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여 아까 호텔로 돌아왔다.호텔 아래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선두에 선 남자는 짧게 깎은 머리에 냉철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목에는 문신이 보였다.진시훈을 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형님.”진시훈은 가볍게 대꾸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호텔 안에는 다른 손님들이 없었고 호텔 지배인만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진 대표님, 시키신 대로 다 비웠습니다만...”“네. 손해는 내가 책임질 겁니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죠.”진시훈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눈빛은 차분했지만 지배인은 등골이 서늘했다.지배인은 다급하게 말했다.“오늘 밤 일은 절대 비밀로 하겠습니다.”진시훈은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까 그 층으로 올라갔다.전범룡의 룸은 시끌벅적했다.사람들이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발로 차여 열렸다.전범룡은 분노하며 벌떡 일어섰다.“어떤 새끼가 감히...”누군가가 돌진하더니 전범룡의 옆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을 쓰러뜨리고 전범룡의 머리채를 잡아 탁자에 내리쳤다.전범룡은 비명을 질렀지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머리채가 잡혀 들렸고 목에는 날카로운 군용 단검이 들이밀어 졌다.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범룡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이어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들어왔다.맨 앞에는 고고한 분위기의 진시훈이 서 있었다.“진시훈, 자네 지금 뭐 하는 거야?”전범룡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진시훈은 꿈쩍도 안 했다.경호원들이 의자를 방 중앙에 놓자 진시훈은 다리를 꼬고 앉아 몸을 뒤로 기대며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형님, 너무 멀리 앉았잖아요. 이리 와서 얘기해요.”성준은 전범룡을 질질 끌고 와서 진시훈 앞에 내동댕이쳤다.전범룡이 벌떡 일어나려는 찰나, 성준은 무표정하게 발길질을 했다.쿵 소리와 함께 전범룡은 무릎을 꿇었다.옆에 있던 사람이 참지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니 잠에서 덜 깬 얼굴이 떡하니 보였다.“자기야, 깼어?”강유나: “...”“어떻게 네가 여기 있어?”“내가 아니면 누구겠어?”하주희는 당당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자기야, 설마 진시훈인 줄 알았어?”“아니야.”“그럼 왜 그렇게 당황해? 그럴 줄 알았어! 입으로는 진시훈을 쳐다도 안 본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그의 몸이 탐났지?”하주희는 그녀를 껴안고 깔깔 웃었다.“자기가 드디어 남자 생각을 하는구나! 내일 바로 태국으로 날아가서 멋진 남자를 데려와 너를 즐겁게 해줄게!”“너 출근을 어떻게 하길래 갈수록 변태 같아.”강유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만 좀 해. 회사에 가야 해.”“오늘은 회사에 안 나가도 돼. 진시훈이 어제 사람을 시켜 나에게 연락했을 때 이미 오늘 하루 너에게 휴가를 준다고 했어. 푹 쉬어. 야, 그 진시훈 씨 정말 세심하지 않냐? 그 사람에 비하면 박현우는 정말 쓰레기야!”강유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그 사람이 어떻게 네 연락처를 알고 있지?”“나도 몰라. 높으신 분들은 다 그런 거 아니겠어?”“뭐가?”하주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3분 안에 이 여자의 모든 정보를 가져오도록.”“...”“그런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시훈의 비서가 너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만 하던데.”“별거 아니야. 식중독이었어.”강유나는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혹시라도 사실대로 말하면 하주희는 하루 종일 캐물을 것이 뻔했다.강유나는 땀으로 흠뻑 젖어 샤워하러 욕실로 향했다. 그녀가 나왔을 때, 하주희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외출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자기야, 나 출근해야 돼. 개 같은 사장이 또 왜 이렇게 늦었냐고 난리야. 이번 달에는 더 이상 지각하면 안 돼.”“사실 너희 사장님,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은데. 맨날 욕하지 마.”“치! 얼굴 빼곤 다 별로거든!”강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오? 잘생겼다고 인정하는
“네가 유능한 건 아는데, 잠깐 쉬어도 돼. 너는 널 철인으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내 능력 있는 직원이 과로로 쓰러지는 꼴 못 봐.”“알았어요. 그럼 내일 갈게요.”“내일 봐.”전화를 끊고 강유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지난 몇 년간 자신을 팽이처럼 몰아붙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박현우는 그녀를 걱정해주지 않았고 그녀 스스로도 조심스럽게 행동해 왔다.진화에 와서 이렇게 챙김을 받으니... 해성을 나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직 시간이 일러 강유나는 서두르지 않았다.그녀는 진나연에게 문자를 보냈다.[나연 씨, 진 대표님은 뭘 좋아해요?]근데 뜻밖의 답변이 왔다.[단 음식이요.]그녀는 택시를 타고 근처 쇼핑몰로 갔다. 그곳에는 맛있는 케이크 가게가 있었다.예전에는 자주 이곳에 왔었다.사실 박현우의 수석 비서가 되기 전, 강유나에게는 작은 꿈이 있었다.케이크 가게를 여는 것이었다.부드러운 생크림 향만 맡아도 행복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 당시 그녀가 박현우에게 이 생각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해 봐. 케이크 가게 하나쯤이야. 열 개라도 투자해 줄 수 있어.”그녀는 그의 말을 믿고 S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브랜드를 알아본 끝에 블루밍이라는 케이크 브랜드를 선택했다.들뜬 마음으로 그에게 이 소식을 전했지만 그때 박현우는 무관심하게 말했다.“이번 일이 끝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하지만 그 후로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예전에는 그가 잊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매주 블루밍에서 작은 케이크를 사다 줬으니 그가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그저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었다.목적지에 도착한 강유나는 곧장 블루밍으로 향했다. 매장 직원은 그녀를 알아보았다.“손님, 이번에도 여기서 드시고 한 조각은 포장해 도와 드릴까요?”“포장 하나 해주시고요. 내일 점심에 회사로 케이크 하나 배달해 주세요.”“네, 주소를 알려주세요.”강유나가 직원에게
말을 마친 후, 그녀는 조용히 강유나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강유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할 말 끝났어요?”강유나는 차갑게 그녀를 흘끗 보더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는 듯이 앞으로 나가 매니저에게 말했다.“이 작은 케이크 하나 더 주세요.”매니저는 두 사람 사이를 잠시 쳐다보다가 케이크를 하나 더 가져왔다.안수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강유나 씨, 왜 돈 아깝게 또 사요? 이 케이크 돌려주면 되잖아요.”그러면서 강유나 앞으로 봉투를 내밀었다.그리고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손을 놓았다.케이크가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안수지는 입을 가리고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말 미안해요. 다 망가졌네. 하지만 별일 아니에요. 이 가게는 곧 내 것이 될 테니까요. 새로 몇 개 더 보내서 보상해드리도록 할게요.”강유나는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그쪽이 케이크 가게를 연다고요?”“네.”안수지는 매우 기뻐하며 웃었다.“난 회사 다닐 체질이 아니라서 가게를 열고 싶다고 했더니 현우가 직접 골라보라고 해서요. 이 가게 케이크를 예전에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고요. 그래서 사려고요. 이제 돌아가서 현우한테 말하면 이 가게는 내 것이 되는 거예요.”강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픔과 동시에 어떤 후련함이 느껴졌다.‘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이...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구나.’“참, 유나 언니, 듣자 하니 언니도 예전에 케이크 가게 하고 싶어 했다면서요? 정말 기막힌 우연이네요.”안수지는 불쑥 말을 덧붙이며 더욱 신나게 웃었다.그녀는 강유나에게 남자뿐만 아니라 꿈까지 빼앗을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그런데 다음 순간, 강유나는 케이크를 집어 들더니 안수지의 머리에 퍽 하고 내리쳤다.“악!”안수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거렸다.“너 미쳤니?!”“이 케이크 네가 먹어. 난 보기도 역겨우니까!”강유나는 차갑게 안수지를 노려보고는 문밖으로 나가버렸다.몇 걸음 걷다가 그녀는
그녀는 스스로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 외에도 전에는 매주 블루밍이라는 케이크 가게에 가서 그에게 작은 케이크를 사다 주곤 했다.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현우는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의 작은 케이크를 훑어보다가 멈칫했다.블루밍이었다.“네가 산 거야?”“어. 난 네가 좋아하는 줄 알고...”“난 안 좋아해. 앞으로 사 오지 마.”박현우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그리고 그제야 안수지가 눈에 들어왔다.“너 모자는 왜 쓰고 있어?”“아... 아무것도 아니야...”안수지는 손으로 모자를 누르며 눈빛이 흔들렸다.“저기, 할 일 있으면 먼저 해. 난 돌아갈게.”“이리 와.”박현우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안수지는 약간 주저하며 다가갔다.박현우는 일어서서 그녀의 모자를 벗겼다. 모자에 끈적하게 묻은 크림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무슨 일이야?”안수지는 입술을 깨물며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나... 나 오늘 유나 언니 만났어...”“유나가 그랬다고?”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걔는 원래 차분한 성격인데, 오늘 왜 그런 거지?”“나도 몰라. 언니를 만나서 먼저 인사까지 했었어. 가게서 케이크를 사고 있길래 나도 케이크 가게를 열 생각이라고 말했더니...”안수지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크를 내 머리에 던지고는 역겹다고 욕했어...”박현우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케이크 가게.예전에 강유나도 그에게 가게를 열고 싶다고 말했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결국 열지 못했다.오늘 그녀가 안수지에게 손찌검한 것은 안수지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찔렀기 때문일 것이다.아니면...그가 안수지에게 이렇게 잘해주고 그녀가 예전에 원했던 것을 안수지에게 주는 것에 질투하는 건 아닐까?후자일 가능성을 생각하니 박현우의 기분은 오히려 좋아졌다.“현우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유나 언니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안수지는 그의 팔을 살짝 안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박현
안수지의 미소가 사라졌다. “왜 안 돼?”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 가게는 이름도 없고 케이크 맛도 별로야. 더 큰 가게로 프랜차이즈 같은 걸 해.내가 투자해 줄게. 그게 훨씬 더 나아.”“근데 난 이 가게가 갖고 싶단 말이야.”안수지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날 지경이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현우야, 전에는 내 맘대로 하라며?”“다른 가게로 해.”박현우의 말투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그가 불쾌해하는 것을 눈치챈 안수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순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의 눈에는 원망과 불만이 가득했다.바로 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온 것이다.박현우는 안수지를 자신의 무릎에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먼저 돌아가. 나 지금 바쁘니까.”안수지는 말없이 나갔다.박현우는 사람들과 사업 이야기를 마치고 함께 식사한 후, 오후에는 몇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모든 일정이 끝났을 때는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이때 정민호에게서 전화가 왔다.“현우 형, 내일 주말인데 같이 놀러 나오지 않을래? 재밌는 클럽을 새로 찾았는데, 여기 술이랑 여자애들 진짜 끝내줘!”“또 모이자고?”지난번 심민준이네 클럽에서 있었던 불편한 자리가 떠올랐다.강유나가 진시훈과 같은 편에 섰던 것을 떠올리자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떠날 때 안수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케이크 가게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하지만 확실히 좀 아닌 것 같았다.“어딘데?”“주소 찍어줄게! 현우 형, 빨리 와! 우리 형이랑 서윤이도 다 와 있어!”“그래.”박현우는 주소를 확인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안수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어디야?”“전에 사 준 단독 별장에 있어. 왜?”“준비해. 저녁에 놀러 가자.”...박현우가 안수지를 데리고 룸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모두 도착해 있었다.정
말하면서 그는 안수지에게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신경 쓰지 마세요. 서윤은 원래 성격이 좀 까칠하거든요.”“괜찮아요...”안수지는 순한 모습을 보였다.정태호는 웃으며 말했다.“현우를 잠시 빌려 가도 될까요?”“먼저 이야기 나누세요.”안수지는 돌아서서 옆 소파에 앉았다.박서윤은 그녀를 무시했고 정민호는 남자였기에 그녀는 혼자 구석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박현우는 정태호의 옆에 허리를 굽혀 앉아 넥타이를 풀었다.“할 말 있어?”정태호는 그에게 부르고뉴를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그냥 묻고 싶은 건데 정말 유나랑 헤어졌어?”“헤어지려면 사귀었어야지, 나와 유나는 그런 사이 아니었어.”“그럼 왜 그렇게 오랫동안 걔 희망 고문 한 거야?”박현우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자기가 좋다고 따라다닌 거지!”정태호는 담담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현우야, 우리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잖아. 한마디 충고하지만 19년이면 인생의 4분의 1이야. 누구든 쉽게 잊을 수 있는 시간 아니라고. 그러니 유나도 결코 쉽게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박현우는 입꼬리를 올렸다.“너도 유나가 나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해?”“내 말은 네가 이번에 유나 마음에 상처 주면, 걔는 절대 널 용서 안 할 거라는 얘기야.”박현우는 말문이 막혔고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내가 걔를 버린 건데, 걔가 날 용서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네가 생각 잘했으면 됐어. 어쨌든 너 여자 친구 생겼잖아. 네가 걔 신경 안 쓰는 거라면 걔가 돌아오든 말든 상관없겠지.”“어.”박현우는 그와 잔을 부딪쳤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정민호는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더니 목이 좀 칼칼해져서 예쁜 여자를 불러 노래를 시키고 자신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이때 박서윤이 갑자기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민호야, 너 진시훈이랑 친해?”“풋!”정민호는 주스를 뿜었다.“콜록콜록... 안 친해. 내가 그 자식이랑 어떻게 친하겠어? 걔랑 현우 형이랑 사이가
박서윤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네가 무슨 상관이야.”“피해자로서 충고 하나 하는데 진시훈은 현우 형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야. 함부로 접근하지 마.”“내 오빠처럼 눈이 멀지만 않으면 돼.”박서윤은 저 멀리 있는 안수지를 흘끗 보고는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오빠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내 친구 문아도 저 여자보다 훨씬 나은데, 오빠는 싫다잖아.”“임문아?”정민호는 눈살을 찌푸렸다.“됐어. 전에 모임 때 걔가 유나한테 빈정거리는 거 봤어. 나도 걔 별로 안 좋아해.”“입 닥쳐. 오빠를 좋아하는데 오빠 옆에 다른 여자가 있으면 속상한 게 당연하지. 너희 남자들이 뭘 알아!”정민호는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다물었다.‘그래, 몰라. 하지만 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고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안다고.’정태호와 이야기를 나눈 후, 박현우는 말이 없어졌고 구석에 있는 안수지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술만 계속 마셨다.결국, 자리가 파할 때쯤에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안수지가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현우야, 너 위염 있잖아. 그만 마셔.”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안수지의 얼굴을 본 후,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어.”손에 든 술을 다 마시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이만 끝내자. 해산.”말을 마친 그는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비틀거렸다.안수지는 곧바로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천천히 가.”정민호는 술병을 들고 정태호에게 다가가 말했다.“형, 무슨 일이야? 오늘 현우 형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정태호는 대답 없이 안수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했다.“민호야, 너 안수지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유나랑 좀 닮은 것 같지 않냐?”“무슨 소리야, 유나가 훨씬 예쁘지.”정태호가 말했다.“내 말은 대학 갓 입학했을 때 유나 말이야.”정민호는 잠깐 멍해졌다가 그때를 떠올렸다.그 당시 강유나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안수지처럼 찰진 검은 생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안수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 익숙한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박현우에게 몸을 기대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사람 유나 언니 아니야? 역시 예쁜 사람은 어디서든 인기가 많네. 진화의 대표님이 감싸주더니 이젠 또 새로운 구애자인가 봐.”박현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안수지는 그의 손을 잡았다.“현우야, 왜 그래?”“아니야, 내리자.”안수지는 순순히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모니카가 다가왔다.“박 대표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늘은 어떻게 오셨어요?”“여자친구에게 드레스를 골라주려고요.”그는 안수지를 앞으로 살짝 밀었다.모니카는 안수지에게 시선을 두고 몇 마디 칭찬한 후 그녀를 데리고 전용 피팅룸으로 안내했다.이곳의 피팅룸은 모두 넓은 공간에 전담 직원이 서비스를 제공했다.박현우는 따라가지 않고 강서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강서욱은 섹시한 모델을 데리고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매장을 나서려던 참이었다.“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는 건성으로 인사했다.박현우는 손을 뻗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강유나랑 무슨 사이지?”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무슨 사이냐고? 예쁘니까 좀 알아가고 싶어서요. 안돼요?”박현우의 목소리에는 싸늘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그녀에게서 떨어져.”“참 이상하네요. 박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러시는 거죠? 설마 강유나가 대표님 소유물이라도 되는 건가요? 이젠 해성도 다 떠났는데 다른 사람이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시겠다?”“감히 그녀를 건드리면 죽을 줄 알아!”“그럼 한번 해 보시죠.”강서욱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과연 누가 누굴 죽이는지 보자고요!”“현우야...”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수지는 흰색 드레스를 들고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서욱은 코웃음 쳤다.“박 대표님, 여자친구가 저기 계시네요. 주제 파악 잘하시고 오지랖 부리지 마세요.”그는 모델을 껴안고 의기
강유나는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하지만 강서욱은 따라왔다.“강유나 씨는 어차피 닳고 닳은 여자잖아. 박현우랑 그렇게 오래 자고도 아무것도 얻은 게 없지? 그냥 나랑 만나. 한 달에 6천만 원 줄게.”“꺼져!”“1억? 하아, 설마 자신이 2억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는 입술을 핥으며 강유나에게 다가왔다.“2억도 좋아. 하지만 좀 더 자극적인 걸 해야겠지. 네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짝!강서욱의 뺨에 강력한 따귀가 작렬했다.“내 앞에서 꺼지라고 했어! 여긴 CCTV도 있으니까 당장 꺼지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강서욱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칫, 성깔 하나는 대단하네. 내가 겁먹을 줄 알아?”그가 강유나의 손목을 꽉 움켜쥐고 다음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뭐 하는 짓이야!”하주희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빠르게 달려왔다.모니카도 뒤따라와서 바로 말했다.“강서욱 씨, 그만 손 놓으시는 게 좋겠어요. 강유나 씨는 진 대표님께서 직접 드레스 피팅을 위해 저에게 맡기신 분입니다.”진시훈의 이름이 나오자 강서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그는 천천히 강유나의 손목을 놓고는 비웃듯 말했다.“대단해. 박현우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다른 남자를 찾다니. 인기가 대단하셔~”강유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걱정 마. 어떻게든 네 차례는 안 올 테니까.”“말은 그렇게 일찍 하는 게 아니야.”강서욱은 목소리를 낮추고 비꼬는 투로 말했다.“강서윤 씨, 그 행운이 영원하길 빌어. 내 손에 걸리지 않도록.”말을 마치자 그는 음흉하게 웃고는 떠났다.그가 가자 하주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자기야, 방금 그 변태가 가면서 너한테 뭐라고 했어? 너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분해서 하는 말이었어.”“강제로 안 되니까 분풀이하는 거야?”하주희는 모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방금 그 인간 말종은 도대체 누구예요?”모니카가 말했다.
다음 날은 마침 주말이었다.강유나는 원래 진시훈과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갈 예정이었지만 진시훈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아침 일찍 해외로 출국하게 되었다.그는 전화로 담당자를 이미 연결해 놓았으니 혼자 가면 된다고 말했다.마침 하주희가 쇼핑하자며 찾아왔기에 강유나는 그녀와 함께 드레스를 보러 갔다.담당자인 모니카는 혼혈이었는데, S 시 브랜드 대리인일 뿐만 아니라 패션 잡지 회사 사장이기도 했다.많은 연예인이 그녀의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강유나를 보자마자 모니카는 칭찬했다.“강유나 씨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제가 본 많은 여자 연예인들보다 훨씬 빛이 나요!”강유나는 겸손하게 미소 지었다.이때 옆에 하주희는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죠. 우리 유나는 원래 이렇게 예쁘답니다. 유나의 절친으로서 정말 자랑스러워요.”강유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하주희는 장난스럽게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자기야, 진심이야. 아, 내가 왜 남자가 아닐까?”“네가 남자였으면 감방에 넣어줬을 거야.”“차마 그러진 못 하겠지~”하주희는 강유나에게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자기야, 얼른 들어가서 입어 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 기대할게!”맞춤 제작된 몇 벌의 드레스는 명품 C 브랜드의 예약 판매 상품이었다.진시훈도 어떻게 구했는지 특별히 그녀를 위해 공수해 온 것이었다.모니카는 커튼을 치고 직접 강운희가 드레스를 입는 것을 도왔다.드레스를 다 입은 강유나는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어때?”하주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유나야, 너무 예뻐! 자선 만찬회가 시작되면 넌 분명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거야!”말을 마친 하주희는 턱을 쓰다듬으며 음흉하게 웃었다.“그 자리엔 재계, 정계 거물들이 다 모일 테니 그 쓰레기 박현우도 분명 있겠지...”그녀는 마치 박현우가 후회하며 벽에 머리를 박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생각만 해도 통쾌했다.강유나는 거울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 본
박 씨 저택에서.박현우는 막 욕실에서 나왔다.샤워를 하고 나니 화가 좀 누그러졌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가 무심코 전화를 받자 안수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현우야, 아까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좀 일이 있어서 못 받았어.”“할머니는 좀 어때?”안수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내일 뭐 좀 사서 할머니 보러 갈까?”박현우는 옆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고개를 숙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필요 없어. 할머니는 유나를 보고 싶어 하셨는데, 오늘 만났으니 많이 좋아지셨어.”안수지는 침묵했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현우야, 할머니도 나를 싫어하시는 거야? 어머니랑 여동생도 싫어하는데 이제 할머니까지... 왜,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그녀는 박현우의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었다. “그들이 싫어하면 싫어하는 거지. 너랑 만나는 건 나잖아.”“그래서... 현우야, 넌 나를 좋아하는 거지?”박현우는 “좋아해”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짧게 대답했다.“어.”안수지의 목소리는 금세 밝아졌다.“현우야, 너만 나 좋아해 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바로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정민호의 문자였다.그가 보낸 사진을 열어보는 순간, 박현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사진에는 강유나와 진시훈이 있었다.두 사람은 로맨틱한 프랑스 레스토랑 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는데 정민호의 사진 촬영 각도 때문인지 레스토랑의 조명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다정해 보였다.안수지는 계속해서 재잘거렸지만 박현우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건성으로 몇 마디 대꾸한 후 전화를 끊었다.그가 초조하게 담배를 비벼 끄며 장소를 물어보려던 참에 정민호의 문자가 다시 도착했다.[형, 올래? 유나가 진짜 진시훈한테 넘어갈 것 같아!]박현우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그는 문자를 보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강유
박현우는 옆에 있는 마이바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손이 아팠다.벤틀리 안에서 강유나는 조수석에 앉아 티슈로 빗물을 닦고 있었다.차가 얼마쯤 달린 후, 진시훈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서 부드러운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걸로 닦아.”“고마워요.”강유나는 작은 담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았다.그러다가 담요를 내려놓을 때에야 차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고개를 돌리니 진시훈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몸을 돌려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강유나는 손을 멈췄다.“대표님?”“유나야, 너 소문과 좀 다른데.”진시훈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박현우를 끔찍이 사랑한다더니 아주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아.”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저도 사람이에요.”그녀에게도 최소한의 기준, 자존심, 마음이 있었으니 박현우가 계속 짓밟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진시훈은 웃음을 터뜨렸다.“맞아. 넌 사람이지만 박현우는 아니지.”“...”그는 욕하는 데 능숙해서 강유나도 어떤 면에서는 익숙해져 있었다.그녀가 물었다.“대표님은 왜 아직 여기에 계셨어요?”“할머니 뵙고 바로 간다고 했잖아. 나도 오늘 별일 없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진시훈은... 일부러 나를 기다렸다고?’강유나는 미안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대표님, 저녁 식사할 생각 있으세요? 만약 있다면, 우리...”“있어.”진시훈은 고개를 돌렸다. 깊은 눈동자가 유난히 아름다웠다.“뭘 먹으러 갈까?”강유나: “오늘은 대표님 생일이니까 대표님이 골라요.”...30분 후, 벤틀리는 프랑스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강유나는 진시훈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실내 조명은 은은했고 중앙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우아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테이블에는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명백히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였다.그녀는 무심코 진시훈을 바라보
할머니가 주무시고 나서야 둘은 방을 나왔다.문을 닫자마자 강유나는 박현우의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 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왜 그래? 내가 뭐 더러운 거라도 되는 것처럼?”“할머니 앞에서만 그런 척한 거였어. 이제 할머니께서 주무시니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강유나는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박현우도 따라갔다.“어디 가?”“돌아갈 거야.”“이렇게 늦었는데?”“내 일이니까 신경 꺼.”강유나는 단호하게 걸어갔다. 아래층에 도착하자 이 씨 아주머니가 기장 떡과 탕수육을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유미진은 소파에 앉아 포메라니안 한 마리를 안고 비꼬듯 말했다.“어머님께서 시키신 거니까 먹어.”강유나: “괜찮아요. 저녁은 이미 먹었어요.”“안 먹겠다면 말고. 내가 정말 네 같은 배은망덕한 계집애를 붙잡고 싶은 줄 아냐?”“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도 오지 않았을 거예요.”“뭐라고?!”유미진은 눈을 부릅떴다.“유나야, 이젠 기가 붙었구나? 감히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장 나가!”강유나는 돌아서 나갔다.밖에는 언제부터인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감촉은 차갑고 따가웠다.그녀는 별장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뒤에서 갑자기 두 개의 자동차 전조등이 밝게 비추었다.박현우의 차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차창이 내려가고 그의 짜증스러운 얼굴이 드러났다.“타!”강유나가 차갑게 말했다.“됐어. 택시 타고 갈 거야.”“여기서 무슨 택시를 타? 유나야,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 타!”강유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박현우는 주먹을 쥐었다.그는 강유나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그런 황소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고칠 줄도 모르는지.박현우는 쫓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강유나가 돌아보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빗물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려 그러잖아도 아름다운
“할머니, 아줌마.”유미진은 그녀를 흘끗 보고 차갑게 응수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반가워했다.“유나 왔구나! 어서 와, 얼굴 좀 보자!"강유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침대 옆에 앉았다.“거의 일 년 만이네. 유나야, 살 빠졌어.”할머니는 유미진에게 분부했다.“아주머니에게 유나가 좋아하는 기장떡하고 탕수육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해. 많이 먹고 살 좀 찌워야겠어.”유미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결국 유미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강유나는 할머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할머니, 어쩌다 또 편찮으세요?”“아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병도 다 나은 것 같구나.”“그래도 몸조심하세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먹고 싶은 건 없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할머니는 강유나의 손을 잡았다.“유나야,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말해보렴. 왜 해성에서 나왔니? 혹시 현우 그 녀석이 널 괴롭혔어?”강유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아니요, 제가 스스로 해성을 나온 거예요.”“왜? 너는 항상 현우를 좋아했잖니?”“저...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잘해줘서 저도 계속 잘해준 것뿐이에요. 단지 일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어서 해성을 나온 거고요.”“그러니까 너희 둘 사이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거니?”할머니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강유나가 할머니의 등을 토닥여 드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박현우가 할머니에게 물 한 잔을 건넸다.“할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이렇게 걱정하시면 안 돼요. 나와 유나 사이에는 아무 문제 없어요.”할머니의 눈빛이 다시 밝아졌다.“정말이냐?”“네. 젊은 연인들끼리 다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할머니도 저희 싸우는 거 많이 보셨잖아요. 다 금
박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지만 강유나를 챙겨준 어른은 박현우 할머니뿐이었다.그런데 할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다가 결국에는 경치 좋은 요양원으로 가셨다.비록 곁에 계시진 않지만 강유나의 생일 때마다 할머니는 선물을 보내주곤 했다.강유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진시훈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무슨 일이야?”강유나는 다소 어색하게 말했다.“대표님, 저녁 식사는... 나중에 다시 할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생겼어요.”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왔기에, 강유나는 이번에 가지 않으면 다시는 뵙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그랬다간 평생 자책하며 살 것 같았다.하지만 오늘은 진시훈의 생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진시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어디 가는 건데? 데려다줄게.”강유나는 다소 놀랐다.“화 안 나세요?”“아니.”진시훈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고귀한 얼굴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나와 생일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고 또 바람을 맞혔지만 난 성격 좋으니까 화 안 나.”강유나: “...”분명히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진시훈은 강유나가 알려준 길을 따라 박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에 그녀를 데려다주었다.그는 눈앞의 저택을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드리웠다.“어쩐지 길이 점점 익숙하다 했더니 박 씨 저택이잖아. 그럼 아까 그 전화는 박현우였어?”강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진시훈은 별다른 말 없이 차 문 잠금장치를 풀었다.“내려.”강유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차창을 두드렸다.진시훈은 담배를 꺼내려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어둑한 불빛에 반쯤 가려진 옆얼굴은 더욱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그는 차창을 내렸다.“왜 그래?”“내가 여기에 온 건 현우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아프셔서 왔어요. 할머니는 나한테 잘해주셨는데 걱정돼서요. 할머니를 뵙고 바로 갈 거예요.”강유나는 진시훈에게 잘 보
두 개의 손목시계였다.정교하고 독특한 디자인에 차가운 금속 광택이 빛나는 것이 보기만 해도 비싸보이는 시계였다.진시훈은 무덤덤하게 말했다.“고맙지만, 왜 시계를 두 개나 줬어? 내가 솔로라고 놀리는 거야?”심민준은 웃었다.“여자 시계는 유나 주면 되잖아.”“안 받을걸.”“그건 네가 알아서 해.”심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특별한 날인데, 저녁에 한잔할래?”진시훈은 시계를 챙겨넣으며 말했다.“뭐가 특별한 날인데? 나 생일 안 챙기는 거 알잖아.”“또 그러네.”심민준은 혀를 찼다.하지만 그는 익숙했다. 그 사건 이후로 진시훈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으니까.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진시훈의 허락을 받고 강유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심민준을 보고 그녀는 인사했다.“심 대표님.”“왜 이렇게 격식을 차려? 우리 오래 알고 지냈잖아. 예전처럼 불러.”강유나는 다시 호칭을 바꿨다.“민준아.”심민준은 예전에는 박현우의 집에도 자주 왔었기에 그녀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었다. 다만 언제부턴가 발길이 뜸해졌을 뿐이었다.그녀는 지난번 클럽에서야 그가 진시훈과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대표님.”강유나는 다가와 작은 케이크를 진시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동안 많이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케이크 맛있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진시훈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의아해하는 순간, 옆에서 심민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시훈아, 네 생일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나봐.”강유나는 깜짝 놀랐다.“대표님, 오늘... 생일이세요?”“어.”진시훈은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그럼 강 비서도 생일 선물 준비했어?”“...”강유나가 말했다.“사실 오늘이 생일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따로 챙겨드릴게요.”“농담이야.”진시훈은 케이크를 가져오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생일 안 챙겨.”강유나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지만 착각인지 확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