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한성우의 연기 톤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잡이 같은 놈.”——아름드리.한현진은 송가람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며 굳은 얼굴로 탕탕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잠자리에 누우려던 황씨 아주머니는 고기를 다지는 소리에 시끄러워 잠에 들 수가 없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사모님. 이 저녁에 잠은 안 주무시고 주방에서 뭐 하세요?”손에 칼을 들고 몸을 돌린 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한서가 내일 아침으로 물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요. 마침 잠도 안 와서 만두 속이나 만들어 놓을까 해서요. 저 때문에 깨셨어요?”한현진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가엔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칼을 들고 있는 한현진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황씨 아주머니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뇨. 주방에 민찌기 있어요. 제가 도, 도와드릴까요?”“괜찮아요. 고마워요.”한현진의 눈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손으로 직접 다진 게 맛있잖아요.”“그, 그럼 마저 하세요. 전 들어가서 쉴게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세요.”황씨 아주머니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지금 한현진의 모습은 고기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토막 내는 것 같았다. 11시가 거의 되어갈 때쯤, 문밖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운전기사와 강민서가 강한서를 부축하며 들어왔다. 주방에서 나온 한현진의 손에는 여전히 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한서를 소파에 눕힌 강민서는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한 한현진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아직 안 잤어?”한현진이 미소 지었다. “딸기 푸딩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강민서가 꿀꺽 침을 삼켰다. “난 이미 밥 먹고 왔어. 푸딩은 내일 먹을게. 오빠 부탁할게.”말을 마친 강민서는 재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운전기사가 그 모습을 보더니 더는 강한서를 부축하지
소파 위의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현진은 아예 나머지 단추를 전부 풀었다. 강한서의 가슴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술에 취한 것이 맞는 듯했다. “강한서?”한현진이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날 데리러 오던 날 나에게 했던 말 아직도 기억해?”한현진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들고 있던 칼은 어느새 강한서의 벨트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강한서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차가운 칼날이 살며시 강한서의 아랫배를 툭툭 건드렸다. 한현진을 손을 뻗어 강한서 이마에 맺힌 땀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넌 기억력이 좋으니까 당연히 잊지 않았겠지?”강한서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순간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앞으로 기억이 돌아오든 아니든, 만약 다시 송가람과 썸씽이 있으면 네 대를 끊어버릴 거야.”칼날이 점점 더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강한서의 몸은 긴장으로 바짝 굳어졌다. “정말 취한 거야?”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강한서의 얼굴을 만졌다. “너 대체 얼마를 마신 거야?”그녀는 칼을 내려놓고 강한서의 옆에 앉았다. “송가람은 네가 술 못 마시는 걸 알면서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술을 먹인 거야?”말하며 한현진은 강한서의 얼굴을 꼬집었다. “설마 네가 인사불성인 틈을 타 너랑 관계라도 가지려고 한 거야?”한현진이 또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송가람은 아직 널 잘 모르네. 넌 술에 취하면 아예 서질 못하는데 설사 송가람이 선녀 같은 미모를 갖고 있다고 해도 제구실도 못 하는 사내 앞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누가 제구실도 못 한다는 거예요?”한현진의 등 뒤로 강한서의 목소리가 여유롭게 울려 퍼졌다. 움찔한 한현진이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소파에 누워있던 사람이 이젠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현진이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취한 거 아니— 아—”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서의 한현진의 손을
강한서는 비록 기억을 잃었어도 키스 실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한서의 키스에 한현진은 온몸이 나른해지고 눈가도 촉촉하게 빛났다. “계속 욕할 거예요?”강한서는 한현진의 코끝을 살짝 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공기 중에 섞여갔다. 한현진이 온몸에 힘이 쭉 빠졌지만 입으로는 절대 굴하지 않으며 말했다. “개자식.”강한서가 피식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가슴팍이 약간 흔들렸고 그의 눈빛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한현진의 심장이 가파르게 떨려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의미예요?”이 키스가 어떤 의미냐는 뜻이었다. 강한서는 시선을 내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면서요?”“...”한현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강한서 씨는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키스부터 해요?”강한서는 손을 뻗어 가볍게 한현진의 아랫배 위에 올렸다. “아이도 있는 사이니 진도를 조금 더 빼도 된다고 생각했죠.”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강한서 씨 논리대로라면 아이를 낳은 사이였으면 바로 잠자리부터 가져도 된다는 거네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현진이 드디어 그가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할 때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지만 임신했을 때 성관계를 가지면 자궁 수축이 올 수 있어요.”그 말에 한현진은 바로 그를 뻥 차버렸다. 강한서도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터라 한현진이 걷어차자 그는 그대로 소파의 한쪽에 앉아버렸다. 단추가 풀려 웃옷이 활짝 열린 채 강한서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조명이 그의 라인이 선명한 근육을 비추며 섹시한 매력을 발산했다. 한현진은 방금 강한서의 유혹으로 널뛰는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강한서를 노려보며 욕설을 지껄였다. “다 네가 문제야.”말하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한 한현진은 잠시 후 해장국을 들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술 냄새가 너무 심하잖아요. 먹고 가서 샤워해요. 본인 주량이 어
강한서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한현진이 컵을 강한서 앞으로 밀었다. “먹어봐요. 어젯밤에 도착한 건데, 어떤지 맛만 봐요.”강한서가 손을 들어 컵을 다시 한현진 쪽으로 밀었다. “혼자 먹어요.”한현진이 코웃음 치더니 그릇을 들고 과일 식초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임신한 후 입맛이 조금 바뀌었다. 전과 달리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고 오히려 시고 단 음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의사가 너무 단 디저트를 먹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며 임신 중 혈당 관리에 주의하라고 했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몸무게를 관리해야만 태아가 너무 크지 않아 낳을 때 고생을 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단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한현진은 신맛이 강한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정인월을 친히 친구들에게 부탁해 단맛이 줄이고 과일 향은 진한 과일 식초를 만들었다. 오늘 처음 과일 식초 맛을 본 한현진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강한서가 신을 갈아신을 때 한현진이 또 그를 불러세웠다. “오빠가 내일 돌아온대요.”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내일 언제요?”“오늘 저녁 비행기로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고 하더라고요. 비행기에 타기 전에 연락한다고 했어요.”알겠다고 대답하던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내일 같이 마중 나가요.”한현진이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그래요.”“오빠, 잠깐만.”강민서가 갑자기 위층에서 내려오며 강한서를 불렀다. 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손에 들린 약병을 강한서에게 건넸다. “어제 가람 언니가 우리를 데려다주면서 오빠한테 전해달라고 한 거야.”한현진은 그 약병을 보며 또다시 머리가 아플 때마다 그 약을 먹던 강한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약이길래 효과가 그렇게 빠른 거야. 게다가... 왜 약병엔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은 거지?’약병을 건네받은 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고맙다고 전해줘.”고개를 끄덕인 강민서가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넥타이를 들고 강한서 앞으로 다가갔다. 강한서가 손을 뻗어 넥타이를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