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한성우의 연기 톤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잡이 같은 놈.”——아름드리.한현진은 송가람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을 보며 굳은 얼굴로 탕탕 고기를 다지고 있었다. 잠자리에 누우려던 황씨 아주머니는 고기를 다지는 소리에 시끄러워 잠에 들 수가 없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사모님. 이 저녁에 잠은 안 주무시고 주방에서 뭐 하세요?”손에 칼을 들고 몸을 돌린 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한서가 내일 아침으로 물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요. 마침 잠도 안 와서 만두 속이나 만들어 놓을까 해서요. 저 때문에 깨셨어요?”한현진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가엔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칼을 들고 있는 한현진의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황씨 아주머니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뇨. 주방에 민찌기 있어요. 제가 도, 도와드릴까요?”“괜찮아요. 고마워요.”한현진의 눈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손으로 직접 다진 게 맛있잖아요.”“그, 그럼 마저 하세요. 전 들어가서 쉴게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주무세요.”황씨 아주머니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지금 한현진의 모습은 고기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토막 내는 것 같았다. 11시가 거의 되어갈 때쯤, 문밖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운전기사와 강민서가 강한서를 부축하며 들어왔다. 주방에서 나온 한현진의 손에는 여전히 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한서를 소파에 눕힌 강민서는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한 한현진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아직 안 잤어?”한현진이 미소 지었다. “딸기 푸딩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강민서가 꿀꺽 침을 삼켰다. “난 이미 밥 먹고 왔어. 푸딩은 내일 먹을게. 오빠 부탁할게.”말을 마친 강민서는 재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운전기사가 그 모습을 보더니 더는 강한서를 부축하지
소파 위의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현진은 아예 나머지 단추를 전부 풀었다. 강한서의 가슴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술에 취한 것이 맞는 듯했다. “강한서?”한현진이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날 데리러 오던 날 나에게 했던 말 아직도 기억해?”한현진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들고 있던 칼은 어느새 강한서의 벨트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강한서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차가운 칼날이 살며시 강한서의 아랫배를 툭툭 건드렸다. 한현진을 손을 뻗어 강한서 이마에 맺힌 땀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넌 기억력이 좋으니까 당연히 잊지 않았겠지?”강한서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순간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앞으로 기억이 돌아오든 아니든, 만약 다시 송가람과 썸씽이 있으면 네 대를 끊어버릴 거야.”칼날이 점점 더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며 강한서의 몸은 긴장으로 바짝 굳어졌다. “정말 취한 거야?”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강한서의 얼굴을 만졌다. “너 대체 얼마를 마신 거야?”그녀는 칼을 내려놓고 강한서의 옆에 앉았다. “송가람은 네가 술 못 마시는 걸 알면서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술을 먹인 거야?”말하며 한현진은 강한서의 얼굴을 꼬집었다. “설마 네가 인사불성인 틈을 타 너랑 관계라도 가지려고 한 거야?”한현진이 또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송가람은 아직 널 잘 모르네. 넌 술에 취하면 아예 서질 못하는데 설사 송가람이 선녀 같은 미모를 갖고 있다고 해도 제구실도 못 하는 사내 앞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누가 제구실도 못 한다는 거예요?”한현진의 등 뒤로 강한서의 목소리가 여유롭게 울려 퍼졌다. 움찔한 한현진이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소파에 누워있던 사람이 이젠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현진이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취한 거 아니— 아—”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한서의 한현진의 손을
강한서는 비록 기억을 잃었어도 키스 실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한서의 키스에 한현진은 온몸이 나른해지고 눈가도 촉촉하게 빛났다. “계속 욕할 거예요?”강한서는 한현진의 코끝을 살짝 누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공기 중에 섞여갔다. 한현진이 온몸에 힘이 쭉 빠졌지만 입으로는 절대 굴하지 않으며 말했다. “개자식.”강한서가 피식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가슴팍이 약간 흔들렸고 그의 눈빛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한현진의 심장이 가파르게 떨려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의미예요?”이 키스가 어떤 의미냐는 뜻이었다. 강한서는 시선을 내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면서요?”“...”한현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강한서 씨는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키스부터 해요?”강한서는 손을 뻗어 가볍게 한현진의 아랫배 위에 올렸다. “아이도 있는 사이니 진도를 조금 더 빼도 된다고 생각했죠.”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강한서 씨 논리대로라면 아이를 낳은 사이였으면 바로 잠자리부터 가져도 된다는 거네요?”강한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현진이 드디어 그가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할 때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지만 임신했을 때 성관계를 가지면 자궁 수축이 올 수 있어요.”그 말에 한현진은 바로 그를 뻥 차버렸다. 강한서도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터라 한현진이 걷어차자 그는 그대로 소파의 한쪽에 앉아버렸다. 단추가 풀려 웃옷이 활짝 열린 채 강한서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조명이 그의 라인이 선명한 근육을 비추며 섹시한 매력을 발산했다. 한현진은 방금 강한서의 유혹으로 널뛰는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강한서를 노려보며 욕설을 지껄였다. “다 네가 문제야.”말하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한 한현진은 잠시 후 해장국을 들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술 냄새가 너무 심하잖아요. 먹고 가서 샤워해요. 본인 주량이 어
강한서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한현진이 컵을 강한서 앞으로 밀었다. “먹어봐요. 어젯밤에 도착한 건데, 어떤지 맛만 봐요.”강한서가 손을 들어 컵을 다시 한현진 쪽으로 밀었다. “혼자 먹어요.”한현진이 코웃음 치더니 그릇을 들고 과일 식초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임신한 후 입맛이 조금 바뀌었다. 전과 달리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고 오히려 시고 단 음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의사가 너무 단 디저트를 먹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며 임신 중 혈당 관리에 주의하라고 했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몸무게를 관리해야만 태아가 너무 크지 않아 낳을 때 고생을 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단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한현진은 신맛이 강한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정인월을 친히 친구들에게 부탁해 단맛이 줄이고 과일 향은 진한 과일 식초를 만들었다. 오늘 처음 과일 식초 맛을 본 한현진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강한서가 신을 갈아신을 때 한현진이 또 그를 불러세웠다. “오빠가 내일 돌아온대요.”강한서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내일 언제요?”“오늘 저녁 비행기로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고 하더라고요. 비행기에 타기 전에 연락한다고 했어요.”알겠다고 대답하던 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내일 같이 마중 나가요.”한현진이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그래요.”“오빠, 잠깐만.”강민서가 갑자기 위층에서 내려오며 강한서를 불렀다. 그녀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손에 들린 약병을 강한서에게 건넸다. “어제 가람 언니가 우리를 데려다주면서 오빠한테 전해달라고 한 거야.”한현진은 그 약병을 보며 또다시 머리가 아플 때마다 그 약을 먹던 강한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약이길래 효과가 그렇게 빠른 거야. 게다가... 왜 약병엔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은 거지?’약병을 건네받은 강한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고맙다고 전해줘.”고개를 끄덕인 강민서가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한현진은 몸을 일으켜 넥타이를 들고 강한서 앞으로 다가갔다. 강한서가 손을 뻗어 넥타이를
한준웅과 한열이 또 싸웠다고 했다. 심지어 한열의 생일 당일 싸워 한열은 생일 케이크도 먹지 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는 한중웅의 카톡을 차단한 것은 물론 온 가족의 SNS를 차단해 버렸다. 차마 자존심을 버리고 직접 한열에서 물을 수 없었던 한준웅은 어쩔 수 없이 한현진을 떠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열에서 연락한 한현진은 그제야 한열이 “살의”의 제작발표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가까운 곳이라 한현진은 한열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최대한 중간 다리 역할을 잘 해 부자 사이의 갈등을 풀어줘야 했다. 준비를 위해 막 2층으로 올라간 한현진은 베란다에서 통화 중인 강민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젯밤 만든 딸기 푸딩을 아직 강민서에게 주지 못한 것을 떠올린 한현진이 푸딩을 준비해 뒀다는 얘기를 전하려 강민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워진 한현진은 강민서의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저도 이제야 기회를 잡았어요. 하지만 너무 티 나게 할 수는 없어요. 알잖아요. 한현진이 얼마나 약아빠진 사람인지. 너무 티 나게 굴면 의심할 거예요.”그녀의 말에 한현진이 어리둥절해졌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또 뭘 물은 것인지 강민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오빠는 한현진이 귀찮아 죽으려고 해요. 아침에 나갈 때도 또 싸웠다니까요. 한현진이 굳이 오빠 넥타이를 매주겠다고 해서 오빠가 역겹다며 밀어버려서 한현진이 울 뻔했다니까요. 그때 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않았어도 촬영해서 보여줬을 텐데 아쉽네요. 오빠에게 들킬 것 같았거든요.”한현진의 표정이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또 있어요. 오빠가 가람 언니와 데이트하고 돌아왔을 때 한현진의 표정이 얼마나 재밌는 줄 아세요? 오빠에게 화내고 난리를 쳤지만 오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니까요.”“네. 어제 가람 언니가 저희를 데려다줬어요. 오빠가 취해서 계속 가람 언니 이름을 불렀거든요. 한현진은 화가 나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니까요. 이런데도 아름드리에 계속 있다니, 뻔뻔하기도 하
“현진아, 나 곧 탑승해. 내일 아침 10시쯤에 도착할 것 같아. 짐이 많아서 더러 부쳤고 나머지는 내가 도착하면 가질 수 있을 거야.”송민준이 있는 곳의 바람 소리가 얼마나 큰지 수화기 너머로도 그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럼 비행기에서 쉬어요. 내일 데리러 갈게요.”알겠다고 대답한 송민준이 한현진의 이름을 불렀다. “현진아...”“왜요, 오빠?”그녀는 송민준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송민준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얘기하자.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그래요.”전화를 끊은 한현진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송민준의 반응으로 보아 그쪽에서 당시의 일에 대한 단서를 찾은 것 같았다. 다만 어느 정도로 조사를 마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젠장.”차미주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그에 깜짝 놀란 한현진이 말했다. “왜 그래?”차미주가 이마를 탁 치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엄마를 차단하고 인스타 업로드한다는 걸 깜빡했어. 방금 내가 올린 인스타에 하트를 누르셨어.”한현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엄마가 봐서는 안 되는 걸 올리기라도 한 거야?”차미주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강한서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겠다며? 넌 지금 술을 마실 수 없으니 당연히 나랑 개자식이 나서야지.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우리 100일 기념 파티에 참석할 인원을 모집한다는 피드를 올렸단 말이야.”눈이 휘둥그레진 한현진이 한참 만에야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차미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강한서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동료랑 친척들만 차단하고 엄마는 깜빡했어.”“아니, 그것보다.”한현진이 이마를 짚었다. “대체 누가 100일 기념 파티를 열어? 넌 강한서가 바보인 줄 알아?”차미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억을 잃어도 그다지 똑똑해진 건 같지 않던데?”“...”두 사람이 얘기를 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어이없어, 정말.’차미주와 한현진은 겨우 시간을 맞춰 “살의” 제작발표회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영화관의 구석에 앉아 MC가 배우와 제작진을 한 명씩 무대 위로 모시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신하리를 비롯한 주연 배우와 감독이 먼저 무대에 오르고 MC와 한참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서야 한열이 도착했다. 한열은 아마 스케줄 때문에 이제야 현장에 도착한 것 같았다. 허둥지둥 무대 상영관으로 들어온 그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인기가 많은 그가 무대 위에 오르자 현장은 바로 함성으로 가득 찼다. 상영관의 절반 이상이 한열의 팬이었다. 그의 팬들 사이에 앉은 한현진과 차미주는 하마터면 팬들의 함성 때문에 고막이 터질 뻔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한열은 블랙 수트에 얇은 흰색 티를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긴 다리 덕분에 서 있기만 해도 만화의 캐릭터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정말이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외모였다. 영화 개봉을 홍보하기 위한 제작발표회였기에 인터뷰는 주로 영화 관련된 주제로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엔 잠깐의 팬서비스 시간이 주어졌다. 한열이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잘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팬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팬서비스 시간엔 비록 사전 상의 없이 팬이 한열에게 달려들어 안겨도 그는 절대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한현진은 전에 한열과 대사를 맞추며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저 한 번 보겠다고 먼 곳도 마다하고 왔을 텐데, 제가 얼굴을 붉히면 그건 인간도 아닌 거죠. 제가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닌데 절 위해서 여기까지 와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전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어요.”팬을 대하는 태도로만 보면 한열은 흠잡을 데 없는 아이돌 그 자체였다. 그러니 그의 팬들이 한열이라면 껌뻑 죽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현진이 사색에 잠겼을 때, 마침 한열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한현진은 얼른 손에 들린 슬로건을 흔들었다. 한
한열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는 신하리의 돌발 발언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자는 한열에게서 뭐라도 건지려고 했지만 한열의 입은 무겁기만 했다. 그는 영화 관련 질문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자는 어쩔 수 없이 대화의 주제를 영화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인터뷰가 끝이 났다. 한열은 한현진에게로 걸어와 말했다. “누나, 저 화장실 다녀와서 같이 밥 먹으러 가요.”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인을 받은 차미주가 한열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열이 동생 완전 멋져.”한열이 씩 웃더니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한현진과 차미주는 대기실에 앉아 무료하게 한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대기실로 들어온 신하리가 두 사람에게 오렌지를 건네며 윙크를 날렸다. “제작발표회에서 주인공이 무대 아래에 관객으로 앉아계셨네요?”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괜히 무대에 올랐다가 신하리 씨에게 가려질까 봐 그러죠.”신하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씀 예쁘게 하시네요. 둘레집은 왜 하차하셨어요?”한현진이 오렌지를 손에 들고 웃으며 말했다. “가업을 상속받으려고요.”잠시 할 말을 잃었던 신하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시 고민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본이 정말 좋거든요.”신하리가 진지하게 한현진에게 제안했다. 신하리는 이제 이 정도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좋은 대본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은 달랐다. 이제 막 연예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이라 그녀의 인지도를 높여 줄 좋은 대본이 필요했다. 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강 때문에 잠시 촬영은 힘들어서요. 사실 그저 신하리 씨에게 역할을 넘기기만 한 건 아니에요. 저도 투자를 좀 했거든요.”신하리가 멈칫하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제가 투자자님도 못 알아보고 실례했네요.”그러자 한현진도 신하리를 따라 웃었다. ‘신하리 씨 재밌는 사람이네.’신하리가 대기실에 들어온 지 얼마 되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