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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 화

작가: 단유
생각을 다 정리한 가희는 잠을 잘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윤호와의 관계는 그저 ‘거래’였다. 그걸 잘 알면서도 괜히 스스로를 원망하고 상처받을 필요는 없었다.

가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요양원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 가희 아니야? 이렇게 보자마자 가버리다니, 무슨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민주, 우준서의 아내였다.

과거 가희와 우준서의 사이가 예사롭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진민주는 매번 가희를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걸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가희는 민주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가려 했으나, 민주가 먼저 가희의 앞을 막아섰다.

“왜 이렇게 급하게 도망치려고 해? 무슨 뒤가 구린 일이라도 있어?”

민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이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손에 든 명품 가방이 눈에 띄었다. 우준서가 아내에게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지원해 주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가희는 무표정하게 민주를 바라보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모님,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참 세상 좁네요.”

민주는 그런 가희의 태도에 더 기분이 나쁜 듯 비웃음을 지었다.

“정말 우연일까? 네가 여기 온 이유, 혹시 우리 준서 씨 할머니 만나러 온 거 아니야? 준서와 끝난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이런 짓을 해?”

“그리고 난 다 알고 있어. 내가 충고 하나 할게, 그런 헛된 생각은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가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지만,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고 감사해요. 하지만 저도 분명히 말씀드리죠. 저는 한 번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가희가 담담하게 말을 마치자마자, 민주는 갑자기 손을 들어 가희의 뺨을 세게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가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가희는 당황했지만 곧 눈썹을 찌푸리며 민주를 차갑게 바라봤다.

민주는 여전히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

“이건 경고야. 다시는 준서 씨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요양원에 오는 건 물론이고, 준서 씨와 관련된 어떤 일도 손대지 마. 만약 또 이런 짓을 하면...”

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가희는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진민주의 뺨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따악!

예상치 못한 가희의 행동에 민주는 충격을 받은 듯 굳어버렸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가희의 차가운 눈빛과 단호한 태도에 민주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순간, 민주의 머릿속에 스친 건 가희가 과거 이윤호의 곁에서 ‘완벽한 비서’로 불리며 모두가 인정했던 뛰어난 업무 능력이었다.

그런 가희가 절대 함부로 당할 리 없었다.

가희는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모님께서도 제일 잘 알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불안감을 저에게 뒤집어씌우지 말고, 차라리 우준서 대표님에게 더 신경 쓰세요.”

“지금 사모님께서 하시는 행동은 그저 유치할 뿐이에요. 다시 만날 일 없기를 바랍니다.”

민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가희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이미 가희는 등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둘 다 알지 못한 채, 멀리 설치된 CCTV 카메라가 이 모든 장면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었다.

가희 역시 이 일이 다시 우준서와 얽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다음 날, 가희가 막 자리에 앉자마자 내선 전화가 울렸다.

“들어와.”

윤호의 목소리였다.

가희가 대표실로 들어가자 윤호는 말없이 한 서류를 그녀에게 던지듯 건넸다.

“WR 그룹 계약서다. 내일이 계약 갱신 마지막 날이니까 네가 처리해.”

가희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WR 그룹의 왕명찬 대표는 업계에서 손버릇이 나쁘고 도덕적이지 않은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윤호 역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전까지 WR 그룹의 계약 갱신 업무는 항상 남자 직원이 맡았었고,

그런데 이번엔...

가희는 잠시 망설이다 윤호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윤호가 냉정하게 물었다.

“문제 있으면 말해.”

가희는 손에 쥔 서류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고,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 그녀가 용기를 내어 거절하려던 찰나, 윤호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맑은 여성의 목소리에 윤호의 표정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래, 오후에 갈게.”

가희는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와 통화 중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장예나...’

가희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온통 장예나에게만 가 있지. 내가 싫다고 해 봤자 이 사람이 배려해 줄 리가 없지.’

‘이윤호에게 나는 그저 필요할 때 부리는 직원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러니 WR그룹과의 계약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내 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겠지.’

가희는 깊은 한숨을 삼키며 손에 쥔 서류를 더 꽉 움켜쥐었다.

전화가 끊기자 윤호는 다시 차갑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가희, 내 시간 낭비하지 말아.”

남자의 목소리에는 이미 짜증과 불만이 묻어 있었다.

가희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대표님. 문제없습니다.”

윤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더욱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가희의 태연한 반응에 더욱 짜증이 난 그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문제없으면 나가.”

가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서류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본 사무실 동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실장님, 그 왕 대표 진짜 악명 높잖아요. 대표님이 왜 그 일을 실장님한테 맡기신 거예요?”

“맞아요. 실장님, 대표님한테 가서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해보면 안 돼요?”

“아니면 제가 같이 갈게요. 사람 많으면 그 양반도 함부로 못 할 거예요.”

동료들의 걱정스러운 말에 가희는 마음속 깊이 씁쓸함이 밀려왔다.

‘이윤호, 다들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당신이 모를 리가 없잖아. 정말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은 걸까?’

‘실은 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은 명확하니까.’

‘신경 쓰지 않으니까 내 안전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거겠지.’

가희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요. 이런 일, 저한테는 식은 죽 먹기예요. 다들 신경 쓰지 말고 일해요.”

동료들은 걱정을 거두지 못한 채 몇 마디 더 위로의 말을 건넨 후에야 자리로 돌아갔다.

가희는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켠에 답답함과 씁쓸함이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결국, 나 혼자서 이 일을 처리해야겠지.’

가희는 자리로 돌아와 신속하게 왕명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왕명찬은 상대가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약한 말투로 느끼한 농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왕명찬의 말장난을 받아넘겼다.

전화를 마친 후, 그녀는 저녁 식사 장소를 고급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예약했다.

왕명찬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가희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 가희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선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팁을 웨이터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제 잔에 담길 와인은 빨간색 음료로 바꿔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웨이터는 팁을 받은 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가희의 신경은 여전히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반드시 이 계약을 따낼 생각이었지만, 문제는 왕명찬의 추잡한 행동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이윤호,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을까?’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지만, 가희는 곧 스스로를 비웃었다.

윤호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하든, 이 사람은 아무런 관심도 없겠지.’

잡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왕명찬이 도착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가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지만, 악수를 빙자해 그녀의 손을 슬쩍 더듬었다.

가희는 눈빛을 살짝 좁혔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손을 빼며 미소를 유지했다.

“왕 대표님, 오늘은 A코스 메뉴로 준비했습니다. 제가 사전에 대표님의 비서분께 여쭤봤을 때, 대표님께서는 이 메뉴를 자주 드신다고 하셔서 준비했는데, 혹시 알레르기나 드시면 안 되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제가 웨이터에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명찬은 가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눈빛은 대놓고 그녀의 외모를 훑으며 말끝에 침이 고인 듯했다.

“이윤호 대표님께 한 실장 같은 유능한 비서가 있어서 참 부럽네.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는데, 소문보다 훨씬 더 미인이니까.”

왕명찬의 노골적인 시선과 말에 가희는 속으로 불쾌함이 치밀었지만,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그저 사무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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