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자기가 몇 시간을 잤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머리는 계속 휭 한 상태였고 올려다본 천장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떨 때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주위의 공기마저 차게 느껴졌지만 또 어떨 땐 사막을 걷는 듯 너무 더웠다.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박한빈은 어렴풋이 성유리를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성유리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그 손을 피해버렸고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마에 붙이고 있는 해열패치는 이미 그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변해갔다.온몸은 금방 씻은 듯 푹 젖었는데 정말 사막이라도 걷다 온 사람 같아 보였다.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던 박한빈은 방 안에 있는 작은 소파에 누군가 샤워가운을 덮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창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방을 비추자 박한빈은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기다린 속눈썹과 하얀 피부, 그리고 늘 그렇듯 도톰하고 예쁜 입술.박한빈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오늘이... 보름 아닌가?’망설이던 박한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박한빈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금방 깨어난 성유리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먼저 입을 열었다.“깨셨어요?”박한빈이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유리가 지금 살짝 기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 착각이 오래가기도 전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빨리 에릭 씨한테 연락하셔서 저 좀 풀어달라고 하세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멍해졌다. 마
방안에는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성유리는 이미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지 소파에 앉아 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마치 문이 열리기만 하면 당장 뛰쳐나갈 사람처럼.박한빈은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얼른 샤워부터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욕실로 들어가는 순간 성유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되었다.비록 성유리가 떠날 수만 있다면 진즉에 떠났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지금 방문이 잠긴 상태라는 것도 알지만 박한빈은 움직이기 싫었다.펄펄 끓던 열이 내려가자 박한빈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지만 잠에 들기는 싫어 침대에 기대앉은 채로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봤다.“연정우 씨랑 결혼하려고?”박한빈이 침묵을 깨뜨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둘만 있는 호텔 방에서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대답하기를 거절하는 건가?’박한빈은 흠칫하기만 할 뿐 대답 없는 성유리를 보다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유리야, 난 네가 아예 모르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사람이 말이야, 인품이 보증만 되고 너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되지. 안 그래? 근데 연정우 씨는... 그 사람은 아니지 않나? 너도 알잖아.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성유리가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물었다.“어떤 일은 지나간 거라고 해서 정말 지나간 게 아니잖아. 아니야? 그럼...”말을 하던 박한빈이 순간 뚝 멈췄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 자신이 이런 말들을 더 늘어놓는다면 미련해 보이고 멍청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기에.이미 했었던 말과 들었던 답을 반복해 듣는 것 또한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대답했다.“전 그냥 지나간 거면 지나가게 놔둘래요. 그리고 하늘이가 정우를 많이 좋아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죠. 정우라면 우리 하늘이가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
유리 조각이 땅에 떨어져 내는 큰 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성유리를 강제로 가둬두었던 그 방문도 드디어 스르르 열렸고 그제야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전부터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눈치 차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껏 모르는 척 성유리를 가둬두었고 그 사실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휙 쳐다보았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자신의 외투를 다 챙겨 입은 상태였고 성유리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채로 빠르게 방을 떠나갔다.에릭 또한 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듣고 내려와 입구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심지어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에릭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에릭을 상관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에릭은 재빨리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떻게? 왜? 내가 얼마나 좋은 기회랑 조건을 줬는데!”에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말 의아하다는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래. 고맙다.”박한빈은 입으로 고맙다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말해 에릭을 귀찮아하는 듯 대충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근데 앞으로 이런 건 하지 마.”에릭은 그제야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거들떠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알아? 난 여기 휴가를 즐기러 왔다고. 근데 이게 뭐야? 괜히 이런 일에 엮이기나 하고.”에릭의 말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나 있었지만 박한빈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그러자 에릭은 더 이상 궁금해 참지 못하겠는지 빠른 걸음으로 박한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그래서 결과는? 두 사람...”“나랑 유리는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쓸데없는 일 하지 마.”‘쓸데없는 일?’박한빈의 말에 에릭이 화가 나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네가 그
연정우는 아주 평온하게 묻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도 알아.”연정우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랑 박한빈 씨 사이를 남들이 모를 수는 있어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무조건 너를 속여서 그 방까지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도 하늘이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너 믿어.”연정우는 담담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말해 그녀의 어깨를 무거운 “돌”로 짓누르고 있었다.“너도 밤 샜지?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나도 이만 가볼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정우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갑자기 성유리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너무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연정우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놀랐어?”그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는데 그 조롱이 스스로를 향한 건지 아니면 성유리를 향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연정우의 물음에 침묵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정우가 먼저 입을 뗐다.“걱정하지 마. 너한테 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얼른 가서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뒤돌아 방을 떠나갔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침실로 돌아갔고 안에서는 하늘이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 많이 불안한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한참 뒤,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하늘이를 끌어안았다.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성유리는 박한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에릭도 종적을 감춰버렸다.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고 신나게 아이와 시간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물건이에요? 그거 엄청 비싼 브랜드예요. 정말 비싸다고요. 제가 특별히...”“그러니까! 그렇게 의도가 뻔히 보이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주면 어떡해? 나 진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사하나의 말에 반박했다.“그땐 저도 시간이 없...”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멈칫하더니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니, 언니가 어떻게 그 브랜드 물건이 뭔지 아세요? 쯧, 언니도 역시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네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말문이 막혀 빨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를 살짝 째려보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너랑 아무 말도 안 할 거야.”“안 돼요. 언니 아직 저한테 해줄 말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연 대표님이랑...”“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것도.”사하나는 성유리의 간단한 대답에 처음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정말 재미없어! 전 살면서 진짜 처음으로 남녀 둘이 같이 휴가까지 떠나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사례를 봤다고요.”사하나는 얼굴까지 새빨개진 채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우리 둘만 떠난 것도 아니잖아. 하늘이도 있었는데?”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물을 뿐이었다.“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래요?”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다른 일이 떠올랐는지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설마 아직 박한빈 씨를 못 잊어서 그러세요?”“아니야.”“그럼 왜...”바삐 움직이던 성유리는 하던 행동을 뚝 멈추고는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난 아직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그리고 넌 정말 나랑 정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당연하죠! 왜 안 어울리겠어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데! 게다가 언니도 전에 연 대표님이랑 결혼까지 할 뻔하셨다면서요. 좋아해서!”사하나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성유리는 왜 그때 당시 자신이
그날 밤.하늘이는 오늘 하루 종일 차에 앉아 있어 피곤했는지 샤워를 마치고는 졸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는 하늘이의 행동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졸리면 머리 다 말리고 바로 자자. 오늘은 이야기책 읽지 말고. 괜찮지?”“안 괜찮아.”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대답했다.“난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책 듣고 싶어.”“그러자 그럼. 오늘은 뭐 듣고 싶은데?”하늘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자신의 책장으로 뛰어가더니 그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민 끝에 하늘이가 고른 것은 바로 [나의 어린 괴물]이라는 책이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건네는 책을 건네받았다. 사실 이 책은 성유리가 이미 하늘이에게 몇 번이나 읽어줬었지만 아이는 매번 처음 듣는 듯 이야기에 잔뜩 집중했다.그녀가 이야기가 어느덧 끝이 나는 마지막 장을 읽던 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그 괴물은 영원히 나나랑 같이 있어 주는 거야?”“그렇지.”“그럼 엄마는 영원히 하늘이랑 있어 줄 거야?”성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그제야 하늘이는 만족한 듯 다시 배시시 웃었고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가 하늘이에게 물었다.“하늘이도 엄마랑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응. 당연하지!”“그럼... 하늘이는 엄마랑 하늘이 사이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아니, 사실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얼마 후, 아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연정우 아저씨야?”“연정우 아저씨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 해도 하늘이는 괜찮겠어?”“난 엄마가 행복하면 그거로 만족해.”하늘이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계속 이어 나갔다.“엄마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난 다 괜찮아.”성유리는 아이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하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의 기분을 알아차렸고 조금 주저하다 먼저 말을 걸었다.“최근 몇 년 동안은... 금성에서 사업을 키워나갈 거지?”그녀의 물음에 연정우는 더 당황해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근데 난 이제 더 이상 금성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난 경운시가 꽤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거리도 하나의 문제가 되는 거지.”“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교통이 편리해서 나 한 달에 한 번씩 너희 보러 올 수 있어. 게다가... 장성 그룹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몇 년 뒤에 자리를 잘 잡으면 나도 다른 곳에 지사를 세울 계획이거든. 그때가 되면 지사 위치로 제일 먼저 경운시를 선택할게.”연정우는 횡설수설 하며 대답했는데 마치 물에 빠져있던 사람이 자신을 구해줄 구세주를 발견한 것처럼 다급했고 절실해 보였다.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진심을 꺼내 성유리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다시 자신을 떠나갈까 봐.성유리는 연정우의 대답에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늘이를 낳을 때 나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써버렸어. 다 낳고 나서도 너무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그러니까... 의외의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잘 알지. 걱정하지 마. 난 하늘이를 꼭 내 친자식처럼 키울 테니까. 그리고 나도 하늘이 정말 좋아해.”“난 지금 정우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지는 않아. 심지어 네 조건만 보고 그냥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도 있지. 네가 원하는 모든 거... 사랑이나 보답 같은 건 앞으로 못 해줄 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연정우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해줬다.그녀는 이런 말들이 한 남자에게는 정말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지금 연정우의 조건이나 신분으로 놓고 말하면 그는 성유리보다 더 훌륭하고
“연 대표님, 오랜만입니다.”누군가가 연정우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를 들은 박한빈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하며 앞에 있는 사람과 계속 얘기를 나눴다. 사실 오늘 이 연회장에 박한빈은 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주최자와 사이가 꽤 좋았던 박한빈은 행여나 주최자가 오해할까 봐 오늘 밤 연회장으로 와 얼굴이나 비추려 했다.원래부터 오고 싶지 않았던 장소에서 하필이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쳐버린 박한빈은 사실 연정우와 성유리가 다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며칠 전, 에릭이 연정우와 성유리가 손을 잡고 다정히 있는 모습을 몰래 찍어 박한빈에게 보내줬기 때문이다.이미 성유리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박한빈을 에릭은 재미난 장난감을 대하듯 매일같이 그를 건드리고 쿡쿡 찔러댔다.‘내가 고통스러워해야 이 자식이 기뻐하나?’박한빈은 도대체 에릭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는 혹시 에릭이 지금 과거 자신이 성유리에게 한 행동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우스운지를 알려주려고 이러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보았다.그 이유가 뭐가 됐던지 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번호를 차단해 버린 상태였지만 오늘 이 연회장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릴 줄은 몰랐다.새로 설립한 회사치고 장성 그룹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저 괜찮은 회사라는 평가만 들을 뿐, 연정우한테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이 업계에서 기회 한 번 얻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연정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빌고 빌어 기회를 얻거나 아니면 비굴하게 행동해야 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도 그의 이런 면을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연정우가 지금 이런 위치에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그리고 이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바로 연정우의 이런 면을 보고 나서도 그를 좋아할 수 있는지였다.박한빈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연정우가 술잔을 손에 든 채로 박한빈을 향해 걸어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연정우가 인사를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도 박한빈의 침묵과 함께 천천히 사라졌다.그러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가 이미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연정우의 내연녀인 줄 알았던 그 단발머리는 여인은 확실히 성유리가 맞았다.머리까지 짧게 자른 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와 함께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 박한빈은 이 두 개의 현실에 가슴을 깊이 찔린 것 같은 고통이 점점 더 심하게 느껴졌다.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박한빈의 입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두 주먹도 꽉 쥐고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박한빈은 그 여인이 성유리가 맞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다시 물었다.“그럼 너는? 넌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데?”박한빈은 뚜벅뚜벅 성유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그녀가 하는 대답은 이미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다 큰 성인남녀가 야심한 시각에 같은 호텔 방에 머물면 과연 어떤 일은 하겠는가?두 남녀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대화만 나누고 잡담만 할 리도 없다. 게다가 성유리는 이미 샤워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더욱 볼 것도 없었다.박한빈이 바로 노크하지 않고 멈춰 담배를 피우는 시간 동안, 연정우와 성유리가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그는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성유리와 연정우가 만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줄 알았다. 연정우의 여자 친구가 성유리라는 사실 말이다.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그러나 지금, 막상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충격은 더 세게 다가왔다.심지어 박한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침실까지 쳐다봤다. 도대체 침실 안이 어떤 상황인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둘이 안에서 뭐 한 거지? 연정우 씨는 유리한테 잘해주나?’박한빈은 성유리가 과연 원해서 관계를 가진 건지 아니면 그녀가 지금 즐거운지, 자신과 함께 있을 때처럼 섹시하고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는지 너무
박한빈은 그렇게 연정우의 뒤를 몰래 따랐다.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것도 말이다.하지만 도저히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고 마음 같아서는 성유리에게 라이브 방송이라도 켜 보여주고 싶었다.성유리가 연정우라는 남자의 실체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것만큼은 꾹 참으려 했다. 스스로도 이런 일에서는 자신이 설복력이 없고 신뢰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그리고 솔직히 말해 박한빈도 사실 굳이 성유리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연정우의 “가면”을 벗긴 다음 성유리에게서 멀어지라고 경고하려고 했다.연정우는 성유리와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사람이니까!그 여인의 손을 잡은 채로 연정우는 방 안에 들어섰고 박한빈은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피운 다음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그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걸음으로 방 앞에 도착했고 이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아무리 노크해도 방 안에서는 미동도 없었고 박한빈은 속으로 연정우를 무척이나 조롱하고 나무랐다.똑똑!몇 번이나 반복된 노크 소리에 그제야 방 안에 있던 연정우가 물었다.“누구세요?”박한빈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연정우가 입구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문 하나를 사이에 둔 박한빈은 연정우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고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심지어는 호텔 측에 부탁해 연정우가 다른 여자와 방 안에 들어섰다는 영상을 찍어달라고 했다.비록 박한빈 또한 이러한 상황에 불가피하게 놓인 적은 있었지만 그는 남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건 다 성유리를 위한 거야.’박한빈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연정우가 마침 문을 벌컥 열었다.문밖에 있는 박한빈을 발견한 연정우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예상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연 대표님, 이렇게 또 만나네요.”“지금 이게...
그 사진은 옛날 박한빈과 성유리, 그리고 하늘이가 놀이공원에 놀러 간 날 찍은 것이었다.놀이공원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한빈에게 잘 보이려고 계속 세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었다.하지만 지금, 박한빈이 슬쩍 본 성유리의 프로필 사진에는 하늘이와 그녀의 얼굴만 있을 뿐이었다.‘나는 아예 없던 사람처럼 잘라버렸네.’“죄송합니다. 전화 한 통만 받고 오겠습니다.”연정우는 박한빈을 향해 살짝 미소 짓더니 그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돌아 전화를 받으러 떠나버렸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있다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 어떻게 날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나.’그는 연정우가 지금 일부러 자기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일부러 핸드폰을 박한빈 앞에서 꺼내 들고 성유리와 본인 사이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박한빈은 연정우가 자신과 성유리 사이 과거 일들과 사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방금 전에 보인 담담한 모습과 미소는 다 연정우의 “연기”라고 생각했고 걸려 온 영상통화 또한 가짜일 것이라고 여겼다.그냥 사진 한 장만 바꾼 뒤에 성유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척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박한빈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진짜든 가짜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지금 이러고 있는지 본인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 관련된 모든 일들에 관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연정우와 도대체 어떤 사이로, 어떤 감정을 갖고 있든 모른 척하기로 했었다.지금 연정우가 하는 행동들이 과시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박한빈은 그냥 모르고 지내기로 다짐했다.“박 대표님?”그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박한빈이 정신을 다잡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쳐다보며 얼른 대답했다.“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그럼 모셔다드릴까요?”상대는 박한빈의 말에 다정한 말투로 물었지만 그는 손을 내저으며
“연 대표님, 오랜만입니다.”누군가가 연정우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를 들은 박한빈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하며 앞에 있는 사람과 계속 얘기를 나눴다. 사실 오늘 이 연회장에 박한빈은 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주최자와 사이가 꽤 좋았던 박한빈은 행여나 주최자가 오해할까 봐 오늘 밤 연회장으로 와 얼굴이나 비추려 했다.원래부터 오고 싶지 않았던 장소에서 하필이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쳐버린 박한빈은 사실 연정우와 성유리가 다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며칠 전, 에릭이 연정우와 성유리가 손을 잡고 다정히 있는 모습을 몰래 찍어 박한빈에게 보내줬기 때문이다.이미 성유리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박한빈을 에릭은 재미난 장난감을 대하듯 매일같이 그를 건드리고 쿡쿡 찔러댔다.‘내가 고통스러워해야 이 자식이 기뻐하나?’박한빈은 도대체 에릭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는 혹시 에릭이 지금 과거 자신이 성유리에게 한 행동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우스운지를 알려주려고 이러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보았다.그 이유가 뭐가 됐던지 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번호를 차단해 버린 상태였지만 오늘 이 연회장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릴 줄은 몰랐다.새로 설립한 회사치고 장성 그룹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저 괜찮은 회사라는 평가만 들을 뿐, 연정우한테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이 업계에서 기회 한 번 얻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연정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빌고 빌어 기회를 얻거나 아니면 비굴하게 행동해야 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도 그의 이런 면을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연정우가 지금 이런 위치에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그리고 이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바로 연정우의 이런 면을 보고 나서도 그를 좋아할 수 있는지였다.박한빈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연정우가 술잔을 손에 든 채로 박한빈을 향해 걸어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연정우가 인사를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의 기분을 알아차렸고 조금 주저하다 먼저 말을 걸었다.“최근 몇 년 동안은... 금성에서 사업을 키워나갈 거지?”그녀의 물음에 연정우는 더 당황해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근데 난 이제 더 이상 금성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난 경운시가 꽤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거리도 하나의 문제가 되는 거지.”“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교통이 편리해서 나 한 달에 한 번씩 너희 보러 올 수 있어. 게다가... 장성 그룹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몇 년 뒤에 자리를 잘 잡으면 나도 다른 곳에 지사를 세울 계획이거든. 그때가 되면 지사 위치로 제일 먼저 경운시를 선택할게.”연정우는 횡설수설 하며 대답했는데 마치 물에 빠져있던 사람이 자신을 구해줄 구세주를 발견한 것처럼 다급했고 절실해 보였다.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진심을 꺼내 성유리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다시 자신을 떠나갈까 봐.성유리는 연정우의 대답에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늘이를 낳을 때 나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써버렸어. 다 낳고 나서도 너무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그러니까... 의외의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잘 알지. 걱정하지 마. 난 하늘이를 꼭 내 친자식처럼 키울 테니까. 그리고 나도 하늘이 정말 좋아해.”“난 지금 정우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지는 않아. 심지어 네 조건만 보고 그냥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도 있지. 네가 원하는 모든 거... 사랑이나 보답 같은 건 앞으로 못 해줄 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연정우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해줬다.그녀는 이런 말들이 한 남자에게는 정말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지금 연정우의 조건이나 신분으로 놓고 말하면 그는 성유리보다 더 훌륭하고
그날 밤.하늘이는 오늘 하루 종일 차에 앉아 있어 피곤했는지 샤워를 마치고는 졸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는 하늘이의 행동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졸리면 머리 다 말리고 바로 자자. 오늘은 이야기책 읽지 말고. 괜찮지?”“안 괜찮아.”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대답했다.“난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책 듣고 싶어.”“그러자 그럼. 오늘은 뭐 듣고 싶은데?”하늘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자신의 책장으로 뛰어가더니 그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민 끝에 하늘이가 고른 것은 바로 [나의 어린 괴물]이라는 책이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건네는 책을 건네받았다. 사실 이 책은 성유리가 이미 하늘이에게 몇 번이나 읽어줬었지만 아이는 매번 처음 듣는 듯 이야기에 잔뜩 집중했다.그녀가 이야기가 어느덧 끝이 나는 마지막 장을 읽던 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그 괴물은 영원히 나나랑 같이 있어 주는 거야?”“그렇지.”“그럼 엄마는 영원히 하늘이랑 있어 줄 거야?”성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그제야 하늘이는 만족한 듯 다시 배시시 웃었고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가 하늘이에게 물었다.“하늘이도 엄마랑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응. 당연하지!”“그럼... 하늘이는 엄마랑 하늘이 사이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아니, 사실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얼마 후, 아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연정우 아저씨야?”“연정우 아저씨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 해도 하늘이는 괜찮겠어?”“난 엄마가 행복하면 그거로 만족해.”하늘이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계속 이어 나갔다.“엄마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난 다 괜찮아.”성유리는 아이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하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물건이에요? 그거 엄청 비싼 브랜드예요. 정말 비싸다고요. 제가 특별히...”“그러니까! 그렇게 의도가 뻔히 보이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주면 어떡해? 나 진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사하나의 말에 반박했다.“그땐 저도 시간이 없...”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멈칫하더니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니, 언니가 어떻게 그 브랜드 물건이 뭔지 아세요? 쯧, 언니도 역시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네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말문이 막혀 빨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를 살짝 째려보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너랑 아무 말도 안 할 거야.”“안 돼요. 언니 아직 저한테 해줄 말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연 대표님이랑...”“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것도.”사하나는 성유리의 간단한 대답에 처음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정말 재미없어! 전 살면서 진짜 처음으로 남녀 둘이 같이 휴가까지 떠나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사례를 봤다고요.”사하나는 얼굴까지 새빨개진 채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우리 둘만 떠난 것도 아니잖아. 하늘이도 있었는데?”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물을 뿐이었다.“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래요?”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다른 일이 떠올랐는지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설마 아직 박한빈 씨를 못 잊어서 그러세요?”“아니야.”“그럼 왜...”바삐 움직이던 성유리는 하던 행동을 뚝 멈추고는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난 아직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그리고 넌 정말 나랑 정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당연하죠! 왜 안 어울리겠어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데! 게다가 언니도 전에 연 대표님이랑 결혼까지 할 뻔하셨다면서요. 좋아해서!”사하나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성유리는 왜 그때 당시 자신이
연정우는 아주 평온하게 묻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도 알아.”연정우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랑 박한빈 씨 사이를 남들이 모를 수는 있어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무조건 너를 속여서 그 방까지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도 하늘이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너 믿어.”연정우는 담담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말해 그녀의 어깨를 무거운 “돌”로 짓누르고 있었다.“너도 밤 샜지?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나도 이만 가볼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정우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갑자기 성유리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너무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연정우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놀랐어?”그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는데 그 조롱이 스스로를 향한 건지 아니면 성유리를 향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연정우의 물음에 침묵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정우가 먼저 입을 뗐다.“걱정하지 마. 너한테 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얼른 가서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뒤돌아 방을 떠나갔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침실로 돌아갔고 안에서는 하늘이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 많이 불안한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한참 뒤,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하늘이를 끌어안았다.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성유리는 박한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에릭도 종적을 감춰버렸다.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고 신나게 아이와 시간
유리 조각이 땅에 떨어져 내는 큰 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성유리를 강제로 가둬두었던 그 방문도 드디어 스르르 열렸고 그제야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전부터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눈치 차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껏 모르는 척 성유리를 가둬두었고 그 사실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휙 쳐다보았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자신의 외투를 다 챙겨 입은 상태였고 성유리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채로 빠르게 방을 떠나갔다.에릭 또한 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듣고 내려와 입구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심지어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에릭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에릭을 상관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에릭은 재빨리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떻게? 왜? 내가 얼마나 좋은 기회랑 조건을 줬는데!”에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말 의아하다는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래. 고맙다.”박한빈은 입으로 고맙다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말해 에릭을 귀찮아하는 듯 대충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근데 앞으로 이런 건 하지 마.”에릭은 그제야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거들떠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알아? 난 여기 휴가를 즐기러 왔다고. 근데 이게 뭐야? 괜히 이런 일에 엮이기나 하고.”에릭의 말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나 있었지만 박한빈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그러자 에릭은 더 이상 궁금해 참지 못하겠는지 빠른 걸음으로 박한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그래서 결과는? 두 사람...”“나랑 유리는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쓸데없는 일 하지 마.”‘쓸데없는 일?’박한빈의 말에 에릭이 화가 나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네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