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그제야 여성의 신분이 떠올랐는지 살짝 경계하며 되물었다.“무슨 일이시죠?”“그... 그냥 저 따라오세요.”여자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붉어져 있었는데 어딘가 숨기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보였다.“제가 사다 드려야 할 물건이 있나요? 아니면 직원이라도 불러드릴까요?”같은 여자로서 성유리는 지금 여자가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성유리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저 따라오시면 안 될까요? 성유리 씨 도움이 꼭 필요해요.”그 여성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는데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그러나 두 눈이 빨개진 채 울먹이며 자신의 도움을 구걸하는 여성의 얼굴을 보자 성유리는 마음이 약해져 결국 여성을 따라나섰다.‘그래.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러겠지.’성유리는 속으로 그 여성이 절대 나쁜 의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지금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거죠?”여성의 손에 이끌려 호텔로 돌아가게 된 성유리는 그제야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올라가서 직접 확인하세요.”여성은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진짜 제발요. 성유리 씨가 올라가지 않으면 에릭 씨가 많이 화낼 거예요.”성유리는 여성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에릭 씨가 화를 내든 말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올라가서 보면 알게 될 거예요.”성유리를 보며 말하는 여성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결심한 듯 대답했다.“이 손 놔주세요.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그녀의 말에 여성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살짝 미소 짓더니 손을 서서히 풀어주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올랐다. 처음에 성유리는 에릭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이런 일은 자신감 넘치고 도도한 에릭이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럼 지금...”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뒤돌아 방을 나가며 빠르게 방문을 잠가버렸다.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릭이 이미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 상태였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당장 이 문 여세요.”성유리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문고리를 힘껏 당기며 에릭을 향해 소리쳤다.“해열제는 이미 안에 넣어뒀습니다.”에릭은 문밖에서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의사가 해열제만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른 일은... 성유리 씨가 알아서 하십시오.”그의 말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당장 문 열어줘요!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 박한빈 씨가 아픈 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세요?”힘껏 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성유리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더 이상 힘으로 문을 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성유리는 방 안에 있는 호텔 전화기로 카운터에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나 이내 성유리는 에릭이 이미 전화기 선을 끊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전화기는 먹통이었고 게다가 성유리 개인 핸드폰도 사라졌다.‘도대체 내 핸드폰은 언제 가져간 거야?’성유리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박한빈의 핸드폰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성유리의 핸드폰까지 몰래 빼간 에릭이 박한빈의 핸드폰을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너무도 화가 나 주저앉은 성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두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물었다.한참 뒤, 성유리는 결심한 듯 침대맡으로 다가가 박한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박한빈 씨.”그는 끓는 열 때문에 추워졌는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성유리는 그날 처음으로 박한빈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전혀 마음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잠에 빠져있는 박한빈을 있는 힘껏 밀며 소리 질렀다.“당장 일어나요
성유리는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아 약과 물을 계속 건네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빨리 약 드시라고요.”그녀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어있었고 말투 또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박한빈은 멍하니 그런 성유리를 바라보다 주인 말을 잘 듣는 순한 강아지처럼 약을 건네받고는 입안에 넣었다.금방 물을 컵에 따른 성유리조차 그 물이 너무 차갑다고 느꼈지만 박한빈은 내색하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버렸다.“누워요. 다시 주무세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넌 갈 거야?”그녀는 지금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상태인지 아니면 해롱해롱한 상태인지 구분이 안 갔지만 그의 물음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막 터져 나왔다.“당신의 좋은 친구분이 저를 방안에 가둬버렸어요. 게다가 제 핸드폰이랑 박한빈 씨 핸드폰까지 다 가져갔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떠나죠?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되나?”박한빈은 한꺼번에 울분을 토해내듯 말하고 있는 성유리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그녀의 말을 애써 이해하려는 어린아이처럼.한참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떠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그러자 안심이 된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해열제의 효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박한빈의 열이 다 내려갔지만 성유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왜냐하면 아직 워터파크에 하늘이와 연정우가 있으니 말이다.‘나를 못 찾으면 불안해할 텐데. 많이 걱정하고 있으려나?’그리고 에릭이 한 말들과 행동을 돌이켜보면 성유리가 박한빈을 챙겨주기만 하면 풀려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성유리도 없이 에릭이 연정우와 마주친다면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겠는가?하지만 사실 성유리는 지금 에릭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에릭은 연정우라는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그때, 연정우가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성유리 씨 찾으십니까? 죄송한데 지금 유리 씨는 전화 받을 시간이 없어서요.”“누구시
...박한빈은 자기가 몇 시간을 잤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머리는 계속 휭 한 상태였고 올려다본 천장은 빙글빙글 돌았다. 어떨 때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주위의 공기마저 차게 느껴졌지만 또 어떨 땐 사막을 걷는 듯 너무 더웠다.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박한빈은 어렴풋이 성유리를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성유리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그 손을 피해버렸고 성유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박한빈은 뻗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마에 붙이고 있는 해열패치는 이미 그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로 변해갔다.온몸은 금방 씻은 듯 푹 젖었는데 정말 사막이라도 걷다 온 사람 같아 보였다.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던 박한빈은 방 안에 있는 작은 소파에 누군가 샤워가운을 덮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창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방을 비추자 박한빈은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기다린 속눈썹과 하얀 피부, 그리고 늘 그렇듯 도톰하고 예쁜 입술.박한빈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한참 동안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오늘이... 보름 아닌가?’망설이던 박한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그렇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박한빈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금방 깨어난 성유리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먼저 입을 열었다.“깨셨어요?”박한빈이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유리가 지금 살짝 기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 착각이 오래가기도 전에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빨리 에릭 씨한테 연락하셔서 저 좀 풀어달라고 하세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멍해졌다. 마
방안에는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성유리는 이미 박한빈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지 소파에 앉아 입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마치 문이 열리기만 하면 당장 뛰쳐나갈 사람처럼.박한빈은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얼른 샤워부터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욕실로 들어가는 순간 성유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걱정되었다.비록 성유리가 떠날 수만 있다면 진즉에 떠났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지금 방문이 잠긴 상태라는 것도 알지만 박한빈은 움직이기 싫었다.펄펄 끓던 열이 내려가자 박한빈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지만 잠에 들기는 싫어 침대에 기대앉은 채로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봤다.“연정우 씨랑 결혼하려고?”박한빈이 침묵을 깨뜨리며 성유리에게 물었다.둘만 있는 호텔 방에서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대답하기를 거절하는 건가?’박한빈은 흠칫하기만 할 뿐 대답 없는 성유리를 보다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유리야, 난 네가 아예 모르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사람이 말이야, 인품이 보증만 되고 너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되지. 안 그래? 근데 연정우 씨는... 그 사람은 아니지 않나? 너도 알잖아.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짓을 했는지.”“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성유리가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물었다.“어떤 일은 지나간 거라고 해서 정말 지나간 게 아니잖아. 아니야? 그럼...”말을 하던 박한빈이 순간 뚝 멈췄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 자신이 이런 말들을 더 늘어놓는다면 미련해 보이고 멍청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기에.이미 했었던 말과 들었던 답을 반복해 듣는 것 또한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슬쩍 쳐다보고는 대답했다.“전 그냥 지나간 거면 지나가게 놔둘래요. 그리고 하늘이가 정우를 많이 좋아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죠. 정우라면 우리 하늘이가 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줄
유리 조각이 땅에 떨어져 내는 큰 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성유리를 강제로 가둬두었던 그 방문도 드디어 스르르 열렸고 그제야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전부터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눈치 차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지금껏 모르는 척 성유리를 가둬두었고 그 사실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휙 쳐다보았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자신의 외투를 다 챙겨 입은 상태였고 성유리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은 채로 빠르게 방을 떠나갔다.에릭 또한 방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듣고 내려와 입구에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방안을 쳐다보고 있었다.심지어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에릭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까지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에릭을 상관하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에릭은 재빨리 박한빈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어떻게? 왜? 내가 얼마나 좋은 기회랑 조건을 줬는데!”에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말 의아하다는 눈으로 박한빈을 쳐다봤다.“그래. 고맙다.”박한빈은 입으로 고맙다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말해 에릭을 귀찮아하는 듯 대충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았다.“근데 앞으로 이런 건 하지 마.”에릭은 그제야 박한빈이 지금 자신을 거들떠보기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박한빈의 말에 반박했다.“나는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런 줄 알아? 난 여기 휴가를 즐기러 왔다고. 근데 이게 뭐야? 괜히 이런 일에 엮이기나 하고.”에릭의 말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나 있었지만 박한빈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가기만 했다.그러자 에릭은 더 이상 궁금해 참지 못하겠는지 빠른 걸음으로 박한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그래서 결과는? 두 사람...”“나랑 유리는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쓸데없는 일 하지 마.”‘쓸데없는 일?’박한빈의 말에 에릭이 화가 나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네가 그
연정우는 아주 평온하게 묻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약간의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약간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나도 알아.”연정우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너랑 박한빈 씨 사이를 남들이 모를 수는 있어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무조건 너를 속여서 그 방까지 데려간 거지? 그리고 너도 하늘이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난 너 믿어.”연정우는 담담한 말투로 성유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말해 그녀의 어깨를 무거운 “돌”로 짓누르고 있었다.“너도 밤 샜지?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계속 말했다.“나도 이만 가볼게.”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정우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갑자기 성유리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너무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연정우는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놀랐어?”그는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는데 그 조롱이 스스로를 향한 건지 아니면 성유리를 향한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성유리는 연정우의 물음에 침묵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정우가 먼저 입을 뗐다.“걱정하지 마. 너한테 뭐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얼른 가서 푹 쉬어.”말을 마친 연정우는 뒤돌아 방을 떠나갔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침실로 돌아갔고 안에서는 하늘이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 많이 불안한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인형을 꽉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한참 뒤, 천천히 침대에 누워 하늘이를 끌어안았다.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성유리는 박한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에릭도 종적을 감춰버렸다.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더 자유롭고 신나게 아이와 시간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물건이에요? 그거 엄청 비싼 브랜드예요. 정말 비싸다고요. 제가 특별히...”“그러니까! 그렇게 의도가 뻔히 보이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주면 어떡해? 나 진짜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고.”성유리는 이를 악물고 사하나의 말에 반박했다.“그땐 저도 시간이 없...”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멈칫하더니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니, 언니가 어떻게 그 브랜드 물건이 뭔지 아세요? 쯧, 언니도 역시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네요.”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말문이 막혀 빨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를 살짝 째려보고는 한 마디 내뱉었다.“너랑 아무 말도 안 할 거야.”“안 돼요. 언니 아직 저한테 해줄 말이 많이 남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연 대표님이랑...”“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것도.”사하나는 성유리의 간단한 대답에 처음엔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유리의 눈빛을 확인하는 순간,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정말 재미없어! 전 살면서 진짜 처음으로 남녀 둘이 같이 휴가까지 떠나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사례를 봤다고요.”사하나는 얼굴까지 새빨개진 채로 성유리에게 말했다.“우리 둘만 떠난 것도 아니잖아. 하늘이도 있었는데?”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물을 뿐이었다.“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래요?”사하나는 말하다 문득 다른 일이 떠올랐는지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따지듯 물었다.“설마 아직 박한빈 씨를 못 잊어서 그러세요?”“아니야.”“그럼 왜...”바삐 움직이던 성유리는 하던 행동을 뚝 멈추고는 사하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난 아직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어.”“그리고 넌 정말 나랑 정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당연하죠! 왜 안 어울리겠어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데! 게다가 언니도 전에 연 대표님이랑 결혼까지 할 뻔하셨다면서요. 좋아해서!”사하나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성유리는 왜 그때 당시 자신이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