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 씨!”누군가 격양된 목소리로 성유리를 부르던 그때, 그녀는 이제 막 하늘이와 모래사장에 도착한 상황이었다.남자는 반바지 하나만 몸에 걸치고 있는 채로 선글라스만 끼고 있었는데 탄탄한 몸매와 특이한 그의 피부색은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시선들이 이미 익숙해졌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성유리에게 다가와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죠? 저희가 여기서 다 만나네요. 아, 참! 성유리 씨 남자 친구는 어디 계십니까?”성유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다 낮은 소리로 입을 뗐다.“에릭 씨, 오랜만이네요.”“확실히 오래 못 보긴 한 것 같습니다.”남자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성유리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기 시작했다.살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성유리의 모습이 불만스러운지 에릭은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방금 가지고 들어가시던 그 수영복은 왜 안 입으셨습니까? 아니면 혹시 남자 친구분이랑 둘만 있을 때 입는 코스프레 복 같은 건가요?”에릭의 말은 충분히 선을 넘는 성희롱적인 발언이었지만 성유리는 그가 자신을 일부로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다른 말로 해석하면 에릭은 근본 성유리를 눈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까도 봤다시피 에릭의 주변엔 늘 몸매가 일품인 여성들이 서 있었다.박한빈은 전에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에릭 걔는 여자 친구를 밥 먹듯이 바꿔. 아마 책 넘기는 속도보다 여자 친구 바꾸는 속도가 더 빠를걸.]전에 성유리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유도 아마 성유리가 박한빈의 아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에릭은 도대체 성유리한테 무슨 매력이 있기에 박한빈이 죽고 못 사는지 궁금했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의 아내나 여자 친구가 아니니 에릭 또한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을 것이다.에릭이 방금 한 희롱적인 발언은 그저 성유리를 조롱하고 비웃으려는 의도였다.“에릭 씨가 왜 이곳에 계세요?”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화
“우린 뭐 먹어도 상관없어.”성유리는 하늘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대답을 이어갔다.“너 바쁘면 먼저 일 봐도 돼. 우린 우리가 알아서 먹을게.”“명색이 휴간데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일만 하겠어?”연정우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그때, 에릭이 갑자기 그들에게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성유리 씨?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연정우는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봤지만 에릭은 연정우에게 시선 한번 주지도 않았다.그러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성유리에게 건네주며 계속 물었다.“이곳 핸드폰 앱들을 전 도저히 쓸 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지금 제가 있는 위치를 다른 사람한테 공유할 수 있죠?”성유리가 에릭이 내민 핸드폰 화면을 슬쩍 쳐다보자 화면엔 그와 박한빈의 대화창이 떠 있었다.두 사람은 막 통화를 끝낸 상태였고 에릭은 지금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에릭이 늘 해외에 머물고 있어 국내 앱들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그의 명석한 두뇌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굳이 성유리에게 찾아와 위치 공유를 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는 원인은 아마 단순히 그녀를 조롱하고 싶어서일 것이다.“같이 오신 여성분이랑 물어보셔도 되잖아요.”성유리가 말했다.“지금 제 옆에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냥 위치 좀 공유하게 해달라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줍니까? 저희 친구 사이 아니었나요?”에릭은 마치 상처를 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성유리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이때, 성유리는 연정우가 몸을 일으켜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이러면 돼요.”망설일 틈도 없이 성유리는 에릭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아 얼른 그들이 있는 위치를 공유해줬다.“오, 고마워요.”에릭은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이더니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성유리 씨 딸입니까? 정말 귀엽게 생겼네요.”조금 망설이던 에릭은 손을 뻗어
“방금 저 사람. 박한빈 씨 친구야?”에릭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자 연정우는 그제야 뒤돌아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때까지도 하늘이와 함께 모래성을 만들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연정우는 다시 물었다.“그러니까 방금 말한 로얀이라는 사람도 박한빈 씨겠네?”“아마도.”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연정우는 침묵했다.조용해진 연정우의 모습을 본 성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저 사람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창백해진 안색으로 말하는 성유리를 발견한 연정우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난 널 믿어.”성유리는 그의 웃음이 어딘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계속 모래를 만지작거렸다.“그럼 우리 저녁에 해산물 먹으러 갈까? 이 부근에 되게 괜찮은 식당이 있거든.”“그래.”성유리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연정우의 말에 동의했다.아마 오후에 갑자기 나타나 훼방을 놓은 에릭 때문에 지쳐서일까, 저녁에 밥을 먹는 순간까지도 성유리는 박한빈이 갑자기 나타날까 봐 자꾸만 신경 쓰였다.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박한빈은 식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자꾸만 입구를 보는 성유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연정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뭐 찾아?”“아니야. 아무것도.”성유리가 재빨리 부인하자 연정우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미소 지으며 껍질을 잘 발라놓은 새우를 그녀 접시에 놓더니 말했다.“먹어.”세 사람의 식사는 아주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고 식사가 끝나자 연정우는 두 사람을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방금 봤어? 밖에 야경 되게 예뻐.”하늘이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고 성유리와 둘만 남자 연정우가 갑자기 물었다.입구에 서 있던 성유리는 아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연정우의 목소리를 듣고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좀 잇다가 하늘이 잠들면 나와서 나랑 산책할래?”계속되는 연정우의 질문에 성유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그녀도 연정
연정우는 굳이 그녀의 남자 친구나 남편이라는 신분이 아니어도 그저 성유리 옆에 머물고 있어도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그래서 지금, 성유리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순간에도 연정우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난 사실 너희 두 사람이랑 같이 있기만 해도 기분 좋아. 정말 진심으로.”성유리는 연정우의 대답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너도 네 스스로를 강요할 필요는 없고.”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우리 천천히 하자. 그냥 그저 그런 보통 친구 사이처럼 지내도 난 괜찮으니까.”성유리는 연정우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그는 손을 쭉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갈게.”“그래. 일찍 자고 푹 쉬어.”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우와 대화를 마치고는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문이 닫히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연정우는 순간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 발걸음을 뚝 멈추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아니나 다를까, 길게 늘어진 복도의 어느 한쪽 방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남자 한 명이 문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연정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담배를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서 있었던 것 같았지만 연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성유리가 머무는 방 옆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그리고 안으로 들어서기 전, 남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기까지 했다.“여기서 총기 사용은 불법인가?”에릭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근데 나도 이번엔 총 안 챙겨왔는데? 챙겨왔으면 진즉에 내가 너 대신 두 발의 총알을 사용했을 거야.”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에릭을 쓱 쳐다보고는 말없이 담배만 계속 피웠다.“내가 너 대신 찾아봤는데 저 남자 안 되겠던데?”에릭은 박한빈의 반응이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깐족거리며 말했다.“책임감이라는 게 없고 속임수를 쓰기 좋아하고 심지어 정정당당한 싸움을 하지도 않잖아. 근데...”에릭이 잠깐 멈
성유리는 그제야 여성의 신분이 떠올랐는지 살짝 경계하며 되물었다.“무슨 일이시죠?”“그... 그냥 저 따라오세요.”여자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붉어져 있었는데 어딘가 숨기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보였다.“제가 사다 드려야 할 물건이 있나요? 아니면 직원이라도 불러드릴까요?”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지금 여자가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성유리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저 따라오시면 안 될까요? 성유리 씨 도움이 꼭 필요해요.”그 여성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는데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그러나 두 눈이 빨개진 채 울먹이며 자신의 도움을 구걸하는 여성의 얼굴을 보자 성유리는 마음이 약해져 결국 여성을 따라나섰다.‘그래.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러겠지.’성유리는 속으로 그 여성이 절대 나쁜 의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지금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거죠?”여성의 손에 이끌려 호텔로 돌아가게 된 성유리는 그제야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올라가서 직접 확인하세요.”여성은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진짜 제발요. 성유리 씨가 올라가지 않으면 에릭 씨가 많이 화낼 거예요.”성유리는 여성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에릭 씨가 화를 내든 말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올라가서 보면 알게 될 거예요.”성유리를 보며 말하는 여성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결심한 듯 대답했다.“이 손 놔주세요.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그녀의 말에 여성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살짝 미소 짓더니 손을 서서히 풀어주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올랐다. 처음에 성유리는 에릭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이런 일은 자신감 넘치고 도도한 에릭이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럼 지금...”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뒤돌아 방을 나가며 빠르게 방문을 잠가버렸다.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릭이 이미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 상태였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 이 문 여세요.”성유리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문고리를 힘껏 당기며 에릭을 향해 소리쳤다.“해열제는 이미 안에 넣어뒀습니다.”에릭은 문밖에서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의사가 해열제만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른 일은... 성유리 씨가 알아서 하십시오.”그의 말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당장 문 열어줘요!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 박한빈 씨가 아픈 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세요?”힘껏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성유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더 이상 힘으로 문을 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성유리는 방 안에 있는 호텔 전화기로 카운터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에릭이 이미 전화기 선을 끊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전화기는 먹통이었고 게다가 성유리 개인 핸드폰도 사라졌다.‘도대체 내 핸드폰은 언제 가져간 거야?’성유리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박한빈의 핸드폰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성유리의 핸드폰까지 몰래 빼간 에릭이 박한빈의 핸드폰을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너무도 화가 나 주저앉은 성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두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었다.한참 뒤, 성유리는 결심한 듯 침대맡으로 다가가 박한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박한빈 씨.”그는 끓는 열 때문에 추워졌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성유리는 그날 처음으로 박한빈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전혀 마음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잠에 빠져있는 박한빈을 있는 힘껏 밀며 소리 질렀다.“당장 일어나요
성유리는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약과 물을 계속 건네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빨리 약 드시라고요.”그녀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어있었고 말투 또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런 성유리를 바라보다 주인 말을 잘 듣는 순한 강아지처럼 약을 건네받고는 입안에 넣었다.금방 물을 컵에 따른 성유리조차 그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지만 박한빈은 내색하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누워요. 다시 주무세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넌 갈 거야?”그녀는 지금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상태인지 아니면 해롱해롱한 상태인지 구분이 안 갔지만 그의 물음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막 터져 나왔다.“당신의 좋은 친구분이 저를 방안에 가둬버렸어요. 게다가 제 핸드폰이랑 박한빈 씨 핸드폰까지 다 가져갔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떠나죠?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되나?”박한빈은 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듯 말하고 있는 성유리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그녀의 말을 애써 이해하려는 어린아이처럼.한참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그러자 안심이 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해열제의 효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박한빈의 열이 다 내려갔지만 성유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왜냐하면 아직 워터파크에 하늘이와 연정우가 있으니 말이다.‘나를 못 찾으면 불안해할 텐데. 많이 걱정하고 있으려나?’그리고 에릭이 한 말들과 행동을 돌이켜보면 성유리가 박한빈을 챙겨주기만 하면 풀려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성유리도 없이 에릭이 연정우와 마주친다면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겠는가?하지만 사실 성유리는 지금 에릭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에릭은 연정우라는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성유리 씨 찾으십니까? 죄송한데 지금 유리 씨는 전화 받을 시간이 없어서요.”“누구시
...박한빈은 자기가 몇 시간을 잤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머리는 계속 휭 한 상태였고 올려다본 천장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떨 때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주위의 공기마저 차게 느껴졌지만 또 어떨 땐 사막을 걷는 듯 너무 더웠다.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박한빈은 어렴풋이 성유리를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성유리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그 손을 피해버렸고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마에 붙이고 있는 해열패치는 이미 그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변해갔다.온몸은 금방 씻은 듯 푹 젖었는데 정말 사막이라도 걷다 온 사람 같아 보였다.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던 박한빈은 방 안에 있는 작은 소파에 누군가 샤워가운을 덮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창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방을 비추자 박한빈은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기다린 속눈썹과 하얀 피부, 그리고 늘 그렇듯 도톰하고 예쁜 입술.박한빈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오늘이... 보름 아닌가?’망설이던 박한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박한빈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금방 깨어난 성유리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먼저 입을 열었다.“깨셨어요?”박한빈이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유리가 지금 살짝 기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 착각이 오래가기도 전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빨리 에릭 씨한테 연락하셔서 저 좀 풀어달라고 하세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멍해졌다. 마
오히려 사하나는 연정우의 일로 성유리에게 사과를 했다.“제가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솔직히 저도 연정우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사하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변명해보았지만 성유리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성유리의 눈빛에 사하나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제 탓하는 건 아니죠?”“내가 네 탓을 왜 해?”성유리가 웃기다는 듯 말했다.“이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그래도... 그때 제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난 어른이잖아. 이런 기본적인 판단능력도 없으면 나중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다른 사람 탓이나 하게?”성유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게다가 나도 그때는 연정우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뒤늦게 둘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고.”“안 맞는 게 아니라, 연정우가 언니한테 안 어울리는 거죠!”사하나가 곧장 대답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박한빈 버린 여자가 연정우한테 차였다고 소문 돌고 있던데요.”“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박한빈한테 사업으로 밀리니까 그딴 식으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왜 언니까지 끌어들인대요? 언니가 뭘 잘못했다고!”사하나는 말할수록 점점 화가 치미는지 언성을 높였다.성유리는 그런 사하나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물이나 좀 마시고 진정하지 그래?”사하나는 태연한 성유리의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성유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사하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사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선에 어딘가 머쓱해진 성유리가 물었다.“왜 그래?”“언니는 화도 안 나요?”사하나가 물었다.“왜 화가 나야 하는데?”“그러니까... 연정우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화가 나야 하잖아요.”사하나의 앞에
문이 열리는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몸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몸으로 문을 막았다.“대체 여긴 왜 찾아온 거예요?”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캄캄한 밤이었다.같은 층에는 성유리네 말고도 세 가구가 더 거주 중이었다. 이웃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던 탓에 성유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며 난동을 부리던 박한빈은 정말 문이 열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그윽한 눈으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잠시 박한빈과 눈을 맞추고 있던 성유리는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요.”말을 끝낸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박한빈의 손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이렇게까지 날 피하고 싶은 거야?”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옆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도망치듯 이사를 가버리는 건데?”“성유리, 너 정말 매정하다. 어떻게 나한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안 주는 건데?”한참이나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유리가 대답했다.“대표님, 제발 대표님의 인생을 사세요.”“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게다가 대표님 같은 조건과 위치라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굳이 저한테 이렇게 집착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여자들이 줄을 선다고...”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넌 정말 그 여자들이 날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애초에 접근할 기회도 안 주면서, 진심일지 아닐지 어떻게 확신하는데요?”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더군다나, 지금 저랑 그 여자들이 다를 게 뭔데요?”“박한빈 씨,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 여자들은 돈 때문에라도 한빈 씨를 사랑하겠지만 저는 이제 그럴 수도 없어요.”“한빈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가장 치명적인 투자가 어떤 건지도 잘
“감사합니다.”성유리는 결재서류를 받아들고 사인하며 말했다.“우리 남편 들어오면 담배라도 한 갑 사 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쉬운 대로 몇만 원 더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는 길에 뭐라도 사드세요.”“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직원들은 극구 사양하는 척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성유리가 건네주는 현금을 받았다.성유리는 직원들이 떠나자마자 곧장 상자 속에 있던 신발을 현관에 놓고는 남자 옷까지 몇 벌 더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었다.“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성하늘이 물었다.“맞아.”“그럼 우리가 원래 살던 집은 어떻게 됐어?”“방 뺐어.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그럼... 난 이제 승민이 오빠 못 만나는 거야?”“아니야, 여기서 얼마 멀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하늘이가 유치원 들어가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그제야 성하늘은 안심한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저녁도 차리지 못했다.그래도 성하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성유리가 저녁을 직접 차리지 못한다면 배달 음식으로 먹게 되는 것은 밖에서 파는 정크푸드였기 때문이다.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서인지 성하늘은 밤이 되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감았다.아이가 잠든 줄 알았던 성유리는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줄만 알았던 성하늘이 눈을 떴다.“그럼 난 이제 그 사람도 못 보는 거야?”“그 사람이 누군데?”성유리가 무심코 물었다.하지만 성하늘은 그녀의 질문에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침대 곁에 서 있던 성유리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이가 얘기한 ‘그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성유리는 아이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눈을 질끈 감은 성하늘은 정말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결국, 그녀는 잠든 아이를 두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얼마 전에 받았던 커미션의
박한빈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평소 성유리와 아이의 외출 시간은 오전과 초저녁으로 나뉘었다.보통 오전 11시쯤이면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잠깐의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박한빈은 앞집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그는 그 소리가 곧바로 문을 열었다.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낯선 남자 무리였다.박한빈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남자들이 깜짝 놀라 박한빈을 돌아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쪽은 누구신데요?”“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박한빈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전선 고치러 오신 거예요? 무슨 전선 하나 고치는 데 이렇게 많이 몰려와요?”“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저희는 이 집으로 이사 온 건데요.”남자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그 말에 박한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사요?”“네, 이사 왔어요.”남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다시 문 앞에 적힌 번호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5동 904호, 맞는데요.”그 말과 함께 남자는 이미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그저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가장 행복해야 할 놀이공원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도 된 듯, 믿기 힘든 감정과 함께 몰려온 혼란스러운 감정이 쓰나미처럼 박한빈을 덮쳐왔다.박한빈은 천천히 집안으로 돌아왔다.모니터에는 여전히 알아보기도 힘든 다양한 데이터 수치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평소 작은 움직임 하나로 박한빈을 흥분시키던 데이터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날뛰어도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성유리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