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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7화

Author: 송진
“우린 뭐 먹어도 상관없어.”

성유리는 하늘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대답을 이어갔다.

“너 바쁘면 먼저 일 봐도 돼. 우린 우리가 알아서 먹을게.”

“명색이 휴간데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일만 하겠어?”

연정우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그때, 에릭이 갑자기 그들에게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성유리 씨?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연정우는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봤지만 에릭은 연정우에게 시선 한번 주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성유리에게 건네주며 계속 물었다.

“이곳 핸드폰 앱들을 전 도저히 쓸 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지금 제가 있는 위치를 다른 사람한테 공유할 수 있죠?”

성유리가 에릭이 내민 핸드폰 화면을 슬쩍 쳐다보자 화면엔 그와 박한빈의 대화창이 떠 있었다.

두 사람은 막 통화를 끝낸 상태였고 에릭은 지금 박한빈에게 성유리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에릭이 늘 해외에 머물고 있어 국내 앱들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그의 명석한 두뇌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굳이 성유리에게 찾아와 위치 공유를 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는 원인은 아마 단순히 그녀를 조롱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같이 오신 여성분이랑 물어보셔도 되잖아요.”

성유리가 말했다.

“지금 제 옆에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냥 위치 좀 공유하게 해달라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줍니까? 저희 친구 사이 아니었나요?”

에릭은 마치 상처를 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성유리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이때, 성유리는 연정우가 몸을 일으켜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러면 돼요.”

망설일 틈도 없이 성유리는 에릭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아 얼른 그들이 있는 위치를 공유해줬다.

“오, 고마워요.”

에릭은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이더니 하늘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유리 씨 딸입니까? 정말 귀엽게 생겼네요.”

조금 망설이던 에릭은 손을 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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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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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6화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5화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4화

    사실 박한빈도 안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이미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들은 상황이니 더더욱 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묻고 싶었다.박한빈은 지금 마치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른의 다리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답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한번, 또 한 번 자신이 사랑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증명받고 싶었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멈칫하더니 비웃듯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이게 바로 형님이 저한테 연락한 이유인가요?”박한빈은 침묵했지만 박세빈은 그 침묵 속에서 정답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나간 듯 깔깔 웃던 박세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고 이내 말을 이어갔다.“형님은 뭐인 것 같습니까? 설마 그때 성유리 씨가 형님이랑 이혼한 게 제가 협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나요?”“박한빈 씨, 제대로 된 답을 알려드리죠. 사실 그때 저희는 아주 간단한 대화만 나눴습니다.”박세빈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하늘이 맞죠? 제가 아이 이름을 한 번 말하니까 바로 제 의도를 알아차리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떠나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솔직히 말하면 다른 일도 이용해 협박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습니다.”“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형님은 성유리 씨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한빈 씨, 형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형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형님의 돈과 권력을 보고 접근한 것 아닌가요? 그 누구도 진심으로...”박세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답.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정답은 박한빈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를 점이 없었다.우스운 건 박한빈이 스스로 성유리의 선택에 대한 이유도 다 지어내고 확신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다는 점이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를 속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3화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아무 대답 없는 박한빈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유리는 그의 침묵이 곧 수긍이라고 생각해 뒤돌아 떠나버렸다.박한빈은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떠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세빈 쪽에 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박 대표님, 깨어났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네.”몇 초 뒤, 박한빈은 수화기 너머에서 박세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한빈 형님 아니신가요?”박세빈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나약했고 힘없어 보였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직 저 같은 동생을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박한빈은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박세빈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셨다.”그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는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박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어쩐지 전에 쓰러졌을 때 꿈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보군요.”박한빈은 옛날 박세빈이 박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김난희에게 아부하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비록 당시에도 박한빈은 박세빈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김난희의 부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박한빈은 굳이 이런 문제로 박세빈에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아쉽게도 볼 기회가 없었지만. 3일 뒤에 장례식이 끝날 예정인데 오고 싶으면 와도 돼.”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세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형,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십니까?”“최근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2화

    “박세빈이 전에 너한테 찾아간 적 있지? 걔가 무슨 말을 했었어?”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물었다.조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성유리는 잠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되묻기 시작했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지금 묻잖아. 그때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말이야. 박세빈이 너 찾아간 적 있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협박이라도 한 거야?”“걔가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 혹시 나한테 영향을 끼칠까 봐? 맞아?”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만 뚫어져라 보는 박한빈은 며칠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치 이 결론이어야만 당시 성유리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박한빈은 어쩌면 박세빈이 정말 성유리를 협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정말 성유리가 재물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여자였다면 떠날 때 박한빈이 준 모든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늘 모순적이던 성유리의 행동이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아가는 것 같았기에 박한빈은 꽉 막혀있는 속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마음 같아서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성유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지 않은 건지, 왜 홀로 그런 감정을 떠안고 살았는지.분명히 남편이던 자신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왜 숨겼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 박세빈의 협박 때문에 자신을 떠난 것이 맞다면 말이다.“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침묵하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짧디짧은 한마디에 박한빈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고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쳐다보았다.“박세빈 씨가 저한테 찾아왔던 건 맞아요.”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를 협박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71화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소문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연정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샛별처럼 업계에 등장한 사람이고 성유리는 엄연한 박한빈의 전 아내였다.이런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퍼졌고 자연스레 그들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연정우와 성유리 둘 다 겸손하고 관심받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업계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하지만 지금 판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오늘은 박한빈의 할머니, 즉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는데 연정우와 성유리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그저 그런 형식들이 오가며 차가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던 추모회는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사람들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달려가 박한빈의 시선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를 선택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향을 피우고 애도하고는 연정우와 함께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비통하시겠습니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성유리의 행동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박한빈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의 말을 다 들어줬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개의치 않았고 연정우와 함께 떠나려고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박한빈이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할 말이 있어.”박한빈은 잘 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일 것이고 무슨 행동을 하던 다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한 말과 행동들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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