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박현우는 기가 막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는 강유나를 돌아보며 말했다.“정말 놀라워. 며칠 만에 내 라이벌과 붙어먹다니?”“너랑 무슨 상관인데!”화가 난 강유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하지만 너무 세게 뿌리친 탓에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휘청거렸다.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받쳐주었다.진시훈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강유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허리를 펴고 그의 옆에 섰다.진시훈은 그녀의 작은 행동에 기분이 좋아진 듯 눈빛을 부드럽게 하고 미소를 지었다.박현우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눈꼴사나웠다.막 입을 열려는 순간, 심민준이 그를 막아섰다.“현우야, 유나는 퇴사했잖아. 이렇게 전 직원을 붙잡고 있으면 네 여자친구가 좋아하겠어?”박현우는 그제야 안수지가 생각났다.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안수지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안쓰럽게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정태호도 앞으로 나섰다. “현우야, 유나는 이제 네 직원이 아니야. 그러니 넌 그녀의 일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박현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유나를 쏘아보았다.그리고는 진시훈에게 시선을 옮겼다.“뭐야. 진시훈, 얘한테 관심 있는 거야?”진시훈은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네 알 바는 아니지.”“너...”박현우의 팔에 핏줄이 불거지자 심민준이 그를 막아섰다.“현우야. 유나는 지금 진화 그룹 대표의 수석비서야.”박현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그는 너무 화가 나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강유나, 너 정말 대단해!”그를 골탕 먹이려고 라이벌 회사의 수석비서가 되다니?강유나의 이 전략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그는 제대로 열 받았다.지금 그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박현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심민준을 밀쳐냈다.“심민준, 너도 대단해. 이 몇 년간 왜 코빼기도 안 보였나 했
그녀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박씨 가문 어르신의 생일잔치에는 엄청 많은 손님이 왔었다.사람이 많은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홀로 뒤뜰 정원에서 비단잉어를 구경하고 있었다.심심해하던 차에 갑자기 옆에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잡아다가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그렇게 오래 보고 있는 거야?”강유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의 남자아이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그는 자신보다 한두 살쯤 많아 보였고 정장을 입진 않았지만 입고 있는 셔츠가 꽤 비싼 것임을 알 수 있었다.강유나는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아니... 난 그냥 조금 심심해서.”그녀가 물었다.“넌 오늘 온 손님이야?”“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들은 나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아. 공교롭게도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남자애는 먼 곳을 바라보며 나이에 안 맞게 좀 어른스럽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강유나의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강유나는 곧바로 볼을 감싸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자기소개할게. 난 진시훈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강유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유나야.”“크게 말해 봐. 내가 무서워?”강유나는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민호가 막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강유나, 너 여기서 이 잡종이랑 뭐 하는 거야!”진시훈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누구 보고 욕하는 거야?”“하영 이모가 그랬어. 네가 잡종이라고, 우리보고 너랑 놀지 말라고 했어!”강유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민호야, 그렇게 말하면 안 돼.”정민호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네가 감히 나한테 훈계 질이야? 강유나, 너 촌뜨기 주제에. 현우 형아가 이 잡종을 제일 싫어하는 거 몰라? 나 지금 당장 가서 일러바칠 거야! 현우 형아가 알면 너랑 다시는 안 놀아 줄걸!”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달아나려고 했다.그
다음 날, 강유나는 일찍 일어났다.진화 그룹에 첫 출근하는 날이라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녀는 풍성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나갈 때 하주희는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고 옆에 놓인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어댔다.강유나가 발신자를 확인하니 ‘바보 사장’이었다.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저는 주희 친구인데요. 주희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결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하주희가 매일 사장님 욕하는 걸 듣고 대머리에 맥주 배가 나온 느끼한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목소리는 꽤 젊었다.게다가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알겠습니다. 그럼 주희 씨에게 오늘 하루 쉬라고 전해 주세요. 몸이 우선이죠.”“네, 전달할게요.”“그럼 이만 끊겠습니다.”강유나는 휴대폰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침대에서 곤히 잠든 하주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저렇게 좋은 사장을 만나놓고도 불만이라니.아파트에서 진화까지는 매우 가까워서 걸어서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출근 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아 있었다.강유나는 아침 식사를 들고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진시훈도 있었다.그는 은회색 정장을 입고 검은색 가죽 의자에 앉아 펜을 돌리며 모니터에 띄워진 주식 시장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깔끔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차갑고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평소의 느긋한 모습과 달리 훨씬 진중하고 냉철해 보였다.진시훈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너 정력 좋다. 어젯밤 늦게까지 놀았으면서 오늘 아침 일찍 나온 걸 보면.”강유나는 그에게 다가가 향긋한 아침 식사와 아래층에서 사 온 따뜻한 커피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진시훈: “이건 뭐야?”“내가 만든 아침 식사예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오?”진시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가져온 보온 도시락을 열었다.안에는 먹음직스러운 만두 두 개와 계란 부침이 들어 있었는데 모양도 예뻐서 가게에서 파는 것 못지않았다.그는 만두 하나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그리고는 미간
“나가라고 했잖아!”사무실 안, 가죽 의자에 앉은 박현우는 온몸에서 흉포한 기운을 풍겼다.안수지인걸 보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너였어?”“현우야... 기분 안 좋아 보여서 걱정돼서 왔어.”“난 괜찮아.”“이렇게 화를 내는데 어떻게 괜찮아? 무슨 일인지 나한테 말해 봐,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안수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네 짐을 덜어주고 싶어.”“네가 도울 일이 아니야.”회사 일이라 안수지의 능력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강유나라면 도움이 됐을 텐데.강유나를 떠올리자 이미 불쾌했던 박현우의 기분은 더욱 악화되었다.안수지는 포기하지 않았다.“현우야, 그러지 마.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아직 점심도 안 먹었잖아. 우리 건물 아래 새로 생긴 레스토랑이 있던데 같이 가서 먹자. 위도 안 좋은데 굶으면 안 되잖아.”“안 가.”이런 상황에 무슨 밥 생각이 나겠는가!안수지가 다시 설득하려는 순간, 박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세요?”“현우야, 서윤이한테 들었는데 유나가 해성을 버리고 진화로 갔다며?”또 강유나였다.박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꾹 참고 말했다.“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걔가 네 뒤꽁무니만 몇 년을 쫓아다녔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뒤돌아서! 우리 박씨 가문이 배은망덕한 년을 키운 거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거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장 걔 다시 불러와! 우리 박씨 가문에서 힘들게 키워서 성공시켰더니 경쟁사에 갖다 바치게 생겼잖아!”“해성이 강유나가 없으면 망하기라도 해요?”박현우는 잘생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유나 얘기하시려고 전화한 거면 그만 하세요.”“중요한 얘기가 하나 더 있어.”유미진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너 안수지라는 여자 친구 사귄다며?”“네, 그런데요.”“내가 사람 시켜서 알아봤는데 그 안수지라는 애는 시골 깡촌 출신에 학력도 별 볼 일 없고 집안은 우리 박씨 가문 문턱에도 못
“대표님.”강유나는 대표실로 돌아와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들어가 보니 진시훈은 훤칠하게 긴 다리를 편하게 겹쳐 놓고 한 손은 머리 뒤에 얹은 채, 다른 손에는 담배를 끼고 옆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살짝 감고 마치 잠든 것 같았다.강유나는 도시락을 한쪽에 두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남자는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윤곽,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마치 만화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느긋한 귀족 도련님 같았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이때 진시훈이 갑자기 눈을 떴다.“저기, 대표님, 식사 가져왔어요...”강유나는 약간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고 진시훈에게 도시락을 건넸다.붉어진 그녀의 귀를 보며 진시훈은 느긋하게 일어났다.“이렇게 오래 안 오길래 변절해서 눈먼 전 사장한테 돌아간 줄 알았지.”“저는 절대 돌아가지 않아요.”강유나는 곧바로 변명했지만 방금 아래층에서 박현우와 만났던 일이 떠올라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대표님, 저 먼저 나가볼게요.”“이따가 네 치수를 보내 놔. 드레스를 골라 보낼 테니까.”“저한테요?”강유나는 놀란 얼굴로 돌아섰다.진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일주일 후에 대형 자선 만찬회가 있는데 파트너와 함께 참석할 예정이야. 강 비서, 함께 가 줄래?”대형 자선 만찬회라...그렇다면 박현우도 분명히 있겠지?“가기 싫으면 거절해도 돼.”진시훈은 그녀의 난감한 표정을 눈치챈 듯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강유나: “갈게요.”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박현우를 피해야 한단 말인가.그렇다고 앞으로 평생 그를 피해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식사 후, 강유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다니엘과의 협의는 순조로웠다. 진시훈이 그에게 이미 이야기를 해 놓았는지 그녀가 진화에 나타난 것을 보고도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그는 미소를 지으며 강유나의 능력을 칭찬했다.“그러고 보니 해성의 새 수석 비서는
강유나는 귓불까지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고 손가락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진시훈의 소매를 붙잡았다.진시훈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며 안심시키듯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전화 좀 하고 올게.”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진나연의 다소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나 찾아?”“지금 시간 있어?”“시간은 있는데...”“그럼 이쪽으로 와.”진시훈은 그녀의 말을 끊고 강유나가 그런 약을 먹었다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주소를 불러주며 빨리 오라고 했다.통화를 마친 후, 그는 다시 차로 돌아갔다.차 문을 열자마자 진시훈은 몸이 굳었다.차 안에서 강유나는 단추를 풀어 가느다란 백조 목을 드러냈고 무의식적으로 옷깃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어깨끈도 드러났다.진시훈은 차에 타 문을 닫고는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작은 손을 붙잡았다.강유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깊고 아름다운 눈매와 마주쳤다.“옷 제대로 입어.”강유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옷깃을 여몄다.원래도 붉었던 뺨은 이제 피가 맺힐 듯 더욱 붉어졌다.비록 이성적으로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약 기운이 올라오면서 머릿속은 온통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은 마디가 길고 섬세했다.그녀는 그 손을 따라 진시훈을 흘끗 쳐다보았다.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과 깊은 이목구비를 가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남자였다.셔츠 아래 감춰진 몸은 어떨지 몰라도 살짝 드러난 팔뚝이 단단하고 힘이 넘쳐 보이는 걸로 봐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좁은 차 안, 남자에게서 나는 차가운 나무 향과 은은한 담배 냄새가 뒤섞여 그녀를 더욱 안달하게 만들었다.안달 나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그녀의 손을 잡은 진시훈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하지만 힘이 들어가는 것은 손뿐만이 아니었다.몸속의 피가 끓어올랐다.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눈앞의 여자를 뒷좌석에 눕혀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고 그녀와 함께 절정에 오르고 싶었다...다시 입을
진나연의 눈에 의심이 어렸다. 진시훈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말 많네.”“...”진나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의 연애사는 흔치 않은 일이라 궁금해서 몇 마디 더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강유나는 흰 목욕가운을 걸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진나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긴 밤색 머리를 묶어 올린 그녀는 화려한 미모를 자랑했다. 붉은 입술과 새하얀 피부는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넋을 잃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어머, 오빠 여자 보는 눈이 좋네.’진시훈은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이쪽은 진나연, 의사야. 이 분야에 능통하니까 진찰을 받아 봐.”“진나연 씨, 안녕하세요.”“나연이라고 부르면 돼요. 저 사람 사촌 동생이에요.”진나연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서 강유나의 체온을 쟀다.“걱정 마세요. 보통 이런 종류의 약물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요. 하지만 많이 불편하면 약 좀 드릴게요.”“네.”강유나는 얌전히 침대에 앉아 진나연의 검진을 받았다.진시훈은 돌아서서 나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진나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오빠랑 어디까지 진도 나갔어요?”강유나는 잠시 멍해졌다.“오해예요. 저희는 단순한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일 뿐이에요.”“에이, 설마. 오빠가 그냥 부하로 둘 것 같지 않은데? 오빠가 저렇게까지 신경 쓰는 모습은 처음 봐요.”“사실 진 대표님은 좋은 분이세요.”“푸핫!”진나연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강유나를 쳐다보며 말했다.“강유나 씨는 우리 오빠에 대해 오해가 꽤 깊으시네요.”강유나는 다소 의아했다.“저를 아세요?”“물론이죠. 박현우와의 일은 업계에 꽤 알려져 있잖아요. 저도 들었어요.”“그런가요.”‘어째서 모두가 내가 박현우한테 푹 빠졌던 걸 아는 거지?’“해성을 나온 건 잘한 일이에요. 강유나 씨처럼 아름다운 분은 박현우에게 어울리지 않아요.”진나연의 아름다운 얼굴에 교활한 미소가 번졌다.“우리 오빠가 딱 어울리죠.”“.
차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여 아까 호텔로 돌아왔다.호텔 아래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선두에 선 남자는 짧게 깎은 머리에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목에는 문신이 보였다.진시훈을 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형님.”진시훈은 가볍게 대꾸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호텔 안에는 다른 손님들이 없었고 호텔 지배인만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진 대표님, 시키신 대로 다 비웠습니다만...”“네. 손해는 내가 책임질 겁니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죠.”진시훈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눈빛은 차분했지만 지배인은 등골이 서늘했다.지배인은 다급하게 말했다.“오늘 밤 일은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진시훈은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까 그 층으로 올라갔다.전범룡의 룸은 시끌벅적했다.사람들이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발로 차여 열렸다.전범룡은 분노하며 벌떡 일어섰다.“어떤 새끼가 감히...”누군가가 돌진하더니 전범룡의 옆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을 쓰러뜨리고 전범룡의 머리채를 잡아 탁자에 내리쳤다.전범룡은 비명을 질렀지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머리채가 잡혀 들렸고 목에는 날카로운 군용 단검이 들이밀어 졌다.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범룡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이어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들어왔다.맨 앞에는 고고한 분위기의 진시훈이 서 있었다.“진시훈, 자네 지금 뭐 하는 거야?”전범룡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진시훈은 꿈쩍도 안 했다.경호원들이 의자를 방 중앙에 놓자 진시훈은 다리를 꼬고 앉아 몸을 뒤로 기대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형님, 너무 멀리 앉았잖아요. 이리 와서 얘기해요.”성준은 전범룡을 질질 끌고 와서 진시훈 앞에 내동댕이쳤다.전범룡이 벌떡 일어나려는 찰나, 성준은 무표정하게 발길질을 했다.쿵 소리와 함께 전범룡은 무릎을 꿇었다.옆에 있던 사람이 참지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안수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 익숙한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몸을 기대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사람 유나 언니 아니야? 역시 예쁜 사람은 어디서든 인기가 많네. 진화의 대표님이 감싸주더니 이젠 또 새로운 구애자인가 봐.”박현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안수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현우야, 왜 그래?”“아니야, 내리자.”안수지는 순순히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모니카가 다가왔다.“박 대표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떻게 오셨어요?”“여자친구에게 드레스를 골라주려고요.”그는 안수지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모니카는 안수지에게 시선을 두고 몇 마디 칭찬한 후 그녀를 데리고 전용 피팅룸으로 안내했다.이곳의 피팅룸은 모두 넓은 공간에 전담 직원이 서비스를 제공했다.박현우는 따라가지 않고 강서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강서욱은 섹시한 모델을 데리고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매장을 나서려던 참이었다.“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는 건성으로 인사했다.박현우는 손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강유나랑 무슨 사이지?”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무슨 사이냐고? 예쁘니까 좀 알아가고 싶어서요. 안돼요?”박현우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그녀에게서 떨어져.”“참 이상하네요. 박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설마 강유나가 대표님 소유물이라도 되는 건가요? 이젠 해성도 다 떠났는데 다른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시겠다?”“감히 그녀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그럼 한번 해 보시죠.”강서욱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과연 누가 누굴 죽이는지 보자고요!”“현우야...”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수지는 흰색 드레스를 들고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박 대표님, 여자친구가 저기 계시네요. 주제 파악 잘하시고 오지랖 부리지 마세요.”그는 모델을 껴안고 의기
강유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하지만 강서욱은 따라왔다.“강유나 씨는 어차피 닳고 닳은 여자잖아. 박현우랑 그렇게 오래 자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그냥 나랑 만나. 한 달에 6천만 원 줄게.”“꺼져!”“1억? 하아, 설마 자신이 2억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는 입술을 핥으며 강유나에게 다가왔다.“2억도 좋아. 하지만 좀 더 자극적인 걸 해야겠지. 네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짝!강서욱의 뺨에 강력한 따귀가 작렬했다.“내 앞에서 꺼지라고 했어! 여긴 CCTV도 있으니까 당장 꺼지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강서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칫, 성깔 하나는 대단하네. 내가 겁먹을 줄 알아?”그가 강유나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다음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뭐 하는 짓이야!”하주희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빠르게 달려왔다.모니카도 뒤따라와서 바로 말했다.“강서욱 씨, 그만 손 놓으시는 게 좋겠어요. 강유나 씨는 진 대표님께서 직접 드레스 피팅을 위해 저에게 맡기신 분입니다.”진시훈의 이름이 나오자 강서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그는 천천히 강유나의 손목을 놓고는 비웃듯 말했다.“대단해. 박현우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를 찾다니. 인기가 대단하셔~”강유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걱정 마. 어떻게든 네 차례는 안 올 테니까.”“말은 그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야.”강서욱은 목소리를 낮추고 비꼬는 투로 말했다.“강서윤 씨, 그 행운이 영원하길 빌어. 내 손에 걸리지 않도록.”말을 마치자 그는 음흉하게 웃고는 떠났다.그가 가자 하주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자기야, 방금 그 변태가 가면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분해서 하는 말이었어.”“강제로 안 되니까 분풀이하는 거야?”하주희는 모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방금 그 인간 말종은 도대체 누구예요?”모니카가 말했다.
다음 날은 마침 주말이었다.강유나는 원래 진시훈과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갈 예정이었지만 진시훈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아침 일찍 해외로 출국하게 되었다.그는 전화로 담당자를 이미 연결해 놓았으니 혼자 가면 된다고 말했다.마침 하주희가 쇼핑하자며 찾아왔기에 강유나는 그녀와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갔다.담당자인 모니카는 혼혈이었는데, S 시 브랜드 대리인일 뿐만 아니라 패션 잡지 회사 사장이기도 했다.많은 연예인이 그녀의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강유나를 보자마자 모니카는 칭찬했다.“강유나 씨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여자 연예인들보다 훨씬 빛이 나요!”강유나는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이때 옆에 하주희는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죠. 우리 유나는 원래 이렇게 예쁘답니다. 유나의 절친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요.”강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하주희는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자기야, 진심이야. 아, 내가 왜 남자가 아닐까?”“네가 남자였으면 감방에 넣어줬을 거야.”“차마 그러진 못 하겠지~”하주희는 강유나에게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자기야, 얼른 들어가서 입어 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 기대할게!”맞춤 제작된 몇 벌의 드레스는 명품 C 브랜드의 예약 판매 상품이었다.진시훈도 어떻게 구했는지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공수해 온 것이었다.모니카는 커튼을 치고 직접 강운희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왔다.드레스를 다 입은 강유나는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어때?”하주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유나야, 너무 예뻐! 자선 만찬회가 시작되면 넌 분명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거야!”말을 마친 하주희는 턱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었다.“그 자리엔 재계, 정계 거물들이 다 모일 테니 그 쓰레기 박현우도 분명 있겠지...”그녀는 마치 박현우가 후회하며 벽에 머리를 박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생각만 해도 통쾌했다.강유나는 거울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 본
박 씨 저택에서.박현우는 막 욕실에서 나왔다.샤워를 하고 나니 화가 좀 누그러졌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가 무심코 전화를 받자 안수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현우야, 아까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좀 일이 있어서 못 받았어.”“할머니는 좀 어때?”안수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내일 뭐 좀 사서 할머니 보러 갈까?”박현우는 옆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고개를 숙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필요 없어. 할머니는 유나를 보고 싶어 하셨는데, 오늘 만났으니 많이 좋아지셨어.”안수지는 침묵했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현우야, 할머니도 나를 싫어하시는 거야? 어머니랑 여동생도 싫어하는데 이제 할머니까지... 왜,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그녀는 박현우의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 “그들이 싫어하면 싫어하는 거지. 너랑 만나는 건 나잖아.”“그래서... 현우야, 넌 나를 좋아하는 거지?”박현우는 “좋아해”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짧게 대답했다.“어.”안수지의 목소리는 금세 밝아졌다.“현우야, 너만 나 좋아해 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바로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정민호의 문자였다.그가 보낸 사진을 열어보는 순간, 박현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사진에는 강유나와 진시훈이 있었다.두 사람은 로맨틱한 프랑스 레스토랑 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는데 정민호의 사진 촬영 각도 때문인지 레스토랑의 조명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다정해 보였다.안수지는 계속해서 재잘거렸지만 박현우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건성으로 몇 마디 대꾸한 후 전화를 끊었다.그가 초조하게 담배를 비벼 끄며 장소를 물어보려던 참에 정민호의 문자가 다시 도착했다.[형, 올래? 유나가 진짜 진시훈한테 넘어갈 것 같아!]박현우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그는 문자를 보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강유
박현우는 옆에 있는 마이바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손이 아팠다.벤틀리 안에서 강유나는 조수석에 앉아 티슈로 빗물을 닦고 있었다.차가 얼마쯤 달린 후, 진시훈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서 부드러운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걸로 닦아.”“고마워요.”강유나는 작은 담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그러다가 담요를 내려놓을 때에야 차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고개를 돌리니 진시훈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몸을 돌려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강유나는 손을 멈췄다.“대표님?”“유나야, 너 소문과 좀 다른데.”진시훈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박현우를 끔찍이 사랑한다더니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아.”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저도 사람이에요.”그녀에게도 최소한의 기준, 자존심, 마음이 있었으니 박현우가 계속 짓밟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진시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넌 사람이지만 박현우는 아니지.”“...”그는 욕하는 데 능숙해서 강유나도 어떤 면에서는 익숙해져 있었다.그녀가 물었다.“대표님은 왜 아직 여기에 계셨어요?”“할머니 뵙고 바로 간다고 했잖아. 나도 오늘 별일 없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진시훈은... 일부러 나를 기다렸다고?’강유나는 미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대표님, 저녁 식사할 생각 있으세요? 만약 있다면, 우리...”“있어.”진시훈은 고개를 돌렸다. 깊은 눈동자가 유난히 아름다웠다.“뭘 먹으러 갈까?”강유나: “오늘은 대표님 생일이니까 대표님이 골라요.”...30분 후, 벤틀리는 프랑스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강유나는 진시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실내 조명은 은은했고 중앙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우아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명백히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였다.그녀는 무심코 진시훈을 바라보
할머니가 주무시고 나서야 둘은 방을 나왔다.문을 닫자마자 강유나는 박현우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 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왜 그래? 내가 뭐 더러운 거라도 되는 것처럼?”“할머니 앞에서만 그런 척한 거였어. 이제 할머니께서 주무시니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강유나는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박현우도 따라갔다.“어디 가?”“돌아갈 거야.”“이렇게 늦었는데?”“내 일이니까 신경 꺼.”강유나는 단호하게 걸어갔다.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 씨 아주머니가 기장 떡과 탕수육을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유미진은 소파에 앉아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안고 비꼬듯 말했다.“어머님께서 시키신 거니까 먹어.”강유나: “괜찮아요. 저녁은 이미 먹었어요.”“안 먹겠다면 말고. 내가 정말 네 같은 배은망덕한 계집애를 붙잡고 싶은 줄 아냐?”“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도 오지 않았을 거예요.”“뭐라고?!”유미진은 눈을 부릅떴다.“유나야, 이젠 기가 붙었구나? 감히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장 나가!”강유나는 돌아서 나갔다.밖에는 언제부터인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촉은 차갑고 따가웠다.그녀는 별장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뒤에서 갑자기 두 개의 자동차 전조등이 밝게 비추었다.박현우의 차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가고 그의 짜증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타!”강유나가 차갑게 말했다.“됐어. 택시 타고 갈 거야.”“여기서 무슨 택시를 타? 유나야,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타!”강유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현우는 주먹을 쥐었다.그는 강유나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그런 황소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고칠 줄도 모르는지.박현우는 쫓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강유나가 돌아보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빗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려 그러잖아도 아름다운
“할머니, 아줌마.”유미진은 그녀를 흘끗 보고 차갑게 응수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반가워했다.“유나 왔구나! 어서 와, 얼굴 좀 보자!"강유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침대 옆에 앉았다.“거의 일 년 만이네. 유나야, 살 빠졌어.”할머니는 유미진에게 분부했다.“아주머니에게 유나가 좋아하는 기장떡하고 탕수육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해. 많이 먹고 살 좀 찌워야겠어.”유미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결국 유미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강유나는 할머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할머니, 어쩌다 또 편찮으세요?”“아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병도 다 나은 것 같구나.”“그래도 몸조심하세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먹고 싶은 건 없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할머니는 강유나의 손을 잡았다.“유나야,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말해보렴. 왜 해성에서 나왔니? 혹시 현우 그 녀석이 널 괴롭혔어?”강유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아니요, 제가 스스로 해성을 나온 거예요.”“왜? 너는 항상 현우를 좋아했잖니?”“저...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잘해줘서 저도 계속 잘해준 것뿐이에요. 단지 일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어서 해성을 나온 거고요.”“그러니까 너희 둘 사이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거니?”할머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강유나가 할머니의 등을 토닥여 드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박현우가 할머니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할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이렇게 걱정하시면 안 돼요. 나와 유나 사이에는 아무 문제 없어요.”할머니의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정말이냐?”“네. 젊은 연인들끼리 다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할머니도 저희 싸우는 거 많이 보셨잖아요. 다 금
박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강유나를 챙겨준 어른은 박현우 할머니뿐이었다.그런데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다가 결국에는 경치 좋은 요양원으로 가셨다.비록 곁에 계시진 않지만 강유나의 생일 때마다 할머니는 선물을 보내주곤 했다.강유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진시훈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무슨 일이야?”강유나는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대표님, 저녁 식사는... 나중에 다시 할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생겼어요.”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왔기에, 강유나는 이번에 가지 않으면 다시는 뵙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그랬다간 평생 자책하며 살 것 같았다.하지만 오늘은 진시훈의 생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진시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어디 가는 건데? 데려다줄게.”강유나는 다소 놀랐다.“화 안 나세요?”“아니.”진시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고귀한 얼굴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고 또 바람을 맞혔지만 난 성격 좋으니까 화 안 나.”강유나: “...”분명히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진시훈은 강유나가 알려준 길을 따라 박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에 그녀를 데려다주었다.그는 눈앞의 저택을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드리웠다.“어쩐지 길이 점점 익숙하다 했더니 박 씨 저택이잖아. 그럼 아까 그 전화는 박현우였어?”강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진시훈은 별다른 말 없이 차 문 잠금장치를 풀었다.“내려.”강유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차창을 두드렸다.진시훈은 담배를 꺼내려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어둑한 불빛에 반쯤 가려진 옆얼굴은 더욱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그는 차창을 내렸다.“왜 그래?”“내가 여기에 온 건 현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아프셔서 왔어요. 할머니는 나한테 잘해주셨는데 걱정돼서요. 할머니를 뵙고 바로 갈 거예요.”강유나는 진시훈에게 잘 보
두 개의 손목시계였다.정교하고 독특한 디자인에 차가운 금속 광택이 빛나는 것이 보기만 해도 비싸보이는 시계였다.진시훈은 무덤덤하게 말했다.“고맙지만, 왜 시계를 두 개나 줬어? 내가 솔로라고 놀리는 거야?”심민준은 웃었다.“여자 시계는 유나 주면 되잖아.”“안 받을걸.”“그건 네가 알아서 해.”심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특별한 날인데, 저녁에 한잔할래?”진시훈은 시계를 챙겨넣으며 말했다.“뭐가 특별한 날인데? 나 생일 안 챙기는 거 알잖아.”“또 그러네.”심민준은 혀를 찼다.하지만 그는 익숙했다. 그 사건 이후로 진시훈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니까.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진시훈의 허락을 받고 강유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심민준을 보고 그녀는 인사했다.“심 대표님.”“왜 이렇게 격식을 차려? 우리 오래 알고 지냈잖아. 예전처럼 불러.”강유나는 다시 호칭을 바꿨다.“민준아.”심민준은 예전에는 박현우의 집에도 자주 왔었기에 그녀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었다. 다만 언제부턴가 발길이 뜸해졌을 뿐이었다.그녀는 지난번 클럽에서야 그가 진시훈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대표님.”강유나는 다가와 작은 케이크를 진시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많이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케이크 맛있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진시훈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의아해하는 순간, 옆에서 심민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시훈아, 네 생일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나봐.”강유나는 깜짝 놀랐다.“대표님, 오늘... 생일이세요?”“어.”진시훈은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그럼 강 비서도 생일 선물 준비했어?”“...”강유나가 말했다.“사실 오늘이 생일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따로 챙겨드릴게요.”“농담이야.”진시훈은 케이크를 가져오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생일 안 챙겨.”강유나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지만 착각인지 확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