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송석석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 찾았다는 것이냐?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필명은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무릎에 괴더니 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예, 단혼교에서 찾았습니다. 근데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데 저희가 도무지 설득할 수 없어서요. 그저 대인님을 만나겠다고만 해서 급히 왔습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전북망이 놀라며 물었다. “뭣이오? 왜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이오?!” 송석석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곧장 뛰어나가며 외쳤다. “어서 말을 준비하거라!” 단혼교는 진성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아래에는 동림강이라 불리는 강물이 급하게 흘렀다. 동림강은 단혼교 일대에서 매우 세차게 흘렀는데 상류가 넓고 하류가 좁은 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물살이 매우 거칠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에서 떨어지면 거의 살 수 없다고 보면 된다. 그 다리는 원래 동림이교라고 불렀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백성들이 단혼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전북망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필명에게 사람을 시켜 장군부로 가서 형님에게 알리라고 부탁하고는 바로 말을 타고 단혼교로 향했다. 시만자는 이미 멀리 달려간 뒤였다. 그녀는 가는 길에서 필명을 만났는데, 민 씨가 단혼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단혼교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만자가 단혼교에 막 도착했을 무렵에 해가 방금 져서 하늘에는 붉은 노을만이 남아있었다.해질 무렵의 단혼교는 바람이 차고 강물은 세차게 흘러 특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다리 위에 흔들리는 사람이 서 있다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무서운 풍경이었다. 시만자가 도착했을 땐 놀라서 혼비백산할 뻔했다. 왜냐하면 민 씨가 서 있는 곳이 다리 가운데 기둥이 있는 자리였는데 그 자리엔 그녀가 겨우 서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바람이 너무 거세서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듯 덜덜 떨며 휘청거렸고, 덮은 망토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그러자 경위 한 명이 즉시 횃불을 찾으러 갔다. 시만자는 민 씨가 피곤함과 추위에 시달려 눈을 감으려는 것을 보고 온몸을 떨며 급히 소리쳤다. “잠들면 안 됩니다! 송석석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석석이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으니 절대로 눈을 감으시면 안 됩니다!” 민 씨는 눈을 떠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는데, 비록 이곳에 서 있는게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장군부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뛰어내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해 이 곳에 온 것인데 거센 바람과 추위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자신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송석석에게 전당표를 건네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북망이 송석석과 이혼하려고 할 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고, 송석석이 장군부에 있을 때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해줬던 것이 너무 고마워 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또한 전당포에 넘긴 장신구를 그녀는 되찾을 기회가 없으니 송석석에게 돌려받으라고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건 송석석의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은자는 모두 써버려서 송석석이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바람소리를 가르며 곧장 단혼교로 달려갔다.송석석이 먼저 도착하자 시만자가 뛰쳐나와 막았고 송석석은 급히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고 뛰어내렸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두 명의 경위는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지만 민 씨가 있는 곳을 비추지 못하니 사람들에게 횃불을 더 추가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송석석은 희미하게 민 씨의 모습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더욱 가냘프게 보였고 찬바람에 펄럭이는 망토는 기둥에 걸린 깃발처럼 보였다. “민 언니, 저 송석석입니다!” 민 씨가 송석석의 형수였는데다 지금 자살까지 하려고 하니 송석석은 도저히 민 씨라고 부를 수 없었다. 민 씨는 휘날리는 망토를 당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송석석은 하고 싶은 말들이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전북망이 달려가려 하자 시만자가 그의 무릎을 걷어차 버렸다. “안 됩니다! 그녀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전북망이 넘어지자 시만자는 그의 머리를 누르고 민 씨를 향해 소리쳤다. “이 사람도 무릎을 꿇고 당신에게 사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욕해도 됩니다.” “소용없습니다…!” 민 씨는 울부짖었다. “소용없다고요…! 지금 사과한다고 해도 돌아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난 돌아갈 친정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혼수로 가져갔던 장신구마저 모두 팔아 이혼을 한다면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돼 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을 것입니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당신의 아이를 생각하십시오!” 송석석은 시만자에게 눈짓을 보내 전북망을 잡아두고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 “방금 그들이 당신을 때렸다고 했는데, 대체 왜 때린 겁니까? 나한테 말하면 내가 나서서 막아주겠습니다.” 송석석은 말을 하는 동시에 소리 없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지금 속도대로라면 날아가도 민 씨가 뛰어내리는 것보다 빠르지 못할 것이었다. 민 씨가 뛰어내리기라도 한다면 송석석은 급류 속에서 그녀를 구할 자신이 없었다. “돈 때문입니다…” 민 씨는 여전히 울면서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부에서는 내가 뭘 하든 다 틀렸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단설환을 살 수 없는 것도, 심고환을 살 수 없는 것도 내 잘못이었습니다. 내가 가문의 생계를 유지하려고 왕청여에게 돈을 달라고 하자 왕청여는 나에게 3성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녀와 이방에게 하인이 너무 많아서 내가 좀 내보내겠다고 하자 그들은 체면을 세워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장군부의 체면을 깎을 수 없다면 생계는 누가 유지하겠습니까? 이방을 들일 때 팔 수 있는 모든 산업을 팔았고 왕청여를 들이기 위해 모든 사람이 함께 모은 돈을 다 썼으며 전소환의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썼습니다. 돈이 없는데
송석석은 몸을 돌려 다리 건너편으로 뛰어들어 물을 밟으며 민 씨를 찾으려 했지만 어두운 수면에서 민 씨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해졌고 전 씨 가문의 네 명은 그녀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특히 전북경은 아내의 연약한 성격을 잘 알고 알기에 강에 뛰어들기는커녕 물에 들어가 발을 적실 용기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을 보고 송석석과 경위까지 오게 해서 창피하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욕한 것이지, 그녀가 정말로 뛰어들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였다. 겁이 많던 사람이 어떻게 감히 급격한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생겼는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가문의 생계를 유지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왜 다른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녀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모두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할 때 송석석은 이미 물살을 따라 내려갔고 시만자도 강둑을 따라 달렸다. 물에 빠지면 위험하니 일 초라도 빨리 구조해야 했다. 전북망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시만자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이미 멀리 뛰어간 뒤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과 송석석과 시만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깨닫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살리려는 생각만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지만 본인은 아니였다. 송석석은 물결에 떠내려가는 민 씨를 보고 힘을 빌려 허공을 몇 차례 휘젓더니 민 씨 앞에 멈춰 순조롭게 차가운 물결 속의 그녀를 끌어 안았다. 하지만 민 씨를 안은 송석석은 경공을 펼칠 수 없었다. 물살이 너무 센 탓에 그는 먼저 평형을 유지해야 했다. 시만자는 뛰면서 망토를 찢어 묶은 뒤 돌멩이 하나 또한 같이 묶어 송석석에게로 던졌다. 망토 띠가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자 송석석은 한 손으로 민 씨를 안고 한 손으로 망토 띠를 잡아당겨 마침내 평형을 유지했다.송석석은 시만자를 향해 외쳤다. “당겨.” 그러자 시만자는 즉시 다른 쪽 끝
민 씨를 약왕당으로 보낸 후 송석석은 약왕당의 사람들에게 전 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막고, 민 씨가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따라간 전 씨 가문의 사람들 모두 약왕당의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약왕당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지금 환자를 치료하는 중이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전북경은 굳이 민 씨를 만나야겠다며 싫증을 부렸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약왕당은 4대 금강을 내세워서야 그들을 물리쳤다. 전북망이 움직이지 않자 다른 사람들은 싸울 자격조차 없었다. 그러자 전기가 말했다. “민 씨가 약왕당에 있는 한 위험은 없을 테니 우린 먼저 돌아가자꾸나.” 장군부에서 전기의 존재감은 매우 낮았다. 왜냐하면 그는 일이 있을 때마다 숨어서 한 번도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그가 입을 열었으니 전북경은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북경은 전당표를 쥐고 풀이 죽은 채 가버렸다. 그의 마음속엔 막막함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둘째 동생이 방금 승진했는데 이런 짓을 하면 장군부와 둘째 동생의 앞길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어째서 좀 이해해 줄 수 없는 것일까? 부귀만 함께 누릴 수 있고 고난은 함께 겪을 수 없다는 것인가? 시어머니가 편찮으면 며느리로서 조금 참아가면서 시중을 드는 게 어때서? 제수씨가 임신 중인데 돈을 좀 더 쓰는 게 어때서? 대체 왜 이렇게까지 따져야 하는 걸까?” 전북경은 순간 자신이 민 씨의 따귀를 때리고 어머니에게 사죄하라고 한 일이 생각났다.송석석이 구해 온 민 씨는 깨어났지만 사레가 들려 계속 기침을 했는데 송석석과 시만자가 보내온 사람이기에 단신의는 병이 남지 않도록 직접 진찰했다. 홍작은 자신의 옷을 가져와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갈아입힌 후 그들의 옷을 말렸다. 단신의가 민 씨를 진료한 후 약을 복용하게 하자 민 씨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서 단신의가 몇 번을 불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단신의는 사람의 병을 고칠
장군부에서 둘째 집과 이방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큰 집의 사람들이 노부인의 방에 모였습니다. 노부인은 화가 치밀어 오른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강에 뛰어든 것도 모자라 송석석이 그녀를 구했다고? 죽으려면 조용히 죽을 것이지 이렇게 소란을 피우기나 하고! 누구를 협박하려는 것인가? 누가 그녀에게 시켜서 그런 게 분명하다. 우리 장군부가 대체 언제 그녀를 박대했던가? 능력도 없고 친정에 기댈 곳도 없는 여자를 굳이 데리고 와 내 옆에서 병시중을 좀 들라고 했다고 마치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죽으려고 하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내가 악독한 시어머니라고 여길 것 아니냐?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날 죽이려고 그런 것이다. 정말로 죽고 싶었다면 사람들 다 보는데서 난리 피우지 않고 진작에 뛰어내렸겠지!” 전북경은 방금 겪은 일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민 씨가 뛰어내리던 순간, 그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절대로 어머니의 말처럼 죽는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 밤이 어두워서 어떻게 구했는지 잘 보지는 못했지만 구조하기도 힘든 상황인건 분명했다. 하지만 전 씨 노부인은 계속 욕설을 퍼부울 뿐이였다. “이러면 우리가 송석석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 아니더냐? 외부인을 도와 우리 가문을 해치다니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안 그래도 북망이 송석석의 부하로 굴욕을 당하고 있는데 이제 신세까지 졌으니 시동생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 것이냐? 나도 눈이 멀었지. 애초에 왜 그런 여자를 맏며느리로 선택했을까?” 그러자 전북망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실 요즘 형수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는데, 장부에 돈이 없어서 안 그래도 억울한 데다 형님이 그녀의 뺨을 때리고 범인을 호송하듯이 끌고 가서 어머니에게 사죄하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청여가 심고환을 사 오라고 하질 않나, 앞으로 3성의 봉급만 준다고 하질 않나…” 그러자 왕청여는 불룩한 배를 내밀고 일어서서
전북망은 힘이 다 빠진듯 어깨가 축 처졌다. ‘또 시작이군.’ 끊임없이 싸우기만 하고 평온한 날이 없는 가문을 보며 그는 순간 형수를 이해했다. 그도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마침 아버지가 몰래 나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매번 그랬던 것이었다.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그는 도망가군 했다. 그가 큰형과 셋째 동생을 보니 큰형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고 셋째 동생은 어머니를 위해 나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북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다들 그만하십시오! 형수가 돌아오면 살림은 여전히 형수에게 맡기고 내 녹봉은 모두 형수님께 맡길 것입니다. 어떻게 지출할지는 형수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청여는 단호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당신이 두 사람의 몫을 내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전북망은 더욱 비분을 금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가장 많이 썼고 내가 이 집에 빚진 것이 가장 많기 때문이오.”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빚진 것이지 내가 빚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봉록으로 갚는다고 하지 않았소?” 전북망은 형수가 강물로 뛰어내리던 모습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졌다. “아무튼 당신은 우리 몫의 월례만 받으면 되오. 매일 먹고 마시는 것은 형수님이 안배하고 당신 방의 하인들의 월례도 저택에서 지급할 것이오. 만약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면 돈을 아껴 써야 할 것이오. 형수님은 자기가 안 먹더라도 당신을 굶기지는 않을 것이오.” “말도 안 됩니다.”왕청여는 냉소하며 말했다.“난 평서백부의 딸이오. 내가 장군부로 시집온 게 매달 몇 냥의 월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당신들과 함께 고생할 수 있어도 내 복중의 아기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일 년에 나에게 200 냥을 주지 않으면 나는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것입니다.”그러자 전노부인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모두 닥치고 나가거라. 북경은 내
다음날, 전북경은 약왕당으로 민 씨를 데리러 갔지만 약왕당 사람들이 그를 들여보내지 않아 그는 밖에서 한 시진 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 씨는 약왕당의 뒤뜰에서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차 한 잔을 마신 뒤 고개를 들어 홍작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홍작이 말했다. “당신만 원한다면 매일 오늘같이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잘 말해두었으니 약왕당에서 이제 당신을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민 씨는 찻잎 찌꺼기를 보다가 한참 뒤에야 일어나서 말했다. “나 그 사람과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러자 홍작이 말했다. “잘 생각하신 겁니까?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언젠간은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민 씨는 눈시울을 붉히고 웃으며 말했다. “홍작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그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약을 좀 지어줄 테니 돌아가서 복용하십시오.” “아닙니다. 전 이제 괜찮아져 굳이 약 먹을 필요까진 없습니다.” 민 씨는 밖으로 나가 아치 쪽으로 가더니 홍작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민소진입니다.” 그러자 홍작은 잠깐 멍하더니 말했다. “민소진, 이름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그렇지요. 아름다운 이름이지요.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러자 홍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럴 리가요? 당신의 부군께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습니까?” 민 씨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엔 불러주었지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저 차갑게 ‘야’라고만 부르더군요.” “‘야’라니요…?” 홍작은 멍하니 생각하더니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그렇게 부른다는 말입니까?” “예.” 민 씨는 짧게 대답한 후 홍작을 향해 몸을 굽혀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대신 송석석에게도 정말 고
사여령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꼭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사여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리사 감옥 관리자가 되고 나서 사여령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나중에 진소경이 사여령의 고민을 눈치채고 사여령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에 닥친 일만 잘 해내면 된다고 방법을 제시했기에 사여령은 그 뒤로부터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여태까지 답을 얻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사여묵의 물음에 넋을 잃은 채 앉아있던 사여령은 위엄이 넘치는 사여묵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덜컥 겁이 난 사여령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노주에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사여묵이 물었고 사여령은 노주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 뒤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선택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여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주의 왕부에 서재가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평소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가끔 하루 종일 2층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서재가 너무 큰 탓에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주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왔고 노주 외에도 옹현, 간현, 부현 그리고 나현 등 지역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역도 있는데 지역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식량을 노주에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왕이 여러 지역에서 병사를 키우고 있다고? 그럼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거지? 병사를 키운다는 게 점포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식량과 무기 공급은 문제가 없는 건가?’사여묵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연왕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과 재력이 없었다.옹현과 간현은 그럴 가능성
북명왕 저택에는 호위병 외에 따로 비밀 호위무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밖에서 정보를 캐내는 무술 실력이 강한 부하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다들 매우 바빴기에 거의 한 달에 한번 저택으로 돌아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곤 했다.물론 정탐조도 있지만 이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자들이기에 사적인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비밀 호위무사를 두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큰 전공을 세웠고 현갑군도 거느리고 있었기에 선황제는 사여묵이 저택에 너무 많은 부병을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두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 전쟁에 투입되고 나서 이런 부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황제의 의심과 경계 때문에 더더욱 비밀 호위무사를 키울 수 없었다.지금 만약 황제가 대외적으로 사여묵을 노주로 정찰을 보낸다고 발표한다면 현갑군에서 병사들을 보낼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는 것이기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제가 같이 갈까요?”송석석의 물음에 사여묵은 피식 웃으며 송석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괜찮소. 위험한 건 아니오. 그저 정보만 수집하는 일이라 몸을 쓸 일은 없소. 몸을 써야 한다면 우리 몇 명만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연말이라 경위부도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이곳을 지키는 게 좋겠소.”사여묵이 말한 것처럼 연말에 경위부와 순방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이 많았기에 송석석이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몇 명만 보내기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음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심청화는 10일 뒤면 서원도 수업이 끝나니 며칠 앞당겨서 사여묵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했다.심청화가 함께 간다고 하니 송석석은 훨씬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이 일은 국태 부인과 상의를 해야 한다.심청화가 국태 부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들 동의했으며 출발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으니 서원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심청화는 당연히 진짜 행방을 얘기
시만자는 현재 사부 외에도 석소 사저 등 몇 명과 함께 팀을 이루어 여성들에게 변태 짓을 저지르는 범인들을 잡으러 다녔다.처음에는 이 일이 매우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범인을 잡아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할 때까지 때려서 관청으로 보낸 뒤, 범인들은 자신들이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말을 바꿨다.석소 사저는 몰래 피해자 여성들을 찾아가 봤지만 다들 부인하기 바빴다. 심지어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고 버럭 화를 내면서 석소 사저를 쫓아내기까지 했다.증거가 없는 탓에 범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시만자는 풀려난 범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이제 소속이 없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왕야는 공문 소속이고 송석석도 현갑군을 관리하고 있기에 시만자는 살인자가 될 수는 없었다.그렇게 밤낮없이 범인을 잡느라 갖은 고생은 다 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한 명도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송석석은 화가 잔뜩 난 시만자를 위로했다.“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어쨌든 확실하게 팼으니까 범인들도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서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패는 걸로 분이 안 풀려. 그 놈들이 전부 관청에 끌려가서 벌받았으면 좋겠어.”시만자가 턱을 괸 채 한숨을 푹 내쉬자, 송석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들에게 당한 여인들은 쉽게 나서지 못할 거야. 되레 그 사실을 꽁꽁 숨기려고 하겠지.”“그럼 저 나쁜 놈들이 저렇게 밖에 돌아다니게 내버려둬?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다음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관청으로 끌고 갈 필요도 없어. 일단 죽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패는 거야. 손이나 발을 잘라버려. 아니면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도 좋고.”시만자는 송석석의 말에 착잡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좋은 방법이네.”“근데 조사는 확실하게 한 거야?”시만자가 가슴을 퍽퍽 치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확실하게 조사했으니깐. 절대 죄 없는 사람은 잡지 않아. 하지만 피해자들
며칠 뒤, 숙청제는 장춘궁에 나타났고 제황후는 붉어진 눈시울로 제자예가 퇴학 당한 일을 꺼냈다.한편, 이미 제씨 가문에게 이 일에 대해 주의를 주었는데 제황후가 다시 언급하자 숙청제는 속으로 살짝 언짢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치를 보던 제황후는 화가 난 듯한 황제의 표정에 이내 화제를 돌렸고 요즘 명문 가문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송석석의 인품을 칭찬하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제황후를 쳐다보며 말했다.“듣고 있으니 짐은 궁금하기도 하오. 왜 세가의 부인들은 황후가 아닌 송석석을 칭찬하는 걸까? 황후는 한 나라의 국모로써 짐에게 시집오기 전에는 진성에 소문이 자자한 천재 소녀였소. 그럼 황후야말로 백성들의 모범이고 찬송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겠소?”제황후는 황제의 말이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헷갈렸다. 웬지 요즘 따라 점점 황제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제황후는 황제에게 차 한 잔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현재 북명 왕비의 위신이 매우 높습니다. 여학과 소진 소주방도 점점 잘 되고 있고 예전에 왕비에게 손가락질을 했던 사람들도 다들 칭찬하기 바쁩니다. 뿐만 아니라 북명왕도 황제 폐하의 큰 신임과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제가 보기엔 마냥 좋은 일은 아닌 듯합니다.”숙청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제황후는 황제의 반응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황제는 북명왕 부부에게 거리낌을 느끼고 있었다. 북명왕 부부는 너무 많은 찬송과 영예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부부에게 신뢰가 깊었기에 황제는 견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편, 송석석은 민소와 홍현 등 여인에게 교대로 여학을 지키라고 했다.예전의 제씨 가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제씨 가문 부인들은 각자 꿍꿍이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예가 학교에서 쫓겨난 일로 황후는 매우 화가 나 있을 것이다.특히 넷째 부인은 막무가내로 미쳐서 날뛸 때가 많았기에 언제든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한다.한동안 시만자와 두 사
조금 뒤, 저택으로 돌아간 제 상서는 넷째 부인을 불러 크게 호통을 치자, 그녀가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저희도 그저 마마의 뜻에 따랐을 뿐이에요. 광릉후의 셋째 도련님께 혼사를 제안하려고 했지만 마마께서 우리 가문에 무장의 힘이 없다고 하셨거든요.”넷째 부인은 제황후가 혼사를 허락하려고 했지만 태후에게 제지 당한 일을 얘기했다.“방씨 가문도 참 어이가 없네요. 우리 제씨 가문의 귀한 딸을 대체 뭐가 싫다고 거절한 거예요? 방씨 가문은 지금 우리 제씨 가문을 만만하게 여기고 있는 거라고요!”“방씨 가문에서 왜 우리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돼? 그럼 우리가 방씨 가문을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어?”제 상서가 버럭 화를 내며 되물었다. 이게 바로 문제점이다. 언젠가부터 제씨 가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제씨 가문의 체면을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제 상서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제씨 가문은 어느새 사람들 눈에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말문이 턱 막힌 넷째 부인이 한참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저희는 제씨 가문이잖아요.”이 일을 계기로 제 상서는 제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실을 조심하라고 했으며 절대 자만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고 괜히 잘난 척하지도 말라고 경고했다.그러다가 반역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제 상서의 말에 가문 사람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제 상서는 그래도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대황자가 멍청한 짓이나 악한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 제 상서는 괜히 대황자를 위해 모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어차피 대황자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 받은 자로 태자의 자리는 결국 대황자의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황자의 녹록함은 점점 더 눈에 띄게 드러났고 심지어 녹록할 뿐만 아니라 성격과 품행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황제도 분명 이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니 지금 이 상황에서 뭔가 모략하는 건 황제의 의심을 더욱 크게 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다행히 대황자는 아직
그러자 제 상서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인지하게 되었다.아군 여학의 학생들 일을 조정에서 얘기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제 상서는 그렇게 대신들이 전부 물러갈 때까지 멍하니 서있다가 숙청제의 부름에 궁에 남게 되었다.숙청제는 제 상서를 어서방으로 불렀지만, 계속 안으로 들어오라는 얘기도 안하고 밖에 세워 두기만 했다. 그렇게 칼바람이 부는 날씨에 제 상서는 두 시간이나 서있었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에게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온몸을 덜덜 떨면서 서있던 제 상서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어찌됐든 제 상서는 황제의 장인 어른인데 아무리 잘못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장인 어른을 이렇게 추위에 방치하는 건 너무했다.두 시간이 지나자 제 상서의 몸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오 대반이 제 상서에게 작은 손 난로 하나를 쥐여 주었다.한편, 오월은 빠른 걸음으로 어서방에 들어갔다가 조금 뒤, 밖으로 나와 제 상서에게 다가갔다.“제 상서, 왜 이곳에 이러고 계신가요?”제 상서가 이를 악문 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황제 폐하께서 저를 안으로 불러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제 상서의 말에 오월이 입을 떡 벌리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폐하께서 조금 전에 저를 불러 제 상서를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어서방으로 불렀는데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하셨는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폐하께서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제 상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굳어버린 두 다리를 힘겹게 옮기며 어서방으로 향했다.평소와 같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고 자리에 앉으라는 허락도 받았지만 제 상서는 황제가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제 상서를 두 시간 동안 밖에 세워둔 것도 그에게 확실하게 주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방 안은 따듯했고 제 상서도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 오 대반이 따듯한 차 한 잔과 함께 조사 보고서를 제 상서에게 건넸다.의아
송석석은 최씨와 함께 돌아갔다. 송석석은 자신이 타고 온 말을 하인에게 끌게 한 뒤 최씨와 함께 최씨의 마차에 타고 있었다.송석석은 최씨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오사형께서 안 좋은 걸로 골라서 또 몇 개 팔았고, 판 돈은 전부 왕경루 지하에 넣어뒀어요.”최씨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희 평서백부가 그분께 빚진 겁니다. 그 돈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편하게 쓰라고 전해주세요. 제가 따로 모아둔 돈도 조금 있습니다.”“오사형은 그 돈을 쓰지 않을 겁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니깐요.”잠시 침묵하던 송석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께서 고청우 신분을 조사하셨습니다. 고청우가 노주에 계신 한 부인을 양모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시씨는 강남 시씨 가문의 방계의 성씨를 따른 것 같습니다. 그 가문도 노주에서 장사를 하는 집안입니다. 전에 부인께서 고청우가 누군가와 비밀리에 왕래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상대방은 아무래도 시씨 가문 사람인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그 사람에게 손을 쓰면 좋은데 아직 움직임은 없으십니다. 그럼 평서백께서 깊이 연루될 가능성이 큽니다.”송석석은 중요한 정보까진 최씨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노주에서 사병을 엄하게 조사할 거라는 등등… 이런 말들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정도 정보를 얘기한 것도 최씨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배려였다. 왕표가 지금이라도 멈추면 그저 작위만 잃을 뿐, 평서백부는 어떻게든 발을 뺄 수 있을 것이기에 처참한 최후는 면할 수 있었다.이 모든 것이 비록 평서백 부인이 왕표를 말릴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정되지만 최씨 부인은 그저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최씨는 최선을 다했지만 왕표가 그녀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고 있다.그 사실을 눈치챈 송석석은 최씨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고는 도중에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이 있다.예를 들
최씨와 딸 왕지아는 마당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당에는 나무와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지만 그리 무성하게 자라지 못했으며 특히 올해 겨울엔 더더욱 일찍 시들었다.“지아야, 너 왜 고모부… 방시원 장군님 편을 든 거야?”최씨는 손수건으로 왕지아의 상처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물었으며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고 싶었다.평서백부에 이런저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얘기해주지 않았으며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밖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너무 많았기에 아이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왕지아는 벌겋게 부은 얼굴을 살짝 들었다. 분명 맑고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와 맞지 않는 성숙한 눈빛이 보였다.“엄마, 예전에 고모부가 고모와 함께 우리 집안에 처음 왔을 때 나에게 뭘 선물했는지 기억하세요?”왕지아의 말에 최씨가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엄마 기억으론 장군을 보필하는 마마가 너와 현이에게 금덩이 하나와 금열쇠 하나씩 선물했던 것 같은데?”왕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국태 부인의 산하지를 저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그때 당시 고모부가 저에게 해준 말이 있었거든요. 지금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기 어렵다고 했어요. 다른 지역으로 시집을 가지 않는 이상, 집 밖으로 나간다는 건 쉽지 않지만 넓은 바깥 세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라고 했어요. 우리 상국의 아름다운 풍경들도 보고 바깥 하늘이 얼마나 푸르고 높은지도 보아야 시야가 넓어지고 쓸데없는 일에 고집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힘들게 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죠.”최씨는 딸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때 당시 방시원을 처음 봤을 때 최씨도 돈만 밝히는 사람이어서, 상대방이 무슨 선물을 들고 왔는지부터 따지기 바빴다.“고모부는 고모와 혼인을 하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 집안에 찾아와서 따지거나 고모를 힘들게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엄마, 고모
제자예는 넷째 부인의 손을 뿌리치곤 최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절대 사과 안 할 거예요! 저를 뭐 어떡하실 건데요? 그렇게 억울하면 저도 한 대 치세요!”최씨를 향해 얼굴을 들이민 제자예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세상 서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최씨는 그런 제자예를 보며 그저 어이없다는 듯이 차갑게 피식 웃었다.“그렇다면 지금 당장 제 제사한테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네. 따님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버릇이 없는 건지, 참.”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말했다.“훈장님, 그때 제 증인이 되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제 제사를 만난다면 전 당연히 솔직하게 얘기드릴 겁니다.”송석석의 대답에 제씨 넷째 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졌으며 이 일이 어르신에게 알려지면 넷째 부인은 크게 혼이 날 것이다.절대 어르신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넷째 부인은 이를 악문 채 제자예에게 말했다.“얼른 왕지아에게 사과해.”제자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엄마, 전 사과할 수 없어요. 쟤들이 날 괴롭혔고 날 서원에서 쫓아내려고 했어요.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쟤들이에요.”넷째 부인은 최씨와 송석석을 힐끗 흘겨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했다.“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야.”제자예는 자신이 며칠동안 서러운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어머니마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더욱 서럽고 슬펐다.“싫어요. 절대 사과 못 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세요! 전 절대 굴하지 않을 거예요!”말을 하던 제자예는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이내 송석석에게 잡혀 다시 최씨 곁으로 돌아왔다. 송석석이 최씨를 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저희 아군 서원에서 벌어졌으니 서원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자예 학생이 왕지아 학생의 얼굴에 상처를 냈으니 관아로 보내는 건 어떠세요? 관아의 처리에 따라 저희 아군 서원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은 반드시 책임지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