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말에 이은진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러나 서정원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통속적으로 말하면 속물 같아 보이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디자이너가 완벽한 디자인을 만들어 내려면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에요. 디자인에 영혼을 주입하고 유일무이한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거죠.”서정원의 말에 백아영의 표정도 변해갔다.비록 이번 시즌의 메인 디자이너는 이은진이었지만 백아영은 주얼리 디자인팀의 부장으로서 이은진에게 적잖은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그녀가 최성운에게 보여줄 디자인으로 통과시켜 준 것이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예상보다 조용하고 빠르게 흘러갔다.손윤서는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운성 그룹에 나타나지 않았고 하은별도 이상하리만큼 서정원을 찾아와 귀찮게 하지 않았다.그러나 서정원은 절대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폭풍이 일어나기 전에도 항상 고요했기 때문이다.오늘은 레이디 패션 프랑스 본부의 회사 대표인 브루스가 운성 그룹으로 방문하는 날이었다.레이디 패션 프로젝트의 담당자로서 서정원은 공항으로 마중 나가야 했다.공항으로 가기 전까지 서정원은 오후에 있을 레이디 패션에 관한 회의 자료들을 꼼꼼하게 살펴봤다.아무
“하이, 미스터 최!”최성운을 발견한 브루스가 열정적인 인사와 함께 포옹하였다.“오랜만이네요.”최성운은 여전히 다가가기 힘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서정원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프랑스어로 인사를 나누었다.“브루스 씨, 안녕하세요!”“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죠?”브루스는 활짝 웃으며 푸른 보석 같은 눈을 반짝이며 서정원에게 물었다.최성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브루스에게 소개했다.“이분은 서정원 씨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담당자죠.”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서정원의 모습에 최성운은 또 한 번 놀랐다.그
‘디자인 도면을 잃어버려? 심지어 도면 대신 백지가 몇 장 들어있다고?’최성운은 서정원이 이런 저급한 실수를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해 그녀의 설명을 들어볼 생각이었다.그러나 서정원은 해명할 생각이 없는 건지 평온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말했다.“일단 이 일은 논의하지 않겠어요.”서정원은 백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도면 백업했나요?”백아영은 이내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서정원 비서, 우리 주얼리 디자인 도면은 전부 손으로 그린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손으로 그린 건데 어떻게 백업해요? 서정원 비서는 그 정도 상식도 없
반지, 목걸이, 팔찌, 세 개 도면이 생생하게 반짝이고 있었다.더 놀라웠던 건, 서정원이 그린 도면이 디자이너팀의 손으로 그린 도면과 몇 군데 살짝 다른데, 오히려 달라진 점들이 얼음과 불 시리즈 주얼리에 영혼을 불어넣어 사람들을 푹 빠지게 만든다는 점이었다.주얼리 디자인팀의 수석 디자이너도 하지 못한 일을 서정원이 해낸 것이다.시골에서 올라온 그의 약혼녀 서정원은 대체 그에게 얼마나 더 많은 놀라움을 안겨주려는 걸까?하은별은 서정원이 그린 디자인 도면을 한동안 넋 놓고 바라봤다.이럴 수가!‘서정원은 대체 어떻게 겨우 한
“무슨 일이죠?”하은별과 백아영은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누르며 의아한 표정으로 서정원을 바라봤다.서정원은 폴더에서 꺼냈던 백지를 흔들어 보였다.“이젠 이 일에 관해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서정원의 손에 들린 백지를 본 순간, 하은별의 눈빛이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서정원은 종이를 들고 최성운의 앞에 서서 그에게 종이를 건넸다.“디자인 도면이 갑자기 백지로 바뀌었는데, 대표님은 의심이 들지 않으세요?”최성운의 마디마디 분명한 큰 손이 백지를 건네받았다. 그
서정원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하은별이 쉽게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하은별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서정원은 오늘 하은별이 한 짓을 밝히기 위해 미리 준비해 뒀다.“저한테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오늘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증거 말이에요.”서정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최성운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은 크고 건장했고 표정은 차갑고 무심했다. 그는 얇은 입술이 일자가 되게 입을 꾹 다물었다.그는 서정원을 힐끗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얘기했다.“증거가 있다면 얘기해
“네, 대표님.”임창원은 정중하게 대답했다.그는 오늘 아침 서정원이 공항으로 떠나고 나서 다시 회사로 돌아온 그사이의 CCTV 영상을 확보한 뒤 그것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대표님, 가져왔습니다.”임창원은 들고 있던 USB를 최성운에게 건넸다.최성운은 USB를 건네받은 뒤 몸을 뒤로 젖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CCTV에는 과연 뭐가 찍혔을까?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USB를 테이블 위에 놓은 뒤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재생하세요.”“네.”임창원은 명령에 따라 노트북을 켜고 화면 미러링을 한 뒤 USB에 담긴 CC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