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설아의 기색이 갑자기 긴장되었다.이상하네? 이른 아침 낯선 땅에서 그보다 눈도 먼 사람이 어디로 도망간 걸까?그녀는 서둘러 문을 열고 사람을 찾으려다가 남아름과 부딪쳤다.“설아야, 일찍 일어났네? 어젯밤 잘 잤어?”여자는 우아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뒤에서 직원이 밀고 있는 흰색 미니밴을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말했다.“부서 사람들에게 너랑 성도윤 씨의 건강 상태에 따라 영양가 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거든. 빨리 입맛에 맞는지 먹어봐.”차설아는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는데 표정이 안 좋았다.“아줌마, 고마워요, 마음만 받을게요. 일이 좀 생겨서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아요.”“서두르지 마,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아줌마가 도와줄까?”“그게...”차설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는데 솔직히 고백해야 할지 몰랐다.어쨌든 이 일을 입 밖에 낸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중상을 입고 시력을 잃은 사람도 잘 보지 못하는 자신이 폐인과 뭐가 다른가?남아름은 차설아의 난처함을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아줌마한테 말하기 불편해도 괜찮아... 네가 여기 올 때면 친정으로 돌아왔다 생각해. '신지 요양병원'의 모든 인력, 물력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너의 일에 반드시 전력을 다해 협력할 거고.”여자의 진지한 말에 차설아의 거리낌이 사라졌고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기, 혹시 성도윤을 보신 분 없습니까?”“성도윤 씨는 너랑 함께 있지 않았어?”“아침에 일어나 보니 방에 없었고 언제 뛰쳐나갔는지도 몰라요.”차설아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볼이 불룩해지며 이를 갈았다.“제 몸 상태도 모르고 왜 이러는지... 몸에 상처도 있고 눈도 보이지 않는데 감히 사라지다니, 이건 순전히 죽으러 나간 거 아녜요?”“설아야, 일단 당황하지 마, 우리 요양원 공공 구역에 CCTV가 있어, CCTV를 보면 성도윤 씨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아마 근처에 있을 거야.”남아름은 차설아를 다독이고 있다가 안보부서 사람들을
남아름은 직원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지난 2년간 신지 요양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용음구에 산림 지킴이를 보내 안전상의 위험을 제거해 왔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그 사람도 보통이 아니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어요.”차설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고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는 별로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아줌마는 볼일 보세요. 제가 찾으러 가면 돼요.”“안 돼!”남아름은 차설아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용음구는 지세가 복잡하고 깊은 못과 구덩이가 너무 많아. 그리고 간혹 멧돼지와 늑대도 출몰한다고. 넌 가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전문요원을 보낼게.”“큰 문제가 없다고 하시더니 왜 그러세요? 사람 분명히 찾을 수 있다면서요?”“어...”남아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도 크지 않고 사람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지만 어쩌면 백골 더미로 찾을 수도 있을 따름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전에 이것보다 더 위험한 일도 많이 겪었어요, 정말 문제없어요.”차설아는 말을 마친 뒤 남아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용음구로 향했다.구불구불하고 질퍽한 산길을 지나 깊고 좁은 골짜기에 이르니 흐르는 계곡 소리가 귀에 맴돌고 그러다 이따금 한두 번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는데 소름이 끼쳤다.방금 했던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는데 용음구는 확실히 너무 험악해서 정상인이라도 대처할 수 없었다. 성도윤은 눈까지 멀었으니 아마...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어 뼈다귀도 남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아니, 아니야. 성도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분명 괜찮을 거야.”차설아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헛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핏자국이나 유골만 안 보인다면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니 그는 분명 살아있을 거다!여자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성도윤이 남긴 단서를 찾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걸어오는 길에 축축한 흙바닥에 어렴풋이 난 발자국이 보였는데 이 발자국은 성도윤이 남긴 것이 틀림없었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남자를 찾
뼈를 갉아 먹던 반달가슴곰은 뒤에서 소리가 나자 이내 멈춰 서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입과 몸의 털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곰은 발바닥으로 뼈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뼈 위에는 피투성이가 된 살점이 붙어 있었다.“아!”차설아는 무너져 내렸다... 성도윤의 뼈다귀와 살이 이렇게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나다니!“쾅!”반달가슴곰도 흥분했는지 아니면 도발인지는 몰라도 차설아를 향해 소리쳤다.“죽여버릴 거야, 널 산산조각 낼 거라고!”차설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돌려 반달가슴곰의 머리를 향해 힘껏 걷어찼다.그녀는 가냘픈 몸매에도 불구하고 매우 민첩했고 게다가 힘도 엄청났는데 반달가슴곰을 비틀거리게 차버렸다.“???”반달가슴곰은 아마 이렇게 사나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곰은 멍해졌고 손에 쥔 막대 뼈도 잊은 채 차설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마치 이 여자 뭐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보긴 뭘 봐? 네가 내 남편을 먹어놓고 억울하다는 거야 뭐야?”차설아는 너무 슬픈 나머지 미치광이처럼 울면서 반달가슴곰을 마구 때렸다. “내가 경고하는데 지금 당장 뱉어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배를 찢어서라도 그를 되찾을 거니까!”“네가 그 사람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이렇게 먹어버리다니... 이 숲에 이렇게 많은 멧돼지로도 모자라서 왜 사람은 잡아먹고 난리야! 뼈도 남기지 않고...”“쾅! 쾅!”반달가슴곰은 차설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커다란 곰 발바닥을 들어서는 차설아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차설아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는데 킬러 랭킹 1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가볍게 곰의 공격을 피하더니 반달가슴곰에게 또 다른 공격을 가했다.반달가슴곰의 눈, 코는 모두 차설아에 의해 여러 대를 제대로 맞았다.하지만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어찌할 수 없었는데 몇 번의 공격이 지나자 차설아는 체력이 떨어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머리카락도 땀에 젖었다.하지만 그녀는 지지 않을 거
차설아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고 벌떡 일어나 남자를 꼭 껴안았다.“어떻게 된 거에요? 곰한테 물려 죽은 거 아니었어요?”“좋게 좀 생각하시죠?”성도윤은 별로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여자가 끌어안도록 내버려 둔 채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차설아는 눈을 비비며 여전히 믿기지 않아 했다.“방금... 설마 당신이 총을 쏜 거에요?”“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성도윤의 손에는 긴 사냥총이 쥐어져 있었고 총구에는 아직도 흰 연기가 남아 있었는데 이는 방금 그 세 발이 바로 그가 쏜 것임을 의미했다.그의 사격은 늘 정확했는데 오랫동안 연습하지 않고 심지어 눈을 가리고도 소리를 듣고 백발백중할 수 있었다.“대단한데요? 날 거의 다 따라잡았어요. 킬러 조직이 당신을 안다면 거금을 주고 채용했을 거예요!”차설아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성도윤을 보는 눈빛에 설렘이 더해졌다.그는 이 녀석이 시력을 잃은 후에 갓난아이처럼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눈감고도 한 마리 곰을 총살할 수 있는 지독한 캐릭터라니!여자는 남자를 다시 찾은 기쁨에 잠겼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그런데 당신은 밤새 병원을 벗어났는데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사냥총을 가지고 있는 거죠? 이 반달가슴곰이 갉아먹은 것이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이에요?”“이 사냥총은 우연히 주운 거예요. 반달가슴곰이 갉아먹은 사람이 바로 이 사냥총의 주인인 것 같아요.”성도윤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신도 정말 대단하네요. 하늘이 도와주네...”차설아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성도윤은 정말 목숨이 긴 사람이라고 말이다.게다가 그의 마음가짐은 정말 안정적이었는데 눈이 먼 상태에서 그 큰 병원을 빠져나와 이런 날짐승과 맹수가 곳곳에 있었는데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마치 공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홀가분하다니...“당신도 보통이 아닌걸요? 여자가 혼자 이런 이상한 곳에 와서 반달가슴곰을 맨손으로 때리다니, 당신에 대한 이해가 나도 좀 더 풍부해졌어요.”성도윤이 가
“그런데...”성도윤의 쓸쓸한 목소리가 그윽하고 으슥한 숲속으로 유난히 파고들며 가슴을 파고들었다.“나 지금은 마음을 바꿨어요.”“무슨 뜻이에요?”차설아는 남자를 응시했는데 그녀의 쓸쓸한 살굿빛 눈동자엔 약간의 기대가 담겨 있었다.“조금 전에 이곳에 남기로 했어요.”“정말이요?”여인의 두 눈매는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그럼 이제는 탈출하지 않는 거예요? 드디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알았군요?”“그건 아니고...”성도윤의 완벽한 얼굴은 타고난 자신감으로 여유로웠다.“내가 진짜 떠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건 일도 아니죠, 누구도 날 막진 못할 거에요.”“푸!”차설아는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이 지경이 됐으면서 말은 잘해.“맞아, 맞아요. 당신이 제일 대단하고 제일 강하죠, 이 숲에 사방팔방 수많은 길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험한 용음구를 고르다니... 당신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건 알고 있는 거죠?”“당신이 이렇게 대단하니 우리 내기나 할까요? 당신이 혼자 용음구에서 벗어나면 서은아에게 데려다주고 자유를 줄게요.”성도윤은 살짝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었다.“진심이에요?”“당연하죠, 만약 못해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얌전히 내 서방님이 되는 거예요. 내가 섭섭지 않게 대해줄게요.”여자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어린아이를 놀리듯 배짱 좋게 남자의 뺨을 주물렀다.“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젖히고 심호흡을 하며 뭔가를 느끼더니 사냥총을 어깨에 메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어이, 아니... 당신 진짜예요?”차설아는 이 녀석이 무릎을 꿇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설마 정말 응전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남자의 승부욕이란!“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여기는 전체 삼림 지역에서 가장 험악한 용음구라고요. 맹수가 없더라도 이 지세는 대처할 방법이 없어요. 갑자기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면 그냥 끝이라고. 이만하면 됐어요, 억지 부리지 말아요.”성도윤의 걸음걸이는 아주 굳건했는데 차설아와 거리가 멀어지자 쿨하게 한마디 내
차설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남자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윽한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흐릿했고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그러길 바라죠...”“당신...”남자의 애처로운 모습은 차설아를 무너뜨렸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정말 안 보여요?”“당신이랑 그런 장난을 칠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어요.”차가운 얼굴을 한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상처가 보였다.“미안해요, 정말 당신이 너무 대단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놈의 입이 문제야 정말!”차설아는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성도윤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이 눈이 멀어 가뜩이나 의기소침한데 눈먼 체하고 있다고 오해까지 했으니 이것은 그의 상처를 반복적으로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다.성도윤은 별 표정 없이 정면을 응시하며 얇은 입술로 차갑게 내뱉었다.“그래서, 계속할 거에요?”차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대답했다.“당신이 계속하고 싶으면 계속해요.”“그럼 좀 비켜줄래요?”성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정말 혼자 힘으로 용음구를 빠져나가려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차설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구고 다시 남자의 뒤로 향했다.둘 다 집요함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 누구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결국 성도윤은 자신의 힘으로 무사히 용음구를 빠져나왔다.이때 구조를 온 전문 일군들과 마주쳤는데 모두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두 분 다 괜찮으신 겁니까?”“어머나, 이럴 수가. 우리 같은 전문인들도 사냥총을 소지하고 짝을 지어 다녀야 하는데 어떻게...?”“어, 그게... 상황이 좀 복잡해요.”여러 사람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차설아는 어색해했다.그녀도 성도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몰라 성도윤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네가 졌어.”성도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차설아가 있는 쪽을 향해 말했다.“그래, 내가 졌어.”차설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이겼으니 너의 소원을 들
차설아는 남자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이러는 거예요?”“단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가 떠나고 싶다면 아무도 날 막을 수 없다는 걸. 만약 내가 남는다면 그것도 내 선택이라고요.”성도윤은 다소 거만하게 대답을 했다.“그런데... 왜요?”차설아는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그녀는 이제는 성도윤이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도망갈 실력이 있다고 믿었다.다만 그는 오로지 서은아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왜 또 갑자기 남기를 원하는 거지?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당신은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떠나려 한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려고 했잖아요? 그건 우리의 관계가 단순한 병우사이가 아니라는 걸 설명하겠죠...”성도윤은 잠시 멈칫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특별한 교류가 있는지 알고 싶어요.”기억 일부가 빠진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차설아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서은아는 물론 심지어 그의 어머니도 그렇게 이 여자를 신경 쓰지는 않았을 거다.모두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으니 그가 스스로 남아서 답을 찾는 수밖에 없다.차설아는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정말 알고 싶으면 치료에 협조해요. 다시 내 모습을 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요.”“좋은 제안이네요.”성도윤은 시력을 잃은 이래 볼 수 없었던 즐거움과 적극성을 가지고 말했다.“당신을 만날 날을 기대하죠.”“...”차설아는 대답이 없었고 그녀의 마음속은 복잡했다.아마 당신이 나를 만나는 날이면 내가 얼마나 가치가 없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성도윤은 무사히 신지 요양병원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민이 이모는 그를 검사한 후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차설아는 옆에 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가슴이 조여왔는데 그녀는 성도윤에게
차설아는 다시 가슴을 졸이며 긴장된 표정으로 민이 이모를 바라봤다.“이모, 뜸 들이지 말고 한 번에 다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마음이 쪼여와서 질식할 것 같아요.”민이 이모는 얼굴을 찡그리며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제 아버지의 의술이 뛰어나긴 해도 치료 스타일이 조금 기이해요.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중의학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처방만 사용하셔서 저도 그의 처방을 지금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에요...”“어떤 처방이에요? 얼마나 기이해요?”민이 이모는 차설아의 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의 처방에는 특별한 약인이 필요해요...”차설아는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다가 민이 이모한테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제공할 테니까 필요하시면 쓰셔도 돼요.”“그렇게 되면 아가씨한테 너무 큰 상처가 될 거예요. 배신자를 위해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저 때문에 도윤 씨가 이렇게 되었으니, 제가 목숨이라도 바쳐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알겠어요, 저도 아가씨가 도련님한테 빚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해요.”말을 마친 두 사람은 성도윤의 치료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성도윤도 모처럼 차설아가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 먹었다.일주일이 지난 후, 성도윤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의 맥을 짚어본 민이 이모도 마침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도련님의 맥이 이제 안정되었고 혈맥도 많이 원활해졌어요. 두 번의 치료 과정만 더 거친 후, 눈을 집중적으로 치료해도 될 것 같아요.”차설아는 기쁨에 겨워 눈까지 번쩍 뜨면서 답했다.“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네요!”성도윤의 치료를 위해 약인을 제공한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고 목소리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으면 눈두덩이도 검게 변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차설아의 수척해진 모습을 본 민이 이모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아버지의 처방전을 쓴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앞으로의 처방에는 약인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