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예요.”성유리가 말했다.“알아.”“이우빈 씨 일... 박한빈 씨가 시킨 거예요?”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묻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응.”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조금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맞다는 대답을 내뱉었다.“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세요. 이우빈 씨 쪽도 박한빈 씨가 손 볼 필요 없어요.”“왜? 이우빈이라는 사람을 동정하는 거야?”박한빈은 성유리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계속 물었다.“일이 생기면 여자를 앞에 내세우는 남자를 동정할 가치가 있나?”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때 상황에서 만약 이우빈 씨가 나서서 저를 보호했다면 일은 더 복잡해졌을 거예요.”“게다가 저랑 그저 동료 사이 일뿐인 이우빈 씨가 굳이 나서서 저를 도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수수방관했던 사람이 어디 이우빈 씨 한 명인가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래도 뭐가 됐든 해주신 모든 일들은 감사하게 생각할게요. 하지만 다른 일은 이제 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제 드라마고 제 작품이니 계획대로 방영한다면 저야 너무 좋죠. 그러니까 박 대표님께서도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이제 그만 하세요. 저희가 다시 솟아날 구멍을 남겨두세요. 네?”“성유리, 꼭 이런 식으로 말해야겠어?”“그럼 제가 어떻게 할까요? 다시 무릎이라도 꿇을까요?”성유리는 자신의 말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 의아했다.‘곧 다른 말로 반박하겠지.’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는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다 이내 박한빈이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그래서 성유리는 전화를 내려놓고는 하던 일에 몰두했다.하지만 그 순간,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하늘이가 먼저 소리를 듣고 입구로 쪼르르 달려 나갔고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아이는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 사람은 허리를 굽혀 하늘이의 코를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별 얘기 아니야.”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안 했어.”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저예요.”성유리가 말했다.“알아.”“이우빈 씨 일... 박한빈 씨가 시킨 거예요?”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묻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임을 확신하고 있었다.“응.”박한빈은 그녀의 물음에 조금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맞다는 대답을 내뱉었다.“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여기까지만 하세요. 이우빈 씨 쪽도 박한빈 씨가 손 볼 필요 없어요.”“왜? 이우빈이라는 사람을 동정하는 거야?”박한빈은 성유리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계속 물었다.“일이 생기면 여자를 앞에 내세우는 남자를 동정할 가치가 있나?”성유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때 상황에서 만약 이우빈 씨가 나서서 저를 보호했다면 일은 더 복잡해졌을 거예요.”“게다가 저랑 그저 동료 사이 일뿐인 이우빈 씨가 굳이 나서서 저를 도울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수수방관했던 사람이 어디 이우빈 씨 한 명인가요?”성유리의 대답에 박한빈이 입을 꾹 다물었다.“그래도 뭐가 됐든 해주신 모든 일들은 감사하게 생각할게요. 하지만 다른 일은 이제 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제 드라마고 제 작품이니 계획대로 방영한다면 저야 너무 좋죠. 그러니까 박 대표님께서도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시고 이제 그만 하세요. 저희가 다시 솟아날 구멍을 남겨두세요. 네?”“성유리, 꼭 이런 식으로 말해야겠어?”“그럼 제가 어떻게 할까요? 다시 무릎이라도 꿇을까요?”성유리는 자신의 말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 의아했다.‘곧 다른 말로 반박하겠지.’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바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는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다 이내 박한빈이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그래서 성유리는 전화를 내려놓고는 하던 일에 몰두했다.하지만 그 순간,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하늘이가 먼저 소리를 듣고 입구로 쪼르르 달려 나갔고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아이는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그 사람은 허리를 굽혀 하늘이의 코를
경운시에 있는 집은 이미 장시간 방치돼 있는 상태였다.성유리가 집에 돌아간 뒤, 며칠 동안 열심히 청소를 했고 그제야 집은 그나마 깨끗하게 치워졌다.집을 청소하는 와중에 하늘이는 마치 바삐 움직이는 한 마리의 꿀벌처럼 성유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도왔다.성유리가 이제 드디어 안정적인 삶을 다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터넷에 갑자기 사과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그 영상은 몇 달 전 성유리와 이우빈의 사이에 대해 해명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영상 속 상대는 사실 그때 자신은 한 번도 직접 성유리가 이우빈에게 대시하거나 일부러 말을 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사실대로 토로했다.그와 동시에 이우빈이 성유리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질투가 나 나쁜 마음을 품고 거짓 소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사람들은 이 일을 거의 다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연예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은 다시 뜨겁게 달궈졌다.게다가 이우빈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자신과 성유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문장을 올리는 동시에 몇 달 전 왜 직접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덧붙였다.회사에서 이우빈에게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해 아무 해명도 하지 못한 사실에 지금 성유리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말,이우빈이 올린 마지막 문장에는 자신을 몰래 찍는 사생팬들을 나무라는 말이었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이내 성유리는 이우빈 회사 측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죄송해요. 성 선생님. 이번 일은 저희 책임도 있어요. 저희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도 큰 죄죠.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그 팬이라는 사람 저희가 알아서 처리했고 인터넷에 사과 영상도 올리라고 했어요. 경찰도 그 여자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겠다고 약속했고요.”“지금까지 저희가 후기 작업을 거의 다 마쳤어요.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정상적으로 방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유리 선생님 이름은 꼭 제일 위에 잘 보이는 위치에 적을게요.
마치 자신을 왕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이런 상황이 죽도록 싫었다.한참을 망설이던 성유리는 박한빈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캐리어를 손에 넣으려 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다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손에 들려 있던 캐리어를 꽉 쥐었다.성유리 또한 박한빈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에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거 놓으세요.”힘을 세게 쓰고 있는 바람에 박한빈의 팔에는 핏줄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연정우와 자신 사이에서 연정우를 선택한 성유리의 결정이 박한빈은 믿기지 않아 성유리를 쳐다봤다.옆에 있던 김서영은 박한빈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유리야, 그래도...”“박한빈 씨, 이 손 놓으라고요.”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을 올려다보며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쳐다보다 문득 어젯밤 안희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녀는 성유리의 심장이 더는 박한빈을 위해 뛰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처음에 박한빈은 안희연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안희연이 했던 말이 다 사실 같았다.캐리어를 꽉 쥐고 있던 박한빈은 서서히 손에 힘을 풀었고 성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캐리어를 휙 낚아챘다.이런 상황을 지켜만 보던 연정우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성유리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가자. 엄마랑 같이 지하철 타고 갈까?”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잔뜩 신나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좋아!”성유리는 아이의 순수한 웃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돌려 김서영과 마지막 인사를 한 뒤, 하늘이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그러나 뒤에 있던 연정우가 서둘러 두 사람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지하철 타고 갈 거야?”“응. 지하철 타고 가면 공항이랑 연결된 길이 있어서 사실 내가 더 편해.”“여기서부터 지하철역까지 가려면 거리가 좀 있을 텐데? 내가 데려다.
연정우가 하늘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성유리는 결국 받아들였다.그러나 반짝이는 보석이 붙어있는 머리 집게가 하늘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몇 번 보고 나서는 서랍 안에 넣어버렸다.“이건 안 가지고 갈 거야?”성유리가 묻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로 마음에 안 들면 엄마가 이 선물 연정우 아저씨한테 돌려줄까?”“응,”너무도 빠르게 대답하는 하늘이의 모습에 성유리는 의아해졌다.“아저씨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아저씨가 준 선물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연정우 아저씨 좋아. 그냥 나한테 준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야.”성유리가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하늘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어갔다.“난 인형이 더 좋아. 엄마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말해서 나한테 인형 하나 사달라고 해. 나는 토끼 인형 갖고 싶어.”피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면서 직접 낳은 아이의 감정을 성유리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연기하며 자세한 원인은 묻지 않았고 하늘이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원래는 약속한 대로 연정우가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줄 알았지만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도 와 있었다.게다가 박한빈의 신분은 연정우와는 다르지 않는가?아이와 피가 섞인 가족이자 아버지인 박한빈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오더니 성유리와 하늘이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성유리는 생각지 못한 그의 등장에 멍해 있다 정신을 다잡고는 박한빈을 막으려했다.그리고 그 순간, 연정우의 차 또한 두 사람이 머물던 집 밑에 세워졌다.박한빈을 발견한 연정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캐리어를 꼭 잡더니 물었다.“하늘이는요? 아직 안 내려왔습니까?”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연정우의 행동에 박한빈은 자신이 마치 짐을 날라주는 짐꾼이 된 기분이 들었다.아직 아이의 캐리어를 손에 넣지 못한 연정우가 다시 손을 뻗자 박한빈은
안희연은 아주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며 두 눈으로는 사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자신의 아이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안희연의 발언에 사하나는 화가 나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니까 박한빈 씨도 이런 식으로 달랬다는 거지?’사하나는 딱 봐도 거짓말인 안희연의 설명을 박한빈이 믿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만약 박한빈이 안희연을 믿어준 게 사실이라면 사하나는 박한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미친놈이 아니라 바보였나?’성유리는 사하나의 손을 재빨리 잡으며 안희연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그 순간, 안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성유리 씨, 저 할 말 있어요.”“뭐라고요?”사하나가 먼저 고개를 돌려 안희연을 당장이라도 때릴 듯 째려보며 말했다.“지금 본인이 뭐라도 됐다고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은 저희랑 대화를 나눌 자격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사하나 씨, 저는 성유리 씨랑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그쪽이 아니라.”“저...”사하나는 치가 떨려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희연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지만 성유리가 급히 말렸다.그리고는 안희연을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하실 말씀이 뭐죠?” “아, 네. 곧 경운시로 돌아가신다고요?” “네.” “정말 잘됐네요.” 안희연은 더욱 밝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박한빈 씨를 옆에서 잘 챙길 테니까.““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성유리는 아주 차 분한 어조로 대답했다.“두 분이서 만나시든 말든, 누가 누구를 챙기든 저랑은 이제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제가 경운시로 돌아가려는 이유 또한 당신들이랑 상관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안희연은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성유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하나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하나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는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맞아요! 제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라고요. 언니 정말 멋졌어요! 오늘에서야 저는 비로소 알 것
“이제 그만 마셔요. 너무 속상하니까!”성유리가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 사하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한 손으로 목을 꽉 잡은 채로 애써 안희연의 목소리를 따라 하고 있었다.원래부터 안희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하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밥을 같이 먹다 보니 더더욱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극도로 싫어졌다.성유리는 사하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먼저 물었다.“안희연 씨가 너한테 무슨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싫어해?”“왜 싫어하냐고요?”그녀의 말에 사하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저 연기하는 꼴 좀 보세요! 게다가 방금도 언니를 막 조롱하려고 했잖아요. 언니는 그저 박한빈 씨 과거 애인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밝히고 비웃은 거잖아요!”“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해요. 과거 일로 말하자면 저도 말할 게 많다고요. 전에도 막 다른 남자랑 쇼핑하고 호텔도 갔잖아요. 박한빈 씨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여자를 도대체 왜 좋아하는 거죠?”“언니, 내 생각엔 박한빈 씨가 일부로 저러는 것 같아요. 언니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저러는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면 전 이해가 안 돼요. 좀 잇다 돌아가서 그 여자 얼굴 볼 생각만 하면 토 나온다니까요! 근데 언니는 왜 자꾸 저를 쿡쿡 찌르세요?”말문이 한번 트이기 시작한 사하나는 멈출래야 멈출 수가 없었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성유리는 몇 번이나 끼어들려고 했지만 기회를 다 놓쳐버렸고 어쩔 수 없이 사하나의 손을 잡거나 쿡쿡 찔러야 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을 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하나는 순식간에 등골이 싸해졌다.뒤를 천천히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안희연이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전에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거나 욕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이
사하나는 그런 안희연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안희연 씨 맞으시죠? 전에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모습 본 적 있는 것 같아요.”“아, 그래요?”안희연은 그제야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이어갔다.“사하나 씨 제 팬이신가 봐요?”‘팬? 누가? 별꼴이야. 정말!’사하나는 속으로 안희연을 몇 번이나 욕했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그러다 감정을 추스르고는 입을 열었다.“팬은 아니고 그냥 몇 번 본 것뿐이에요. 근데 제가 알기론 남자 친구 있으시지 않았나요? 안희연 씨랑 친구라고 한 것 같은데.”“맞아요. 그렇지만 저희는 이미 헤어졌어요.”안희연은 사하나의 말을 깔끔하게 인정하며 계속 말했다.“이 시대에 연애 좀 하는 것도 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과거는 있는 법이죠. 안 그래요?”안희연은 성유리를 쓱 쳐다보며 이런 말을 했는데 마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의 과거일 뿐이라는 말을 전하려는 의도 같았다.그 모습에 겨우 화를 억누르던 사하나가 폭발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표정 관리를 못하던 사하나를 본 연정우는 먼저 술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이제 보니 박 대표님이랑 이렇게 같이 식사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기회를 빌어 제가 한 잔 따라드릴까요?”박한빈은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좋습니다.”두 사람은 그렇게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마셨다.한잔, 두잔, 세잔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음주에 놀란 사하나가 낮은 소리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혹시 누가 먼저 취하는지 붙어보려는 건가? 연 대표님 주량이 어떻게 돼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뚫어져라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지금 두 사람이 이러는 게 너무 싫었다.
“내일 몇 시 비행기예요? 전 내일 바빠서 아마 공항까지는 못 데려다줄 것 같아요.”사하나는 말을 하면서도 연정우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티 나게 연정우에게 무언의 암시를 주고 있었다.연정우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사하나의 말에 대답했다.“그래요? 유리야,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몇 시 비행기야?”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그래도 내가 데려다줄게. 다음엔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연정우는 성유리를 조금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고 옆에 있던 사하나도 맞장구를 쳐줬다.“연 대표님 말이 맞아요. 성유리 씨? 이번엔 결정을 너무 빨리 내리신 것 같아요. 저희한테 반응할 틈도 안 주시고.”성유리는 두 사람의 말에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그때,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하늘이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아저씨가 주는 선물이야.”하늘이는 핑크색으로 정교히 포장돼 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는 성유리의 눈치를 쓱 살폈다.성유리는 단번에 상자 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로고를 발견했는데 어린아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귀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이 선물을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와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사하나가 먼저 뒤돌아 소리가 나는 쪽을 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를 뱉을 뻔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한빈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던 안희연이었다.꽤 잘나가는 인플루언서인 안희연은 멀리서 봐도 자태가 아름다웠지만 금성에서는 내놓을 정도의 미모가 아니었다.그래서 사하나는 박한빈이 안희연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연히 그녀를 내팽개칠 줄 알았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안희연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박한빈이었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꽉 끼고 있었는데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차 안에는 적막만이 흘렀고 침묵하던 하늘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엄마, 나는 하나 이모랑 더 놀고 싶어.”“응.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약속했어.”“연정우 아저씨도 와?”하늘이가 물었다.아이의 말에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박한빈을 슬쩍 쳐다보았다.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행여나 박한빈이 갑자기 화를 낼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아이는 잔뜩 신나 하며 말했다.“와! 너무 좋아. 난 연정우 아저씨랑 같이 노는 게 제일 행복해.”“왜?”“왜냐하면 정우 아저씨는 잘생겼거든. 그리고 아저씨는 엄마를 잘 보호해 줄 것 같아.”하늘이의 말에 운전만 하던 박한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 섞인 눈빛으로 성유리를 쳐다보았다.성유리는 그의 눈빛을 애써 못 본 체했고 시선을 하늘이에게만 고정했다....성유리는 그날 저녁, 연정우와 밥 약속이 있었다. 필경 전에 갑자기 연정우와의 약속을 취소해 버린 죄가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곧 금성을 떠날 성유리기에 오늘 밤이 아니라면 아마 만날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는 하늘이까지 데리고 그와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세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저번에 놀이공원을 가려고 한 날에도 성유리는 사실 사하나와 함께 가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사하나는 성유리가 자신과의 약속을 깨고 박한빈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기도 했다.그녀는 한결같이 성유리가 얼른 박한빈과 하늘이 사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빨리 불필요한 관계를 끊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생물학적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성유리가 누누이 말한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는 말 또한 사하나는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사하나는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