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우는 아주 평온하게 묻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도 알아.”연정우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랑 박한빈 씨 사이를 남들이 모를 수는 있어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무조건 너를 속여서 그 방까지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도 하늘이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너 믿어.”연정우는 담담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말해 그녀의 어깨를 무거운 “돌”로 짓누르고 있었다.“너도 밤 샜지?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나도 이만 가볼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정우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갑자기 성유리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너무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연정우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놀랐어?”그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는데 그 조롱이 스스로를 향한 건지 아니면 성유리를 향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연정우의 물음에 침묵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정우가 먼저 입을 뗐다.“걱정하지 마. 너한테 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얼른 가서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뒤돌아 방을 떠나갔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침실로 돌아갔고 안에서는 하늘이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 많이 불안한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한참 뒤,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하늘이를 끌어안았다.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성유리는 박한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에릭도 종적을 감춰버렸다.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고 신나게 아이와 시간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물건이에요? 그거 엄청 비싼 브랜드예요. 정말 비싸다고요. 제가 특별히...”“그러니까! 그렇게 의도가 뻔히 보이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주면 어떡해? 나 진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사하나의 말에 반박했다.“그땐 저도 시간이 없...”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멈칫하더니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니, 언니가 어떻게 그 브랜드 물건이 뭔지 아세요? 쯧, 언니도 역시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네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말문이 막혀 빨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를 살짝 째려보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너랑 아무 말도 안 할 거야.”“안 돼요. 언니 아직 저한테 해줄 말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연 대표님이랑...”“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것도.”사하나는 성유리의 간단한 대답에 처음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정말 재미없어! 전 살면서 진짜 처음으로 남녀 둘이 같이 휴가까지 떠나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사례를 봤다고요.”사하나는 얼굴까지 새빨개진 채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우리 둘만 떠난 것도 아니잖아. 하늘이도 있었는데?”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물을 뿐이었다.“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래요?”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다른 일이 떠올랐는지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설마 아직 박한빈 씨를 못 잊어서 그러세요?”“아니야.”“그럼 왜...”바삐 움직이던 성유리는 하던 행동을 뚝 멈추고는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난 아직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그리고 넌 정말 나랑 정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당연하죠! 왜 안 어울리겠어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데! 게다가 언니도 전에 연 대표님이랑 결혼까지 할 뻔하셨다면서요. 좋아해서!”사하나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성유리는 왜 그때 당시 자신이
그날 밤.하늘이는 오늘 하루 종일 차에 앉아 있어 피곤했는지 샤워를 마치고는 졸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는 하늘이의 행동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졸리면 머리 다 말리고 바로 자자. 오늘은 이야기책 읽지 말고. 괜찮지?”“안 괜찮아.”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대답했다.“난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책 듣고 싶어.”“그러자 그럼. 오늘은 뭐 듣고 싶은데?”하늘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자신의 책장으로 뛰어가더니 그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민 끝에 하늘이가 고른 것은 바로 [나의 어린 괴물]이라는 책이었다.성유리는 하늘이가 건네는 책을 건네받았다. 사실 이 책은 성유리가 이미 하늘이에게 몇 번이나 읽어줬었지만 아이는 매번 처음 듣는 듯 이야기에 잔뜩 집중했다.그녀가 이야기가 어느덧 끝이 나는 마지막 장을 읽던 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엄마, 그 괴물은 영원히 나나랑 같이 있어 주는 거야?”“그렇지.”“그럼 엄마는 영원히 하늘이랑 있어 줄 거야?”성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그제야 하늘이는 만족한 듯 다시 배시시 웃었고 조금 망설이던 성유리가 하늘이에게 물었다.“하늘이도 엄마랑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응. 당연하지!”“그럼... 하늘이는 엄마랑 하늘이 사이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어?”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하늘이는 대답하기를 꺼렸다. 아니, 사실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얼마 후, 아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연정우 아저씨야?”“연정우 아저씨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 해도 하늘이는 괜찮겠어?”“난 엄마가 행복하면 그거로 만족해.”하늘이가 예상치 못한 대답을 계속 이어 나갔다.“엄마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난 다 괜찮아.”성유리는 아이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겠어.”하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의 기분을 알아차렸고 조금 주저하다 먼저 말을 걸었다.“최근 몇 년 동안은... 금성에서 사업을 키워나갈 거지?”그녀의 물음에 연정우는 더 당황해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근데 난 이제 더 이상 금성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그러자 성유리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난 경운시가 꽤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거리도 하나의 문제가 되는 거지.”“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 교통이 편리해서 나 한 달에 한 번씩 너희 보러 올 수 있어. 게다가... 장성 그룹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몇 년 뒤에 자리를 잘 잡으면 나도 다른 곳에 지사를 세울 계획이거든. 그때가 되면 지사 위치로 제일 먼저 경운시를 선택할게.”연정우는 횡설수설 하며 대답했는데 마치 물에 빠져있던 사람이 자신을 구해줄 구세주를 발견한 것처럼 다급했고 절실해 보였다.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진심을 꺼내 성유리를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다시 자신을 떠나갈까 봐.성유리는 연정우의 대답에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하늘이를 낳을 때 나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써버렸어. 다 낳고 나서도 너무 힘든 나날들을 보냈고. 그러니까... 의외의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잘 알지. 걱정하지 마. 난 하늘이를 꼭 내 친자식처럼 키울 테니까. 그리고 나도 하늘이 정말 좋아해.”“난 지금 정우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지는 않아. 심지어 네 조건만 보고 그냥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도 있지. 네가 원하는 모든 거... 사랑이나 보답 같은 건 앞으로 못 해줄 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성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연정우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해줬다.그녀는 이런 말들이 한 남자에게는 정말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지금 연정우의 조건이나 신분으로 놓고 말하면 그는 성유리보다 더 훌륭하고
“연 대표님, 오랜만입니다.”누군가가 연정우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를 들은 박한빈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하며 앞에 있는 사람과 계속 얘기를 나눴다. 사실 오늘 이 연회장에 박한빈은 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주최자와 사이가 꽤 좋았던 박한빈은 행여나 주최자가 오해할까 봐 오늘 밤 연회장으로 와 얼굴이나 비추려 했다.원래부터 오고 싶지 않았던 장소에서 하필이면 보기 싫은 사람과 마주쳐버린 박한빈은 사실 연정우와 성유리가 다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며칠 전, 에릭이 연정우와 성유리가 손을 잡고 다정히 있는 모습을 몰래 찍어 박한빈에게 보내줬기 때문이다.이미 성유리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박한빈을 에릭은 재미난 장난감을 대하듯 매일같이 그를 건드리고 쿡쿡 찔러댔다.‘내가 고통스러워해야 이 자식이 기뻐하나?’박한빈은 도대체 에릭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는 혹시 에릭이 지금 과거 자신이 성유리에게 한 행동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우스운지를 알려주려고 이러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해보았다.그 이유가 뭐가 됐던지 박한빈은 이미 에릭의 번호를 차단해 버린 상태였지만 오늘 이 연회장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릴 줄은 몰랐다.새로 설립한 회사치고 장성 그룹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저 괜찮은 회사라는 평가만 들을 뿐, 연정우한테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이 업계에서 기회 한 번 얻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연정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빌고 빌어 기회를 얻거나 아니면 비굴하게 행동해야 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도 그의 이런 면을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연정우가 지금 이런 위치에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그리고 이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바로 연정우의 이런 면을 보고 나서도 그를 좋아할 수 있는지였다.박한빈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연정우가 술잔을 손에 든 채로 박한빈을 향해 걸어오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연정우가 인사를
그 사진은 옛날 박한빈과 성유리, 그리고 하늘이가 놀이공원에 놀러 간 날 찍은 것이었다.놀이공원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한빈에게 잘 보이려고 계속 세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었다.하지만 지금, 박한빈이 슬쩍 본 성유리의 프로필 사진에는 하늘이와 그녀의 얼굴만 있을 뿐이었다.‘나는 아예 없던 사람처럼 잘라버렸네.’“죄송합니다. 전화 한 통만 받고 오겠습니다.”연정우는 박한빈을 향해 살짝 미소 짓더니 그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돌아 전화를 받으러 떠나버렸다.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있다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 어떻게 날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나.’그는 연정우가 지금 일부러 자기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일부러 핸드폰을 박한빈 앞에서 꺼내 들고 성유리와 본인 사이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박한빈은 연정우가 자신과 성유리 사이 과거 일들과 사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방금 전에 보인 담담한 모습과 미소는 다 연정우의 “연기”라고 생각했고 걸려 온 영상통화 또한 가짜일 것이라고 여겼다.그냥 사진 한 장만 바꾼 뒤에 성유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척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박한빈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진짜든 가짜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지금 이러고 있는지 본인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 관련된 모든 일들에 관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연정우와 도대체 어떤 사이로, 어떤 감정을 갖고 있든 모른 척하기로 했었다.지금 연정우가 하는 행동들이 과시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박한빈은 그냥 모르고 지내기로 다짐했다.“박 대표님?”그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박한빈이 정신을 다잡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쳐다보며 얼른 대답했다.“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그럼 모셔다드릴까요?”상대는 박한빈의 말에 다정한 말투로 물었지만 그는 손을 내저으며
박한빈은 그렇게 연정우의 뒤를 몰래 따랐다.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것도 말이다.하지만 도저히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고 마음 같아서는 성유리에게 라이브 방송이라도 켜 보여주고 싶었다.성유리가 연정우라는 남자의 실체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것만큼은 꾹 참으려 했다. 스스로도 이런 일에서는 자신이 설복력이 없고 신뢰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그리고 솔직히 말해 박한빈도 사실 굳이 성유리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연정우의 “가면”을 벗긴 다음 성유리에게서 멀어지라고 경고하려고 했다.연정우는 성유리와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사람이니까!그 여인의 손을 잡은 채로 연정우는 방 안에 들어섰고 박한빈은 담배 한 대를 천천히 피운 다음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그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걸음으로 방 앞에 도착했고 이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아무리 노크해도 방 안에서는 미동도 없었고 박한빈은 속으로 연정우를 무척이나 조롱하고 나무랐다.똑똑!몇 번이나 반복된 노크 소리에 그제야 방 안에 있던 연정우가 물었다.“누구세요?”박한빈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연정우가 입구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문 하나를 사이에 둔 박한빈은 연정우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고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심지어는 호텔 측에 부탁해 연정우가 다른 여자와 방 안에 들어섰다는 영상을 찍어달라고 했다.비록 박한빈 또한 이러한 상황에 불가피하게 놓인 적은 있었지만 그는 남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건 다 성유리를 위한 거야.’박한빈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연정우가 마침 문을 벌컥 열었다.문밖에 있는 박한빈을 발견한 연정우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예상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연 대표님, 이렇게 또 만나네요.”“지금 이게...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도 박한빈의 침묵과 함께 천천히 사라졌다.그러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가 이미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연정우의 내연녀인 줄 알았던 그 단발머리는 여인은 확실히 성유리가 맞았다.머리까지 짧게 자른 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와 함께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 박한빈은 이 두 개의 현실에 가슴을 깊이 찔린 것 같은 고통이 점점 더 심하게 느껴졌다.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박한빈의 입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두 주먹도 꽉 쥐고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박한빈은 그 여인이 성유리가 맞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다시 물었다.“그럼 너는? 넌 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데?”박한빈은 뚜벅뚜벅 성유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그녀가 하는 대답은 이미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다 큰 성인남녀가 야심한 시각에 같은 호텔 방에 머물면 과연 어떤 일은 하겠는가?두 남녀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대화만 나누고 잡담만 할 리도 없다. 게다가 성유리는 이미 샤워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더욱 볼 것도 없었다.박한빈이 바로 노크하지 않고 멈춰 담배를 피우는 시간 동안, 연정우와 성유리가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그는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성유리와 연정우가 만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줄 알았다. 연정우의 여자 친구가 성유리라는 사실 말이다.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해도 괜찮을 줄 알았다.그러나 지금, 막상 눈으로 직접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충격은 더 세게 다가왔다.심지어 박한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침실까지 쳐다봤다. 도대체 침실 안이 어떤 상황인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둘이 안에서 뭐 한 거지? 연정우 씨는 유리한테 잘해주나?’박한빈은 성유리가 과연 원해서 관계를 가진 건지 아니면 그녀가 지금 즐거운지, 자신과 함께 있을 때처럼 섹시하고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는지 너무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