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월의 선물을 사고 나온 강한서는 화장실로 갔고 진씨는 차에 물건들을 싣기 시작했다.유현진은 원래 이 틈을 타서 휴대폰이나 보려고 했는데 주얼리 가게의 포스터에 시선을 뺏겨버리고 말았다. 포스터 속의 모델이 하고 있는 팔찌가 너무 예뻤던 것이다."혹시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으시면 들어와서 착용해 보세요. 가게 안에 예쁜 제품들이 아주 많아요."가게 직원은 아주 열정적이었다.강한서가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 유현진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는 금방 문을 연 것 같았다. 어떤 직원은 부지런히 전시품을 교체하고 있었고 손님들은 이제야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유현진은 바로 비취옥 코너로 가서 팔찌들을 살펴봤다. 그러자 직원 한 명이 뒤따라와서 이렇게 물었다."본인이 쓰실 건가요? 아니면 선물하실 건가요?"유현진은 진열장 안의 전시품들을 살펴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구경하러 왔어요.""그럼 천천히 구경하세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고요."한바탕 구경을 끝낸 후에도 포스터 속의 제품을 찾지 못한 유현진은 직원을 불러와서 이렇게 물었다."포스터 속의 모델이 하고 있는 팔찌는 어디에 있어요?""손님, 안목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그건 저희 가게의 신제품이에요. 품질이 아주 훌륭한 제품이라 파손이 생길까 봐 진열장 안에 넣지 않았어요.""잠깐 구경해도 될까요?""그럼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매니저님한테 신청을 해볼게요."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은 상자 하나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왔다.상자를 열자 벨벳 위에 놓인 비취옥 팔찌가 보였다. 비취옥은 아주 투명하고 영롱했고 색깔 분포도 균일했다.가게 직원은 장갑을 끼고 팔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조명까지 켜고 유현진한테 구경을 시켜줬다.비취옥은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비취옥 안에는 불순물과 균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색깔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자연의 색깔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유현진은 여기까지만 알고 있었다."한 번 써봐
가게 직원은 물건을 팔기 위해 듣기 좋은 소리만 했다.이 팔찌는 예쁘기는 하지만 유현진과 어울리지는 않았다. 유현진의 손목에 비해 크기도 했고 색채가 너무 진해 그녀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다."손님이 왔는데 왜 마중 나오는 직원 한 명 없어요? 이 가게는 서비스가 왜 이 모양이에요?"이때 오만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현진의 옆에 있던 가게 직원은 후다닥 마중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죄송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여자는 진열장 속의 제품들을 힐끔 보면서 오만하게 말했다."팔찌 품질이 이게 뭐예요? 너무 수준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다양한 손님들을 만나온 가게 직원은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정말 죄송합니다. 비취옥은 쉽게 깨지기 때문에 실수를 방지하고자 고품질 제품만 따로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시에만 꺼내서 전시를 합니다.""그럼 얼른 갖고 와야지 뭘 하고 있어요?"가게 직원은 iPad를 갖고 오면서 이렇게 말했다."이건 고품질 제품들의 사진입니다.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르시거나 예산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추천해 드리겠습니다."여자는 아무렇게나 뒤적거리다가 유현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저 제품의 사진은 어디에 있어요?"가게 직원은 바로 해당 제품의 광고 영상을 틀어줬다.여자는 영상을 본체만체하고 이렇게 말했다."저도 이걸 써볼래요!""알겠습니다. 먼저 오신 손님께서 구경을 끝내시면 도와드리도록 할게요."이 말을 들은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저 사람이 이렇게 한참 구경하는 걸 보면 딱히 살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요?"가게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현진은 머리를 들지도 않고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을 돌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이걸 사든 말든 순서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팔찌를 써보고 싶다면 조용히 줄이나 서요."사실 두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유현진은 거울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유현진은 트위드재킷을 걸친 여자가 안하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하윤은 강민서의 친
"하윤 씨는 생각이 너무 어린 것 같아요. 저는 전업주부도 별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고귀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혼인 관계에서 분업이 달라질 뿐이죠. 저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돈을 벌고 제가 집안을 돌보고 있어요. 만약 남편이 힘들다고 하면 남편이 집안을 돌보고 제가 돈을 벌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벌어도 남편과 잘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예요."유현진은 또 이렇게 말했다."반대로 저는 돈을 벌 능력이 없어서 부모님의 돈이나 쓰며 허풍치는 사람이 더욱 싫어요."가게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현진의 말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마침 가게 안의 사람들이 듣기에 적당했다.이 시간에 가게로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유현진과 같은 전업주부였다. 유현진처럼 집안이 부유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물론 있었다.그들은 자신의 직장 생활을 희생해서 집안을 돌보고 있는데 '돈 한 푼도 벌지 못한다', '남자한테 빌붙어 산다'라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유현진은 이 자리에 있는 전업주부들의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어떤 사람은 참다못해 이렇게 말했다."젊은 애가 생각이 왜 이렇게 구식이야.""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여성을 함부로 평가해?""출근이 얼마나 쉬운 일이라고 그래. 내 남편이 전업주부를 한다면 난 아예 월급 카드를 남편한테 줄 거야.""쌀벌레가 무슨 자격으로 전업주부를 무시해?"...안하윤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했다. 그녀는 머리를 홱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닥쳐!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가게 직원은 이렇게 주의를 줬다."손님, 가게 안에서는 큰 소리로 떠들면 안 돼요."유현아는 안하윤이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다. 아직 한 라운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화를 참지 못하니 말이다.유현아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언
"팔찌는 깨끗하게 닦아줘요. 내 물건에 다른 여자의 역겨운 냄새를 달고 다니기 싫으니까."유현진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녀는 안하윤의 유치한 짓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한도가 부족해요."안하윤이 득의양양한 기분을 누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의 말 한마디 때문에 창피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말도 안 돼. 제 카드 한도는 10억이나 된다고요!"직원은 이렇게 말했다."이 비취옥 팔찌는 할인 후 가격이 62억 5200만 원입니다. 한도가 모자라면 할부로 해드릴까요?"안하윤은 안색이 약간 어두웠다. 그녀는 비취옥 팔찌 하나에 기껏해야 5억 정도 할 줄 알았다. 62억은 그녀의 용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안하윤은 아주 난감했다. 자신이 사겠다고 말까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안 산다고 하면 비웃음을 당할 게 뻔했다.보다 못한 유현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렸다."하윤아, 그냥 사지 말자. 이건 너무 비싼 것 같아.""62억이면 꽤 괜찮죠. 이런 색깔이 흔한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안하윤의 옆으로 걸어온 유현진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게다가 하윤 씨의 입장에서는 비싼 축도 아니잖아요?"유현진의 도발을 견딜 수 없었던 유현진은 이렇게 억지를 부렸다."60억이 뭐예요. 600억이라 해도 별것 없죠. 저한테는 손가락만 움직이면 얻을 수 있는 돈이라고요! 제가 당신처럼 물건 하나 사는데 남 눈치를 보는 줄 알아요?"안하윤은 이렇게 말하며 다른 카드를 직원한테 건넸다."이 카드로 계산해요."62억은 순식간에 카드에서 빠져나갔다. 오늘의 최고 매출에 가게 직원들은 일제히 인사를 했다.계산을 하고 머리를 돌린 안하윤은 유현진이 계속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팔찌를 자랑하며 이렇게 말했다."사모님의 팔찌를 빼앗게 되어서 참 죄송하네요. 아니면 이곳에서 가장 잘나가는 제품으로 하나 골라봐요. 제가 민서를 봐서 첫 만남 선물로 하나
안하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가 어딜 봐서 저 여자가 소개한 거란 말이에요?""방금 사모님한테 선물을 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희는 지인이 아니라면 선물을 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어요."이 말을 들은 안하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가게 직원들을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이 사기꾼들... 기자를 찾아가서 다 말해버릴 줄 알아요!" 안하윤은 또 유현진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도 두고 봐요!"손가락으로 수표를 집어 든 유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수표를 흔들어 보였다."나중에 또 봐요."유현아는 안하윤의 멍청함을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 안하윤한테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강한서를 발견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서 가게 밖으로 나갔다."사모님, 다른 제품을 보시겠어요?"매니저가 정중하게 물었다.이 가게는 한성우의 가게였다. 그리고 강한서가 그녀를 몇 번 데리고 온 적 있는 덕분에 매니저와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안 그러면 매니저는 방금 전처럼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다.어찌 됐든 유현진은 강한서의 이름을 빌어 위세를 부렸다."이 소엽자단 팔찌를 포장해 주세요. 선물할 거예요.""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누구한테 선물하게?"이때 강한서의 목소리가 갑자기 유현진의 귓가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유현진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네 할머니한테 선물할 거야."강한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자신의 말투가 쌀쌀맞았다는 것을 알아챈 유현진은 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할머니한테 드리려고.""넌 1800만 원을 넘게 벌어 놓고 할머니한테는 200만 원도 안 되는 선물을 사는 거야?"강한서는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다 알고 있었다.'나쁜 놈!'"200만 원이 뭐 어때서? 그 200만 원도 내 돈이야. 너한테서 받은 게 아니라고! 게다가 할머니는 너희 같은 사람들이랑 달라. 할머니는 모든 걸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고."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끗
뒤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한서는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유현진, 너 억지 부리지 마. 나한테는 통하지 않으니까." 강한서는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허벅지까지 오는 여자아이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제 꽃을 밟았어요."강한서는 말을 잃었다. 그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왼발 아래에 있는 종이 백합을 바라봤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백합을 주워 들고는 여자아이한테 건네줬다."네 어머니는 어디에 있어?"여자아이가 막 말하려고 할 때, 한 남자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왔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강한서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려갔다.강한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맞은편의 남성복 가게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유현진은 마침 넥타이를 고르고 있었다. 유현진이 넥타이를 고르고 있는 것을 본 강한서는 답답하던 가슴이 순식간에 뻥 뚫린 것 같았다.두 넥타이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유현진은 머리를 돌려 강한서한테 물었다."넌 어느 쪽이 더 예쁜 것 같아?"강한서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는 듯한 눈빛으로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파란색 줄무늬."유현진은 강한서의 목에 넥타이를 대보더니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파란색은 너한테 어울리지만 그 사람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아."이 말을 들은 강한서는 잠깐 멈칫하더니 표정이 싸늘했다."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유현진은 강한서의 감정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 채 넥타이를 고르면서 말했다."주강운 변호사 말이야. 어젯밤 변호사님이 없었더라면 나는 화장실 안에 한참 더 갇혀 있었을 거야. 마침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백화점에 온 김에 넥타이 선물이라도 해야겠어."유현진이 주강운한테 진 빚은 어떻게라도 갚아야 했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약간 어색하니 선물을 주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유현진
"또 다른 선물도 있어?"강한서는 이렇게 물었다.유현진은 베풀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강한서가 먼저 이렇게 물어보자 그녀는 쇼핑백을 열고 조잘조잘 설명하기 시작했다.정원사한테 줄 장갑, 가정부한테 줄 안마기, 조련사한테 줄 새 부츠, 그리고 준이한테 줄 작은 머리핀... 유현진은 신이 나서 하나하나 설명했다. 강한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모든 선물을 설명하고 나서도 상자 하나가 남은 것을 보고 유현진은 슥 꺼내들며 이렇게 말했다."아 맞다. 이건 네 선물이야."강한서는 상자를 힐끗 쳐다봤다. 상자에 새겨져 있는 로고는 유현진이 넥타이를 고르고 있던 그 가게의 로고였다.강한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갑자기 넥타이는 왜 샀어?""넥타이 아니야."유현진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이 가게에서 오늘 2만 원을 보태면 양말 한 켤레는 주는 행사를 하고 있더라고! 너 이 브랜드 양말 좋아하잖아. 평소에는 한 켤레에 5만 원이 넘는데 오늘은 2만 원밖에 안 해서 정장이랑 잘 어울리는 남색으로 하나 골랐지."이 말을 들은 강한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자를 쇼핑백 속으로 던져버렸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유현진은 강한서의 태도가 아주 불만스러웠다. 그는 유현진과 함께 쇼핑을 하며 물건을 들어주기는커녕 선물을 받고서도 정색을 했다.강한서는 유현진을 상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아저씨, 조금 빨리 가죠."유현진은 강한서가 왜 또 화가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 시간 후, 둘은 드디어 한주 강씨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다. 이 저택은 정인월과 그의 남편이 돈을 벌고 나서 땅을 사 직접 지은 집이었다. 저택은 정원의 형식으로 지어졌고 정자도 만들어져 아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주 강씨 가문의 저택은 최근 몇 년 동안 생긴 별장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이었다.정인월이 말을 키우기 시작한 후로는 저택 뒤에 있는 땅도 사서 목마장과 채소밭으로 만들었다. 말도 키우고, 채소도 심는 생활은 아주 여
남자는 시선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강씨 가문의 손자며느리라면 틀림없을 거예요."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유현진을 보고 주강운은 이렇게 설명했다."이쪽은 송민준이라고 해요. 어젯밤 화장실에 있던 그 아가씨가 민준이의 여동생이래요."그뿐만 아니라 송민준의 아버지와 강한서의 아버지는 같은 바지를 입을 정도로 친한 동창 사이였다.몇 년 전, 그들은 막내딸 송가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대부분 회사를 해외로 옮겼다. 송가람의 병세가 호전되고 나자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송민준의 아버지는 다 함께 국내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해외에 처리해야 하는 회사가 아직 남아 있는 관계로 그는 두 남매를 먼저 국내로 보냈다.어젯밤 남매는 원래 함께 파티에 참석할 계획이었지만 송민준은 다른 일이 있는 관계로 조금 늦게 도착을 하게 되었다. 송가람은 그 새로 화장실에서 발작을 하고 만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진 송가람의 상태가 안정된 후, 송민준은 바로 호텔 측에 연락해 '생명의 은인'을 찾아 나섰다.호텔 매니저의 도움 하에 그는 주강운과 연락을 하게 됐고, 또 한주 강씨 가문의 손자며느리가 송가람을 도와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외에 있던 송 대표는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강씨 가문에 직접 방문해서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이번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송민준은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유현진한테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어젯밤 일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동생이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거든요. 만약 현진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 동생은 아주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제가 저희 가족을 대신해 이렇게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송민준은 이렇게 말하며 상자 하나를 꺼내 유현진한테 건네줬다."이건 저희 가족의 작은 성의입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상자 속에 저의 명함도 있으니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만약 유현진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상자는
“넘버 S 오일이 저장되어 있던 곳은 잠겨 있었어요. 잠금장치가 있었으니 기사님은 오일을 건드릴 수 없었어야 해요. 하지만 기사님이 오일을 꺼낼 수 있었다는 건 그 당시엔 잠겨있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기사님은 저장실의 규정에 관해선 전혀 모르고 계세요. 책임자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 업무 중 실수로 오일을 깨뜨린 건 고의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이 일에 관한 책임을 논한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감당해야 해요.”“하지만 주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의 제조에 성공했고 이 일은 사실상 저희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퇴사 처리는 너무 심한 처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린 이 징계를 전례로 따른다면 업무 중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해고 당하는 것이 두려워 일부러 숨겨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상황을 피면할 수 있을 거예요. 처벌이라는 건 실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수단이잖아요.”서해금이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건 기사님을 감싸주려고 그러는 거죠?”한현진이 쿨하게 인정했다. “내 사람은 당연히 내가 감싸야죠. 송 팀장님도 홍혜림 씨에게 실수를 하셨지만 그저 감봉을 조금 당한게 전부였잖아요.”그 말은 송가람뿐만 아니라 서해금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혁이 해고를 당할 땐 당하더라도 한현진은 부하 직원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줄곧 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3개월 감봉, 보너스 삭감. 이 정도면 되겠니?”조금 더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한현진의 예상과는 달리 서해금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서해금을 힐끗 훑어보던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송가람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처벌은 너무 가볍잖아요.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도 고작 이정도 처벌로 넘어간다면 앞으로 다른 직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한현진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회
멈칫하던 한현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연 사람은 다름이 아닌 한현진의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한현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주혁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깡마르고 잔뜩 움츠러든 그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표님, 오일은 제가 깨뜨린 거예요. 오늘 안에서 청소를 하다 그만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이곳엔 값비싼 물건들만 저장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서워... 무서워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말하며 그는 한현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죄송해요.”미간을 찌푸린 한현진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회사엔 청소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고 있는데 왜 기사님이 청소하신 거예요?”주혁이 고개를 숙이고 차마 한현진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제가 신청했어요. 시급으로 15000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이라도 해주려고...”주혁이 청소를 하게 된 이유를 들은 한현진은 화조차도 낼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송가람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이 고르고 고른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어요? 넘버 S 오일을 얼마나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실수로 깨뜨려요? 오일을 깨뜨리고 무서워서 감히 인정을 못 한 게 아니라 어쩌면 애초부터 손버릇이 나쁜 사람인 걸지도 몰라요. 청소를 핑계로 훔치려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깨뜨린 거죠.”당황하던 주혁이 창백해진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의 눈빛엔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매에 감춰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전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 그저 먼지를 닦으려고 오일병을 꺼낸 거였어요. 하지
송민준은 매주 서너 번씩 주승관을 찾아왔다. 말도 많고 멍청한 데다 시끄럽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매번 재미없는 얘기만 늘어놓다 마지막은 꼭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내 동생도 이렇게 컸으면 세은이만큼 귀여웠을 거예요.”그 후 여동생이 아파서 송민준은 두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주승관은 주세은과 함께 송민준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인 송가람을 만났다. 송민준의 말과 달리 주세은은 그의 여동생이 귀엽기는커녕 오히려 멍청하다고 느꼈다. 송민준과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주세은과 주승관을 배웅하며 송민준은 주세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장난스레 말했다. “양심도 없는 꼬맹아. 의사에겐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빠라고 안 불러?”주세은이 대답했다. “멍청하니까요.”그 말에 송민주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마치 못 들을 충격적인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세은은 자신이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거 맞잖아. 6개월 동안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 하나 따지 못하다니. 대체 뭘 배운 거야.’주세은의 말에 자극을 받은 송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면 날 오빠라고 부를 거야?”주세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나보다 똑똑하겠어? 아빠가 가르쳐준 건 이젠 나도 거꾸로 외울 수 있는 수준인데도 아직 기억하지 못하잖아.’송민준이 말했다. “그럼 내가 문제 낼게. 네가 정답을 맞힐 수 있으면 난 네가 나보다 똑똑하다는 걸 인정할게. 하지만 만약 네가 틀리면 앞으론 날 볼 때마다 얌전히 오빠라고 불러.”주세은이 송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송민준이 말했다. “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있을까?”“...”“모르겠어?”빨갛게 얼굴을 붉히던 주세은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는데요?”송민준이 씩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만큼.”“...”자신에게 농락당해 얼굴이
송가람은 약 올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나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 씨는 뭔데 뿌듯해하는 거예요. 현진 씨가 제조한 것도 아니잖아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세은이는 제가 특례로 입사시킨 천재잖아요. 제가 왜 뿌듯하면 안 되는 거예요?”말하며 한현진은 서해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 대표님,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했으니 이젠 억울하게 오일을 깨뜨렸다는 누명을 쓴 일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리고 서하 씨의 보너스 삭감이 정말 규정에 따란 이행된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그걸 빌미로 사적인 화풀이를 하려고 한 건지 회사 감사위원회에 조사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한현진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향이 비슷하긴 하지만 사용 여부에 대해선 테스트를 진행해 봐야 해.”한현진이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일단 오일을 깨뜨린 일부터 조사하시죠.”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해금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경찰이 도착했어요. 누군가 회사의 재물손괴가 있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고 신고를 해 조사하러 왔다고 하네요.”서해금이 휙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경찰에게 맡기는 편이 효율적인 것 같아서요. 값비싼 물건인 만큼 만에 하나 범인을 색출하지 못한다면 저희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잖아요. 제가 소유하고 있는 지분이 제일 많으니 손실을 제일 많이 보는 것도 저예요. 그러니 저도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이해하시죠?”서해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현진은 지금의 서해금은 어쩌면 옆에 놓은 물을 자신의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은 성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해금이 손을 움직이는 순간 성월의 등 뒤로 숨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해금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신고까지 한 거냐며 난리를 피우는 송가람과 달리 서해금은 몸을 일으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아무
[한 대표님이요...]채팅방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었다. [한 대표님, 돈을 이렇게 많이 거셨다가 지면 어쩌시려고요.]한현진이 대답했다. [한 번 걸어보는 거죠. 돈방석에 앉게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리고 채팅방은 곧 [대표님, 쿨하시네요.]라는 문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몇십 명의 사람들이 실패에 베팅했다. 심지어 돈을 더 거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몇 분 후, 딜러가 또 말했다. [송 팀장님께 실패에 2000만 원을 거셨어요.]멈칫한 한현진은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은 마치 한현진이 자신을 쳐다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은 송가람이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말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미소를 짓던 한현진이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으며 물었다. “사기당한 40억은 돌려받았어요?”송가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송가람은 자신을 쳐다보는 서해금의 시선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세은은 매번 제조해 낸 오일의 향에 따라 원료의 비율을 조절했다. 1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10가지가 넘는 샘플을 만들어냈지만 넘버 S 오일에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직 없었다. 서해금은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주세은이 시도한 비율은 서해금의 제조 방안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던 샘플과 비슷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오일의 비율을 조절했다. 그러니 주세은이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리가 없었다. 현장에서 제조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전교 일 등인 척하는 전교 꼴찌를 지켜보는 기분이네요. 대체 제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넘버 S의 성분 분석에 참여했던 사람이 말했다. “세은 씨가 정확한 오일을 고르긴 했어요. 정말 천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우연일 뿐이었네요.”“한 대표님께서 성공에 2000만 원이나 거셨던데 그 돈이
주세은이 제조에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은 벌써 냉소적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손놀림은 꽤 전문가답네요. 현진 씨는 세은이가 제조에 성공하려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늦어서 2시간이요. 세은이가 그랬잖아요. 청력에 문제 있어요?”송가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2시간 안에 성공한다면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회사는 불필요한 사람을 키워줄 이유가 없거든요.”한현진이 냉담한 태도로 받아쳤다. “줄곧 필요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있었잖아요.”멈칫하던 송가람은 그제야 한현진이 말 한 필요 없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송가람이 한현진을 반박하려는데 서해금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보려거든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 사람은 나가.”‘얘는 철이 안 들어! 하필 지금 여기서 한현진과 설전을 벌여야겠어?’송가람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주세은이 창피를 당하기만을 기다렸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주세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제조에 성공해도 걱정, 실패해도 걱정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제조에 성공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낸다면 서해금의 경계 대상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대부분은 주세은이 우스운 꼴을 당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꼬맹이가 넘버 S 오일을 제조해 낼 것이라 믿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을 인정하는 게 나을 텐데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서 제조에 실패하면 얼마나 창피해요.”“오일을 제조하겠다는 건 핑계고 그저 나대고 싶은 것 같아요. 오늘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지금 어린 친구들은 너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니까요.”...그나마 눈치를 보며 말을 내뱉는 현장의 사람들과 다르게 단체 채
물론 서해금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꼬맹이에게 그 오일을 제조할 만한 실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넘버 S 오일은 한아람이 세상을 뜨기 전 제조해 낸 것이었다. 당시엔 오일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해금도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회사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해금은 그 오일을 제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향사들과 수천 가지가 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그녀는 심지어 화학성분 분석까지 의뢰했지만 그 어떤 조합으로도 한아람이 만든 오일을 재현할 수 없었다. 서해금이 재현해 낸 오일 중 넘버 S 오일과 제일 근접했을 때도 딱 2%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 2%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향수의 향기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서해금은 넘버 S 오일을 장기 보관할 방법을 연구해 최대한 오일의 휘발을 감소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노력으로도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한 오일을 주세은이 향만 맡고 제조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다면 당연히 기회를 줘야 했다. 어차피 서해금은 애초부터 주세은의 입사를 반대했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그 눈은 보기만 해도 심기가 불편했다. 이 기회에 회사에서 내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던 서해금이 말했다. “그럼 너에게 하루의 시간을 줄게.”“아뇨.”주세은이 말했다. “만약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최대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에 주세은을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풍을 떠는 인간을 보는 눈빛이 아닌 바보를 보듯 주세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주세운이 두 시간 사이 오일을 제조해 낸다면 그건 회사의 모든 조향사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이었다. 한현진은 스르륵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세은의 손을 꼭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건 어때?”‘만약 제조에 실패해 서해금이 이 기회를 빌려 회사에서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오빠에겐 뭐라고
주세은의 말 한마디에 현장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물론 한현진도 멍해졌다. ‘어린애가 이런 말을 당당하게도 하네.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서해금도 지금까지 한 병밖에 갖고 있지는 않았겠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아끼던데.’만약 오일의 제조는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그저 단순히 마케팅을 위해 서해금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 이상 오일의 제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의 많은 조향사들은 넘버 S 오일을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정말 마케팅에 불과하다면 진작 들켰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경쟁자로 가득한 이 업계에 이런 비밀로 캐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말 제조가 어려운 오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껏해야 배상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세은은 말을 내뱉었고 만약 서해금이 정말 주세은에게 제조를 맡긴 후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한현진은 정말 주세은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지금 MZ는 왜 이렇게 무모한 거야?’지금 주세은에 대한 한현진의 평가는 그나마 무난한 편이었다. 주위에 몰려 구경 중이던 직원들은 한현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얘기를 꺼냈다. “음식 양념장이라도 만드는 건 줄 아나 봐. 그렇게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오일이었으면 깔린느가 지금껏 향수 업계에서 인기를 누릴 수 있었겠어? 진작 라이벌 회사에 뺏겼을 거야.”“서 대표님도 본인이 제조하셨지만 다시 똑같은 오일을 만들지는 못하셨어요. 이제 갓 졸업한 어린 꼬맹이가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예요?”“하룻밤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잖아요.”“만약 세은 씨가 넘버 S 오일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제 손에 지지겠어요.”송가람의 얼굴에 은은한 멸시가 감돌았다. 아마도 주세은이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본인이 직접 불구덩이에 뛰어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한현진은 마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온 학부모 같았다.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사
한현진은 말하며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전 주주의 신분으로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니도 세은이와 마찬가지로 모두 임원인 누군가의 연줄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언니가 이런 방식으로 저와 세은이를 제약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똑같은 방식으로 언니와 서 대표님을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송가람은 논리정연하면서도 은근히 비꼬는 한현진의 말투에 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현진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묵직한 한 방이 되었다. 낄린느의 창시자에 대해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아람이 세상을 뜬 후 입사한 직원이 알고 있는 회사의 대표는 서해금이 전부였다. 깔린느의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도 서해금을 깔린느의 창시자인 듯 추앙하고 있었다. 예전의 파트너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의 간략한 설명이 전부였다. 경력 2, 30년 이상의 고참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깔린느가 모든 위기를 헤치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전부 서해금의 공로로 알고 있었다. 설사 한현진이 회사의 대표로 취임했어도 다들 서해금이 옛정을 생각해 파트너였던 사람의 딸을 챙겨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월이든 송가람이든 한현진의 얘기만 나오면 은연중에 그런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급되지조차 않던 창시자인 한아람은 애초부터 깔린느의 최대 주주였고 심지어 그녀는 90%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깔린느의 창업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밖에 되지 않는 서해금의 투자금이 부족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실 서해금은 그저 적은 투자금을 들여 깔린느와 파트너쉽을 맺고 다른 사람이 심은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는 얘기였다. 자수성가, 커리어우먼, 비즈니스 천재, 조향 천재라는 타이틀은 그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아람 덕에 누린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과 더불어 “주세은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현진이 모든 책임을 진다”던 송가람의 말을 곱씹어 본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은 의미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