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안수지를 보고는 분노를 가라앉혔다.“네 잘못이 아니야.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현우야...”안수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박현우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만약 강유나가 있었더라면 절대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혼자 묵묵히 인정하고 수정한 다음 만회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회사로 돌아온 박현우는 저녁도 먹지 않고 직접 협력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몇 시간 동안 설득한 끝에 다니엘은 드디어 그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 양측은 며칠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일을 해결하고 나니 박현우의 기분도 한결 나아진 듯했다. 사무실을 나간 그때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안수지를 발견했다.“현우야, 어떻게 됐어?”“해결했어.”“정말? 너무 잘됐다. 역시 넌 참 대단해.”안수지의 두 눈이 빛이 날 정도로 반짝였다. 그 모습에 박현우의 기분도 많이 나아졌다.그는 안수지가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좋아했다. 이건 여자가 남자에 대한 가장 좋은 칭찬이니까.하지만 강유나에게는 이런 눈빛이 없었다. 늘 차갑고 무뚝뚝하기만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투정을 부리는 법이라곤 없었다.하늘이 무너져도 그의 품에 숨어서 우는 게 아니라 함께 헤쳐나갈 성격이었다. 너무 냉정해서 오히려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쉬어.”박현우는 안수지의 손을 먼저 잡았다. 안수지는 기쁨에 겨워하며 박현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박현우가 그녀를 별장으로 데려가진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운전기사에게 그냥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홀로 마이바흐를 운전하여 별장으로 돌아왔다.샤워를 마치고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속이 쓰려 깨고 말았다. 위병이 도진 것이었다.저녁을 먹지 않은 데다가 연속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바람에 위가 너무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가 도우미 방의 벨을
강유나는 택시를 타고 해성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하주희의 전화를 받았는데 어디냐고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러자 하주희는 친구끼리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해야 한다면서 박현우를 상대하러 무조건 오겠다고 했다.강유나는 그녀를 말리다 못해 그냥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한 시간 후 택시가 해성 그룹 앞에 멈춰 섰다.햇살이 우뚝 솟은 건물을 비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예전에 해성 그룹 본사는 이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5년 전 이 건물이 준공된 그날 박현우는 기분 좋은 나머지 술을 많이 마셨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강유나는 그런 그의 곁을 지켰다.커다란 통유리 앞에서 야경을 감상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박현우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뭘 보고 있어?”“여기서 보면 야경이 엄청 예뻐.”“나랑 이렇게 예쁜 야경을 볼 자격이 있는 여자는 너밖에 없어.”그러고는 강유나의 볼에 키스했다.“유나야, 평생 내 옆에 있어 줘.”강유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해성 그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탄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진화 그룹의 인사팀에서 보낸 문자였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강유나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고 26층에서 내린 다음 곧장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사무실 안, 박현우는 다리를 꼰 채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걸 보니 오래전부터 그녀를 기다린 듯했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다가가 A4 용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사직서 프린트해서 가져왔어. 인사팀에 가서 절차 마무리할 테니까 사인해.”박현우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언제까지 억지 부릴 거야?”“억지? 내가 지금 억지 부리는 거로 보여?”“수지가 네 일에 끼어드는 게 싫다면 수지한테 다른 쉬운 일 맡길 테니까 넌 계속 수석비서 자리에 있어. 걔가 널 방해할 일은 없을 거야.”박현우는 자신이 충분
이 순간 강유나의 마음은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렸다.하주희는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손찌검까지 하려 했다.“그럼 예전에는 왜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박현우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무서운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하주희, 여긴 해성 그룹이야. 계속 소란을 피웠다간 가만 안 둬.”하주희도 예전에는 박현우를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아 눈에 뵈는 게 없었다.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앞을 막아선 서진호까지 밀어내면서 박현우를 때리려 했다.박현우가 경비원을 부르자 몇몇 경비원이 재빨리 다가와 하주희를 거칠게 끌어냈다. 그 모습에 강유나가 나서서 하주희를 지켜주었다.“주희 건드리지 마!”강유나가 박현우를 쳐다보며 말했다.“주희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둬. 박현우, 네 수석비서로 오랫동안 일해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 걸 명심해. 너도 내일에 해성 그룹의 부정적인 뉴스가 뜨는 걸 원치 않겠지?”“지금 날 협박해? 해성 그룹의 기밀을 발설했다간 감옥 간다는 거 몰라?”“주희를 건드리면 싹 다 말해버릴 거야.”강유나는 분노를 터트리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두 눈에 경계와 분노, 그리고 적대심이 가득했다. 박현우를 이런 눈빛으로 쳐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박현우는 기분이 너무도 언짢았다.“이렇게까지 감싸고 돌 거야?”“그래.”강유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날 지켜주는 사람은 주희밖에 없거든.”박현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예전에 강유나에게 평생 지켜주겠다고 했었다. 그는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하주희 데리고 당장 해성 그룹에서 꺼져!”하주희가 펄쩍 뛰었다.“우린 진작 가려고 했었는데 일을 크게 벌인 건 너잖아. 우린 뭐 이런 재수 없는 곳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자기야, 가자.”박현우도 안수지의 손을 잡고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강유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따귀처럼 그녀의 얼굴을 힘껏 내리치는 것 같았다.직원들은 일하는 척했지만
하주희의 추돌 사건 이후 강유나는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자기야, 기분이 좀 어때?”“괜찮아. 한바탕 울고 나니까 많이 나아졌어. 그리고 네가 벤틀리를 들이박았는데 내가 울 새가 어디 있어.”“진작 말할 것이지. 이런 일로 기분이 풀릴 줄 알았으면 박현우 그 자식 마이바흐를 냅다 들이박아 버렸을 텐데.”강유나는 실소를 터트리더니 하주희를 와락 끌어안았다.“역시 너밖에 없어.”“네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긴 하지만 난 남자를 좋아해.”“알았어.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면 남자를 열 명 소개해줄게.”“둘이면 충분해. 열 명 다 만나기엔 체력이 달려.”두 사람은 까르르 웃으면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강유나도 드디어 더는 박현우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저녁에 그들은 집에서 샤부샤부를 해 먹었다. 하주희는 채소를 씻었고 강유나는 요리를 담당했다.강유나의 요리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그동안 박씨 가문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느라 주방 일도 많이 했다.그 집에서 나온 후에는 박현우를 챙기면서 못하는 요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솜씨가 늘었다.강유나는 깨끗하게 씻은 야채를 접시에 가지런하게 담았고 쇠고기도 어찌나 얇게 잘 썰었는지 실제 식당을 방불케 했다.하주희는 맛있게 먹으면서 강유나를 걱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자기야, 앞으로 어떡할 셈이야?”“진화 그룹에 가려고.”“뭐?”하주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박현우의 라이벌 회사잖아.”“응. 어떻게 생각해?”“너무 잘했어!”하주희의 두 눈이 다 반짝였다.“우리 유나 많이 컸구나.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박현우 그 자식이 상처를 주면 그대로 똑같이 갚아. 라이벌 회사에서 승승장구해서 박현우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강유나가 말했다.“그 사람이 후회하든 말든 이젠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 난 그냥 다시 시작하고 싶을 뿐이야.”“그래, 그래. 자, 우리의 새로운 인생을 위하여 치얼스!”강유나는 콜라로 하주희와 건배했다....다음 날 하주희가 출근하러 간 후 강유나도
진시훈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강유나에게 건넸다.“천천히 훑어보고 문제없으면 사인해.”강유나는 계약서를 받고 소파에 앉아 열심히 훑어보았다. 그녀가 계약서를 보는 내내 진시훈은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브라운톤의 긴 머리에 피부가 하얬고 이목구비도 아주 정교했다. 대충 앉아 있는데도 자태가 참 아름다웠다. 가늘고 긴 목에 글래머한 가슴, 잘록한 허리와 애플힙 모두 완벽했다.진시훈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이내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계약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 박현우가 주는 연봉보다 더 많았다. 강유나는 고민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입사 축하해.”진시훈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강유나는 더 머무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시간 맞춰 출근할게요.”그러고는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섰다.진시훈이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그때 강유나가 돌아선 걸 보고는 입에 담배를 물고 물었다.“할 얘기 더 남았어?”“지난번에 우리한테 우산도 주고 어젠 대표님 차를 들이박았는데도 책임을 묻지 않았어요. 혹시 왜 그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난 착한 사람이니까.”“...”‘착하긴 개뿔.’강유나가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설마 예전부터 계속 절 스카우트하려고 준비한 건 아니죠?”‘다 내가 전부터 계획한 거라고?’진시훈이 웃음을 터트렸다.“생각보다 자기애가 좀 심하네?”강유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진시훈은 그런 그녀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우린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어. 아는 사람을 더 챙겨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우리가 어릴 적에 만난 적이 있다고요?”진시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그만 나가봐.”강유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진시훈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문이 닫힌 그때 진시훈이 코웃음을 쳤다.“역시 배은망덕한 계집애야.”...양지성과 함께 입사 절차를 마친 후 양지성은 그녀에게 회사 자료와 입사 규칙을 건넸다.돌아가는 길에 강유나는 기억
‘강유나?’정태호가 금테 안경을 올리며 쳐다보았다. 잘못 본 줄 알고 가서 확인하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정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 왜 아직도 안 와? 우리 한참이나 기다렸단 말이야.”“금방 갈게.”정태호는 전화를 끊고 곧장 2층 VIP 룸으로 들어갔다. 정민호, 박서윤, 그리고 박현우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 가녀린 여자 한 명이 더 있었다.그는 양복 외투를 벗어 소파에 던지면서 물었다.“강유나 씨는 왜 안 왔어?”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룸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박현우가 대답했다.“걔 회사 그만뒀어. 이젠 해성 그룹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둘이 헤어졌어?”“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어?”박현우의 잘생긴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옆에 앉은 안수지를 와락 끌어안았다.“소개할게. 내 여자 친구 안수지야.”안수지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그런데 정태호는 못 들은 것처럼 무시해버렸다.“우리가 유나 씨랑 알고 지낸 지 몇 년인데 아무리 그만둬도 친구잖아. 이 자리에 불렀어야지.”박서윤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친구는 무슨. 태호 오빠, 걔는 그냥 도우미의 딸이야. 현우 오빠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랑 어울릴 자격도 없었어. 그리고 그런 배은망덕한 애는 진작 차버렸어야 해.”“무슨 일 있었어?”“오늘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강유나더러 집에 와서 갈비탕 좀 끓여달라고 했더니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표 냈다면서 이젠 박씨 가문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래.”정민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야. 현우 형이 유나 씨한테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기 오면 체면이 구겨지긴 하지.”“우리 오빠 앞에서 개처럼 벌벌 기는 걔가 무슨 체면이 있다고. 예전에도 여러 번이나 삐졌었는데 결국에는 다시 고분고분 돌아왔잖아. 이번에도 그냥 삐진 척하는 거야.”박서윤은 눈을 희번덕거리고는 박현우를 쳐다보았다.“오빠, 강유나가 이번에 오빠한테 고개를 숙이면 절대 쉽게 용서하지 마
그 말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박현우는 기가 막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는 강유나를 돌아보며 말했다.“정말 놀라워. 며칠 만에 내 라이벌과 붙어먹다니?”“너랑 무슨 상관인데!”화가 난 강유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하지만 너무 세게 뿌리친 탓에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휘청거렸다.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받쳐주었다.진시훈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강유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허리를 펴고 그의 옆에 섰다.진시훈은 그녀의 작은 행동에 기분이 좋아진 듯 눈빛을 부드럽게 하고 미소를 지었다.박현우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눈꼴사나웠다.막 입을 열려는 순간, 심민준이 그를 막아섰다.“현우야, 유나는 퇴사했잖아. 이렇게 전 직원을 붙잡고 있으면 네 여자친구가 좋아하겠어?”박현우는 그제야 안수지가 생각났다.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안수지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안쓰럽게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정태호도 앞으로 나섰다. “현우야, 유나는 이제 네 직원이 아니야. 그러니 넌 그녀의 일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박현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유나를 쏘아보았다.그리고는 진시훈에게 시선을 옮겼다.“뭐야. 진시훈, 얘한테 관심 있는 거야?”진시훈은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네 알 바는 아니지.”“너...”박현우의 팔에 핏줄이 불거지자 심민준이 그를 막아섰다.“현우야. 유나는 지금 진화 그룹 대표의 수석비서야.”박현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그는 너무 화가 나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강유나, 너 정말 대단해!”그를 골탕 먹이려고 라이벌 회사의 수석비서가 되다니?강유나의 이 전략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그는 제대로 열 받았다.지금 그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박현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심민준을 밀쳐냈다.“심민준, 너도 대단해. 이 몇 년간 왜 코빼기도 안 보였나 했
그녀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박씨 가문 어르신의 생일잔치에는 엄청 많은 손님이 왔었다.사람이 많은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홀로 뒤뜰 정원에서 비단잉어를 구경하고 있었다.심심해하던 차에 갑자기 옆에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잡아다가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그렇게 오래 보고 있는 거야?”강유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의 남자아이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그는 자신보다 한두 살쯤 많아 보였고 정장을 입진 않았지만 입고 있는 셔츠가 꽤 비싼 것임을 알 수 있었다.강유나는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아니... 난 그냥 조금 심심해서.”그녀가 물었다.“넌 오늘 온 손님이야?”“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은 나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아. 공교롭게도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남자애는 먼 곳을 바라보며 나이에 안 맞게 좀 어른스럽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강유나의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강유나는 곧바로 볼을 감싸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자기소개할게. 난 진시훈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강유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유나야.”“크게 말해 봐. 내가 무서워?”강유나는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민호가 막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강유나, 너 여기서 이 잡종이랑 뭐 하는 거야!”진시훈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누구 보고 욕하는 거야?”“하영 이모가 그랬어. 네가 잡종이라고, 우리보고 너랑 놀지 말라고 했어!”강유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민호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정민호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네가 감히 나한테 훈계 질이야? 강유나, 너 촌뜨기 주제에. 현우 형아가 이 잡종을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 나 지금 당장 가서 일러바칠 거야! 현우 형아가 알면 너랑 다시는 안 놀아 줄걸!”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달아나려고 했다.그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안수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 익숙한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몸을 기대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사람 유나 언니 아니야? 역시 예쁜 사람은 어디서든 인기가 많네. 진화의 대표님이 감싸주더니 이젠 또 새로운 구애자인가 봐.”박현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안수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현우야, 왜 그래?”“아니야, 내리자.”안수지는 순순히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모니카가 다가왔다.“박 대표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떻게 오셨어요?”“여자친구에게 드레스를 골라주려고요.”그는 안수지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모니카는 안수지에게 시선을 두고 몇 마디 칭찬한 후 그녀를 데리고 전용 피팅룸으로 안내했다.이곳의 피팅룸은 모두 넓은 공간에 전담 직원이 서비스를 제공했다.박현우는 따라가지 않고 강서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강서욱은 섹시한 모델을 데리고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매장을 나서려던 참이었다.“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는 건성으로 인사했다.박현우는 손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강유나랑 무슨 사이지?”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무슨 사이냐고? 예쁘니까 좀 알아가고 싶어서요. 안돼요?”박현우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그녀에게서 떨어져.”“참 이상하네요. 박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설마 강유나가 대표님 소유물이라도 되는 건가요? 이젠 해성도 다 떠났는데 다른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시겠다?”“감히 그녀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그럼 한번 해 보시죠.”강서욱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과연 누가 누굴 죽이는지 보자고요!”“현우야...”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수지는 흰색 드레스를 들고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박 대표님, 여자친구가 저기 계시네요. 주제 파악 잘하시고 오지랖 부리지 마세요.”그는 모델을 껴안고 의기
강유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하지만 강서욱은 따라왔다.“강유나 씨는 어차피 닳고 닳은 여자잖아. 박현우랑 그렇게 오래 자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그냥 나랑 만나. 한 달에 6천만 원 줄게.”“꺼져!”“1억? 하아, 설마 자신이 2억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는 입술을 핥으며 강유나에게 다가왔다.“2억도 좋아. 하지만 좀 더 자극적인 걸 해야겠지. 네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짝!강서욱의 뺨에 강력한 따귀가 작렬했다.“내 앞에서 꺼지라고 했어! 여긴 CCTV도 있으니까 당장 꺼지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강서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칫, 성깔 하나는 대단하네. 내가 겁먹을 줄 알아?”그가 강유나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다음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뭐 하는 짓이야!”하주희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빠르게 달려왔다.모니카도 뒤따라와서 바로 말했다.“강서욱 씨, 그만 손 놓으시는 게 좋겠어요. 강유나 씨는 진 대표님께서 직접 드레스 피팅을 위해 저에게 맡기신 분입니다.”진시훈의 이름이 나오자 강서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그는 천천히 강유나의 손목을 놓고는 비웃듯 말했다.“대단해. 박현우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를 찾다니. 인기가 대단하셔~”강유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걱정 마. 어떻게든 네 차례는 안 올 테니까.”“말은 그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야.”강서욱은 목소리를 낮추고 비꼬는 투로 말했다.“강서윤 씨, 그 행운이 영원하길 빌어. 내 손에 걸리지 않도록.”말을 마치자 그는 음흉하게 웃고는 떠났다.그가 가자 하주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자기야, 방금 그 변태가 가면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분해서 하는 말이었어.”“강제로 안 되니까 분풀이하는 거야?”하주희는 모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방금 그 인간 말종은 도대체 누구예요?”모니카가 말했다.
다음 날은 마침 주말이었다.강유나는 원래 진시훈과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갈 예정이었지만 진시훈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아침 일찍 해외로 출국하게 되었다.그는 전화로 담당자를 이미 연결해 놓았으니 혼자 가면 된다고 말했다.마침 하주희가 쇼핑하자며 찾아왔기에 강유나는 그녀와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갔다.담당자인 모니카는 혼혈이었는데, S 시 브랜드 대리인일 뿐만 아니라 패션 잡지 회사 사장이기도 했다.많은 연예인이 그녀의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강유나를 보자마자 모니카는 칭찬했다.“강유나 씨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여자 연예인들보다 훨씬 빛이 나요!”강유나는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이때 옆에 하주희는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죠. 우리 유나는 원래 이렇게 예쁘답니다. 유나의 절친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요.”강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하주희는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자기야, 진심이야. 아, 내가 왜 남자가 아닐까?”“네가 남자였으면 감방에 넣어줬을 거야.”“차마 그러진 못 하겠지~”하주희는 강유나에게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자기야, 얼른 들어가서 입어 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 기대할게!”맞춤 제작된 몇 벌의 드레스는 명품 C 브랜드의 예약 판매 상품이었다.진시훈도 어떻게 구했는지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공수해 온 것이었다.모니카는 커튼을 치고 직접 강운희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왔다.드레스를 다 입은 강유나는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어때?”하주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유나야, 너무 예뻐! 자선 만찬회가 시작되면 넌 분명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거야!”말을 마친 하주희는 턱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었다.“그 자리엔 재계, 정계 거물들이 다 모일 테니 그 쓰레기 박현우도 분명 있겠지...”그녀는 마치 박현우가 후회하며 벽에 머리를 박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생각만 해도 통쾌했다.강유나는 거울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 본
박 씨 저택에서.박현우는 막 욕실에서 나왔다.샤워를 하고 나니 화가 좀 누그러졌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가 무심코 전화를 받자 안수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현우야, 아까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좀 일이 있어서 못 받았어.”“할머니는 좀 어때?”안수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내일 뭐 좀 사서 할머니 보러 갈까?”박현우는 옆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고개를 숙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필요 없어. 할머니는 유나를 보고 싶어 하셨는데, 오늘 만났으니 많이 좋아지셨어.”안수지는 침묵했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현우야, 할머니도 나를 싫어하시는 거야? 어머니랑 여동생도 싫어하는데 이제 할머니까지... 왜,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그녀는 박현우의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 “그들이 싫어하면 싫어하는 거지. 너랑 만나는 건 나잖아.”“그래서... 현우야, 넌 나를 좋아하는 거지?”박현우는 “좋아해”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짧게 대답했다.“어.”안수지의 목소리는 금세 밝아졌다.“현우야, 너만 나 좋아해 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바로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정민호의 문자였다.그가 보낸 사진을 열어보는 순간, 박현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사진에는 강유나와 진시훈이 있었다.두 사람은 로맨틱한 프랑스 레스토랑 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는데 정민호의 사진 촬영 각도 때문인지 레스토랑의 조명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다정해 보였다.안수지는 계속해서 재잘거렸지만 박현우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건성으로 몇 마디 대꾸한 후 전화를 끊었다.그가 초조하게 담배를 비벼 끄며 장소를 물어보려던 참에 정민호의 문자가 다시 도착했다.[형, 올래? 유나가 진짜 진시훈한테 넘어갈 것 같아!]박현우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그는 문자를 보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강유
박현우는 옆에 있는 마이바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손이 아팠다.벤틀리 안에서 강유나는 조수석에 앉아 티슈로 빗물을 닦고 있었다.차가 얼마쯤 달린 후, 진시훈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서 부드러운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걸로 닦아.”“고마워요.”강유나는 작은 담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그러다가 담요를 내려놓을 때에야 차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고개를 돌리니 진시훈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몸을 돌려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강유나는 손을 멈췄다.“대표님?”“유나야, 너 소문과 좀 다른데.”진시훈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박현우를 끔찍이 사랑한다더니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아.”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저도 사람이에요.”그녀에게도 최소한의 기준, 자존심, 마음이 있었으니 박현우가 계속 짓밟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진시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넌 사람이지만 박현우는 아니지.”“...”그는 욕하는 데 능숙해서 강유나도 어떤 면에서는 익숙해져 있었다.그녀가 물었다.“대표님은 왜 아직 여기에 계셨어요?”“할머니 뵙고 바로 간다고 했잖아. 나도 오늘 별일 없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진시훈은... 일부러 나를 기다렸다고?’강유나는 미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대표님, 저녁 식사할 생각 있으세요? 만약 있다면, 우리...”“있어.”진시훈은 고개를 돌렸다. 깊은 눈동자가 유난히 아름다웠다.“뭘 먹으러 갈까?”강유나: “오늘은 대표님 생일이니까 대표님이 골라요.”...30분 후, 벤틀리는 프랑스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강유나는 진시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실내 조명은 은은했고 중앙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우아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명백히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였다.그녀는 무심코 진시훈을 바라보
할머니가 주무시고 나서야 둘은 방을 나왔다.문을 닫자마자 강유나는 박현우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 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왜 그래? 내가 뭐 더러운 거라도 되는 것처럼?”“할머니 앞에서만 그런 척한 거였어. 이제 할머니께서 주무시니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강유나는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박현우도 따라갔다.“어디 가?”“돌아갈 거야.”“이렇게 늦었는데?”“내 일이니까 신경 꺼.”강유나는 단호하게 걸어갔다.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 씨 아주머니가 기장 떡과 탕수육을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유미진은 소파에 앉아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안고 비꼬듯 말했다.“어머님께서 시키신 거니까 먹어.”강유나: “괜찮아요. 저녁은 이미 먹었어요.”“안 먹겠다면 말고. 내가 정말 네 같은 배은망덕한 계집애를 붙잡고 싶은 줄 아냐?”“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도 오지 않았을 거예요.”“뭐라고?!”유미진은 눈을 부릅떴다.“유나야, 이젠 기가 붙었구나? 감히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장 나가!”강유나는 돌아서 나갔다.밖에는 언제부터인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촉은 차갑고 따가웠다.그녀는 별장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뒤에서 갑자기 두 개의 자동차 전조등이 밝게 비추었다.박현우의 차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가고 그의 짜증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타!”강유나가 차갑게 말했다.“됐어. 택시 타고 갈 거야.”“여기서 무슨 택시를 타? 유나야,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타!”강유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현우는 주먹을 쥐었다.그는 강유나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그런 황소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고칠 줄도 모르는지.박현우는 쫓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강유나가 돌아보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빗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려 그러잖아도 아름다운
“할머니, 아줌마.”유미진은 그녀를 흘끗 보고 차갑게 응수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반가워했다.“유나 왔구나! 어서 와, 얼굴 좀 보자!"강유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침대 옆에 앉았다.“거의 일 년 만이네. 유나야, 살 빠졌어.”할머니는 유미진에게 분부했다.“아주머니에게 유나가 좋아하는 기장떡하고 탕수육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해. 많이 먹고 살 좀 찌워야겠어.”유미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결국 유미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강유나는 할머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할머니, 어쩌다 또 편찮으세요?”“아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병도 다 나은 것 같구나.”“그래도 몸조심하세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먹고 싶은 건 없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할머니는 강유나의 손을 잡았다.“유나야,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말해보렴. 왜 해성에서 나왔니? 혹시 현우 그 녀석이 널 괴롭혔어?”강유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아니요, 제가 스스로 해성을 나온 거예요.”“왜? 너는 항상 현우를 좋아했잖니?”“저...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잘해줘서 저도 계속 잘해준 것뿐이에요. 단지 일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어서 해성을 나온 거고요.”“그러니까 너희 둘 사이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거니?”할머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강유나가 할머니의 등을 토닥여 드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박현우가 할머니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할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이렇게 걱정하시면 안 돼요. 나와 유나 사이에는 아무 문제 없어요.”할머니의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정말이냐?”“네. 젊은 연인들끼리 다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할머니도 저희 싸우는 거 많이 보셨잖아요. 다 금
박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강유나를 챙겨준 어른은 박현우 할머니뿐이었다.그런데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다가 결국에는 경치 좋은 요양원으로 가셨다.비록 곁에 계시진 않지만 강유나의 생일 때마다 할머니는 선물을 보내주곤 했다.강유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진시훈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무슨 일이야?”강유나는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대표님, 저녁 식사는... 나중에 다시 할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생겼어요.”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왔기에, 강유나는 이번에 가지 않으면 다시는 뵙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그랬다간 평생 자책하며 살 것 같았다.하지만 오늘은 진시훈의 생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진시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어디 가는 건데? 데려다줄게.”강유나는 다소 놀랐다.“화 안 나세요?”“아니.”진시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고귀한 얼굴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고 또 바람을 맞혔지만 난 성격 좋으니까 화 안 나.”강유나: “...”분명히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진시훈은 강유나가 알려준 길을 따라 박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에 그녀를 데려다주었다.그는 눈앞의 저택을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드리웠다.“어쩐지 길이 점점 익숙하다 했더니 박 씨 저택이잖아. 그럼 아까 그 전화는 박현우였어?”강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진시훈은 별다른 말 없이 차 문 잠금장치를 풀었다.“내려.”강유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차창을 두드렸다.진시훈은 담배를 꺼내려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어둑한 불빛에 반쯤 가려진 옆얼굴은 더욱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그는 차창을 내렸다.“왜 그래?”“내가 여기에 온 건 현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아프셔서 왔어요. 할머니는 나한테 잘해주셨는데 걱정돼서요. 할머니를 뵙고 바로 갈 거예요.”강유나는 진시훈에게 잘 보
두 개의 손목시계였다.정교하고 독특한 디자인에 차가운 금속 광택이 빛나는 것이 보기만 해도 비싸보이는 시계였다.진시훈은 무덤덤하게 말했다.“고맙지만, 왜 시계를 두 개나 줬어? 내가 솔로라고 놀리는 거야?”심민준은 웃었다.“여자 시계는 유나 주면 되잖아.”“안 받을걸.”“그건 네가 알아서 해.”심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특별한 날인데, 저녁에 한잔할래?”진시훈은 시계를 챙겨넣으며 말했다.“뭐가 특별한 날인데? 나 생일 안 챙기는 거 알잖아.”“또 그러네.”심민준은 혀를 찼다.하지만 그는 익숙했다. 그 사건 이후로 진시훈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니까.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진시훈의 허락을 받고 강유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심민준을 보고 그녀는 인사했다.“심 대표님.”“왜 이렇게 격식을 차려? 우리 오래 알고 지냈잖아. 예전처럼 불러.”강유나는 다시 호칭을 바꿨다.“민준아.”심민준은 예전에는 박현우의 집에도 자주 왔었기에 그녀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었다. 다만 언제부턴가 발길이 뜸해졌을 뿐이었다.그녀는 지난번 클럽에서야 그가 진시훈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대표님.”강유나는 다가와 작은 케이크를 진시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많이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케이크 맛있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진시훈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의아해하는 순간, 옆에서 심민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시훈아, 네 생일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나봐.”강유나는 깜짝 놀랐다.“대표님, 오늘... 생일이세요?”“어.”진시훈은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그럼 강 비서도 생일 선물 준비했어?”“...”강유나가 말했다.“사실 오늘이 생일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따로 챙겨드릴게요.”“농담이야.”진시훈은 케이크를 가져오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생일 안 챙겨.”강유나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지만 착각인지 확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