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강유나는 회사 건물을 나섰다.

지금까지 조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일찍 나와봤자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결국 고민하다가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이 카페에서 사용하는 커피콩은 전부 브라질에서 공수해온 거라 커피 향이 진했고 그녀의 입맛에도 맞았다.

카페 사장이 강유나를 알아보고 직접 라떼 한잔을 내려주었다.

“오늘은 남자 친구랑 안 왔네요?”

‘남자 친구? 박현우를 말하는 건가?’

예전에 박현우와 자주 오긴 했었다.

강유나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젠 못 와요.”

“헤어졌어요?”

“죽었어요.”

“...”

강유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숟가락으로 라떼를 천천히 저었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자기야,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왜 이제야 받아?”

하주희였다. 이 큰 S시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라곤 하주희뿐이었다.

강유나의 목소리가 바로 다정해졌다.

“일이 있어서 못 들었어.”

“무슨 일인데? 박현우 그 인간쓰레기가 또 못살게 굴었어? 공적인 일을 처리해주는 건 그렇다 쳐도 시중까지 들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사람을 부려먹어도 적당히 부려먹어야지.”

그동안 하주희는 강유나가 박현우에게 어떻게 헌신했는지 똑똑히 보았기에 맨날 박현우를 인간쓰레기라 욕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진작 결혼해서 명분을 줬을 텐데.

예전에는 하주희가 너무 심한 독설을 내뱉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람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는 못살게 굴 일도 없어.”

“뭐야? 그 인간쓰레기가 드디어 명분을 준대? 드디어 재벌에 시집가는 거야? 자기야, 나 지금 당장 사표 낼 테니까 남은 인생 네가 먹여 살려줘.”

하주희는 마치 자신이 재벌에 시집간 것처럼 좋아했다. 강유나가 미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박현우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어. 내가 옆에 있어봤자 굴욕만 자초할 뿐이야.”

하주희가 소리를 질렀다.

“여자 친구라니? 여자 친구는 너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자식이 널 차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거야? 지금 속상해서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니지? 어디야? 내가 당장 그쪽으로 갈게.”

강유나가 물었다.

“일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일이 너보다 중요해? 대표가 자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뭐. 주소나 알려줘.”

강유나는 그녀에게 현 위치를 알려주었다. 솔직히 그녀도 지금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 그때 하주희가 문자를 보냈다.

[자기야, 길이 좀 막혔어. 5분 정도 더 가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강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에서 기다렸다. 불같은 성격을 지닌 하주희가 이따가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냅다 욕설부터 퍼부을까 봐 걱정되어 나왔다.

내성적인 강유나로서는 그런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밖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유나는 아침에 백화점에서 급하게 산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옅은 파란색 치맛자락이 종아리까지 내려와 다리에 생긴 멍을 마침 덮어주었다.

초가을의 가랑비라 그런지 날씨가 꽤 쌀쌀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빗속에서 가끔 차들이 지나갔다. 얇은 파란색 원피스만 입은 강유나는 마치 길옆에 피어난 한 송이 아이리스 같았다.

맞은편 술집의 VIP 룸에 있던 남자가 마침 그 모습을 보았다.

진시훈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6층 창가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옆에 있던 부동산 대표가 그에게 잘 보이려고 말을 걸었다.

“대표님 왜 안 드세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나요?”

“소화 좀 시키려고요.”

목소리가 차분해서 기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부동산 대표는 잠깐 생각하다가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자에게 눈짓했다.

여자는 바로 알아차리고 진시훈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녀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노래 한 곡 불러드릴까요?”

“풍경 좀 구경하고 이따가 불러.”

여자가 애교를 부렸다.

“밖에 구경할 풍경이 뭐가 있다고 그래요? 대표님, 풍경이 저보다 이쁜가요?”

진시훈이 고개를 돌렸다. 눈매가 길고 날카로웠고 눈가의 검은 점이 그의 잘생기고 귀티 나는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네가 더 예쁘지.”

진시훈은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삼키면서 흔들리는 목젖이 참으로 섹시했다.

그의 칭찬에 여자는 마음이 설레어 심장이 쿵쾅거렸고 부동산 대표도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평소 진시훈에 대한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았다. 조각처럼 완벽한 비주얼과 달리 하는 행동은 미치광이가 따로 없었다.

변덕스러운 성격에 잔인하고 매정하기까지 해서 쉽게 어울릴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 그런 사람이 진씨 가문의 권력자다.

S시는 원래 박씨 가문의 천하였고 진씨 가문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그런데 갑자기 혼외자식인 진시훈이 나타났다. 다른 가문과 달리 정규 교육이나 훈련을 거치지 않은 그가 진씨 가문을 물려받게 되었다.

진시훈은 진씨 가문을 물려받은 후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해성 그룹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그 결과 짧은 몇 년 사이에 해성 그룹을 발아래로 짓밟았다.

지금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긴 했지만 절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이 같은 자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동산 대표는 진시훈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리 없었다.

“아름이 여기서 노래를 제일 잘해요. 대표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위층에 룸이 있는데 어떻게...”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진시훈이 돌아서더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그렇게 굶주린 것처럼 보여요?”

부동산 대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태도가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 알지 못했다.

“농담도 참. 그 뜻이 아니에요.”

진시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슬쩍 밀었다.

여자는 앞으로 몇 걸음 움직이다가 부동산 대표의 품에 와락 안겼다.

진시훈은 이미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일 얘기만 해요. 이런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하고.”

...

카페가 상권의 중심에 있어 일반 택시는 출입금지였다.

강유나가 한참을 더 기다려서야 다급하게 달려오는 하주희를 보았다.

“자기야...”

하주희는 그녀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더니 소리 내어 울었다.

강유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카페 손님들의 이상한 눈빛에 그녀를 괜히 부른 건 아닌지 후회마저 들었다.

하주희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됐어. 괜찮아, 괜찮아... 그 자식은 인간도 아니야. 널 차버린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손찌검까지 할 수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칼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이기진 못해도 뱃가죽이라도 확 찔렀어야 했어.”

“얼굴 상처는 박현우가 때린 게 아니야... 일단 돌아가자.”

하주희가 눈물을 쓱 닦았다.

“그래.”

두 사람이 비를 맞으면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한 점잖게 생긴 남자가 두 사람에게 우산을 건넸다.

“비도 세게 오는데 이 우산 쓰세요.”

강유나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누구시죠?”

“저희 대표님이 마침 이곳에 일 보러 왔다가 여자 두 분이 속상하게 우는 걸 보고 우산을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남자는 강유나와 하주희가 괜한 오해를 할까 봐 우산만 건네주고 가버렸다.

하주희가 하도 울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께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복 받으실 겁니다.”

강유나와 하주희가 우산을 쓰고 간 후에야 진시훈은 벤틀리 뒷좌석의 유리창을 닫았다.

양지성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표님, 저 두 분을 아시나요?”

“응. 파란색 옷을 입은 여자를 알아.”

양지성이 기억을 더듬었다.

‘얼굴이 예쁘고 피부도 하얀 게 미인이긴 했어. 혹시 대표님이 예전에 만났던 여자인가?’

대놓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죽을 각오까지 하고 물었다.

“혹시 예전에... 만났던 여자예요?”

진시훈이 예쁜 두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면서 방자하게 웃었다.

“배은망덕한 계집애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