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희와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그런데 막 올라타자마자, 그녀가 의료진에게 나지막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안 되면... 제 장기 기증할게요. 꼭 필요한 분들에게요.” 순간, 윤호의 속이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그는 한걸음에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윤호의 눈빛에는 명백한 분노와 위협이 서려 있었다. “한가희, 그렇게 빨리 죽고 싶어?” “세상에 너한테 중요한 게 하나도 없어?” 이미 처음이 아니었다. 가희는 생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녀는 마치... 언
친구들은 예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역시 예나 마음 넓은 건 알아줘야 해. 괜히 우리가 오해했네.” 예나는 우아한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후, 예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나서자마자, 안에서 들려온 비웃음 섞인 목소리. “아니, 근데 장예나는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그렇게 고귀한 척이야? A 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하루 종일 이윤호 대표 주변에 얼쩡거리는 거.” 다른
의사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병원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오고 가는데, 매번 그 모든 감정에 일일이 휩쓸릴 여유 따위 없었다. 하지만 의사는 가희가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너무도 힘들게 살아왔다.’ ‘위암 말기, 몸 곳곳에 남아있는 총상 자국, 그리고 이제는 교통사고까지.’ ‘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던 걸까?’ 의사는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병실 앞. 윤호는 어떻게 발걸음을 옮겨 걸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찌르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를 본 윤호는 즉시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가희의 상태를 점검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분은 깨어났지만, 아직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과격한 움직임은 피하세요. 뇌진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틀 동안은 포도당 링거만 맞아야 하고, 이후에 유동식을 조금씩 섭취하는 게 좋습니다. 보호자님도 환자 회복에 더 신경 써 주세요.” 윤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차분하게 설명을 듣는 모습이었다. 그러
결국, 한가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샤워젤이 든 통을 집어 들어 윤호의 이마에 그대로 던졌다. 퍽! 순간, 욕실 안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샤워젤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정확하게 그의 이마를 강타했고, 곧바로 상처가 나 피가 맺혔다. 윤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욕실을 나갔다. 가희는 혼자 힘겹게 화장실을 마쳤고,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때, 문밖에서 윤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났어?” ‘제발 이대로 가라... 그냥 가라고.’ 가희
가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이미 오후 여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병실 안은 조용했고, 간간이 남자가 종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가희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조금 가다듬는 순간, 마침 윤호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가희는 얼른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윤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많이 다쳤어. B 국에서 좀 더 회복하는 게 좋을 거야. 난 내일 회사로 돌아가야 해. 다음 주말, 시간 비워 둬.”가희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미간을 찌푸
병실에 다시 가희 혼자만 남았을 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장예나의 신작 컬렉션 발표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실 많이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단순히 ‘장예나’ 세 글자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신작 컬렉션 발표회 관련 뉴스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SNS에는 예나의 전시회를 축하하는 키워드가 도배되어 있었고, 댓글 또한 온통 찬사 일색이었다.[세상에, 장예나 씨는 얼굴도 예쁜데 이렇게 재능까지 뛰어나다니.][맞아, 장예나 씨가 디자인한 주얼리 작품도 너무 예뻐. 신작 컬렉션 발표회 열리면 꼭 가볼 거야! 가격이 괜찮다면 하나
남자의 말은 날카로웠고, 그 의미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가희는 윤호를 바라보며 윤호의 말뜻을 이미 깨달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대표님, 제가 좀 피곤해요.”윤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가희가 문쪽을 가리켰다.“대표님, 시간이 늦었어요.”그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윤호는 가희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입을 뗄 듯하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가희는 남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래, 이윤호... 당신 나를 손톱만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가희는 창백한 얼굴로 이정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막다른 길목에 다다랐을 때, 가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감사합니다.”이정은 가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한가희 씨지요? 나도 가희 씨 알아요.”가희는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나를 안다는 건, 아마도 최근의 뜨거운 실시간 검색어 때문이겠지.’ 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도 눈앞에 있는 여성을 알아봤다. 소이정, 과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다만, 이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B 국으로 떠났
“아가, 엄마는 오늘 술 안 마실 거야. 엄마가 널 지켜줄게.”하지만, 가희는 바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셀레나가 있는 룸의 문을 열자, 중심에 앉아 있던 장예나가 가희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가희는 본능적으로 셀레나를 경계하고, 본능적으로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셀레나가 가희의 손목을 붙잡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여기 앉아. 다들 몰랐겠지만, 이 사람이 내 새 매니저야. 꽤 유능하다고.”예나는 가희의 옆자리를 내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한 실장님, 이렇게 또 만나네요. 정말 우연
“너...”셀레나가 여전히 당황하며 몸부림치는 동안, 가희는 망설임 없이 옆에 있던 바늘과 실을 집어 들었다. 가희는 빠른 손놀림으로 실밥이 풀린 셀레나의 드레스를 즉석에서 꿰매기 시작했다.셀레나는 숨이 막히는 듯 분노했다.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가희를 때리려 했지만, 가희는 셀레나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고는 그대로 무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시간 없어요.”셀레나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저항할 틈도 없이 가희에게 떠밀리듯 런웨이 위로 올라갔다.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셀레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 드레스가 스
셀레나는 자신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문 앞에 서 있던 강지섭이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셀레나 얼굴에서 이런 표정을 보다니, 참 보기 드문 광경이네.”셀레나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바꾸고, 아부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 대표님, 이런 우연이 있나요?”지섭은 소파에 앉아 가희가 작성한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남자의 눈에 순간적으로 감탄의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웃었다.“우연은 아니고. 가희 씨 보러 온 거야. 첫날이라 혹시나
가희는 몸이 거의 회복되자, 퇴원 후 바로 셀레나의 작업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은 이미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희는 노트북을 들고 셀레나의 대기실로 들어섰다. 셀레나는 대기실로 들어오는 가희를 무심하게 쳐다보더니, 태연하게 말했다.“신입이야? 와서 옷 정리 좀 해.”가희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저는 셀레나 씨 매니저입니다. 이런 일은 제 업무가 아닙니다.”‘흥.’셀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희를 압도하는 기세로 다가왔다.여자는 키가 180cm 정도 되었고, 하이힐을 신은 상태에서 가희를 아래로
“예나와의 결혼은 할머니의 유언입니다. 전 그 뜻을 어길 생각이 없습니다. 한가희와 관련된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겁니다.”윤호는 자신이 가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오직 물질적 지원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희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그는 말을 마치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이영국은 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그는 혈압약을 삼키고 나서야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가슴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나 젊었을 때
윤호는 가희의 턱을 거칠게 잡으며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더 강하게 조여졌다.“한가희,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 최근에 지섭이 모델을 구하는 일이 있다던데, 너는 거기 가서 지원 업무 해.”윤호는 눈을 감았다. 그는 가희가 외부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지섭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가희를 계속 집안에만 가둬둔다면, 결국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가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희의 감정 없는 얼굴을 보며, 윤호의 가슴속에서는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
예나는 눈물을 흘리며 점점 더 흐느꼈다.“오빠, 혹시 인터넷에 뜬 실시간 검색어를 보고, 그게 내가 조작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일은 정말 나랑 아무 상관 없어요!”그녀는 오늘 가희와 준서의 스캔들이 터진 걸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미 이영국이 윤호에게 결혼을 서두르라고 압박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그런 스캔들이 터진다면 누가 봐도 자신이 꾸민 일이라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윤호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며 냉랭하게 말했다.“그딴 거 신경 안 써. 예나야,
준서의 눈앞에서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졌다. 핏방울이 번진 그의 얼굴 위로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해서 빛났다. 진민주는 숨을 헐떡이며 현장으로 뛰어왔다. 민주의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이를 악물고 현장에 있는 모든 기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이 사람들, 단 한 명도 그냥 보내지 마.”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곧바로 의사들에게 준서를 응급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그 후, 그녀는 거침없이 가희의 병실로 향하며, 병실 문 앞에서 강지섭과 마주쳤다. 지섭은 민주를 보자마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