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하지만 강서욱은 따라왔다.“강유나 씨는 어차피 닳고 닳은 여자잖아. 박현우랑 그렇게 오래 자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그냥 나랑 만나. 한 달에 6천만 원 줄게.”“꺼져!”“1억? 하아, 설마 자신이 2억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는 입술을 핥으며 강유나에게 다가왔다.“2억도 좋아. 하지만 좀 더 자극적인 걸 해야겠지. 네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짝!강서욱의 뺨에 강력한 따귀가 작렬했다.“내 앞에서 꺼지라고 했어! 여긴 CCTV도 있으니까 당장 꺼지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강서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칫, 성깔 하나는 대단하네. 내가 겁먹을 줄 알아?”그가 강유나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다음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뭐 하는 짓이야!”하주희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빠르게 달려왔다.모니카도 뒤따라와서 바로 말했다.“강서욱 씨, 그만 손 놓으시는 게 좋겠어요. 강유나 씨는 진 대표님께서 직접 드레스 피팅을 위해 저에게 맡기신 분입니다.”진시훈의 이름이 나오자 강서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그는 천천히 강유나의 손목을 놓고는 비웃듯 말했다.“대단해. 박현우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를 찾다니. 인기가 대단하셔~”강유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걱정 마. 어떻게든 네 차례는 안 올 테니까.”“말은 그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야.”강서욱은 목소리를 낮추고 비꼬는 투로 말했다.“강서윤 씨, 그 행운이 영원하길 빌어. 내 손에 걸리지 않도록.”말을 마치자 그는 음흉하게 웃고는 떠났다.그가 가자 하주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자기야, 방금 그 변태가 가면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분해서 하는 말이었어.”“강제로 안 되니까 분풀이하는 거야?”하주희는 모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방금 그 인간 말종은 도대체 누구예요?”모니카가 말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안수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 익숙한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몸을 기대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사람 유나 언니 아니야? 역시 예쁜 사람은 어디서든 인기가 많네. 진화의 대표님이 감싸주더니 이젠 또 새로운 구애자인가 봐.”박현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안수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현우야, 왜 그래?”“아니야, 내리자.”안수지는 순순히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모니카가 다가왔다.“박 대표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떻게 오셨어요?”“여자친구에게 드레스를 골라주려고요.”그는 안수지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모니카는 안수지에게 시선을 두고 몇 마디 칭찬한 후 그녀를 데리고 전용 피팅룸으로 안내했다.이곳의 피팅룸은 모두 넓은 공간에 전담 직원이 서비스를 제공했다.박현우는 따라가지 않고 강서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강서욱은 섹시한 모델을 데리고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매장을 나서려던 참이었다.“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는 건성으로 인사했다.박현우는 손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강유나랑 무슨 사이지?”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무슨 사이냐고? 예쁘니까 좀 알아가고 싶어서요. 안돼요?”박현우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그녀에게서 떨어져.”“참 이상하네요. 박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설마 강유나가 대표님 소유물이라도 되는 건가요? 이젠 해성도 다 떠났는데 다른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시겠다?”“감히 그녀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그럼 한번 해 보시죠.”강서욱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과연 누가 누굴 죽이는지 보자고요!”“현우야...”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수지는 흰색 드레스를 들고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박 대표님, 여자친구가 저기 계시네요. 주제 파악 잘하시고 오지랖 부리지 마세요.”그는 모델을 껴안고 의기
강유나는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변태를 만난 것이다.그녀는 오늘 야근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열쇠를 꺼내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입과 코를 막았다.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비상계단으로 끌려갔다.뒤에서 남자의 불쾌한 숨결이 느껴졌다.“향기 좋네.”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뱀처럼 그녀를 휘감았다.극도의 공포 속에서 강유나는 남자를 껴안고 계단 아래로 굴렀다.다행히 그녀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지만 변태는 머리를 다쳐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그 덕에 그녀는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경찰서에서 조서를 마친 후, 강유나는 혼자 병원으로 왔다.그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몇 시간 전에 박현우에게 보낸 문자는 답장 없이 덩그러니 그대로 남아 있었다.“강유나 씨?”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유나가 고개를 들어보니 박현우의 비서 서진호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무슨 일 있으셨어요?”“조금 골치 아픈 일이 있어요.”강유나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서진호의 뒤에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한 가녀린 여자가 검은 정장을 입은 박현우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큰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모습은 누가 봐도 그녀를 지켜주는 듯했다.박현우도 그녀를 알아보았다.“어쩌다 이 꼴이 된 거야?”평소에는 능숙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여자였지만 지금은 긴 머리가 헝클어져 어깨에 흩어져 있었고 흰색 정장에는 핏자국과 먼지가 묻어 있었으며 하얀 이마에는 찰과상의 흔적까지 있었다.강유나가 고개를 돌렸다.“문자 보냈는데 못 봤어?”“무슨 문자?”그가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안수지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현우야, 나 좀 아파.”박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의사한테 검사받으러 가자.”그러고는 한마디 던지고 가버렸다.“진호야, 유나 좀 챙겨줘.”강유나는 내내 시선을 드리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유나는 자취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호텔을 잡았다. 욕실에서 하얀 피부가 벌겋게 될 때까지 때를 벅벅 민 다음에 침대에 누웠다.웜톤의 침대 스탠드를 켜고 얇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움츠렸다.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하지만 밤새 편히 자지 못하고 이런저런 꿈에 시달렸다.소년 시절의 박현우가 꿈에 나타나 강유나의 앞을 막아서면서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또 어두운 복도에서 낯선 남자가 그녀를 꽉 잡고 탐욕스럽게 냄새를 맡는 꿈도 꾸었다.마지막에는 안수지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안수지는 박현우의 품 안에서 옷깃을 잡고 비아냥거렸다.“강유나 씨는 한 마리 개 같아요.”오전까지 꿈에 시달리다가 전화 한 통에 잠에서 깼다. 전화를 받자마자 남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죽 좀 만들어서 회사로 가져와.”강유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지금 만들기엔 늦었어.”“월급 깎지 않을 테니까 늦게 와도 돼.”그녀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위병을 앓는 박현우는 위병이 도질 때마다 강유나가 만든 죽을 먹곤 했다.강유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씻은 후 호텔 밑에 있는 가게에 들러 죽을 산 다음 회사로 가져갔다.해성 그룹은 시 중심의 금싸라기 땅에 위치해있다.본사의 고층건물이 구름을 뚫고 높이 솟아있었고 대표 사무실은 26층이었다. 대표의 수석비서인 강유나는 하도 자주 다녀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였다.오늘 회사로 들어왔을 때 왠지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동료들이 한창 귓속말로 수군거리다가 강유나를 보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강유나는 기분이 찝찝하기만 했다. 평소 그녀와 가깝게 지내던 동료가 다가와서 말했다.“유나 씨, 대표님 사무실에 여자 직원이 한 명 늘었어. 새로 들어온 인턴 비서라고 하더라고...”강유나는 뭔가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박현우의 사무실로 빠르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커다란 사무실에 햇볕이 아주 잘 들었는데
강유나는 회사 건물을 나섰다.지금까지 조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일찍 나와봤자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결국 고민하다가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이 카페에서 사용하는 커피콩은 전부 브라질에서 공수해온 거라 커피 향이 진했고 그녀의 입맛에도 맞았다.카페 사장이 강유나를 알아보고 직접 라떼 한잔을 내려주었다.“오늘은 남자 친구랑 안 왔네요?”‘남자 친구? 박현우를 말하는 건가?’예전에 박현우와 자주 오긴 했었다.강유나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젠 못 와요.”“헤어졌어요?”“죽었어요.”“...”강유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숟가락으로 라떼를 천천히 저었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자기야,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왜 이제야 받아?”하주희였다. 이 큰 S시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라곤 하주희뿐이었다.강유나의 목소리가 바로 다정해졌다.“일이 있어서 못 들었어.”“무슨 일인데? 박현우 그 인간쓰레기가 또 못살게 굴었어? 공적인 일을 처리해주는 건 그렇다 쳐도 시중까지 들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사람을 부려먹어도 적당히 부려먹어야지.”그동안 하주희는 강유나가 박현우에게 어떻게 헌신했는지 똑똑히 보았기에 맨날 박현우를 인간쓰레기라 욕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진작 결혼해서 명분을 줬을 텐데.예전에는 하주희가 너무 심한 독설을 내뱉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람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걱정하지 마. 이제는 못살게 굴 일도 없어.”“뭐야? 그 인간쓰레기가 드디어 명분을 준대? 드디어 재벌에 시집가는 거야? 자기야, 나 지금 당장 사표 낼 테니까 남은 인생 네가 먹여 살려줘.”하주희는 마치 자신이 재벌에 시집간 것처럼 좋아했다. 강유나가 미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박현우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어. 내가 옆에 있어봤자 굴욕만 자초할 뿐이야.”하주희가 소리를 질렀다.“여자 친구라니? 여자 친구는 너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자식이 널 차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거야? 지금 속상해서 혼자 울고 있는
“가뜩이나 속상해하는 애를 때리기까지 한 줄 알고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박현우가 여자한테 손찌검까지 할 정도로 인간쓰레기라 생각했어.”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야 하주희는 눈물을 멈췄다.“근데 걔도 잘한 게 없어. 변태를 만났다는데도 어떻게 내연녀랑 같이 있을 수 있어? 그런 인간쓰레기는 남자 구실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안수지는 박현우 여자 친구야.”“여자 친구는 개뿔. 걔가 여자 친구면 그럼 넌 뭔데?”강유나의 청순한 얼굴에 쓸쓸함이 드리워졌다.“그러게. 난 뭘까? 관심이 없는 애완동물 정도겠지.”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애완동물 말이다. 그녀를 버릴 땐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됐어. 이젠 그 인간쓰레기 얘기는 꺼내지도 마. 십 년 넘게 죽 쒀서 개 줬다고 생각해. 이 세상에 널린 게 남자인데 남자 하나 못 만나겠어?”강유나가 피식 웃었다.‘지금 다른 남자를 만날 기분이 어디 있다고.’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비에 절반 젖은 옷을 벗고 샤워했다. 샤워를 마친 후에는 젖은 머리를 닦으면서 침대에 앉았다.평소에도 하주희네 집에 자주 와서 자곤 했다. 갈아입을 옷과 생활용품도 다 있어 무척이나 편했다.침대 위에 놓은 휴대폰이 울렸는데 서진호가 보낸 문자였다.[강유나 씨, 대표님 오늘 오후에 협력 회의가 있는데 강유나 씨도 함께 가야 하니까 얼른 회사로 나오세요.]강유나는 휴대폰을 들고 문자를 작성한 후 발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버리고 침대에 누웠다.어젯밤에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가 오늘 박현우에게 상처까지 받아서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였다.이불을 덮자마자 하주희가 욕실에서 걸어 나오며 휴대폰을 들고 투덜거렸다.“우리 회사 대표는 왜 자꾸 어디 있냐고 묻고 난리야? 내가 분명 급한 일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질 않아?”“주희야, 바쁘면 가서 일 봐”“안 바빠. 네 옆에 있을 거야.”하주희도 이불을 덮고 그녀 옆에 누웠다.“자기야, 네가 지금 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속이
박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안수지를 보고는 분노를 가라앉혔다.“네 잘못이 아니야.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현우야...”안수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박현우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만약 강유나가 있었더라면 절대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혼자 묵묵히 인정하고 수정한 다음 만회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회사로 돌아온 박현우는 저녁도 먹지 않고 직접 협력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몇 시간 동안 설득한 끝에 다니엘은 드디어 그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 양측은 며칠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일을 해결하고 나니 박현우의 기분도 한결 나아진 듯했다. 사무실을 나간 그때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안수지를 발견했다.“현우야, 어떻게 됐어?”“해결했어.”“정말? 너무 잘됐다. 역시 넌 참 대단해.”안수지의 두 눈이 빛이 날 정도로 반짝였다. 그 모습에 박현우의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그는 안수지가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좋아했다. 이건 여자가 남자에 대한 가장 좋은 칭찬이니까.하지만 강유나에게는 이런 눈빛이 없었다. 늘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투정을 부리는 법이라곤 없었다.하늘이 무너져도 그의 품에 숨어서 우는 게 아니라 함께 헤쳐나갈 성격이었다. 너무 냉정해서 오히려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쉬어.”박현우는 안수지의 손을 먼저 잡았다. 안수지는 기쁨에 겨워하며 박현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현우가 그녀를 별장으로 데려가진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운전기사에게 그냥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홀로 마이바흐를 운전하여 별장으로 돌아왔다.샤워를 마치고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속이 쓰려 깨고 말았다. 위병이 도진 것이었다.저녁을 먹지 않은 데다가 연속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바람에 위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가 도우미 방의 벨을
강유나는 택시를 타고 해성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하주희의 전화를 받았는데 어디냐고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러자 하주희는 친구끼리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해야 한다면서 박현우를 상대하러 무조건 오겠다고 했다.강유나는 그녀를 말리다 못해 그냥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한 시간 후 택시가 해성 그룹 앞에 멈춰 섰다.햇살이 우뚝 솟은 건물을 비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예전에 해성 그룹 본사는 이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5년 전 이 건물이 준공된 그날 박현우는 기분 좋은 나머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강유나는 그런 그의 곁을 지켰다.커다란 통유리 앞에서 야경을 감상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박현우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뭘 보고 있어?”“여기서 보면 야경이 엄청 예뻐.”“나랑 이렇게 예쁜 야경을 볼 자격이 있는 여자는 너밖에 없어.”그러고는 강유나의 볼에 키스했다.“유나야, 평생 내 옆에 있어 줘.”강유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해성 그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탄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진화 그룹의 인사팀에서 보낸 문자였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강유나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고 26층에서 내린 다음 곧장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 안, 박현우는 다리를 꼰 채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걸 보니 오래전부터 그녀를 기다린 듯했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다가가 A4 용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사직서 프린트해서 가져왔어. 인사팀에 가서 절차 마무리할 테니까 사인해.”박현우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언제까지 억지 부릴 거야?”“억지? 내가 지금 억지 부리는 거로 보여?”“수지가 네 일에 끼어드는 게 싫다면 수지한테 다른 쉬운 일 맡길 테니까 넌 계속 수석비서 자리에 있어. 걔가 널 방해할 일은 없을 거야.”박현우는 자신이 충분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안수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 익숙한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몸을 기대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사람 유나 언니 아니야? 역시 예쁜 사람은 어디서든 인기가 많네. 진화의 대표님이 감싸주더니 이젠 또 새로운 구애자인가 봐.”박현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안수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현우야, 왜 그래?”“아니야, 내리자.”안수지는 순순히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모니카가 다가왔다.“박 대표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떻게 오셨어요?”“여자친구에게 드레스를 골라주려고요.”그는 안수지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모니카는 안수지에게 시선을 두고 몇 마디 칭찬한 후 그녀를 데리고 전용 피팅룸으로 안내했다.이곳의 피팅룸은 모두 넓은 공간에 전담 직원이 서비스를 제공했다.박현우는 따라가지 않고 강서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강서욱은 섹시한 모델을 데리고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매장을 나서려던 참이었다.“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는 건성으로 인사했다.박현우는 손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강유나랑 무슨 사이지?”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무슨 사이냐고? 예쁘니까 좀 알아가고 싶어서요. 안돼요?”박현우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그녀에게서 떨어져.”“참 이상하네요. 박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설마 강유나가 대표님 소유물이라도 되는 건가요? 이젠 해성도 다 떠났는데 다른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시겠다?”“감히 그녀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그럼 한번 해 보시죠.”강서욱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과연 누가 누굴 죽이는지 보자고요!”“현우야...”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수지는 흰색 드레스를 들고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박 대표님, 여자친구가 저기 계시네요. 주제 파악 잘하시고 오지랖 부리지 마세요.”그는 모델을 껴안고 의기
강유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하지만 강서욱은 따라왔다.“강유나 씨는 어차피 닳고 닳은 여자잖아. 박현우랑 그렇게 오래 자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그냥 나랑 만나. 한 달에 6천만 원 줄게.”“꺼져!”“1억? 하아, 설마 자신이 2억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는 입술을 핥으며 강유나에게 다가왔다.“2억도 좋아. 하지만 좀 더 자극적인 걸 해야겠지. 네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짝!강서욱의 뺨에 강력한 따귀가 작렬했다.“내 앞에서 꺼지라고 했어! 여긴 CCTV도 있으니까 당장 꺼지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강서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칫, 성깔 하나는 대단하네. 내가 겁먹을 줄 알아?”그가 강유나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다음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뭐 하는 짓이야!”하주희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빠르게 달려왔다.모니카도 뒤따라와서 바로 말했다.“강서욱 씨, 그만 손 놓으시는 게 좋겠어요. 강유나 씨는 진 대표님께서 직접 드레스 피팅을 위해 저에게 맡기신 분입니다.”진시훈의 이름이 나오자 강서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그는 천천히 강유나의 손목을 놓고는 비웃듯 말했다.“대단해. 박현우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를 찾다니. 인기가 대단하셔~”강유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걱정 마. 어떻게든 네 차례는 안 올 테니까.”“말은 그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야.”강서욱은 목소리를 낮추고 비꼬는 투로 말했다.“강서윤 씨, 그 행운이 영원하길 빌어. 내 손에 걸리지 않도록.”말을 마치자 그는 음흉하게 웃고는 떠났다.그가 가자 하주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자기야, 방금 그 변태가 가면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분해서 하는 말이었어.”“강제로 안 되니까 분풀이하는 거야?”하주희는 모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방금 그 인간 말종은 도대체 누구예요?”모니카가 말했다.
다음 날은 마침 주말이었다.강유나는 원래 진시훈과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갈 예정이었지만 진시훈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아침 일찍 해외로 출국하게 되었다.그는 전화로 담당자를 이미 연결해 놓았으니 혼자 가면 된다고 말했다.마침 하주희가 쇼핑하자며 찾아왔기에 강유나는 그녀와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갔다.담당자인 모니카는 혼혈이었는데, S 시 브랜드 대리인일 뿐만 아니라 패션 잡지 회사 사장이기도 했다.많은 연예인이 그녀의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강유나를 보자마자 모니카는 칭찬했다.“강유나 씨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여자 연예인들보다 훨씬 빛이 나요!”강유나는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이때 옆에 하주희는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죠. 우리 유나는 원래 이렇게 예쁘답니다. 유나의 절친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요.”강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하주희는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자기야, 진심이야. 아, 내가 왜 남자가 아닐까?”“네가 남자였으면 감방에 넣어줬을 거야.”“차마 그러진 못 하겠지~”하주희는 강유나에게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자기야, 얼른 들어가서 입어 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 기대할게!”맞춤 제작된 몇 벌의 드레스는 명품 C 브랜드의 예약 판매 상품이었다.진시훈도 어떻게 구했는지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공수해 온 것이었다.모니카는 커튼을 치고 직접 강운희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왔다.드레스를 다 입은 강유나는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어때?”하주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유나야, 너무 예뻐! 자선 만찬회가 시작되면 넌 분명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거야!”말을 마친 하주희는 턱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었다.“그 자리엔 재계, 정계 거물들이 다 모일 테니 그 쓰레기 박현우도 분명 있겠지...”그녀는 마치 박현우가 후회하며 벽에 머리를 박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생각만 해도 통쾌했다.강유나는 거울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 본
박 씨 저택에서.박현우는 막 욕실에서 나왔다.샤워를 하고 나니 화가 좀 누그러졌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가 무심코 전화를 받자 안수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현우야, 아까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좀 일이 있어서 못 받았어.”“할머니는 좀 어때?”안수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내일 뭐 좀 사서 할머니 보러 갈까?”박현우는 옆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고개를 숙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필요 없어. 할머니는 유나를 보고 싶어 하셨는데, 오늘 만났으니 많이 좋아지셨어.”안수지는 침묵했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현우야, 할머니도 나를 싫어하시는 거야? 어머니랑 여동생도 싫어하는데 이제 할머니까지... 왜,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그녀는 박현우의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 “그들이 싫어하면 싫어하는 거지. 너랑 만나는 건 나잖아.”“그래서... 현우야, 넌 나를 좋아하는 거지?”박현우는 “좋아해”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짧게 대답했다.“어.”안수지의 목소리는 금세 밝아졌다.“현우야, 너만 나 좋아해 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바로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정민호의 문자였다.그가 보낸 사진을 열어보는 순간, 박현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사진에는 강유나와 진시훈이 있었다.두 사람은 로맨틱한 프랑스 레스토랑 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는데 정민호의 사진 촬영 각도 때문인지 레스토랑의 조명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다정해 보였다.안수지는 계속해서 재잘거렸지만 박현우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건성으로 몇 마디 대꾸한 후 전화를 끊었다.그가 초조하게 담배를 비벼 끄며 장소를 물어보려던 참에 정민호의 문자가 다시 도착했다.[형, 올래? 유나가 진짜 진시훈한테 넘어갈 것 같아!]박현우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그는 문자를 보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강유
박현우는 옆에 있는 마이바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손이 아팠다.벤틀리 안에서 강유나는 조수석에 앉아 티슈로 빗물을 닦고 있었다.차가 얼마쯤 달린 후, 진시훈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서 부드러운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걸로 닦아.”“고마워요.”강유나는 작은 담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그러다가 담요를 내려놓을 때에야 차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고개를 돌리니 진시훈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몸을 돌려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강유나는 손을 멈췄다.“대표님?”“유나야, 너 소문과 좀 다른데.”진시훈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박현우를 끔찍이 사랑한다더니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아.”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저도 사람이에요.”그녀에게도 최소한의 기준, 자존심, 마음이 있었으니 박현우가 계속 짓밟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진시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넌 사람이지만 박현우는 아니지.”“...”그는 욕하는 데 능숙해서 강유나도 어떤 면에서는 익숙해져 있었다.그녀가 물었다.“대표님은 왜 아직 여기에 계셨어요?”“할머니 뵙고 바로 간다고 했잖아. 나도 오늘 별일 없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진시훈은... 일부러 나를 기다렸다고?’강유나는 미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대표님, 저녁 식사할 생각 있으세요? 만약 있다면, 우리...”“있어.”진시훈은 고개를 돌렸다. 깊은 눈동자가 유난히 아름다웠다.“뭘 먹으러 갈까?”강유나: “오늘은 대표님 생일이니까 대표님이 골라요.”...30분 후, 벤틀리는 프랑스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강유나는 진시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실내 조명은 은은했고 중앙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우아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명백히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였다.그녀는 무심코 진시훈을 바라보
할머니가 주무시고 나서야 둘은 방을 나왔다.문을 닫자마자 강유나는 박현우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 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왜 그래? 내가 뭐 더러운 거라도 되는 것처럼?”“할머니 앞에서만 그런 척한 거였어. 이제 할머니께서 주무시니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강유나는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박현우도 따라갔다.“어디 가?”“돌아갈 거야.”“이렇게 늦었는데?”“내 일이니까 신경 꺼.”강유나는 단호하게 걸어갔다.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 씨 아주머니가 기장 떡과 탕수육을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유미진은 소파에 앉아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안고 비꼬듯 말했다.“어머님께서 시키신 거니까 먹어.”강유나: “괜찮아요. 저녁은 이미 먹었어요.”“안 먹겠다면 말고. 내가 정말 네 같은 배은망덕한 계집애를 붙잡고 싶은 줄 아냐?”“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도 오지 않았을 거예요.”“뭐라고?!”유미진은 눈을 부릅떴다.“유나야, 이젠 기가 붙었구나? 감히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장 나가!”강유나는 돌아서 나갔다.밖에는 언제부터인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촉은 차갑고 따가웠다.그녀는 별장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뒤에서 갑자기 두 개의 자동차 전조등이 밝게 비추었다.박현우의 차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가고 그의 짜증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타!”강유나가 차갑게 말했다.“됐어. 택시 타고 갈 거야.”“여기서 무슨 택시를 타? 유나야,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타!”강유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현우는 주먹을 쥐었다.그는 강유나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그런 황소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고칠 줄도 모르는지.박현우는 쫓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강유나가 돌아보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빗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려 그러잖아도 아름다운
“할머니, 아줌마.”유미진은 그녀를 흘끗 보고 차갑게 응수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반가워했다.“유나 왔구나! 어서 와, 얼굴 좀 보자!"강유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침대 옆에 앉았다.“거의 일 년 만이네. 유나야, 살 빠졌어.”할머니는 유미진에게 분부했다.“아주머니에게 유나가 좋아하는 기장떡하고 탕수육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해. 많이 먹고 살 좀 찌워야겠어.”유미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결국 유미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강유나는 할머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할머니, 어쩌다 또 편찮으세요?”“아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병도 다 나은 것 같구나.”“그래도 몸조심하세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먹고 싶은 건 없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할머니는 강유나의 손을 잡았다.“유나야,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말해보렴. 왜 해성에서 나왔니? 혹시 현우 그 녀석이 널 괴롭혔어?”강유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아니요, 제가 스스로 해성을 나온 거예요.”“왜? 너는 항상 현우를 좋아했잖니?”“저...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잘해줘서 저도 계속 잘해준 것뿐이에요. 단지 일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어서 해성을 나온 거고요.”“그러니까 너희 둘 사이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거니?”할머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강유나가 할머니의 등을 토닥여 드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박현우가 할머니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할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이렇게 걱정하시면 안 돼요. 나와 유나 사이에는 아무 문제 없어요.”할머니의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정말이냐?”“네. 젊은 연인들끼리 다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할머니도 저희 싸우는 거 많이 보셨잖아요. 다 금
박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강유나를 챙겨준 어른은 박현우 할머니뿐이었다.그런데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다가 결국에는 경치 좋은 요양원으로 가셨다.비록 곁에 계시진 않지만 강유나의 생일 때마다 할머니는 선물을 보내주곤 했다.강유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진시훈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무슨 일이야?”강유나는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대표님, 저녁 식사는... 나중에 다시 할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생겼어요.”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왔기에, 강유나는 이번에 가지 않으면 다시는 뵙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그랬다간 평생 자책하며 살 것 같았다.하지만 오늘은 진시훈의 생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진시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어디 가는 건데? 데려다줄게.”강유나는 다소 놀랐다.“화 안 나세요?”“아니.”진시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고귀한 얼굴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고 또 바람을 맞혔지만 난 성격 좋으니까 화 안 나.”강유나: “...”분명히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진시훈은 강유나가 알려준 길을 따라 박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에 그녀를 데려다주었다.그는 눈앞의 저택을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드리웠다.“어쩐지 길이 점점 익숙하다 했더니 박 씨 저택이잖아. 그럼 아까 그 전화는 박현우였어?”강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진시훈은 별다른 말 없이 차 문 잠금장치를 풀었다.“내려.”강유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차창을 두드렸다.진시훈은 담배를 꺼내려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어둑한 불빛에 반쯤 가려진 옆얼굴은 더욱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그는 차창을 내렸다.“왜 그래?”“내가 여기에 온 건 현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아프셔서 왔어요. 할머니는 나한테 잘해주셨는데 걱정돼서요. 할머니를 뵙고 바로 갈 거예요.”강유나는 진시훈에게 잘 보
두 개의 손목시계였다.정교하고 독특한 디자인에 차가운 금속 광택이 빛나는 것이 보기만 해도 비싸보이는 시계였다.진시훈은 무덤덤하게 말했다.“고맙지만, 왜 시계를 두 개나 줬어? 내가 솔로라고 놀리는 거야?”심민준은 웃었다.“여자 시계는 유나 주면 되잖아.”“안 받을걸.”“그건 네가 알아서 해.”심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특별한 날인데, 저녁에 한잔할래?”진시훈은 시계를 챙겨넣으며 말했다.“뭐가 특별한 날인데? 나 생일 안 챙기는 거 알잖아.”“또 그러네.”심민준은 혀를 찼다.하지만 그는 익숙했다. 그 사건 이후로 진시훈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니까.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진시훈의 허락을 받고 강유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심민준을 보고 그녀는 인사했다.“심 대표님.”“왜 이렇게 격식을 차려? 우리 오래 알고 지냈잖아. 예전처럼 불러.”강유나는 다시 호칭을 바꿨다.“민준아.”심민준은 예전에는 박현우의 집에도 자주 왔었기에 그녀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었다. 다만 언제부턴가 발길이 뜸해졌을 뿐이었다.그녀는 지난번 클럽에서야 그가 진시훈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대표님.”강유나는 다가와 작은 케이크를 진시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많이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케이크 맛있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진시훈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의아해하는 순간, 옆에서 심민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시훈아, 네 생일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나봐.”강유나는 깜짝 놀랐다.“대표님, 오늘... 생일이세요?”“어.”진시훈은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그럼 강 비서도 생일 선물 준비했어?”“...”강유나가 말했다.“사실 오늘이 생일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따로 챙겨드릴게요.”“농담이야.”진시훈은 케이크를 가져오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생일 안 챙겨.”강유나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지만 착각인지 확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