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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애인
비밀애인
작가: 단유

0001 화

작가: 단유
“울기는 왜 울어?”

어둑한 방 안, 남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의 조각 같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날카롭게 굳어져 있었고, 다가오는 미묘한 기류를 묵직한 차가움으로 단숨에 가라앉혔다.

남자는 손을 뻗어 여자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무심하게 물었다.

“하기 싫어? 응?”

“...”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한가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속으로 남자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제 더 이상 견디는 것도 싫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당신의 어설픈 배려 같은 다정함도 지긋지긋해!’

‘그리고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는 당신의 모습까지도!’

하지만 가희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남자가 채우지 못한 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잠시 곁에 둔 대체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4년 전, 남자의 손에서 그 수표를 받던 순간부터 가희는 이미 모든 권리를 잃어버렸다.

그녀에게는 심지어 거부할 자격조차 없었다.

어떤 상황이건 모두 가희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미안해요. 그냥... 눈이 좀 따가워서요.”

가희는 서둘러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억지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목젖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썼다. 마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지처럼.

이윤호도 바보가 아니어서 가희의 서툰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나약하고 순해 보이는 여자지만, 가희는 그동안 윤호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처음에 가희가 양부모를 통해 마치 물건처럼 포장되어 윤호한테 보내졌을 때조차, 그녀는 그저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을 뿐 아무런 말도 없이 양부모의 배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희는 무언가에 절망한 듯, 끝없는 어둠 속에서 혼자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윤호의 짙은 눈동자가 여자의 얼굴을 잠시 훑더니, 길고 가는 손가락이 가희의 턱을 가볍게 감쌌다.

“한가희, 알지? 나를 속인 사람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윤호와 4년을 함께한 가희는 이 남자의 눈빛에 서린 노골적인 불쾌함과 분노를 단번에 읽어낼 수 있었다.

“일 때문이에요.”

가희는 윤호가 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억지로 마음속 뒤엉킨 감정을 숨기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금 까다로운 일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 거예요.”

윤호의 차갑게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며 비웃음 섞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네가 이런 사소한 일로 고민하는 애는 아닌데. 몇 년 사이에 꽤 예민해졌나 보네.”

그는 자신이 가희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갖고 대한 탓에 그녀가 나약해졌다고 생각했다.

‘일 때문이라면... 굳이 지금 이 여자를 위해 나설 이유는 더더욱 없지.’

가희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윤호의 비아냥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가희에게 이 밤은 아직도 한없이 길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

모든 것이 잠잠해졌을 때는 이미 깊은 새벽이었다.

가희는 이불을 꽁꽁 두른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지만 가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윤호는 언제나 지칠 줄 몰랐다.

만약 그가 매번 나지막하게 ‘예나’라는 이름만 부르지 않았더라면, 가희는 윤호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품고 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여자의 볼 위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가희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이불 속으로 파묻고 들키지 않으려 애써 눈물을 숨겼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쾅!

무거운 서류봉투 하나가 침대 옆 탁자 위에 던져졌다.

그것은... 4년 전, 윤호가 그녀에게 내밀었던 ‘계약 연인 동의서’였다.

가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윤호는 등을 돌린 채 셔츠 소매를 천천히 정리하며 답했다.

“4년이나 같이 있었으면 충분하지 않냐.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남자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엔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길고양이나 유기견에게 무심히 건네는 말처럼 무심하고 덤덤하게,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마치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듯 윤호는 말했다.

“그리고 당초 약속했던 건 모두 줄 거야. 너에게 딱히 부족한 건 없을 거다.”

가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남자의 말은 마치 아랫사람에게 은혜라도 베푸는 듯.

가희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게 난감했다.

‘기뻐할 일이잖아. 이제 곧 이 숨 막히는 ‘계약 연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이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네, 알겠어요.”

한참 뒤에, 가희는 마침내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손톱이 거의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맡고 있던 일들은 빠르게 마무리하고 인수인계하겠습니다.”

가희는 윤호의 ‘비밀애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SR 그룹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이윤호 대표의 핵심 비서였다.

윤호는 그녀의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무엇보다 빠른 상황 판단력과 뛰어난 처세술을 칭찬했다.

특히 가희가 절대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래.”

윤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끝내 가희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희는 남자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새로 살 곳을 구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최대한 빨리 집을 비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윤호의 깊은 눈동자가 여자의 얼굴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마치 비즈니스 협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이 집은 원래 네 이름으로 산 거니까 계속 살아. 너는 받을 만큼 받은 거야.”

‘이 사람은 언제나 똑같아. 나와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선을 긋고, 필요할 때만 적당히 잘해주고...’

가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떨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장예나 씨가 돌아온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윤호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하게 가희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역시, 괜한 말을 꺼냈어...’

가희는 당황한 기색으로 급히 고개를 저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맺힌 씁쓸함을 숨기려 애쓰며 담담한 척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공항에 나가서 꼭 마중 나가시라는 말이었어요.”

윤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남자가 너무 오래 바라보자 애써 유지하던 가희의 평정심이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윤호가 경계를 풀고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알 필요 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 쓸데없는 호기심은 곤란하니까.”

가희는 마치 차가운 얼음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 아무리 둔하다 해도 윤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래, 난 언제든 필요할 때 쓰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지.’

‘더구나 장예나는... 이윤호가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첫사랑이라면,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던 거고.’

그녀는 쓰라린 기분을 억누르며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가 말이 많았네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렇게만 해.”

윤호는 무결점의 잘생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기색을 띤 채, 마지막으로 셔츠 소매의 단추를 채우고 고개를 들었다.

“더 할 말 남았어?”

‘허! 내가 할 말이 뭐가 더 있을까?’

‘당신 덕분에 4년간 회사에 남을 수 있어서, 이제 와서 당신이 베풀어준 배려에 고마워하라고?’

“없어요.”

가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조심히 들어가세요.”

쾅!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희는 멍하니 윤호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윤호의 작은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던 가희였지만, 이번만큼은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가 정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단지 무심한 것인지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단지 속이 마치 누군가 손으로 쥐어짜는 듯 심하게 아파왔고, 점점 참기 어려워지는 통증에 가희의 온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가희는 온몸을 휘감는 통증을 억지로 참고 일어나 서랍에서 약병을 꺼내 들었고, 서둘러 흰색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었지만, 씁쓸한 약 맛이 혀끝에서부터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약을 삼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울렁거리며 메스꺼움이 밀려왔고, 가희는 배를 움켜쥔 채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위산이 역류하며 코까지 올라오는 타는 듯한 고통 속에, 가희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속에 있는 것을 다 게워 냈다.

그녀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며칠 전 의사의 사무적이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였다.

“위암 말기입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아야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왜 하필 나야...?’

비좁고 텅 빈 화장실 안에서 가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오랜 시간 꾹꾹 눌러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살아오는 동안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도 없었는데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띠리리리-

갑자기 울린 휴대폰 벨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만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가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히고 여린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고, 벨 소리가 끈질기게 울리는 동안 그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결국 얼굴에 흐른 눈물을 대충 닦아낸 가희는 무기력한 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휴대폰에는 수십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메시지를 하나하나 확인하자 익숙한 폭언들이 가희의 눈앞에 나타났다.

[더러운 년아,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는데 왜 너 같은 년은 안 죽는 거냐?]

[한가희, 남의 감정을 가지고 놀다니 너 같은 여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거야!]

문장 하나, 단어 하나마다 지금의 사회가 품고 있는 어둠이 선명히 드러나,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가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익숙한 표정으로 빨갛게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메시지를 하나씩 삭제했다.

마지막으로 그 익숙하지만 지긋지긋한 번호를 차단 리스트에 추가한 뒤, 가희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마친 후,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휘청거리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차가운 방 안에서 이불을 꼭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웅크린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떨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과 깊은 외로움 속에서, 가희는 말없이 스스로를 작게 말아 숨긴 누에고치 속 애벌레처럼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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