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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화

Author: 단유
이른 아침.

가희는 눈을 뜨자마자 몇 군데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화를 걸었다.

윤호와 헤어지기로 한 이상 그의 집에 더 머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거처를 구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빨리 이사를 결정한 것은 단순히 가희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은 어디에나 윤호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희는 이 곳을 떠나 더 이상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면 이 허무한 꿈속에 자신을 가둬두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삼심병원 근처면 돼요.”

가희는 냄비 안의 뜨거운 죽을 천천히 저으며 전화기 너머 부동산 중개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가격은 최대한 저렴한 곳으로 부탁드릴게요. 조건이 좀 안 좋아도 상관없어요.”

가희에겐 기댈 가족도, 도움을 줄 사람도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텐데, 쓸데없는 지출은 최대한 줄여야 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가희는 비록 식욕이 전혀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아침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녀는 늘 그렇듯 가방을 챙겨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섰고, 붐비는 출근 시간의 지하철 안에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도심 속 금융 중심가로 향했다.

그녀가 지하철역 출구를 나서는 순간, 꽃바구니를 든 어린 여자아이가 다가와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꽃 한 송이만 사세요.”

가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괜찮아.”

‘이런 쉽게 시들어버릴 생명에 돈을 쓸 만큼의 여유는 없지.’

아이는 가희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외롭게 혼자 남아 입술을 꼭 깨물고 울고 싶은 얼굴로 가희를 바라보다가, 끝내 울음을 삼켰다.

그 순간 가희는 발걸음을 멈췄다. 자기 허리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자 묘한 감정이 밀려왔고,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뭔가에 이끌리듯 가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을 바꿨다. 몸을 살짝 굽히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다정하게 물었다.

“귀여운 아가,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언니한테 알려줄 수 있을까?”

“동백꽃이에요!”

깡마른 몸에 노란 얼굴을 한 아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대답했다.

“엄마가 말했어요. 동백꽃은 추운 겨울을 다 견뎌내고 나서야 피는 꽃이라서 ‘참을성’과 ‘고귀함’을 뜻한대요.”

아이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가희의 마음속 깊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의 한마디.

“언니도 그래요.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에요.”

가희의 맑은 눈동자가 순간 떨렸다.

누군가 자신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말해줄 날이 올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시절, 그녀는 다른 아이들처럼 귀여운 말투와 사랑스러운 말로 어른들을 즐겁게 해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희는 늘 어른들 관심 밖에 있는 아이였고,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이후에 만난 윤호 역시, 그녀가 아닌 그저 첫사랑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가희를 첫사랑 대신 4년간 곁에 두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가희는 혼자서 모든 슬픔을 삭이며 소리 없이 견뎌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어린아이는 가희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라며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래, 언니가 한 송이 살게.”

가희는 목이 메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돈을 건넸다. 그리고 아이에게서 순수한 마음이 담긴 붉은 동백꽃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그녀는 소중한 보물인 것처럼 꽃을 들고 천천히 코끝에 가져가 은은한 향을 맡았다.

그러자 차갑고 메말랐던 가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가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

...

SR그룹의 비서실과 대표실은 같은 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희는 익숙한 동작으로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부드럽게 움직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곧, 건물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딩동-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자, 가희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자신이 품에 든, 포장도 초라한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을 나선 순간,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일제히 쏠렸다.

어딘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희는 순간 당황하며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한 남자의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뒷모습이었다.

이윤호였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 서류를 건네받으며 다른 손으로 한 여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장예나였다.

‘그래서... 나에게 정리하자고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가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이 얼어붙은 것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멍하게 서 있던 그녀는 잠시 후, 장예나의 뒤에 있던 안경을 쓴 젊은 여직원이 꽃다발을 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 여직원은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 조심스럽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꽃은 빨리 치우세요. 우리 예나 언니 천식도 있고,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요.”

가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급히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당장 치울게요.”

그녀는 허둥지둥 꽃다발을 뒤로 숨기며 고개를 숙여 사과한 뒤, 급히 발걸음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러나, 가희가 한 걸음도 채 내딛기 전에 뒤에서 일부러 길게 끌며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말을 걸어온 사람은 비서실에 새로 들어온 인턴 지유리였다.

지유리는 누군가의 후광을 믿고 행동하는지 평소에도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유명했다.

특히 그녀는 가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가희를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역시나, 유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을 돌리고 있던 윤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가희를 바라봤다.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덧붙였다.

“제가 알기로 실장님은 평소에 꽃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시던데요. 그런데 꽃을 가져온 오늘이 하필 예나 씨가 오는 날이라니 참 신기하네요?”

유리의 몇 마디 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상황이 마치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프레임을 바꿔버렸다.

가희는 손에 쥔 꽃을 더욱 꼭 움켜쥐며 무의식적으로 윤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윤호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가희가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인 것처럼.

윤호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가희가 숨기듯 뒤로 감춘 꽃다발을 흘끗 보았다.

남자의 완벽한 이목구비 위에 한순간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흥! 뭐지, 이건? 꽃을 사서 뭘 축하하려는 거야?’

‘드디어 나에게서 벗어난 날을 기념이라도 하려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표정으로 윤호가 냉정하게 내뱉었다.

“당장 나가요. 다음에 또 이런 쓸데없는 거 들고 올 거면 그땐 출근하지 않아도 돼요.”

순간에 가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가희의 창백한 얼굴은 금세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밖으로 나온 가희는 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내던지듯 버리고, 한동안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갈 곳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언제부터인지 가희의 눈에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멍하니 공허한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스스로를 다그치듯 손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래, 이건 울 일도 아니야.’

‘장예나는 이윤호가 4년 동안 진심으로 기다렸던 여자잖아.’

‘이윤호가 장예나를 특별히 아끼고 보호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생각하니, 오히려 이런 일로 서글퍼하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가희는 문득 체념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차갑게 식은 뺨을 두어 번 세게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한가희.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곧 이 사람과 멀어질 수 있을 거야.”

윤호가 장예나와 함께 SR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초유의 사건은 단숨에 사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뻔했다.

가희는 한숨을 깊이 내쉰 뒤, 흐트러진 감정을 모두 수습하고 다시 SR 그룹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비서실로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완벽하게 감정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역시나, 비서실에 들어서자마자 몇몇 직원들이 모여 소곤소곤 수군거리는 소리가 가희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헐, 나 진짜 잘못 봤나 했어. 진짜 TV에서 보던 그대로야!”

“맞아. 내가 알기로 장예나 씨는 우리 대표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이래.”

“그렇다더라. 장예나 씨는 우리 회장님께서 한눈에 점찍은 손주며느리감이래. 근데 본인이 워낙 커리어에 욕심이 있어서 재벌가 사모님 되는 거엔 관심 없었다더라!”

“그래. 장예나 씨가 워낙 자기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겨서 결혼 같은 건 관심 없었다잖아. 그런데도 우리 대표님이 몇 년씩 기다렸대.”

“그만큼 대표님에게 장예나 씨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거지.”

여직원들의 대화 내용이 가희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모든 상황이 너무나 확실했네.’

‘이윤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 단호하게 나를 밀어냈는지...’

가희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여직원들이 들뜬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마음속 깊이 알 수 없는 거리감과 씁쓸함이 밀려왔다.

‘이윤호가 원래부터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구나.’

‘그저, 이 남자에게 사랑할 가치를 가진 사람이 나는 아니었던 거지.’

객관적인 현실 인식에 가희의 가슴이 더 아팠다.

“컥컥...”

가희는 손가락을 가볍게 쥔 채 입을 가리고 두 번 조용히 기침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어제 회의록 정리해서 내 사무실로 가져다주세요.”

“네, 실장님.”

여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흩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거슬리는 경멸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쳇, 뭐가 잘났다고 저래요?”

지유리가 일부러 커피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한 실장님이 지금 자리에 올랐는지 다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그렇게 잘난 척할 건 아니지 않아요?”

그 말에 가희의 가냘픈 뒷모습이 순간 굳어졌다.

‘스물일곱 살에 남들이 평생 벌어도 못 버는 연봉을 받으며 이 자리까지 왔지만...’

‘이 나이에 이렇게 빠르게 올라온 여자를 두고 온갖 험담과 질투가 따라붙는 건 당연하지.’

‘그동안 수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고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도 묵묵히 참아왔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항상 참아내고, 넘기면서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지만, 그 결과가 고작 이거야?’

‘결국 지금 남은 건 겨우 몇 달 정도의 시간이 전부네.’

‘이렇게 참고 견디며 살아온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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