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이 말했다.“현재 모은 증거를 볼 때 민사소송은 반드시 이길 수 있어요. 하지만 명예훼손죄의 경우 증거를 더 수집해야 해요.”“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 승소할 확률이 높지 않은가요?”“그건 아니에요. 명예훼손죄를 입증하는 건 꽤 까다로운 일이라 증거에 조금 더 공을 들여야 단번에 깔끔히 처리할 수 있어요.”유현진은 궁금한 듯 물었다.“어떻게 공을 들여야 하죠?”주강운은 웃었다.“그건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이에요. 당신이 고려해야 하는 건 그들이 어떤 심판을 받길 원하는지예요. 그들이 그냥 사과만 하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그들을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해 근본적으로 이 일을 해결할지, 잘 고민해 보세요.”유현진은 침묵했다.그녀는 1년 가까이 심한 악플과 의도적인 사이버불링에 시달렸다. 최악의 경우 핸드폰 번호까지 유출되어 직접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공격하기도 했다.한동안 유현진은 감히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지도 못했다. 분명 그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들도 많지만 악플을 무시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주위가 조용해지면 악랄한 저주와 욕설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그리고 그런 소용돌이에 한 번 빠지게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그래도 유현진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간 의기소침해졌었는데 차미주가 제때 그녀를 데리고 심리 상담을 받아 천천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사이버불링을 당한 사람들은 생사를 넘나들기도 하는 데 반해 사이버불링을 한 사람들은 스크린을 마주하고 키보드를 마구 두드린다. 심지어 일상생활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정의의 사도인 척하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인터넷 또한 법의 제재를 받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으면서 처벌받지 않는 걸까?하지만 조금 전 전과 기록이 남을 수 있다는 주강운의 말에 유현진은 마음속으로 대가의 경중을 따졌다.주강운은 그녀의 머뭇거림을 보아내고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저
"모든 영상에서 암을 언급하는 건 트래픽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야?""참다못한 소녀가 의심하는 사람들의 캡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사건은 도마 위로 오르게 됐어요. 소녀가 올린 사진 때문에 악플을 받게 되었다는 한 사람은 계정을 삭제하겠다고 하기도 했고요. 그러자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소녀한테로 돌렸어요. 영향력이 있는 인플루언서로서 평범한 사람을 자신의 계정에 올리는 것은 악플에 앞장서는 것이라며 말이에요.""의심과 악플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와중에 사람들은 소녀가 먹고 있는 약 리스트가 가짜라는 둥,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는 소녀를 모른다고 했다는 둥, 암에 걸린 소녀는 진작에 치료를 끝내고도 뜨기 위해 쇼를 한다는 둥, 집에 돈도 많으면서 몰래 사람들의 기부를 받고 있는다는 둥 폭로를 하기 시작했어요.""사건이 터지고 나서 사람들은 다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소녀의 계정은 오래도록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어요, 보름 후, 그 계정에는 소녀가 사망했다는 부고가 올라왔어요."이 말을 들은 유현진은 약간 멈칫했다.주강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커피를 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사인은 자살이었어요. 소녀는 병이 아닌 악플러들의 악플로 인해 죽게 되었죠.""소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유서와 병원 도장이 찍힌 차트, 그리고 그녀가 치료를 받고 있는 영상을 공개했어요.""이번 영상에서 고통에 시달리며 가슴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이전 영상에서 발랄하게 웃던 소녀와 완전히 달랐어요. 사람들은 치료를 끝낸 소녀가 어떻게 고통을 참아내며 메이크업을 하고 영상들을 찍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소녀가 하프 마라톤이 끝난 다음 ICU로 갔다는 사실 또한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이번 영상이 업로드된 후, 가해자들은 잇달아 계정을 삭제했어요.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은 계정을 삭제하기만 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들은 다음 사건에서 계속 가해자의 역할을 하게 되겠죠."이야기를 듣고 난 유현진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제가 그냥 사실대로 말할게요. 사실 저희 집안사람들은 제가 더빙 일을 하는 걸 몰라요, 제 개인 정보로 고소를 한다면 더 이상 숨기지 못할 거 아니에요."유현진이 한 말이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이 정도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주강운은 이해를 한다는 듯이 말했다."친구의 개인 정보로 고소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 친구가 모든 과정을 함께 해야 하고 또 재판도 출석해야 돼요.""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해요."유현진은 차미주한테 허락을 받은 후, 그녀의 개인 정보를 주강운한테 알려줬다."차미주?"주강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친구분이랑 성씨가 같네요?"유현진은 영혼 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네."주강운은 따듯하게 웃으며 말했다."두 분이 참 인연 있네요."유현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이따가 다른 할 일이 있어요?"주강운은 머리를 들면서 물었다."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아니요."주강운은 실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그저 제가 밥이라도 살까 싶어서요."사실 유현진은 빨리 일을 해결하고 주강운과 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주강운이 먼저 밥을 사겠다고 말을 꺼낸 이상 그녀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좋아요, 하지만 밥은 제가 살래요. 강운 씨 오늘 아침 내내 저때문에 바빴고, 또 지난번에도 도움을 줬는데 감사의 뜻으로 밥을 살 때도 됐죠."주강운은 사양하지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그럼 뭘 먹으러 갈까요?""그건 당연히 밥을 사주는 사람이 맞춰야죠, 저는 음식을 가리지 않으니까 뭘 먹어도 괜찮아요."주강운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그럼 한주 음식을 먹으러 갈까요?""좋아요."주강운은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유현진이 식당 고르기를 포기하자 그는 신속하게 새로운 계획안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걸어서 이동을 했다.주강운이 선택한 식당은 길 건너편의 대학로 부근에 있었다.대학로는 주차가 어려운 관계로 두 사람은 걸어
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러자 주강운은 이렇게 물었다."혹시 T대생이에요?"유현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이 부근에만 해도 대학이 6개나 있는데 왜 T대라고 생각했어요?""저희가 카페에서 만났을 때, 제가 패드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게 기억나나요?"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게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주강운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저는 더빙 작품들을 보고 있었어요, 더빙 테크닉이 아주 훌륭한 것으로 봐서 더빙을 전문적으로 배웠겠다 싶었죠. 그리고 이 부근에서 더빙을 배워주는 곳은 T대 예술대학밖에 없어요."유현진은 얼굴이 빨개졌다.스크린을 사이 두고 칭찬을 받는 것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면전에 대고 직접 칭찬을 받자 약간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제 추측이 맞나요?"주강운은 웃으면서 물었다.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진짜 대단하네요. 그나저나 대학로에 있는 식당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혹시 강운 씨도 대학로에서 대학을 다녔어요?"주강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한 가지 추측이 떠오른 유현진은 이렇게 떠보듯이 물었다."설마 강운 씨도 T대 출신이에요?"주강운은 피식 웃으면서 유현진한테 악수를 청했다."저는 T대 법대 11학번 주강운이에요."'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유현진은 반박자 느리게 악수를 받아줬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유현진의 호칭을 들은 주강운은 웃으면서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이름으로 불러줘요."오후의 햇빛은 아주 뜨거웠다, 그 뜨거운 햇빛은 마침 식당 입구에서 줄을 서고 있는 유현진한테 비쳤다. 덕분에 유현진의 하얀 피부는 약간 발그레 해졌고 코끝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주강운은 잠깐 생각하다가 유현진이 손을 놓으려는 찰나 그녀를 힘껏 끌어당겨 자신과 자리를 바꿨다.주강운이 몸으로 만든 그늘을 유현진을 가리기에 딱 좋았다.넋이 나가버린 유현진과 달리 주강운은 자연
한성 그룹, 임원 회의실.부사장이 발표를 하고 있을 때, 강한서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자료들을 훑어봤다.이때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문자가 왔다는 것만 확인하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빨리 재미를 보고 싶었던 한성우는 강한서가 답장이 없는 것을 보고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그래서 그는 두 사람의 손이 잘 보이도록 사진을 확대해서 다시 강한서한테 보내줬다."네 와이프가 외간 남자랑 손을 잡았어."강한서는 마침내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클릭했다.사진을 멀리서 찍은 관계로 피사체의 이목구비가 약간 흐릿하기는 했지만 강한서는 옷만으로도 유현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와 손을 잡고 있는 남자는 길가에 있는 식물에 의해 얼굴이 가려져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한성우는 불이 제대로 타지 않을까 봐 계속 땔감을 넣으며 부추겼다."네 와이프는 새 애인이 생겨서 이혼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근데 저 새 애인 너무 수준 떨어지는 것 같아, 어떻게 여자를 데리고 구멍가게에 갈 수 있어? 네 와이프는 도대체 왜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청순함 때문인가?"강한서는 한창 날뛰고 있는 들짐승을 무시하고 유현진한테 문자를 보냈다."너 어디야?"유현진은 주문을 하고 있다가 강한서의 문자를 봤다. 그녀는 휴대폰을 힐끔 보고는 바로 꺼버렸다.주문을 하고 나니 휴대폰에는 문자가 잔뜩 쌓여있었다."왜 답장 안 해?""문자 보면 답장 좀 해줘.""넌 눈이 멀었어?""유현진 너 일부러 내 문자를 씹는 거지!"유현진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예전에는 하루 종일 밖에 있어도 문자 한 통 보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이상하리 만큼 말이 많아졌다.유현진이 다시 휴대폰을 끄려고 할 때, 강한서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는 유현진이 어제 강한서한테 서명을 하게 한 재산 처리 동의 계약서였다.강한서가 계약서를 갖고 자신을 협박하는 것을 보고 유현진은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유현진은 바로 강한서한테 답장을
한성우는 차 유리를 내렸다, 그러자 교통경찰이 이렇게 말했다."차가 벤틀리네요."한성우 잠깐 멈칫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맞아요, 그건 왜요?"교통경찰은 그를 힐끔 보며 말했다."아무리 벤틀리라고 해도 여기서 주차하시면 안 돼요, 앞쪽으로 가주세요."한성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구경을 마저 하지도 못한 채 교통경찰한테 쫓겨나고 말았다.----"대학에서는 무슨 전공을 배웠어요?"주강운은 유현진한테 시원한 음료를 건네주며 물었다.유현진은 휴대폰을 끄고 머리를 들었다."저는 연극 영화과였어요."주강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는 당연히 더빙 전공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전공을 살려 일을 하지 않았어요?"다른 사람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유현진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그건 말하자면 좀 길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다시 말해줄게요."유현진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깨달은 주강운은 웃으면서 말했다."좋아요.""그러고 보니 변호사 수임료는 많이 비싼가요?"유현진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유현진은 주강운과 몇 번 만나면서 그의 옷차림이 수수하고 크게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입고 있기는 하지만 손목시계와 넥타이 클립은 다 고가의 제품이었고 차도 2억이 넘는 모델을 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유현진은 연봉이 얼마나 되어야 이렇게 자유롭게 고급 브랜드를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주강운은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친구의 사무소에 다니고 있어서 수임료가 높지 않아요,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유현진은 멈칫하다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수임료는 받을 만큼 받으세요. 저는 그냥 단순히 변호사는 돈을 얼마나 버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값을 깎을 생각은 전혀 없어요."주강운은 웃으면서 말했다."변호사는 그래도 돈을 꽤 많이 버는 축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어떤 사건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죠. 제 친구 중에 부자들의 이혼 소송을 주로 하는 애가 있어요. 재산분할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
안내원은 움찔 놀라더니, 내밀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얼른 거두어들였다.“강, 강 대표님...”유현진은 고개를 돌려보았다.강한서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몰랐다. 마치 빚쟁이를 기다리듯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유현진은 그를 본 순간, 갑자기 움찔했고 생각에 잠겼다. 강한서가 설마 그녀를 볼 때마다 주머니에서 내놓아야 할 2000억을 떠올리고 그녀한테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게 아닐까 싶었다.그녀는 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오래 기다렸어?”강한서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오긴 오는 거였네!”유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원래는 30분 정도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옷 가지러 갔다가 신상들이 꽤 괜찮아 보이더라고, 너 주려고 셔츠 두 벌 사느라 조금 늦은 거야.”강한서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이유는 그럴듯하구나.”말투는 조금 전보다 훨씬 다정해졌다. 이어서 그는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빨리 안 가고 뭐해?”유현진은 너그럽게 웃음 지으려 애를 썼다. 그녀는 그제야 안내원의 손에서 물건들을 건네받았고, 이어서 간식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방문안내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사모님, 이건 제 일이니, 정말 괜찮습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일과 별개로 지난번에 촬영해 줬던 게 고마워서 드리는 겁니다.”방문안내원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그 일이 있은 뒤로, 매번 강한서가 안내 데스크를 지날 때마다, 그는 가시방석에 놓인 것 같이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최근 일주일은 무탈하게 지나가던 중이라, 그는 약간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결국 유현진이 찾아옴으로써 무탈한 시간은 종료되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는 강한서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만 좀 꾸물거려!”강한서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어휴, 또 트집을 잡는구나!’유현진은 간식을 건네고는 짐을 들고 강한서를 따라갔다.안내원은 간식을 들고 강한서가 떠나기 전 쳐다보
유현진은 눈을 찡긋했다.“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강 대표님께서 약속만 잘 지켜주면 돼! 한성 그룹을 손에 넣으면 약속대로 2000억 내어주고 이혼해 줘.”강한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차 한잔 타줘.”유현진은 새로 산 옷의 태그를 뜯느라 바빴다.“민 실장님 밖에 있잖아, 민 실장님한테 부탁해.”강한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2000억의 절반은 민 실장이랑 나눌 건가 봐?”유현진은 멈칫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이쿠,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강 대표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그의 집무실에서 나온 유현진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돈 몇 푼 가지고 감히 나를 도우미처럼 부려? 나중에 돈만 받으면 강한서 얼굴에 던질 거야. 무시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려줄 거야!’그의 집무실을 나간 뒤, 유현진은 바로 민경하를 마주쳤다. 민경하는 서류를 들고 잔걸음으로 빨리 걸어왔고 유현진한테 인사했다.유현진은 그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민 실장님, 탕비실 어디예요?”“탕비실이요?”민경하는 흠칫 놀라더니 다시 물었다.“사모님 차 드시려고요?”“강한서 씨가 필요하대요, 근데 저는 탕비실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요.”민경하는 일자로 입술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비서실에 커피를 내리는 등 대표님의 일상생활을 돕는 비서가 따로 있는데, 게다가 집무실에 정수기도 있고... 대표님은 왜 사모님한테 직접 다녀오라고 시킨 걸까?’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했지만 더는 묻지 않고 유현진한테 탕비실 위치를 알려줬다.유현진이 떠난 후, 그는 발걸음을 대표님 집무실로 옮겼다.노크하고 들어가는 순간, 강한서는 휴대폰을 들고 소파 옆에 서서 쇼핑백에서 옷을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그의 행동은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어색했다.“무슨 일이시죠?”강한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진 않았고 그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민경하는 담담하게 말했다.“대표님 장인 어르신... 유상수 대표님이 연현 테크에 투자를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