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우는 굳이 그녀의 남자 친구나 남편이라는 신분이 아니어도 그저 성유리 옆에 머물고 있어도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그래서 지금, 성유리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순간에도 연정우는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난 사실 너희 두 사람이랑 같이 있기만 해도 기분 좋아. 정말 진심으로.”성유리는 연정우의 대답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너도 네 스스로를 강요할 필요는 없고.”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우리 천천히 하자. 그냥 그저 그런 보통 친구 사이처럼 지내도 난 괜찮으니까.”성유리는 연정우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그는 손을 쭉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갈게.”“그래. 일찍 자고 푹 쉬어.”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우와 대화를 마치고는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문이 닫히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연정우는 순간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아 발걸음을 뚝 멈추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아니나 다를까, 길게 늘어진 복도의 어느 한쪽 방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남자 한 명이 문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연정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담배를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서 있었던 것 같았지만 연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성유리가 머무는 방 옆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그리고 안으로 들어서기 전, 남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기까지 했다.“여기서 총기 사용은 불법인가?”에릭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근데 나도 이번엔 총 안 챙겨왔는데? 챙겨왔으면 진즉에 내가 너 대신 두 발의 총알을 사용했을 거야.”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에릭을 쓱 쳐다보고는 말없이 담배만 계속 피웠다.“내가 너 대신 찾아봤는데 저 남자 안 되겠던데?”에릭은 박한빈의 반응이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깐족거리며 말했다.“책임감이라는 게 없고 속임수를 쓰기 좋아하고 심지어 정정당당한 싸움을 하지도 않잖아. 근데...”에릭이 잠깐 멈
성유리는 그제야 여성의 신분이 떠올랐는지 살짝 경계하며 되물었다.“무슨 일이시죠?”“그... 그냥 저 따라오세요.”여자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붉어져 있었는데 어딘가 숨기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보였다.“제가 사다 드려야 할 물건이 있나요? 아니면 직원이라도 불러드릴까요?”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지금 여자가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성유리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저 따라오시면 안 될까요? 성유리 씨 도움이 꼭 필요해요.”그 여성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는데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그러나 두 눈이 빨개진 채 울먹이며 자신의 도움을 구걸하는 여성의 얼굴을 보자 성유리는 마음이 약해져 결국 여성을 따라나섰다.‘그래.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러겠지.’성유리는 속으로 그 여성이 절대 나쁜 의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지금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거죠?”여성의 손에 이끌려 호텔로 돌아가게 된 성유리는 그제야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올라가서 직접 확인하세요.”여성은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진짜 제발요. 성유리 씨가 올라가지 않으면 에릭 씨가 많이 화낼 거예요.”성유리는 여성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에릭 씨가 화를 내든 말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올라가서 보면 알게 될 거예요.”성유리를 보며 말하는 여성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결심한 듯 대답했다.“이 손 놔주세요.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그녀의 말에 여성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살짝 미소 짓더니 손을 서서히 풀어주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올랐다. 처음에 성유리는 에릭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이런 일은 자신감 넘치고 도도한 에릭이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럼 지금...”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뒤돌아 방을 나가며 빠르게 방문을 잠가버렸다.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릭이 이미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 상태였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 이 문 여세요.”성유리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문고리를 힘껏 당기며 에릭을 향해 소리쳤다.“해열제는 이미 안에 넣어뒀습니다.”에릭은 문밖에서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의사가 해열제만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른 일은... 성유리 씨가 알아서 하십시오.”그의 말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당장 문 열어줘요!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 박한빈 씨가 아픈 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세요?”힘껏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성유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더 이상 힘으로 문을 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성유리는 방 안에 있는 호텔 전화기로 카운터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에릭이 이미 전화기 선을 끊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전화기는 먹통이었고 게다가 성유리 개인 핸드폰도 사라졌다.‘도대체 내 핸드폰은 언제 가져간 거야?’성유리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박한빈의 핸드폰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성유리의 핸드폰까지 몰래 빼간 에릭이 박한빈의 핸드폰을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너무도 화가 나 주저앉은 성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두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었다.한참 뒤, 성유리는 결심한 듯 침대맡으로 다가가 박한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박한빈 씨.”그는 끓는 열 때문에 추워졌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성유리는 그날 처음으로 박한빈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전혀 마음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잠에 빠져있는 박한빈을 있는 힘껏 밀며 소리 질렀다.“당장 일어나요
성유리는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약과 물을 계속 건네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빨리 약 드시라고요.”그녀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어있었고 말투 또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런 성유리를 바라보다 주인 말을 잘 듣는 순한 강아지처럼 약을 건네받고는 입안에 넣었다.금방 물을 컵에 따른 성유리조차 그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지만 박한빈은 내색하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누워요. 다시 주무세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넌 갈 거야?”그녀는 지금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상태인지 아니면 해롱해롱한 상태인지 구분이 안 갔지만 그의 물음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막 터져 나왔다.“당신의 좋은 친구분이 저를 방안에 가둬버렸어요. 게다가 제 핸드폰이랑 박한빈 씨 핸드폰까지 다 가져갔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떠나죠?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되나?”박한빈은 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듯 말하고 있는 성유리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그녀의 말을 애써 이해하려는 어린아이처럼.한참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그러자 안심이 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해열제의 효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박한빈의 열이 다 내려갔지만 성유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왜냐하면 아직 워터파크에 하늘이와 연정우가 있으니 말이다.‘나를 못 찾으면 불안해할 텐데. 많이 걱정하고 있으려나?’그리고 에릭이 한 말들과 행동을 돌이켜보면 성유리가 박한빈을 챙겨주기만 하면 풀려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성유리도 없이 에릭이 연정우와 마주친다면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겠는가?하지만 사실 성유리는 지금 에릭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에릭은 연정우라는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성유리 씨 찾으십니까? 죄송한데 지금 유리 씨는 전화 받을 시간이 없어서요.”“누구시
...박한빈은 자기가 몇 시간을 잤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머리는 계속 휭 한 상태였고 올려다본 천장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떨 때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주위의 공기마저 차게 느껴졌지만 또 어떨 땐 사막을 걷는 듯 너무 더웠다.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박한빈은 어렴풋이 성유리를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성유리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그 손을 피해버렸고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마에 붙이고 있는 해열패치는 이미 그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변해갔다.온몸은 금방 씻은 듯 푹 젖었는데 정말 사막이라도 걷다 온 사람 같아 보였다.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던 박한빈은 방 안에 있는 작은 소파에 누군가 샤워가운을 덮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창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방을 비추자 박한빈은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기다린 속눈썹과 하얀 피부, 그리고 늘 그렇듯 도톰하고 예쁜 입술.박한빈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오늘이... 보름 아닌가?’망설이던 박한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박한빈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금방 깨어난 성유리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먼저 입을 열었다.“깨셨어요?”박한빈이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유리가 지금 살짝 기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 착각이 오래가기도 전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빨리 에릭 씨한테 연락하셔서 저 좀 풀어달라고 하세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멍해졌다. 마
방안에는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성유리는 이미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지 소파에 앉아 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마치 문이 열리기만 하면 당장 뛰쳐나갈 사람처럼.박한빈은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얼른 샤워부터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욕실로 들어가는 순간 성유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되었다.비록 성유리가 떠날 수만 있다면 진즉에 떠났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지금 방문이 잠긴 상태라는 것도 알지만 박한빈은 움직이기 싫었다.펄펄 끓던 열이 내려가자 박한빈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지만 잠에 들기는 싫어 침대에 기대앉은 채로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봤다.“연정우 씨랑 결혼하려고?”박한빈이 침묵을 깨뜨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둘만 있는 호텔 방에서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대답하기를 거절하는 건가?’박한빈은 흠칫하기만 할 뿐 대답 없는 성유리를 보다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유리야, 난 네가 아예 모르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사람이 말이야, 인품이 보증만 되고 너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되지. 안 그래? 근데 연정우 씨는... 그 사람은 아니지 않나? 너도 알잖아.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성유리가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물었다.“어떤 일은 지나간 거라고 해서 정말 지나간 게 아니잖아. 아니야? 그럼...”말을 하던 박한빈이 순간 뚝 멈췄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 자신이 이런 말들을 더 늘어놓는다면 미련해 보이고 멍청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기에.이미 했었던 말과 들었던 답을 반복해 듣는 것 또한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대답했다.“전 그냥 지나간 거면 지나가게 놔둘래요. 그리고 하늘이가 정우를 많이 좋아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죠. 정우라면 우리 하늘이가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
유리 조각이 땅에 떨어져 내는 큰 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성유리를 강제로 가둬두었던 그 방문도 드디어 스르르 열렸고 그제야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전부터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눈치 차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껏 모르는 척 성유리를 가둬두었고 그 사실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휙 쳐다보았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자신의 외투를 다 챙겨 입은 상태였고 성유리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채로 빠르게 방을 떠나갔다.에릭 또한 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듣고 내려와 입구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심지어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에릭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에릭을 상관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에릭은 재빨리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떻게? 왜? 내가 얼마나 좋은 기회랑 조건을 줬는데!”에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말 의아하다는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래. 고맙다.”박한빈은 입으로 고맙다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말해 에릭을 귀찮아하는 듯 대충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근데 앞으로 이런 건 하지 마.”에릭은 그제야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거들떠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알아? 난 여기 휴가를 즐기러 왔다고. 근데 이게 뭐야? 괜히 이런 일에 엮이기나 하고.”에릭의 말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나 있었지만 박한빈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그러자 에릭은 더 이상 궁금해 참지 못하겠는지 빠른 걸음으로 박한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그래서 결과는? 두 사람...”“나랑 유리는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쓸데없는 일 하지 마.”‘쓸데없는 일?’박한빈의 말에 에릭이 화가 나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네가 그
연정우는 아주 평온하게 묻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도 알아.”연정우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랑 박한빈 씨 사이를 남들이 모를 수는 있어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무조건 너를 속여서 그 방까지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도 하늘이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너 믿어.”연정우는 담담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말해 그녀의 어깨를 무거운 “돌”로 짓누르고 있었다.“너도 밤 샜지?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나도 이만 가볼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정우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갑자기 성유리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너무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연정우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놀랐어?”그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는데 그 조롱이 스스로를 향한 건지 아니면 성유리를 향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연정우의 물음에 침묵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정우가 먼저 입을 뗐다.“걱정하지 마. 너한테 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얼른 가서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뒤돌아 방을 떠나갔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침실로 돌아갔고 안에서는 하늘이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 많이 불안한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한참 뒤,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하늘이를 끌어안았다.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성유리는 박한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에릭도 종적을 감춰버렸다.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고 신나게 아이와 시간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사실 박한빈도 안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이미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들은 상황이니 더더욱 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묻고 싶었다.박한빈은 지금 마치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른의 다리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답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한번, 또 한 번 자신이 사랑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증명받고 싶었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멈칫하더니 비웃듯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이게 바로 형님이 저한테 연락한 이유인가요?”박한빈은 침묵했지만 박세빈은 그 침묵 속에서 정답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나간 듯 깔깔 웃던 박세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고 이내 말을 이어갔다.“형님은 뭐인 것 같습니까? 설마 그때 성유리 씨가 형님이랑 이혼한 게 제가 협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나요?”“박한빈 씨, 제대로 된 답을 알려드리죠. 사실 그때 저희는 아주 간단한 대화만 나눴습니다.”박세빈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하늘이 맞죠? 제가 아이 이름을 한 번 말하니까 바로 제 의도를 알아차리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떠나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솔직히 말하면 다른 일도 이용해 협박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습니다.”“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형님은 성유리 씨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한빈 씨, 형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형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형님의 돈과 권력을 보고 접근한 것 아닌가요? 그 누구도 진심으로...”박세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답.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정답은 박한빈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를 점이 없었다.우스운 건 박한빈이 스스로 성유리의 선택에 대한 이유도 다 지어내고 확신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다는 점이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를 속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아무 대답 없는 박한빈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유리는 그의 침묵이 곧 수긍이라고 생각해 뒤돌아 떠나버렸다.박한빈은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떠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세빈 쪽에 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박 대표님, 깨어났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네.”몇 초 뒤, 박한빈은 수화기 너머에서 박세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한빈 형님 아니신가요?”박세빈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나약했고 힘없어 보였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직 저 같은 동생을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박한빈은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박세빈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셨다.”그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는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박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어쩐지 전에 쓰러졌을 때 꿈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보군요.”박한빈은 옛날 박세빈이 박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김난희에게 아부하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비록 당시에도 박한빈은 박세빈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김난희의 부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박한빈은 굳이 이런 문제로 박세빈에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아쉽게도 볼 기회가 없었지만. 3일 뒤에 장례식이 끝날 예정인데 오고 싶으면 와도 돼.”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세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형,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십니까?”“최근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박세빈이 전에 너한테 찾아간 적 있지? 걔가 무슨 말을 했었어?”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물었다.조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성유리는 잠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되묻기 시작했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지금 묻잖아. 그때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말이야. 박세빈이 너 찾아간 적 있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협박이라도 한 거야?”“걔가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 혹시 나한테 영향을 끼칠까 봐? 맞아?”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만 뚫어져라 보는 박한빈은 며칠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치 이 결론이어야만 당시 성유리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박한빈은 어쩌면 박세빈이 정말 성유리를 협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정말 성유리가 재물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여자였다면 떠날 때 박한빈이 준 모든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늘 모순적이던 성유리의 행동이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아가는 것 같았기에 박한빈은 꽉 막혀있는 속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마음 같아서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성유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지 않은 건지, 왜 홀로 그런 감정을 떠안고 살았는지.분명히 남편이던 자신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왜 숨겼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 박세빈의 협박 때문에 자신을 떠난 것이 맞다면 말이다.“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침묵하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짧디짧은 한마디에 박한빈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고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쳐다보았다.“박세빈 씨가 저한테 찾아왔던 건 맞아요.”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를 협박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소문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연정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샛별처럼 업계에 등장한 사람이고 성유리는 엄연한 박한빈의 전 아내였다.이런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퍼졌고 자연스레 그들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연정우와 성유리 둘 다 겸손하고 관심받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업계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하지만 지금 판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오늘은 박한빈의 할머니, 즉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는데 연정우와 성유리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그저 그런 형식들이 오가며 차가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던 추모회는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사람들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달려가 박한빈의 시선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를 선택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향을 피우고 애도하고는 연정우와 함께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비통하시겠습니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성유리의 행동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박한빈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의 말을 다 들어줬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개의치 않았고 연정우와 함께 떠나려고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박한빈이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할 말이 있어.”박한빈은 잘 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일 것이고 무슨 행동을 하던 다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한 말과 행동들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것
박한빈은 결국 먼저 박세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이건 최근 2년 안에 박한빈이 박세빈에게 처음으로 연락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박세빈이 아니었다.“박세빈 씨와 어떤 사이십니까? 가족입니까?”수화기 너머 들리는 사람의 말투에 박한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얼른 되물었다.“박세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아,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감염이 꽤 심각한 상태고요.”의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급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가족이 맞으시면 빨리 여기로 오세요. 아마 다른 곳으로 데려가셔야 할 겁니다.”박세빈이 머물던 나라는 위생과 의료 설비,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었다.매년 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거의 다 현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에 홀로 살아가고 있던 박세빈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박한빈은 원래 박세빈이 그곳에서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박세빈이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 그곳에 보낸 것이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집사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어 박한빈은 도대체 박세빈이 성유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심지어는 혼자 상상하고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그래서 그때 나를 떠나려고 한 건가?’‘그럼 왜 나중에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지?’‘분명 잘 앉아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잖아.’박한빈은 자꾸만 드는 의문들에 대한 정답을 몰라 답답했고 하루라도 빨리 그 답을 듣고 싶었다.그는 얼른 자람시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먼저 박세빈을 다른 병원에 옮긴 뒤, 그가 깨어나면 제일 먼저 자기한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박세빈이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박한빈은 답을 알고 싶어 점점 더 초조해졌다.김난희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 동안, 장손인 박한빈은 빈소를 지켜야 했고 그 기간 동안 회사에도 많은 업무들이 쌓여
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고민하다 결국 김난희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았다.“고맙습니다.”인사를 마친 성유리가 옆에 서 있는 하늘이에게 슬쩍 눈치를 주자 아이도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증조할머님, 감사합니다.”김난희는 두 사람의 인사에도 그저 침대에 기댄 채로 하늘이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성유리는 김난희와 할 말이 딱히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늘이도 그녀를 무서워하자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더 없어졌다.그렇기에 김난희가 버티다 못해 먼저 잠에 든 후,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원래는 김서영이 아직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줄 알았던 성유리는 방문을 나서자마자 뜻밖의 사람과 마주쳐버렸다.그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 그를 발견한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박한빈은 차분했다.성유리와 마주친 박한빈은 이내 시선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에 돌렸고 망설이던 성유리는 서류를 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어르신께서 주신 주식 양도서예요. 저한테 있어도 별로 소용이 없으니까 이건 돌려드릴게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이건 내가 준 것도 아닌데 갖기 싫어?”“네. 싫어요.”“그럼 돌아가서 할머님께 돌려드려.”박한빈의 태도는 아주 완강했고 성유리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건네기를 포기해 버렸고 그와도 나눌 대화가 없었기에 하늘이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한테 왜 그가 이곳에 나타난 건지도 묻지 않은 채로.하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뒤돌아있는 성유리에게 갑자기 물었다.“할머니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지도 않고는 대답을 이어갔다.“그렇게 걱정되시면 가서 CCTV 돌려보세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뭐라 대꾸하지도 못했다. 사실 무슨 얘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냉랭한 성유리의 말투와 목소
김난희가 있는 요양원은 성유리도 와보지 못했다.그리고 예상대로라면 이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하늘이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양원에 오는 것이기에 많이 신기한지 사방을 마구 둘러보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엄마, 저기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들은 왜 노인이야?”“왜냐하면 여기는 요양원이거든. 노인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야.”“그럼 저 노인들의 자식은?”“밖에서 일하고 있을 거야.”“노인들을 신경도 안 쓰고? 얼마나 외롭겠어.”하늘이의 말이 끝나자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휙 돌아봤다.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하늘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아줬고 오늘은 김서영도 두 사람과 함께였다.하지만 그녀는 굳이 김난희를 보고 싶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김난희 또한 김서영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김서영은 밖에서 성유리와 하늘이를 기다리려고 결정했다.“성유리 씨, 이쪽입니다.”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아주 공손했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유리의 기억 속, 김난희는 늘 강하고 성격이 드센 사람이었다.아무리 연세가 지긋하고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해도 김난희는 무너지지 않았고 강인함을 유지했었다.그러나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나뭇가지처럼 삐쩍 말라 있었고 하늘이는 처음 그렇게 마른 사람을 봐서 그런지 무서워 성유리 뒤로 숨어버렸다.공허한 눈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김난희는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고 이내 성유리와 하늘이를 발견했다.그녀는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등장에 눈빛이 휙 변하더니 애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뗐다.“네가... 한빈이 딸이야?”하늘이는 성유리의 뒤에 숨어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성유리가 하늘이를 달래며 말했다.“하늘아, 인사해야지. 네 증조할머니야.”긴장했는지 혀로 입술을 핥고만 있던 하늘이가 주춤거리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그러자 김난희는 허허 웃으며 연신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정말 좋구나.
그해, 박세빈의 일이 있은 뒤 박한빈은 김난희를 연세가 많아 홀로 생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요양원에 보내버렸다.비록 금성에서 제일 좋은 요양원이긴 하지만 사실 관리가 너무 엄격해 외부인은 마음대로 면회를 갈 수도 없었고 안에 있는 사람도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했다.그러니 김난희가 요양원에서 어떤 생활을 보내는지, 그 생활이 호화로운지 아니면 안쓰러운지 아무도 모른다.만약 집사가 갑자기 김서영이 사는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성유리는 박씨 가문에 김난희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잊었을 것이다.“사모님, 오늘 의사 선생님께서 어르신에게 찾아와 이미 진단을 다 마쳤습니다.”찾아온 손님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김서영에게 말을 이어갔다.“어르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다른 일들에 다 흥미를 잃으셨고 그냥 누워만 계십니다. 유일한 소원이라 하면 오직 친손자를 만나는 거라고 하십니다.”“박세빈이요?”김서영이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지금 걔는 해외에 있어서 당장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큰 도련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모님에게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큰 도련님 좀 설득해 주시죠.”“이건 저도 장담 못 해요.”집사의 부탁에 김서영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애초에 어르신이 우리 모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남들은 모를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알 리가 없고요. 하지만 저희 모자는 아직 선명히 기억하고 있어요.”“솔직히 말하면 박세빈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해외로 보낸 것도 우리 한빈이가 넓은 아량을 베푼 거예요.”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집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그러나 이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굳이 작은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어르신에게 다른 손자라도 보여주시죠?”성유리는 원래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필경 이 일은 박씨 가문의 일이니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김서영에게 먼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