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염선생이 대답했다. “약은 이미 보내졌으나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는 아직 전해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평소 정치에 간여하지 않던 심청화가 걱정하듯 말했다. “서경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렇소. 태자는 이미 국정을 관할하고 있으나 황제는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현재 조정의 반 수가 태자의 과격한 정책에 반대하고 있소. 태자는 선태자와 형제로서의 정이 깊긴 하지만 선태자의 정치 방침에 전혀 동의하지 않소. 수란키는 예전에는 선태자를 열렬히 지지했기에 그가 살아 있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황제의 목숨줄이 참으로 끈질기군요.” 시만자가 굳게 동의하며 말했다. “예! 분명 곧 승하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요?”심청화가 답했다. “물론 대란 때문이지. 선태자는 민심을 얻었고 늙은 황제와 태자 사이의 교대가 거의 완료되었지만, 선태자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태자가 들어섰소. 조정의 신하들 대다수가 선태자의 측근이며 새 태자는 수란키조차 지지하지 않으니 모두가 그를 불신하기에 상황이 아주 어지럽다오. 며칠 전 소식에 의하면 이미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니, 아마 지금쯤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 다만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오.”“대사형, 평사저가 전갈이라도 보낸 겁니까?” 심청화는 줄곧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송석석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전갈이 왔더군.” “허나...!” 송석석이 묻기도 전에 심청화는 그녀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뭘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내 사매가 조정의 일에 연루되었는데 내가 어찌 외면한단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송석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모두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 같네요. 다들 매산에서 자유롭게 살고 계셨거늘... 대사형은 그림을 그리고 산과 물을 노니셨는데 저 때문에 진성에 몸이 묶여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여묵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스승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석석이는 사부님이 만난 사람 중에 무술 재능이 가장 뛰어난 제자라고 했다. 석석인 많은 무공과 기술을 단 한 번 보고도 익힐 수 있지.” 그러자 심청화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다만 그 뒤에 한마디 더 하셨어. 석석이는 너무 게을러서 하루 종일 산에서만 뛰어다니고 또 나무에 올라 새집을 뒤지고 구멍을 파서 독사를 잡고, 쥐를 잡아 아이들을 놀라게 한다고 말이야.” 그러자 몽동이가 무표정을 지었다. “저 또한 당해봤습니다. 글쎄 쥐 꼬리를 잡고 달려오더니 제 몸에 던지는 바람에 제가 너무 놀라 울면서 사부님에게 고했지 뭡니까? 아니 근데, 사부님께서는 사내놈이 울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저를 혼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만종문에 가서 따지셨답니다.” 시만자도 이 일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화해가 이루어졌고 1년 치 임대료를 면제받았다지.” 그러자 송석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서경의 일을 말하는데 내 어린 시절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냐! 밥이나 먹어!”몽동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시만자를 보며 말했다. “1년 치를 면제했다니! 그게 사실이더냐? 넌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것이지?” “우리 적염문 또한 매산에 있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 온 매산이 다 아는 사실이다. 매년 임대료를 낼 때마다 너희 사부님은 너에게 석석이와 한번 겨뤄보라고 하시지?” “아!” 몽동이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 사부님이 판을 짰다는 말이냐? 내가 석석이에게 맞으면 사부님은 그 대가로 임대료를 면제받으셨다는 거지?” 시만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 매산이 다 아는 일이야.” 몽동이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우리 사부님이 얼마나 품위 있고 신중하신 분인데 그런 판을 짠다니! 내가 매번 석석이에게 얻어터졌을 때마다 사부님은 내가 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하셨는데 말이다. 무공을
장군부. 왕청여는 한바탕 성질을 부린 후에야 조용해졌다. 하지만 김순희의 병세는 겨울이 되자 더 심해졌고 약을 더 많이 써도 늘 병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게다가 아직도 단신의를 모셔 오지 못했기에 김순희는 왕청여가 송석석만큼 인맥이 넓지 못한 것을 탓했다.왕청여도 더는 김순희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고 병간호는 물론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큰며느리 민소진만이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김순희는 전북망에게 하소연했다. “넌 이제 어전 시위령이 되었는데 어찌 안사람 하나도 단속하지 못한단 말이냐? 그년은 불효하고 불순하며 늘 이 어미에게 대든다. 현숙하지 않은 며느리는 삼대를 해친다고 했거늘!”전북망은 요즘 승승장구하는 시기였기에 지금 굳이 왕청여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매번 그녀와 다툰 뒤에는 진이 빠진 탓에 그저 어머니를 달래며 큰형수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민소진도 난처해하며 말했다. “둘째 서방님, 어머니를 돌보는 건 제 본분입니다. 서방님이 말씀 안 하셔도 그리해야죠. 그런데 제 몸도 좋지 않은 데다 집안에 돈이 부족하네요. 서방님의 안사람은 집안일에 신경을 안 쓰고 돈만 쓰니 어머니가 다음 달에 드셔야 할 단설환을 살 돈도 없습니다. 서방님, 차라리 작은 시누님께 한번 부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지금 평양후부 사람이니 돈이 있을 겁니다.” 전북망이 말했다. “돈은 내가 알아보겠습니다. 소환에게 부탁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그 말에 민소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 안 되면 사람을 조금 줄이든가 하지요. 이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우는 데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시절마다 옷까지 지어줘야 하니…”전북망이 말했다. “이 일은 형수님과 어머니께서 의논해 주시길 바랍니다.”“의논할 수 있었으면 제가 서방님께 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죠. 어머니는 하인을 내보내는 걸 싫어하십니다. 특히 서방님께서 이제 어전 시위령이 되셨으니 집안의 위세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민소희는 잠시 멈칫하
전장 안으로 들어서자 왕청여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나서는 확실히 조용해진 듯했다.전북망은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살림을 민소진에게 맡기겠다고 말했고 왕청여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건 원래 맏며느리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전 지금 임신 중입니다. 그렇지 않았어도 제가 어찌 살림을 맡는단 말입니까?”전북망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느질은 눈을 상하게 하니 어머니께 맡기시오. 보아하니 홍이도 바느질 솜씨가 좋던데 홍이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 같소.”“그래도 어미로서 아이에게 옷 한두 벌은 만들어주고 싶어서요.”왕청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아무리 우리 집에 녹봉을 받는 사람이 셋이나 있다고 한들 한 집안을 먹여 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도 약을 드셔야 하니 절약할 수 있으면 절약해야지요.”전북망은 그녀가 왜 절약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가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안에 분쟁만 없다면 일이 자연히 잘 풀릴 것이다. 그는 지금 출세를 바랄 여력이 없었고 그저 집안이 평온하기만을 바랐다.“오늘 일찍 오셨으니 마침 잘됐네요. 요즘 들어 배가 많이 나왔으니 유모도 찾아야 하고 산파도 최고로 좋은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 준비를 철저히 해야하지요. 지난번 영안 군주가 난산했다는 소식 들었지요? 우리도 미리 약왕당에 가서 약을 사두는 게 좋겠어요. 어머니께서 단설환을 사시러 가신 김에 함께 사오시면 될 것 같네요.”전북망도 산고의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소, 그 약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내일 집에 오는 길에 사 오겠소.”“심고환이라고 해요. 인삼과 아교에 진통제 성분이 더해진 약이죠. 출산 시 고통이 심하고 기운이 부족할 때 먹으면 제일 좋다고 하네요.”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내일 사 오겠소. 산파와 유모는 형수님에게
다음 날, 전북망은 직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는 바람에 심고환을 사지 못한 탓에 민소진에게 다음 날 약왕당에서 심고환 여덟 알을 사 오고 유모와 산파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다해이 민소진이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시어머니를 위한 단설환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비록 예전엔 몸이 불편해 가사를 돌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장군부가 얼마나 큰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약을 사러 가기 전날 장부에 들러 은자를 찾으려 했을 때, 장부에는 은자 열 냥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군부 전체에 고작 은자 열 냥만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최소한 이삼백 냥 정도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둘째네는 아직 분가 전이기에 대부분의 돈도 공금으로 바쳤다. 그녀의 서방과 시아버지, 그리고 전북망의 녹봉에 하사받은 황금 백 냥까지 포함하면 아무리 적어도 2,300냥은 남았을 텐데 왜 열 냥밖에 남지 않은 거지?장부를 확인했더니 시누이가 혼수품에 사용한 은자도 상당했고 이방의 인출과 왕청여의 월간 지출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약값과 하인들에게 들어가는 돈까지 어느 하나 적은 것이 없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연자육을 한 근이나 먹었고, 다른 보약들도 꾸준히 챙겼다. 민소진은 그런 왕청여의 소비가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집에 이미 보약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북망이 부상을 당했을 때 많은 이들이 보약을 보내왔고 왕청여의 친정에서도 여러 번 보약을 보내왔었다. 집에 있는 보약을 먹으면 되는데 왜 굳이 외부에서 따로 사야 하는 건지, 민소진은 답답한 마음에 문희거로 찾아가 왕청여에게 물었다. 민소진은 워낙 성품이 온화해 그저 궁금해서 찾아간 것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었는데, 왕청여는 그녀가 임신 중인 자기의 소비를 문제 삼는다고 오해해 크게 화를 냈다. 심지어 가위까지 들고 와 민소진에게 뱃속의 아이를 찔러서 없애라며 그러
시녀와 함께 약왕당에 도착한 그녀는 심고환의 가격을 물었는데 심고환의 가격은 하나에 무려 다섯 냥이나 했다. 근데 전북망이 민소진에게 심고환 여덟 알을 사 오라고 했으니.. 민소진은 추운 날씨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눈물을 머금은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민소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약왕당의 약부가 다가와 말했다. “부인, 이 심고환은 기혈이 부족한 산모에게 쓰는 것인데 단순히 기혈을 보하는 것이라면 그냥 약재를 사다 달여 드시면 됩니다. 게다가 이 약은 산모가 기운을 보태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한 알이라도 충분합니다. 여덟 명이 한꺼번에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민소진은 눈물을 닦으며 급히 물었다. "한 알이면 충분한가요? 정말인가요?""예,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불안하시면 두 알을 사셔도 좋습니다. 사실 이 약은 산모가 기운을 잃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니 산모가 힘이 없을 때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만약 난산이나 출혈이 심하다면 이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참고하세요. 남은 한 알은 출산 후 반달 정도 지나서 복용하시면 좋습니다."민소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은자를 건넸다. "그럼 두 알로 살게요. 그리고 단설환도 두 알 주시지요."약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게를 달아 가격을 계산한 후, 엽전을 건네며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단설환은 다음 달부터 가격이 오를 예정입니다. 원재료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서요. 사실 노부인의 병은 전에 단 의원이 봐주셔서 많이 호전되었지요. 앞으로 두 해만 더 치료하시면 병이 다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약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민소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젠 단 백부님을 모셔 올 수도 없고 처방도 계속 똑같이 쓸 수는 없으니 단설환이 부담스러워지면 하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요."약부는 그녀에게 약을 전달하는 동시에 심고환의 복용법을 재삼 당부했다. “이 약은 꼭 네 시진 간격으로 복용하셔야 합니다.
민소진은 김순희의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휴서를 내려 쫓아내겠다니..?민소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돌아오지 못해? 아직 내 욕도 다 못 했는데 감히 가긴 어딜 가! 시어머니한테 장신구를 팔라고? 염치도 없는 년, 이 천한 것 같으니라고!"김순희는 민소진의 뒷모습에 대고 격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돌아오지 못해! 여봐라, 저년을 붙잡아라!” 민소진의 떨리는 몸은 마치 깨져버린 꽃병과도 같게 느껴져 아무도 감히 그녀를 붙잡지 못한 채 말로만 막을 뿐이였다. “부인, 멈추세요.” 하지만 민소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복도 끝에서 홍이의 부축을 받는 왕청여를 보았다. 민소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순간 가위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던 왕청여의 이전 모습이 떠오른 탓에 온몸이 떨리며 겁이 났다.“형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두 알만 사셨다니요? 일여덟 알은 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청여가 불만을 토로했다. "은자가 없다는 말은 하지 마시지요! 어젯밤 그이하고 의논 끝에 이제 형님이 가계부를 맡으면 그이 녹봉의 3할을 공금으로 낼 생각입니다. 남은 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고요."“3할이요?” 정신을 차린 민소진은 그제야 얼굴이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볼을 감쌌다. “3할이요? 왜 3할인가요? 모두가 그대로 바치는데… 단 3할로 어떻게 가게를 꾸린단 말입니까?” “안 될 건 뭐가 있습니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예전에는 우리 그이 녹봉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어도 잘 지내왔던 거 아닙니까?”“그러니까.” 민소진은 침을 삼키고 계속 말했다. “앞으로 3할을 바치고 의식주는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왕청여는 싸늘하게 웃었다. “형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럴 거면 제가 3할은 왜 내겠습니까?” 민소진은 머리가 새하얘져 귀가 윙윙거렸지만 그래도 이성을
이제는 정말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사라져 버렸다. 지친 나날들, 숨이 막힐 듯한 시어머니와 동서, 그리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남자들, 거기에 길상거에 틀어박혀 있다가 가끔 나와서 물건을 빼앗아 가는 악녀 이방까지. 이 집은 더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마치 새장과도 같았다.그녀는 노부인의 방으로 끌려가 침대 옆에 억지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망연히 고개를 들어 시아버지와 전북망을 보았는데, 두 사람의 표정에는 그녀를 탓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다시 남편인 전북경을 보자 그의 눈에도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따귀를 한 대 때리고는 김순희에게 사과했다.“어머니, 부디 화를 푸십시오. 제가 이미 훈계했으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아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그제야 김순희는 민소진을 용서했다. “됐다. 어차피 저 아이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손이 작고 궁상맞은 것도 어쩔 수 없지.”민소진은 뺨의 통증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지만 결국 무뎌지는 자신을 느꼈다.다음 날 새벽, 장을 보러 가는 하인이 일어나 고기를 사러 나가려는데 열린 뒷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아니, 대체 누가 뒷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야? 이렇게 덤벙대서야. 뭐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하인은 투덜거리며 외투를 여미고 뒷문을 닫더니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렸다.“날이 점점 더 추워지네. 올해 겨울옷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지?”그는 낡은 뜰로 나가 수레를 밀고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민소진이 보이지 않았지만 전북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방으로 가곤 했으니 말이다.어젯밤 한바탕 훈계했으니 더 부지런히 행동할 것이라 여겨 마음 한편이 편해진 것 이다.그러면서 자기는 둘째와 다르게 아내에게 휘둘리기는커녕, 아내를 손안에 꽉 잡고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곧이어 남자들은 각자 관청이나 당직을 위해 떠났고, 얼마지나지 않아 김순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아침상은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최숙심은 왕청여에게 언제 어디에서 왕표를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물으며, 왕표 곁에 아이가 없었는지도 확인했다.“어제 냄비를 사러 밖에 나갔는데 소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작은 골목에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오라버니가 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오라버니를 알아보았거든요. 얼굴은 까맣고 눈썹도 다 잘랐는데 몸도 심하게 야위어서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라는 걸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데리고 있지는 않았고 혼자였어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도주하게 되었는데 체포 공문이 떠서 여기저기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이제 가진 돈도 다 썼고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3천냥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돈을 구하면 그자에게 어떻게 주기로 했어?”최숙심이 다급하게 물었고 왕청여가 대답했다.“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저희에게 돈부터 구하라고 하곤, 나중에 오라버니가 날 찾아오겠다고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숙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자가 눈썹이 없다고 했나?”“네, 오라버니는 눈썹이 짙어서 알아보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 잘라버린 것 같아요.”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왕표가 눈썹을 자른다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사실을 얼른 북명 왕비에게 알려야 하지만 눈썹을 다시 그릴 수도 있기에 눈썹이 없는 사람만 유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그럼 넌 이틀에 한 번씩 밖을 돌아다녀서 관찰해봐. 병부에 가서 왕이장을 만나기도 하고. 네 오라버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를 몰래 미행할 거야. 난 석소에게 지금 당장 북명 왕비를 찾아가 순찰에 더욱 힘써 달라고 부탁할게. 그래야 네 오라버니가 한 시라도 빨리 널 찾아올 거야.”“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이던 왕청여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 왕이장이 돈을 주기로 했고 지금 점포를 팔고 있는 중
한편, 최숙심은 뜨개질로 딸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현재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먹고 쓰는 것까지 황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최숙심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왕비가 했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표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무조건 진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진성에 돌아온 그가 자신을 찾아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왕표는 일단 노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노부인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노부인은 어떻게든 그의 이 일을 해결해주려고 할 것이다. 비록 오늘 노부인과 왕청여를 미행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왕표가 진성으로 돌아온 이유가 돈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돈만 구해지면 바로 진성을 떠날 것이다.노부인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없지만 진성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인맥은 넓다.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다면 그건 상대방들을 구렁이에 빠트리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탓에 노부인은 직접 돈을 빌리러 나갈 수도 없고 창피해서라도 절대 직접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보낼 사람은 남희나 왕청여밖에 없다.최숙심이 속으로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있을 때, 왕청여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최숙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왕청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새언니, 제가 예전에 멍청한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저 때문에 새언니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조카들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너무 후회돼요.”최숙심은 왕청여가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뒤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 지난 일이야. 이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지. 앞으로 다 잘 될 거야.”최숙심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
왕청여는 결국 왕이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뻔뻔하게 왕이장도 평서백부 핏줄이니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하는 게 맞다고 얘기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왕청여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평서백부가 무한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때 왕이장은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면 왕씨 가문이 패가망신한 지금, 왕이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왕청여는 그보다 이 사실을 새언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왕청여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참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이때, 석소 사저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청여를 보자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방향을 틀었고 조금 전의 말실수가 떠오른 왕청여가 다급하게 석소 사저를 불러 세웠다.“석소 사저,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예.”그러자 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왕청여는 자유롭게 사는 무림의 여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돌아서는 석소 사저에게 말을 걸었다.“석소 사저, 혹시 사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걸음을 멈춘 석소 사저가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왕청여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왕청여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석소 사저 손에 들고 있던 재봉실을 보며 물었다.“재봉실을 사신 거예요?”“아니요. 이씨 부인께서 보내왔어요.”석소 사저의 대답에 왕청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씨 부인은 사람이 참 선하네요. 소주방에 신경도 많이 써주고.”“다들 선한 사람들이죠.”“맞아요.”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그러자 왕청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함께 사는 얘기나 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
왕청여는 석소 사저가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문을 굳게 닫은 왕청여는 어머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약부터 드세요. 나머지는 다시 천천히 생각하시고요.”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청여야, 네가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가 평소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어머니, 하지만 저희는 이제 오라버니를 도울 능력이 없어요. 우린 지금 소주방에서 빌붙어서 살고 있고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시만자 아가씨가 돈을 줘서 살 수 있었던 거예요.”왕청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노부인이 반박했다.“네가 틀렸어. 그 돈들은 왕이장이 준 거야. 비록 왕이장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었다고.”“그자의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오라버니를 위해 그자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노부인이 솔직하게 얘기했다.“그 돈들은 왕이장 돈이 아니야. 그때 당시 왕이장이 돌아왔을 때 네 새언니가 왕이장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점포 여러 개를 왕이장에게 준 거야.”“그자에게 줬으면 그자의 것이잖아요. 그리고 왕이장 그자도 암암리에서 저희를 많이 챙기고 도왔는데 이제 와서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 이건 왕이장에게 불공평해요.”왕청여의 말에 노부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어차피 우리는 왕이장에게 미안한 짓을 이미 많이 저질렀어. 지금도 왕이장은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텐데 더 원망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네 오라버니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네 오라버니가 이대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고개를 푹 숙인 왕청여는 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어머니, 차라리 새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새언니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건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