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희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알렌의 얼굴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가희의 말은 마치 날 선 칼처럼 그녀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찔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알렌은 그때 울린 휴대폰 벨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구석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가희는 행사장 구석을 돌아다니며 이상이 없는지 점검을 마치고 잠시 앉아 쉴 생각이었지만, 그때 알렌이 다소 어색한 영어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너더러 오라고 했어? 설마 왕국영도 그렇게 말했어? 걔 나 꼬실 때는 그런 말 안 했거든.” “뭐라고? 지금 내가 임신하니까 날
“울기는 왜 울어?” 어둑한 방 안, 남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의 조각 같은 뚜렷한 이목구비가 날카롭게 굳어져 있었고, 다가오는 미묘한 기류를 묵직한 차가움으로 단숨에 가라앉혔다.남자는 손을 뻗어 여자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무심하게 물었다.“하기 싫어? 응?” “...”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한가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속으로 남자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제 더 이상 견디는 것도 싫어! 나와 아무 상
이른 아침.가희는 눈을 뜨자마자 몇 군데 부동산 중개업소에 전화를 걸었다. 윤호와 헤어지기로 한 이상 그의 집에 더 머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거처를 구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빨리 이사를 결정한 것은 단순히 가희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은 어디에나 윤호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희는 이 곳을 떠나 더 이상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면 이 허무한 꿈속에 자신을 가둬두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삼심병원 근처면 돼요.” 가희는 냄비 안의 뜨거운 죽을 천천히 저으며
“미안하지만,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가희는 평온한 미소를 지었으나, 아름다운 눈동자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그간 저와 관련된 모든 인사이동은 각 부서 회의에서 결정된 후, 대표이사님의 결재로 최종 확정된 건데, 유리 씨는 어느 과정에서 의문이나 불만이라는 거죠?” 가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저...!” 유리는 가희가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들어넘길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의 날카로운 반응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한 기색으로
“다음 정류장은 청산요양원, 청산요양원 정류장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기계음 안내방송이 천천히 버스 안에 울려 퍼졌고, 좁은 차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희는 손에 든 보온병을 조심스레 들고 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버스에서 내린 후,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요양원 3층으로 걸어 올라가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 멈춰 섰다.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고령의 할머니가 희미하게 보였다. 가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
생각을 다 정리한 가희는 잠을 잘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윤호와의 관계는 그저 ‘거래’였다. 그걸 잘 알면서도 괜히 스스로를 원망하고 상처받을 필요는 없었다. 가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요양원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 가희 아니야? 이렇게 보자마자 가버리다니, 무슨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민주, 우준서의 아내였다. 과거 가희와 우준서의 사이가 예사롭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
가희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왕 대표님.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저희 대표님께서 이번 계약은 중요하니 특별히 더 신경 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윤호가 직접 자신을 보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 SR 그룹 대표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왕명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명찬은 그녀의 은근한 경고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가희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 왕명찬은
가희는 자리로 돌아와 계약서를 확인하던 중, 왕명찬이 이미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록 왕명찬도 불쾌한 인물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사업을 키운 사람인 만큼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SR 그룹과 틀어지는 것은 WR 그룹에게 전혀 득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가희는 서류를 가방에 넣고 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은 차량과 인파로 북적였고, 거리의 불빛들이 눈부셨다. 그러나 이 화려한 도심 한가운데서, 그녀는 왠지 모를 공허함과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가희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알렌의 얼굴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가희의 말은 마치 날 선 칼처럼 그녀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찔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알렌은 그때 울린 휴대폰 벨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구석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가희는 행사장 구석을 돌아다니며 이상이 없는지 점검을 마치고 잠시 앉아 쉴 생각이었지만, 그때 알렌이 다소 어색한 영어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너더러 오라고 했어? 설마 왕국영도 그렇게 말했어? 걔 나 꼬실 때는 그런 말 안 했거든.” “뭐라고? 지금 내가 임신하니까 날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더라니.’ 지금 알렌이 윤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단순한 비즈니스적 시선이 아니라, 어딘가 감상하는 듯한 기색이 짙었기 때문이었다. 가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윤호가 와인잔을 들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여부는 우리 비서가 허락해야 할 것 같은데요.”알렌의 표정이 순간 살짝 굳었다. 하지만 가희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침착하게 답했다. “대표님께서는 오후에 귀사에서 마련한 환영 행사에 참석하셔야 하고, 저녁에는 냉동창고
“실장님, 방금 대표님이 오늘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문서들 정리하러 갔다 왔는데, 오늘 AW 그룹의 알렌, 그러니까 그날 봤던 여자 비서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같이 가시겠어요?” 주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가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윤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네가 안 가도 돼. 난 창고 시찰하러 가야 하니까, 넌 호텔에 남아서 문서나 정리해.” 주성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조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한 실장님 목에 있던 그건
가희의 얼굴이 순간 붉게 물들었고, 윤호를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으로 두 손을 그의 가슴 앞에 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시간이 벌써... 저...”하지만 윤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고, 곧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가희, 넌 왜 여기 있어?”그 한마디에 가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젯밤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결국 또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네...’가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윤호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잡으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날 유혹하려
“대표님, 취하셨어요. 일단 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희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윤호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치 집착이라도 하듯 답을 강요했다. “후회하냐고! 한가희, 너 후회해?”‘후회?’ 가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후회할 게 대체 뭐가 있지?’ ‘나는 그저 당신의 말 한마디에 움직여야 했던,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존재였잖아.’ ‘당신이 나에게 애인이 되라고 했을 때, 거절할 수 없었어. 자존심을 내던지고 당신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지.’ ‘그
윤호가 SR 그룹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고, 거의 매일 과로와 싸우며 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가희에게 익숙했다. 그가 직접 지시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윤호가 금방 눈치챌 것이 뻔했다. 가희는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주어진 일을 끝내기로 결심했다.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자기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는 사이, 주성은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와서, 상처 다시 소독하고 붕대 감아주세요.”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여서 가희의 상처를 다시 제대로 처리했다. 의사는 처치를 마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분의 상처는 중요 장기나 신체 부위를 피했기 때문에 며칠만 안정을 취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당분간 식사나 생활 습관에 신경을 쓰셔야 하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약간 우울 증세가 보이는데, 심해지기 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의사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 병실에서 빠져나갔고, 병실 안에는
윤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주성은 여비서의 은근한 매력에 점점 더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주성은 그녀의 눈에 잠깐 스친 불쾌감의 기색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그때 갑자기 주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윤호는 곧바로 주성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간병인에게서 온 전화인가?”주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병원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윤호는 곧바로 여비서를 향해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미팅은 이만 마쳐야 할 것
“총알이 다행히 주요 장기를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환자분의 전반적인 생존 의지가 강하지 않아 당분간은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윤호가 병실로 들어섰을 때, 가희는 침대에 누워 미동도 없이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마치 이미 세상을 떠난 것처럼 창백하고 생기 없는 모습이었다. 아까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윤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가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한가희, 죽고 싶으면 적어도 나한테는 물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