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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화

작가: 단유
가희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왕 대표님.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저희 대표님께서 이번 계약은 중요하니 특별히 더 신경 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윤호가 직접 자신을 보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SR 그룹 대표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왕명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명찬은 그녀의 은근한 경고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가희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 왕명찬은 계속되는 가희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말했다.

“SR 그룹에서 온 사람치고는 별로 성의가 없네. 아무리 생각해도 중요한 계약인데 이런 눈치 없는 사람을 보낸 걸 보면 말이다.”

가희는 눈을 살짝 좁히며 미소를 거두고,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꺼내 조용히 밀어놓았다.

“왕 대표님, 이 계약으로 이득을 보실 분이 누구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SR 그룹이 이번 계약을 포기한다고 해서 저희 쪽에 손해가 큰 건 아닙니다.”

“오히려 SR 그룹 대신 더 많은 다른 협력사가 줄을 설 겁니다. 오늘 대표님께서 제가 직접 오도록 한 이유는 왕 대표님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상황을 설명한 후, 가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까 드린 말씀은 다시 한번 잘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SR 그룹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입니다.”

가희는 왕 대표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가면서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왕명찬... 정말 눈치 없구나.’

솔직히 말해, WR 그룹과의 협력은 SR 그룹에 꽤 괜찮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가희는 윤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윤호는 복잡한 일을 싫어했고,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작은 문제에는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지금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대응한 건 다소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윤호라면 분명 수많은 이익이 보장된 계약을 우선하겠지. 그리고 난 그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사소한 비서일 뿐이니까.’

가희는 차가운 표정을 숨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 계약을 따내는 것도, 자신을 지키는 것도 결국은 그녀 혼자 해내야 할 몫이었다.

...

화장실에서 나오던 순간, 가희는 느닷없이 누군가에게 강하게 끌려가 품에 안겨버렸다.

“흠... 한 실장,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거슬리는 남자의 비릿한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가희는 깜짝 놀라 몸을 빼내려 했지만, 남자의 팔에 단단히 감겨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바로 왕명찬이었다.

“한 실장, 이렇게 서툰 방식으로 접근해도 별로 효과가 없을 텐데?”

왕명찬은 비열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고, 화장실 안쪽 칸으로 끌고 가려는 듯 발을 옮겼다.

심지어 그의 끈적한 손은 가희의 등 쪽 지퍼에까지 닿으려 했다.

가희는 속이 울렁거릴 만큼 불쾌했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차갑게 말했다.

“왕 대표님,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왕명찬은 눈을 감은 채 희열에 찬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한 실장, 여기까지 와서 무슨 새삼스럽게 튕기기야? 이윤호 대표가 왜 자네를 보냈는지 모르겠어?”

‘정말 어이없네.’

가희는 속으로 비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자기 하이힐을 들어 그의 발등을 세게 짓밟았다.

왕명찬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갑자기 느껴지는 바람과 함께 누군가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악!”

왕명찬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놀란 가희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윤호가 서 있었다.

날렵한 턱선과 날카로운 눈빛의 윤호는 숨을 고르며 왕명찬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재킷을 벗어 가희의 어깨에 덮어주며 짧게 물었다.

“괜찮아?”

가희는 순간 멍해졌고, 하루 만에 본 윤호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는 전보다 좀 더 야윈 듯했고,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다. 흰 셔츠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몸매가 눈에 들어왔고, 깊고 날카로운 눈매는 묘한 아우라를 풍기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가희는 잠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윤호는 그녀의 대답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왕명찬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왕 대표님,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으셨겠죠?”

가희가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왕명찬이가 소리쳤다.

“너 누구야!?”

윤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대표님, 지금 저까지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그러면서 윤호는 손목에 찬 시계를 살짝 만지작거리며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왕명찬은 윤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한 번 주춤하더니,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얼굴이 굳었다가, 곧 비아냥거리듯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으로 윤호를 가리켰다.

“두고 보자고.”

그렇게 말한 뒤, 왕명찬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될 것이 뻔했다. SR 그룹과의 계약이 WR 그룹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확실한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가희는 윤호의 넓고 단단한 등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

‘설마 이곳까지 온 이유가 나를 보겠다고 온 것일까?’

‘아니면 혹시 내가 실패하는 모습을 확인하려고 온 거야?

그런 생각이 스치자 가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어깨 위에 걸쳐진 그의 재킷을 벗어 건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윤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고, 감정의 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은 가희의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SR 그룹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도 아직도 이런 사람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다니. 한가희, 나아진 게 하나도 없네.”

가희는 손바닥을 꽉 쥐고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얼굴에 드러날 뻔한 서러움을 억눌렀다.

‘내가 방금 뭘 기대했던 거지? 이윤호는 언제나 회사의 이익이 최우선인 사람인데, 왜 이 사람이 나 때문에 달려왔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회사에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윤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여자... 지금 나에게 화를 내는 거야? 아니면 비꼬는 거야?’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우준서가 와인잔을 들고 다가왔다.

가희를 바라보는 그의 낯빛은 순간 미묘하게 변했지만 곧 평소의 온화한 미소를 되찾으며 말했다.

“이 대표님, 이렇게 우연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분이 한 실장님이시군요. 낮에 제 아내와 한 실장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이미 들었습니다. 제 아내가 실례를 범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윤호는 가희를 힐끗 바라보며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폈다.

그러나 가희의 얼굴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무표정 그 자체였고,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편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 대표님, 과한 말씀입니다. 이번 일은 제 책임도 있습니다.”

준서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윤호에게 다시 사업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윤호는 손짓으로 대화를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낸 후 멀리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가볍게 모임 자리라서요. 비즈니스 얘기는 다음에 하시죠.”

준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다시 가희를 바라보며 뭔가 더 말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윤호는 틈을 주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한 실장, 늦었으니 오늘 일에 대한 답변은 최대한 빨리 준비해.”

가희는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그녀의 표정에 잠시 서글픔이 스쳤으나, 그것도 잠깐일 뿐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빠르게 답변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가희는 말없이 돌아서서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그녀는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는 차가운 밤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

준서는 가희가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복잡하게 흔들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호의 눈에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윤호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2층에 있는 VIP 룸으로 돌아갔지만, 거기서도 와인잔을 손에 들고 계속 가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준서와 가희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윤호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윤호는 와인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후, 윤호의 머릿속에 인사팀에서 올라온 가희의 사직서가 떠올랐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하듯 속으로 비웃었다.

‘한가희, 이렇게 급하게 내 곁을 떠나고 싶은 이유가 이준서 때문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서둘러서 그 남자와 함께하고 싶었던 거야?’

그는 서늘한 눈빛을 띠며 잔을 기울이면서도 최근 들은 우준서와 한동건 부부가 가희를 두고 내기를 벌였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윤호는 와인을 한 모금 더 삼키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지켜보지. 네가 그토록 마음을 줬던 우준서가 너를 어떻게 대할지.’

그의 표정은 속내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고, 한층 더 차가워졌다.

‘한가희, 언젠가 다시 내 앞에 와서 매달리는 날이 오겠지. 난 그때를 기다릴 거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나와서 윤호를 불렀다.

“윤호야, 너 뭐 해? 아까부터 계속 멍하니 있네. 혹시 아래층에 괜찮은 여자가 있어서 벌써 정신 팔려있는 거 아니야?”

다른 친구가 장난스레 덧붙였다.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 최근에 예나가 돌아왔잖아. 우리 윤호 눈에 다른 여자가 들어올 리가 있나.”

윤호는 말없이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하듯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농담에 대해선 그는 어떤 반응도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와인잔을 입에 가져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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