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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화

Author: 단유
“미안하지만,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가희는 평온한 미소를 지었으나, 아름다운 눈동자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그간 저와 관련된 모든 인사이동은 각 부서 회의에서 결정된 후, 대표이사님의 결재로 최종 확정된 건데, 유리 씨는 어느 과정에서 의문이나 불만이라는 거죠?”

가희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저...!”

유리는 가희가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들어넘길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의 날카로운 반응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냥 한마디 한 건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요?”

‘참나! 그동안 대표 덕 많이 봤잖아, 낙하산 주제에.’

가희는 가볍게 웃어넘기며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눈앞의 내선 전화기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유리 씨, 다음에 뭔가 또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그룹 내 불만 접수 내선으로 바로 전화하세요. 여기서 헛소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테니까요.”

말을 끝낸 가희는 다른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짓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뒤돌아 사무실로 걸어갔다.

유리는 가희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홧김에 옆에 있던 서류를 탁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짜면서 자기가 진짜인 줄 착각하나 봐. 이제 진짜가 돌아왔으니 어디 한번 얼마나 더 잘난 척하나 두고 보자고!”

따르릉-

따르릉-

가희가 막 책상에 앉자마자 옆에 있는 내선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하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손에 쥐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느리게 수화기를 들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죠?”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이, 희미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가희는 의아한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대표님? 듣고 계신 거 맞으세요?”

계속 대답이 없어 실수로 걸린 전화라고 생각하며 끊으려던 순간, 갑자기 부드럽고 다정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거 어떡해요? 치마가 완전히 망가져서 이제 이걸 입고 나갈 수 없잖아요.]

‘장예나?!’

가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이어서 남자의 낮고 은은한 웃음소리가 아주 잠깐 들렸고, 이내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이 떨어졌다.

[예나한테 줄 옷이랑 액세서리 하나 골라서 내 사무실로 보내, 지금.]

“네, 알겠습니다.”

가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감정을 배제한 사무적인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근처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30분 후.

가희는 양손에 커다란 쇼핑백을 가득 들고 대표실 문 앞에 섰다. 너무 서둘러 온 탓에 숨이 가빠 한동안 거칠게 숨을 고르다가 몇 초간 심호흡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차갑고 건조한 남자의 목소리, 언제나 그렇듯 짧고 투박한 한마디였다.

가희는 바싹 마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선 후, 늘 그렇듯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말씀하신 물건입니다.”

대답 대신 들려온 건 여자의 나긋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한 실장님이시죠? 고생 많으셨어요.”

장예나가 우아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가희가 든 쇼핑백을 받아 들며 잔잔한 미소로 덧붙였다.

“제가 자주 입는 브랜드예요. 신경 많이 써주셨네요.”

가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윤호가 느릿하게 한마디를 던지며 깊고 냉정한 눈빛으로 가희를 흘긋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건 한 실장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의 무심한 말에는 암묵적인 경고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가희에게 ‘네 분수를 제대로 알라’고 상기시키려는 듯한 차가운 견제였다.

하지만 그런 경고는 애초에 쓸데없는 것이었다.

가희는 단 한 번도 자신을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가희는 억지 미소를 적당히 지어 보이며 마음속 깊은 불편함을 애써 감췄다.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예나 씨,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예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대표실 안쪽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가희는 본능적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물고 싶지 않고, 더욱이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마주하는 건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희는 그 정도로 심지가 굳은 것도 아니었다.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발짝도 나가기 전에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멈춰. 내가 나가도 된다고 했어?”

가희의 가녀린 몸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입술을 꽉 다물고 잠시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지시 사항이 더 있으신가요?”

윤호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돌아서서 말해. 지금 기본적인 예의도 잊은 거야?”

가희는 무의식적으로 늘어뜨린 손을 꽉 쥐고 있으며, 짧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아픔을 느낄 정도였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윤호를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말씀하시죠.”

윤호는 매서운 눈길로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잠시 응시하더니, 책상 위에 있던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여기, 너희 집안의 투자 기획안이다. 가져가서 검토하고 보완할 내용이 있으면 바로 투자팀에 전달해.”

‘우리 집안의 투자 기획안?’

가희는 살짝 찡그린 눈썹 사이에 의문을 담았지만, 서류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NP 그룹 관련 일에 대해서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궁금하신 게 있다면 제 아버지와 직접 논의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

윤호는 그녀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는 네가 이 투자안에 관심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의 말에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지만 가희는 그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희는 한동건 부부의 양녀에 지나지 않았다. 집안의 중요 대소사에 관여할 권리도 없었고, 하물며 NP 그룹과 관련된 투자 건이라면 더더욱 가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 사정에 대해 이윤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말을 꺼내지?’

“듣자 하니, 너희 집안에서 최근 어떤 땅에 관심을 보이던데.”

윤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여자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반드시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 같던데.”

가희는 마음 한구석에 불길한 예감이 스치며 서늘함을 느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발 가치가 있는 땅은 놓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꼭 그렇진 않아.”

윤호는 흥미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일어서더니, 느릿한 걸음으로 가희에게 다가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건 실제 가치는 별로 없더라도, 누군가는 그걸 얻기 위해 큰돈을 쓰기도 하지. 왜 그런지 알아?”

윤호가 너무 가까이 다가섰다.

가희는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나무 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길고 가는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녀는 어색하게 입술을 떼며 더듬거리듯 물었다.

“왜... 왜죠?”

그러나 윤호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가희의 살짝 당황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깊고 어두운 눈빛 속에 어떤 의도를 감춘 채 침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희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윤호의 시선을 피하려던 찰나, 휴게실 안에서 예나의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것 좀 도와줄래요? 이 목걸이 혼자서는 도저히 못 하겠어요.”

마음이 순간 차디찬 얼음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해서 가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한 발 물러섰다.

윤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여자가 자신을 피하려는 듯한 태도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그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도 발걸음을 멈추고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윤호는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아 낮고 천천히 말했다.

“한가희,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더 이상 가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돌아서서 휴게실 쪽으로 걸어갔다.

가희는 멍하니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내가 알게 될 게 뭐지?’

‘대체 뭘 알 거라는 뜻이야...’

혼란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자 갑자기 두통이 심해졌다. 가희는 지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힘겹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 윤호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도,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희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사람은 내가 감히 바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가희는 손을 들어 창문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금빛 햇살을 가리며 붉어진 눈가를 가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인사팀으로 향했다.

인사팀 책임자는 가희가 건넨 사직서를 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한 실장님, 정말 퇴사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갑자기요?”

그리고 속으로는 이미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한 실장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SR 그룹 전체가 다 알잖아! 대표 비서실의 만능 해결사, 대표님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완벽한 비서인데...’

‘이런 한 실장이 낸 사직서를 함부로 처리할 수 없지, 말도 안 돼!’

가희는 책임자가 난처해하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리고, 가볍게 입술을 다물었다가 열며 덤덤하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대표님께도 이미 말씀드렸고, 승인받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책임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썩 이해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은 퇴사 절차에 대해 가희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사직서는 부서별로 확인을 거친 후, 3일 내로 최종적으로 대표님 결재가 이루어질 겁니다.”

“그 후, 모든 절차가 끝나면 한 실장님은 자유입니다.”

‘자유...’

가희는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참 좋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에 떠나기 전에 가희가 반드시 끝내야 할 중요한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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