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말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사라져 버렸다. 지친 나날들, 숨이 막힐 듯한 시어머니와 동서, 그리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남자들, 거기에 길상거에 틀어박혀 있다가 가끔 나와서 물건을 빼앗아 가는 악녀 이방까지. 이 집은 더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마치 새장과도 같았다.그녀는 노부인의 방으로 끌려가 침대 옆에 억지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망연히 고개를 들어 시아버지와 전북망을 보았는데, 두 사람의 표정에는 그녀를 탓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다시 남편인 전북경을 보자 그의 눈에도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따귀를 한 대 때리고는 김순희에게 사과했다.“어머니, 부디 화를 푸십시오. 제가 이미 훈계했으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아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그제야 김순희는 민소진을 용서했다. “됐다. 어차피 저 아이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손이 작고 궁상맞은 것도 어쩔 수 없지.”민소진은 뺨의 통증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지만 결국 무뎌지는 자신을 느꼈다.다음 날 새벽, 장을 보러 가는 하인이 일어나 고기를 사러 나가려는데 열린 뒷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아니, 대체 누가 뒷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야? 이렇게 덤벙대서야. 뭐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하인은 투덜거리며 외투를 여미고 뒷문을 닫더니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렸다.“날이 점점 더 추워지네. 올해 겨울옷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지?”그는 낡은 뜰로 나가 수레를 밀고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민소진이 보이지 않았지만 전북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방으로 가곤 했으니 말이다.어젯밤 한바탕 훈계했으니 더 부지런히 행동할 것이라 여겨 마음 한편이 편해진 것 이다.그러면서 자기는 둘째와 다르게 아내에게 휘둘리기는커녕, 아내를 손안에 꽉 잡고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곧이어 남자들은 각자 관청이나 당직을 위해 떠났고, 얼마지나지 않아 김순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아침상은
그 말에 손마마는 민소진이 여기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바로 돌아가서 보고했다. 김순희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어제 일 때문에 마음이 언짢아서 그런 거겠지. 어미가 정말 버릇없이 키운 것 같구나. 그리고 그년이 어디 갈 수나 있겠어? 친정은 이제 진성에 없고 아버지는 타지에서 작은 관리로 지내며 진성엔 돌아오지 않아. 돌아온다고 해도 계모가 있으니, 그런 와중에 감히 소란이라도 피우겠어?”손마마는 조금 걱정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럼... 사람을 보내서 찾아볼까요? 한 번도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나간 적이 없으셨는데...”그러자 김순희는 더욱 분노가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그년이 어디가 잘났다고 찾는다는 게야? 찾으면 자기가 아주 잘난 줄 알아. 잘못한 건 그년이야. 집안일도 제대로 못 하고 심지어 나에게 장신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라고 하다니. 허나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간 거지?”손마마는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민씨를 위해 용기내서 한마디 했다.“부인은 정말 열심히 하셨습니다. 불평 없이 매일 노부인을 돌보며, 아이들까지 챙겼습니다…”“나를 돌보는 건 그년의 본분이야. 게다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 또한 그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리고 내가 어디 그년에게 야박하게 군적이 있었느냐? 장군부에 시집와서 그년이 어디 고생이라도 했느냐? 심지어 예전에 몸이 아프다고 해서 일도 하지 않았을 때 난 눈도 감아줬단 말이다! 오늘 밤 북경이가 돌아오면 다시 한번 제대로 혼쭐을 내줄 거다.” “우선… 기다려 봅시다.” 손마마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김순희는 여전히 확신에 찬 말투로 자신의 화를 풀 뿐이였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휴서를 내려 내쫓겠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너도 보지 않았느냐?!” 김순희는 어떤 사람은 날개를 숨긴 채 평소에는 순종적이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날아가 버린다고 생각한다. 바로 송석석처럼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날개가 잘린 산닭 같다고 생각했다. 바
이전엔 황제가 사온의 역모사건을 중시했기 때문에 송석석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송석석이 바쁜 사건을 끝낸 후 처음으로 조정에 나가는 날이라 진복이 황실에 왔을 땐 송석석과 사여묵이 진작에 황궁으로 떠나고 저택에 있지 않았다. 진복은 아가씨를 만날 수 없게 되자 그 사실을 염 선생에게 알렸다. 염 선생은 장군부의 일이니 무시하지 않고 먼저 진복을 안으로 들여 차를 대접했다. 먼저양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게 한 후 시만자를 불러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왕비가 시만자 아가씨에게 전북망이 연왕과 계속 왕래하는지 주시하라고 부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만자 아가씨께서 장군부의 일을 조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만자는 하품을 하며 대충 말했다. “나도 모릅니다. 장군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몰래 연왕의 행방을 주시하라고 했습니다만. 그가 누구와 접촉했는지는 알고 있지만 장군부의 일은 정말 모릅니다.” 그러자 염 선생이 말했다. “거 참 이상한 일이군요.” “장군부의 일을 왜 상관하십니까?” 시만자는 사실 이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민 씨에게 적의는 없었지만 호감도 없었다. “장군부의 일은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민 씨가 국공부의 앞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갔다는데 만약 그녀에게 일이 생기면 괜히 국공부도 영향을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시만자는 졸려서 여전히 연신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귀찮은 듯 싶었다. “그럼 내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론 민 씨가 장군부에서 노부인의 천대를 많이 받고 있는 데다 이방과 왕청여 때문에 억울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네.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염 선생은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국공부 앞에는 왜 앉아있었던 거지? 평상시에 왕비와 왕래도 없었는데 말이야..’ 장군부와 왕비가 물불 같은 사이는 아니였는데,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홍작이 말했다. “사부님이 전 씨 가문의 노부인을 치료하러 가기 싫어하지만 단설환을 복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민 씨가 약을 사러 올 때마다 직원에게 분부해서 사정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민 씨가 직원과 친해지며 억울함이나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더랍니다. 예전에 그녀는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자기가 처리해야 하고, 노부인까지 보살펴야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장부는 왕청여가 관리하고 있어 돈도 마음대로 지출할 수 없어 때론 자신의 물건을 팔아가며 약을 산다 더군요. 아무튼 여러모로 억눌려서 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양마마의 방에 들어가자 진복이 아직 있었다. 두 사람은 옛이야기를 나누었고 보주는 옆에 함께 앉았다. 양마마는 안색이 좋지 않은 데다 그들이 민 씨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자 답답한듯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너무 연약한 게 문제입니다. 친정이 실력이 없는 데다 아버지가 밖에서 작은 벼슬을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듣기 좋게 말해서 벼슬을 맡고 있지 사실은 폄적된 것이었습니다. 장군부가 엉망진창이어도 친정에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봐서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겠지요. 아버지는 친아버지이지만 어머니가 계모이니 아버지도 도와주는 게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억울함에 습관 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양마마가 말했다. “억울함에 습관이 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억울함을 가만히 냅두다가는 언젠가는 폭발해버릴 것입니다. 장군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장군부에서 버틸 수 없다면 친정에도 기댈 수 없으니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양마마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애초에 그녀가 아가씨께 단설환을 사가지 않으면 노부인에게 쫓겨날 것이라며 빌 때 아가씨께서도 그 처지가 딱해서 약왕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라고 한 것입니다.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는 며느리로 소문이 난다면 장군
송석석은 민 씨와 1년 동안 동서지간으로 지냈던 기억을 더듬었다. 사실 송석석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민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민 씨는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장군부에서 가장 괴롭히기 쉬운 상대이다. 민 씨도 지금 장군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전 씨 노부인의 병은 줄곧 낫지 않지, 왕청여는 임신 중이라 시중을 들 수 없었다. 심지어 이방은 매일 길상거에 숨어서 나오질 않으니 지금 노부인을 시중들 수 있는 사람은 민 씨밖에 없었다. 예전에 송석석이 장군부에 있을 땐 주로 그녀가 노부인을 시중들었다. 하지만 그땐 노부인이 송석석을 귀찮게 굴었지만 혼수 때문에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민 씨는 달랐다. “아마도 억울해서 그랬겠지?” 송석석이 묻자 시만자가 동의했다. “하긴, 당연히 억울하겠지. 근데 얼마나 억울하면 한밤중에 뛰쳐나왔을까? 양마마의 말로는 장군부에서 버틸 수 없다면 다른 살길도 없다던데. 염 선생이 이미 찾으러 갔고, 나도 홍시에게 장군부에서 사람을 파견해 민 씨를 찾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어. 장군 부인이 사라졌으니 그들도 매우 조급해 할 것이야.” 송석석이 말했다. “하긴, 그들이 민 씨를 중시하진 않지만 지금으로선 정말 그녀가 없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송석석은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민 씨가 왜 국공부 앞에 앉아 있었을까? 나를 찾으려면 북명황실로 와야 한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을 텐데.’ 송석석은 입맛은 없지만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시만자와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와 달리시만자는 아침도 먹지 못한 탓에 엄청 많이 먹었다. 저녁 식사 후 홍시가 와서 전했다. “장군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지 않았고 둘째 노부인이 하인들을 보내 알아보라고 했답니다.” 송석석은 둘째 노부인은 이미 큰 집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하인을 보내 민 씨를 찾으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잠시 생각
둘째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처음엔 나도 몰랐단다. 그리고 지금 난 큰 집 일을 상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진작에 살림을 따로 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우리 전 씨 가문이 단합하지 않는다고 수군거릴까 봐 그만두었던 것이다. 요즘 장군부에 일이 많았는데 왕청여가 임신한 후 명목상으로만 안주인이지, 실제로는 민 씨가 모든 일을 관여하고 있다네. 다만 은자를 받을 때만 왕청여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그동안 노부인의 병세가 심각해져 민 씨가 곁에서 시중을 들었단다. 하지만 노부인의 성질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는 본래부터 민 씨를 얕잡아 보며 무슨 일을 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단다.”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민 씨의 처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민 씨가 사라진 후 장군부를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하자 나한테 와서 민 씨를 숨겼다고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질 않던가? 내가 없다고 했는데도 믿지 않다가 내가 화를 내자 그제야 알겠다 하더군. 나중에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니 민 씨와 왕청여가 돈 때문에 한바탕 싸웠다고 했다. 왕청여가 민 씨보고 가문을 관리하면 전북망의 봉록을 3성을 준다고 하자 싸움이 일어난 것이지. 왕청여는 울며불며 민 씨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며 가위를 민 씨에게 쥐여주며 자신의 배를 찌르라고 협박까지 했다지!” 둘째 노부인은 민 씨가 큰 노부인과 전북경이 민 씨의 따귀를 때렸다며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송석석에게 알려주었다. “그걸 알고 나니 나도 좀 불안하긴 했지만 큰 노부인이 멀리 가지 못할 것이라며 찾지 않아도 된다고,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것이라며 돌아오면 혼내겠다고 하더군. 민 씨가 아무리 억울해도 집을 뛰쳐나간 적은 없지 않았니?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사람을 보내 찾아보라고 했던 것이었단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장군부가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시만자는 탁자를 치며 화를 냈다.
약왕당의 점원은 민 씨와 잘 아는 사이라 어제의 상황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내 추측에 의하면 그녀는 전당포에서 장신구를 전당하고 온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들어올 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그녀 손에 쥐고 있던 종이조각을 보니 만보당의 전당표였습니다. 그녀는 심고환을 일곱여덟 알을 달라고 했지만 나는 두 알이면 충분하다고, 하나는 출산할 때 사용하면 되고 하나는 산후조리 때 사용하면 되니 많이 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울었던 건 맞소?” “예, 분명히 울었습니다. 그녀가 들어올 때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으니까요.” “알려줘서 고맙소.” 송석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시만자를 데리고 만보당으로 갔다. 그녀가 관복을 입고 어제 장군부의 큰 부인이 전당포에 왔다 간 일을 묻자 조봉은 그녀가 전당 한 물건을 꺼냈다. 송석석은 물건을 보더니 자기가 예전에 민 씨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조봉은 송석석에게 말했다. “그녀가 나중에 되찾아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녀가 전당 할 때까지만 해도 장신구를 되찾을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나중에 돌아가서 꾸중을 듣고 뺨까지 맞으며 심지어 이혼이라는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집을 뛰쳐나왔던 것이다. 민 씨는 겁이 많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여자였기기에, 송석석은 그런 사람이 한밤중에 집을 나왔다는 건 엄청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진성에서 민 씨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장군부에서 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경위와 순방영에게 찾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송석석은 사람을 파견해 민 씨의 친정에 가서 그녀가 돌아갔는지 확인하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냈던 사람이 돌아와서 민 씨의 친정에 자물쇠가 잠겨 있었는데 녹이 슨 것을 보아 오랫동안 사람이 오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성문 쪽에도 물어보았는데 오늘 아침 혼자 성을 나간 여자는 없었다고 했
그러자 송석석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찾았다는 것이냐?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필명은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무릎에 괴더니 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예, 단혼교에서 찾았습니다. 근데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데 저희가 도무지 설득할 수 없어서요. 그저 대인님을 만나겠다고만 해서 급히 왔습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전북망이 놀라며 물었다. “뭣이오? 왜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이오?!” 송석석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뛰어나가며 외쳤다. “어서 말을 준비하거라!” 단혼교는 진성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아래에는 동림강이라 불리는 강물이 급하게 흘렀다. 동림강은 단혼교 일대에서 매우 세차게 흘렀는데 상류가 넓고 하류가 좁은 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물살이 매우 거칠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에서 떨어지면 거의 살 수 없다고 보면 된다. 그 다리는 원래 동림이교라고 불렀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백성들이 단혼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전북망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필명에게 사람을 시켜 장군부로 가서 형님에게 알리라고 부탁하고는 바로 말을 타고 단혼교로 향했다. 시만자는 이미 멀리 달려간 뒤였다. 그녀는 가는 길에서 필명을 만났는데, 민 씨가 단혼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단혼교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만자가 단혼교에 막 도착했을 무렵에 해가 방금 져서 하늘에는 붉은 노을만이 남아있었다.해질 무렵의 단혼교는 바람이 차고 강물은 세차게 흘러 특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다리 위에 흔들리는 사람이 서 있다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무서운 풍경이었다. 시만자가 도착했을 땐 놀라서 혼비백산할 뻔했다. 왜냐하면 민 씨가 서 있는 곳이 다리 가운데 기둥이 있는 자리였는데 그 자리엔 그녀가 겨우 서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바람이 너무 거세서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듯 덜덜 떨며 휘청거렸고, 덮은 망토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송석석은 차분하게 질서를 잘 정돈한 뒤,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소문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고는 홍현에게 청작과 경조부의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이 범인은 약을 먹은 게 확실하기에 반드시 매달아서 심문해야 하며 청작을 통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한편, 도망친 범인들도 오진에게 전부 잡혀왔고 그들은 묶여 있는 중년 남성보다 정신이 훨씬 멀쩡해 보였지만 송석석과 홍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야릇하고 이글거렸다.송석석은 안여옥을 살포시 안아주었고, 이제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안여옥이 되레 송석석을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왜 그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자신을 망가트린 거라고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국태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얼굴이 창백한 안여옥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국태 부인께서 제 걱정을 이리 하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애초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저에게 있어서 명성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벗어 던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그렇지만 모든 화를 혼자서 떠안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찌 얘기하고 다닐지 걱정됩니다. 선생님 조부께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국태 부인은 안씨 어르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에 안여옥을 여학 선생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안여옥을 잘 보살피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하신 안씨 어르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충격에 쓰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다들 안여옥을 위로하기 바빴고 안여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른 웃으면서 말했다.“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안여옥은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사람
이때, 송석석이 서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송석석이 나타나자 부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송석석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달했다. 감히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송석석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송석석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다. 여학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오늘 서원 대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과 데리러 온 가문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 때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범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학교 안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이 일은 분명 여학을 겨냥해서 벌인 일이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부모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쳐다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입들을 다 단속할 수 있습니까?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없는 사실도 있는 일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여학에 호위병을 좀 많이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한편, 안여옥은 송석석이 궁지로 몰리자 얼른 눈물을 닦은 뒤,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시 마십시오. 한 명도 다친 학생이 없습니다. 저 범인은 그저 저를 잠깐 껴안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을 해치지 못했습니다.”안여옥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들 안여옥이 이 일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범인이 안여옥을 껴안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한단 말인가?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안여옥은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이때, 정신을 번쩍 차린 국태 부인이 다급하게 부인했다.“선생님은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범인은 선생님에게 손을 댈 기회가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여옥은 국태 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
서원에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홍현은 왕지아를 달랜 뒤 바로 서원으로 뛰어갔다.“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잘 숨어있으렴.”한편, 서원 안에서 너무 놀란 국태 부인과 정 부인은 재빨리 딸들을 등 뒤로 숨겼고 안여옥과 무씨 아가씨는 손에 긴 몽둥이를 들고 덜덜 떨면서 들이닥친 남자들을 향해 휘둘렀다.두 선생님은 혹시라도 뒤에 있는 여학생들이 다칠까 봐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힘이 부족했다.이때, 한 남자가 주창우를 향해 덮쳤고 화들짝 놀란 주창우가 비명소리를 지르자 안여옥은 몽둥이로 남자를 내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겁을 먹긴 커녕, 되레 사악하게 웃으며 안여옥을 향해 달려갔다.홍현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안여옥은 남자에게 강제로 안겨 있었고, 그 남자는 심지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겁에 질린 안여옥은 미친 듯이 발버둥쳤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 결국 손톱으로 남자의 얼굴을 할퀴었다.미간을 확 찌푸린 홍현은 바로 달려가 한 손으로 남자의 등을 확 잡더니 그를 바닥에 내리꽂았고 발로 남자의 배를 힘껏 짓밟았다.극심한 고통에 남자는 바닥을 굴러다녔고 홍현은 무씨 아가씨 손에서 몽둥이를 낚아채더니 남자들을 향해 무섭게 공격했다.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남자는 홍현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뼈가 부러졌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바로 이때, 딸을 데리러 온 가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학교 안에 남자들이 들이닥친 겁니까?”서원 안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쳐다보았고 여학생들은 너무 큰 충격에 다들 넋이 나간 상태였다.그러다가 부모님을 발견한 여학생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가족의 품으로 달려갔다.“어머니, 아버지, 너무 무서워요! 저 남자들이 갑자기 서원으로 뛰어들어와서 안 선생님을 강제로 안았어요.”사람들은 이내 안여옥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헝클어진 안여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씨 아가씨 품에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경험이 많은 국태 부
송석석은 이 사실을 염 선생에게 알리자, 염 선생은 흠칫하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사국 사람들이 어떻게 진성에 진입하게 된 거죠? 심지어 이곳에서 살고 있다니.”송석석이 대답했다.“그래서 나머지 남풍관도 확실하게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남풍관 주인장도 만나봐야지. 주인이 사국 사람들을 거둬서 남풍관에서 장사를 하는 거니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을 거야.”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왔고 누가 데리고 왔으며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했다. 송석석은 나머지 남풍관을 직접 방문해서 조사할 생각이었고, 시만자와 왕이장도 함께 했다.그렇게 며칠 동안 송석석은 남풍관 다섯 군데를 돌아다녔다. 그중 세 군데에 사국 사람들이 있었고 총 열다섯 명이었다.호흡 방식이나 걸음걸이로 보면 열다섯 명 전부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확실히 사국 사람들 외모는 아니었으며 보통 몸매의 남강 사람들 같았다.보아하니 신경 써서 고른 듯했다.불빛이 어두운 환경에서는 사국 사람들을 알아보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그들은 상국 말을 유창하게 쓰고 있었기에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리고 세 가게의 주인은 동일인이었으며 그자가 바로 광릉후의 향봉천이다.상의 끝에 송석석 일행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사람들을 시켜 몰래 남풍관 가게들을 지켜보라고 했으며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내려 했다.그리고 염 선생은 광릉후를 다시 한번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다.광릉후의 향봉천은 남색을 즐기는 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내들과 똑같이 혼인하여 아이도 낳고 첩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향회옥이 바로 향봉천의 막내딸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평소에 광릉후 사람들의 행실이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으며 향회옥이 가끔 제자예와 함께 여학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 외에는 그 어떤 추문도 없었다.하지만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해 보이는 광릉후에서 남풍관을 세 군데나 운영하고 있는 것도 모자
송석석은 시만자를 의자에 앉히며 대답했다.“오사형이 아주 고맙게 생각하겠네. 하지만 난 맞추고 싶지 않아. 그래서 누굴 봤는데?”“빅토르! 그래, 맞아! 빅토르를 봤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빅토르를 봤지!”시만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고 송석석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다시 물었다.“여러 명의 빅토르를 본 거야 아니면 빅토르를 닮은 사람이 여러 명 있었던 거야? 너 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취한 거야?”“빅토르… 아니야. 빅토르보다 젊었어.”시만자가 머리를 휘청거리며 대답했고 송석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빅토르를 닮았다는 거지? 그럼 사국 사람들이네?”사국과 상국은 아직 길이 통하지 않았기에 사국 사람들이 상국에 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사국 사람들이 진성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진성에서 살고 있다니.이때, 시만자가 꼬인 혀로 힘겹게 대답했다.“맞… 맞아. 사국 사람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진성에 사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지? 남풍관에 숨어 있었는데 왜 남풍관에 갔던 손님들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그 사람들을 봤다는 건 다른 손님들도 다 봤다는 뜻인데.”송석석은 조금 불안했다. 남풍관을 방문한 손님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풍관에 갔었다고 얘기하지 않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사국 사람들이 언제 진성에 몰래 들어왔냐는 것이다. 그들은 남풍관에 숨어 있었기에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진성에 남풍관이 몇 개가 있지만 전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선황제가 확실한 금지령을 내렸기에 엄격하게 조사했지만 숙청제가 황위에 오르고 나서 더 이상 이런 일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물론 엄하게 다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권장하지도 않았다. 분위기는 선황제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남색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기에 아무도 대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언급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았다.한편, 시만자는 털썩 눕더니 바로 잠이
송석석은 사여묵에게 항상 안전에 조심하고, 스쳐가는 여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사여묵은 질투를 하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서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내 절대 눈길도 안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조금 뒤, 사여묵은 몽동이와 장대성을 데리고 길을 떠났고 혜 태비는 아들의 뒷모습을 몇 번 쳐다보고는 이내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염 선생과 양 마마도 돌아갔고 송석석과 시만자만 문 앞에 서서 사여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마음이 허전해?”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고 송석석은 울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조금.”송석석과 사여묵은 혼사를 치르고 나서 계속 각자 일로 바빴지만 거의 매일 밤 함께 보냈기에 하루도 못 보는 날이 없었다.그런데 최소 두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져 송석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두 달이 참 길게 느껴지네.”“두 달이 길어? 2년도 아니고.”시만자가 송석석의 어깨를 팔로 감싸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보기엔 넌 이 두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해야 돼. 서방이 곁에 없으니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나중에 널 데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데도 같이 가야겠네! 내가 왕이장한테서 들었는데 진성에 꽤 괜찮은 주막들이 있대.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전에는 북명왕이 있어서 널 부르기 조금 미안했지. 이제 됐네. 두 달 동안 자유이니까 마음껏 즐기자고.”“무슨 주막이길래 서방이 있을 땐 날 못 부른 것이냐? 왕경루 음식보다 맛있어?”의아한 듯 묻던 송석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됐어. 나 지금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그런 거 아니야! 남풍관이라고 남자들이 장사를 하는 곳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남장을 해서 들어가면…”시만자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하자 송석석이 걸음을 턱 멈추었다.“뭐야? 너 가봤어? 오사형이 널 데리고 간 거야? 오사형은 지금 어디 있어?”“그자가 날 데리고 가진 않았지. 그저
사여령이 대리사를 나올 땐 허리를 쫙 편 채 눈빛이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사여묵이 마지막에 그에게 했던 한 마디 덕분이었다.“네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어. 조금만 더 노력하고 버티면 내가 승진을 시켜줄게.”그 순간, 사여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준 적이 없었으며 그를 진심으로 칭찬해준 사람도 없었다.어머니가 사여령을 칭찬하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위로였다. 어렸을 때부터 문무가 모두 약했던 사여령에게 어머니는 항상 칭찬으로 자신감을 북돋아주었고 나중에 크면 잘하게 될 거라고 위로했다.하지만 그건 그저 위로일 뿐, 인정은 아니었다.지금, 사여령은 진정한 인정을 받았고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으며 이 길을 계속 갈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사여령은 어렸을 때부터 부왕의 예쁨을 받지 못했고 통방이 낳은 자식이라며 늘 차별을 받았었다.그때 당시 부왕은 통방에게 회임하지 못하도록 약을 먹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결국 통방이 회임을 하게 되었고 부왕은 바로 통방에게 낙태약을 먹였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사여령의 친모는 결국 아이를 낳게 되었다.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이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일부러 대놓고 갓난 사여령을 저택으로 데려왔고 연왕은 아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때부터 사여령의 어머니는 연왕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된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사여령의 발걸음도 몹시 가벼워졌다. 비록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하지만,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지도 않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사여령이 미안한 건 어머니가 청목암으로 보내졌을 때 따라가지 않았던 점이었다.아버지라는 사람은 아들에게만 몹쓸 짓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도 빨리 죽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한편, 북명황실 의사당 안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사여령한테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노주 한 곳만이 아니며 사여령의 정보도 부족한 부분이
사여령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꼭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사여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리사 감옥 관리자가 되고 나서 사여령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나중에 진소경이 사여령의 고민을 눈치채고 사여령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에 닥친 일만 잘 해내면 된다고 방법을 제시했기에 사여령은 그 뒤로부터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여태까지 답을 얻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사여묵의 물음에 넋을 잃은 채 앉아있던 사여령은 위엄이 넘치는 사여묵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덜컥 겁이 난 사여령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노주에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사여묵이 물었고 사여령은 노주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 뒤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선택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여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주의 왕부에 서재가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평소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가끔 하루 종일 2층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서재가 너무 큰 탓에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주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왔고 노주 외에도 옹현, 간현, 부현 그리고 나현 등 지역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역도 있는데 지역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식량을 노주에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왕이 여러 지역에서 병사를 키우고 있다고? 그럼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거지? 병사를 키운다는 게 점포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식량과 무기 공급은 문제가 없는 건가?’사여묵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연왕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과 재력이 없었다.옹현과 간현은 그럴 가능성
북명왕 저택에는 호위병 외에 따로 비밀 호위무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밖에서 정보를 캐내는 무술 실력이 강한 부하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다들 매우 바빴기에 거의 한 달에 한번 저택으로 돌아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곤 했다.물론 정탐조도 있지만 이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자들이기에 사적인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비밀 호위무사를 두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큰 전공을 세웠고 현갑군도 거느리고 있었기에 선황제는 사여묵이 저택에 너무 많은 부병을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두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 전쟁에 투입되고 나서 이런 부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황제의 의심과 경계 때문에 더더욱 비밀 호위무사를 키울 수 없었다.지금 만약 황제가 대외적으로 사여묵을 노주로 정찰을 보낸다고 발표한다면 현갑군에서 병사들을 보낼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는 것이기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제가 같이 갈까요?”송석석의 물음에 사여묵은 피식 웃으며 송석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괜찮소. 위험한 건 아니오. 그저 정보만 수집하는 일이라 몸을 쓸 일은 없소. 몸을 써야 한다면 우리 몇 명만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연말이라 경위부도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이곳을 지키는 게 좋겠소.”사여묵이 말한 것처럼 연말에 경위부와 순방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이 많았기에 송석석이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몇 명만 보내기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음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심청화는 10일 뒤면 서원도 수업이 끝나니 며칠 앞당겨서 사여묵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했다.심청화가 함께 간다고 하니 송석석은 훨씬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이 일은 국태 부인과 상의를 해야 한다.심청화가 국태 부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들 동의했으며 출발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으니 서원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심청화는 당연히 진짜 행방을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