예전부터 사도현은 딩크족이었다. 아이는 그저 악마 같은 존재일 뿐, 절대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돼지를 보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경윤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거야. 경윤이를 닮은 아이면 얼마나 예쁠까?’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출산이 마무리되었다. 다섯 마리의 암컷 돼지는 순리롭게 몇십 마리의 새끼 돼지를 낳았고 장은학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사도현이 빨리 달리고 용기를 낸 덕분에 다른 게스트를 제치고 먼저 1000점을 획득했다. 장은학은 마을 이장과 함께 꽃다발을 건넸고 ‘돼지 출산 전문가’라는 글이 적힌 상장도 주었다.사도현의 하얀 셔츠가 더럽혀졌지만 꽃다발과 상장을 안고 있으니 무척 행복했다.사도현은 배경윤 쪽으로 다가가서 환하게 웃더니 상장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경윤아, 내가 결국 해냈어. 네가 후회할 날이 올 거라고 내가 말했었지? 이제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배경윤은 싱글벙글 웃는 사도현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고 슬며시 엄지를 내밀었다.“네가 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 진짜 대단해.”날이 어두워지자 사도현은 게스트들을 불러 해산물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게스트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도현은 사람을 시켜 진찬영이 파티에 참가하지 못하고 업무 전화만 받게 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지내는 숙소로 걸어갔다.배경윤은 해산물 바비큐 파티에 참가하지 않고 혼자 별장의 베란다에 기대 넓은 바다를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날이 어두워
암컷 돼지들은 괴로워하면서 소리를 질렀고 허공에 대고 발길질했다. 그러면서 몸에 붙어있던 배설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사도현은 토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고 천천히 다가갔다.“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봐! 난산이어서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장은학은 급한 마음에 목청을 높여 말했다.“확실히 할 줄 아는 사람 맞아? 할 줄 모르면 당장 나와. 자네 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잠시만요. 제가 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사도현은 코를 막고 겨우 말했다.‘이 세상에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 고작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는 걸로 겁먹지 말자. 나는 할 수 있어.’고민하던 사도현은 휴대폰을 꺼내 암컷 돼지의 출산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첫째, 산후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깨끗한 출산 공간을 만들어주고 괴망간산칼륨으로 암컷 돼지의 온몸을 한 번 닦는다.][둘째, 가위를 소독하고 새끼 돼지의 탯줄을 자른다.][셋째, 낡은 수건이거나 옷으로 새끼 돼지의 몸을 닦아주고 감싸안는다.][그리고 출산 과정에서 암컷 돼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투로 다독이거나 노래를 불러서 암컷 돼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한다.]암컷 돼지의 출산 절차를 보고 난 사도현은 당장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재벌가 도련님, 유명한 회사의 대표가 이제는 암컷 돼지의 출산을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황당한 일이 연속 벌어지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사도현 씨,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못 하겠으면 빨리 나오세요. 대학교 때 배웠던 적이 있어서 제가 더 잘할 것 같거든요.”하늘은 돼지우리 밖에서 목을 빼 들고 말했다. 하늘은 사도현 다음으로 제일 초라한 별장을 선택한 사람이었기에 별장을 바꾸고 싶었다.“할 수 있으니 들어오지 마세요. 이건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사도현은 심호흡하고는 가만히 누워있는 암컷 돼지를 괴망간산칼륨으로 닦아주었다.암컷 돼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서 버둥거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