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씨 노부인은 침대에 반쯤 기대 누워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째려보며 차가운 말투로 호통쳤다.“무릎 꿇어라!”민 씨가 무릎을 꿇자 노부인이 민 씨의 뺨을 때리며 악독한 저주를 퍼부었다.“죽을 거면 멀리 가서 죽지 왜 다시 돌아온 것이냐? 목숨으로 협박이나 하다니. 네가 간이 제대로 부었구나!”ㄱ러자 손마마가 옆에서 말렸다.“노부인 일단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큰 부인께서도 잘못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노부인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화를 참으십시오.”전 씨 노부인은 옆에 있는 탁자의 찻잔을 집어 민 씨의 머리에 내리쳤다.“이제 와서 잘못을 알았다는 것이냐? 소란을 피울 땐 왜 알지 못했느냐? 우리 장군부의 체면을 모두 잃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꺼지거라. 마당에서 내일까지 무릎을 꿇고 있거라.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말거라.”찻잔이 덜커덕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따뜻한 찻물이 피와 섞여 민 씨의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손마마는 눈앞의 상황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큰 부인, 노부인의 눈앞에 계시지 마시고 어서 나가서 무릎을 꿇고 계십시오.”이건 손마마가 호의로 한 말이었다. 그녀가 빨리 나가야 더 이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민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마당 입구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전 씨 노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저 년, 저 태도 좀 봐!”손마마는 노부인을 위로하더니 담요를 가지고 나가 민 씨에게 주었다. 그녀는 날씨가 추우니 노부인께서도 나와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녀들에게 분부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어서 와서 큰 부인의 상처를 싸매거라.” 민 씨는 내내 끄떡도 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그들이 싸매도록 두었다. 민 씨는 고개를 숙여 아무런 표정이 없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추위도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손마마가 말했다. “큰 부인께선 일단 무릎을 꿇고 계십시오. 저녁식사 후 제가 노부인께 사
전북경은 둘째 숙부의 말을 들어주긴 했지만 여전히 민 씨가 먼저 어머니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는 어머니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으로 가족을 협박하다니, 그런 생각은 애초에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북경은 모질게 마음먹고 그녀를 상관하지 않았다.오늘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 매우 추웠지만 민 씨는 여전히 조각상처럼 무릎을 꿇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손마마는 그녀에게 망토를 걸쳐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노부인을 설득했지만 노부인은 여전히 내일까지는 무릎을 꿇어서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고 했다. “엄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어떻게 잘못을 뉘우칠 수가 있겠느냐!”하지만 손마마는 계속 그녀를 설득했다.“하지만 큰 부인께서는 물에 빠졌다 나오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그러자 노부인은 포악하고 위압감으로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그만 말하거라. 한 번 더 사정한다면 내일도 계속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손마마는 결국 더 이상 나서지 못할 것 같아 몰래 나가서 민 씨에게 옷을 한 벌 더 입히고는 하녀들에게 돌아가라 명하고 혼자 노부인을 시중 들기 위해 다시 방에 들어갔다.노부인은 밤마다 두세 번은 일어나는데 예전엔 민 씨가 시중들었을 때 매일 잠을 잘 못 잔 탓이라고 했다. 밤이 되자 전 씨 노부인은 평소처럼 일어났고, 손마마 타구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가자마자 마당에 비친 한 그림자를 보았는데 그 그림자는 나무에 걸려 노부인의 집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손마마는 너무 놀란탓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여봐라! 큰 부인께서 자살하셨다…!” 손마마의 외침소리를 듣고 전부인이 급히 일어나 대추나무에 매달린 여인을 보았는데 눈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노부인 또한 놀라서 기절해 버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부의 등불이 모두 켜지더니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민 씨의 몸은
노부인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는데, 문 밖에서 목 매달린 민씨의 모습이 아직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녀는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그렇게 한참 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천한 것! 자기 복도 모르는 천한 것!”손마마도 한바탕 울며 그때 민씨를 보러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아…… 조금만 더 일찍 나갔더라면. 어쩌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미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진 그녀는 노부인이 민씨를 험담하자 참다못해 나지막이 변호하듯 말했다. “노부인, 대부인께서 부인을 정성껏 모신 것도 사실 아닙니까. 이제는 욕 좀 그만하십시오. 이미 떠나신 분이잖습니까……”그러자 노부인은 화가 잔뜩 난 채 소리쳤다."어찌 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죽으려면 저 멀리 가서 죽지, 왜 하필 내 문 앞에서 죽어서 나를 불쾌하게 하려는 것이냐?"노부인은 욕설을 내뱉고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저런 나쁜 계집을 진작에 알아보지 못했다니! 내 뜰 앞에서 목을 맨 건 내가 박한 사람이라고 소문이라도 내고 싶었던 겐가? 이제 큰놈이나 셋째가 장가를 들려고 해도 어렵겠구나. 어쩜 내 팔자가 이렇게 고달프냐, 다들 이 모양이니 원…”“우리 장군부의 명예가 전부 실추되어 버렸구나! 이러다가는 우리 둘째의 앞날에도 영향을 미칠지 몰라."노부인은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민씨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다음 날이 되자, 이 소식이 황실에 전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은 쉬는 날을 맞아 서원에 들러 서우를 데리고 식사를 함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만자가 들어와 민씨의 소식을 전해주면서 원래 외출 계획을 접어야 했다. 당연히 그 소식은 홍현이 알아낸 것이었다.송석석은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멍해져서 믿기지 않는 듯 시만자에게 물었다. “목을 맸다고? 살려내지 못한 거야?”“죽었어…” 시만자는 의자에 털썩 앉아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왜 인지 코끝이 시큰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민씨가 스스로 목을 맸다고는 하지만, 경조부에서는 누군가에 의한 타살 여부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전강은 경조부 소속이었으나 장군부와 관련된 사건인 만큼 이번 조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경조부윤 공양은 사람을 보내 여러 사람에게 민씨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각자의 입에서 나온 민씨의 모습은 모두 달랐다.왕청여는 그녀가 이기적이고 게으르다고 말했고, 전북망은 그녀가 제법 이해심이 깊다고 말했다.노부인은 민씨를 독한 계집이라고 부르면서, 교활하고 게으른데다 욕심 많고 방탕하여 장군부의 명성을 실추시켰다며 거칠게 욕했다.그리고 이방은 좀처럼 길상거를 나서지 않기에 이번에도 그저 한마디 할 뿐이었다.“내 알 바 아니야.”하인들은 그녀가 인자하면서도 남들에게 속기 쉬워서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 평가했다.둘째 노부인은 그녀가 불쌍한 사람이라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처지였다고 울먹였다.유일하게 남편인 전북경만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못했다.그는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결국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늘 묵묵히 자신을 돌보며 말을 아끼던 민씨의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항상 무미건조하고 마치 나무토막처럼 무덤덤하며 따분한 사람이었다.민씨는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경조부는 그녀의 죽음을 냉혹한 대우로 인한 자결로 결론지었다.법에 따르면 사람을 자결에 이르게 할 만큼의 냉대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신체적인 손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씨가 실제로 두 차례 뺨을 맞고 무릎을 꿇는 벌을 받긴 했으나 법적 처벌을 받을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법이 제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의 비난은 장군부를 거의 삼킬 정도로 거세게 몰아쳤다. 사실 장군부는 이미 몇 차례나 이러한 비난에 휩싸였을 때마다 매번 꿋꿋하게 견뎌내곤 했다.민씨의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고, 양 마마는 송석석을 대신해 장군부에 들러 향을 올리며 조의를 표했다. 일년 동안 시누이로 지낸 인연을 기리는 마음에서였다.양 마마는 이곳이 불길하다고 느꼈지만 장군부에서는
민씨가 세상을 떠난 후, 왕청여는 어쩔 수 없이 집안 살림을 계속 맡아야 했는데, 장부를 살펴보니 역시 남은 은화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으로 메우는 것은 아까워 결국 손을 떼기로 마음 먹었다. 책임을 피하고자 둘째 노부인을 찾아가 장부를 책상 위에 놓으며 대신 살림을 맡아달라고 했다.둘째 노부인은 민씨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있던 터라 왕청여의 이 행동에 기막혀 화가났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장부를 던져버리고 곧장 노부인의 방으로 달려가 말했다. “전 그냥 나가서 살겠습니다!” 노부인은 울분을 참지 못하며 소리쳤다. "지금 밖에서 우리 장군부를 두고 떠드는 말이 아직 적다고 생각하오? 이 타이밍에 분가를 한다면 사람들이 또 뭐라 하겠소!" “형님네께서 불러온 화인데 왜 제가 함께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오늘 밤 남자들이 돌아오면 어떻게 나눌지 논의해서 곧바로 나가 살겠습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지금 와서 무슨 분가를 한단 말이오? 은화도 다 떨어졌고 집이며 땅이며 남은 게 없소. 이 장군부 한 채로 도대체 어떻게 나누겠다는 것이오?"“벽을 쌓아 나눠 살게 해주십시오. 문은 제가 따로 만들겠습니다.” 둘째 노부인은 이번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단호히 나섰다. “정말 미쳤소! 자네 둘째 집안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잘 지낼 수나 있을 것 같소?”"잘 못 살더라도 형님네처럼 남들한테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것보단 훨씬 더 낫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젠 저도 모르겠으니 따로 삽시다. 큰댁이 팔아버린 가게며 토지는 원래 모두 공공 재산이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둘째 집안 몫은 돌려주셔야 합니다!"둘째 노부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노부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분노에 찼다. "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구나! 왕청여는 대체 왜 저러는 것이냐? 살림을 맡으라 했더니 둘째 집안에 가서 대체 무슨 소란을 벌인 거냔 말이다! 그리고 민씨 그 천한 계집은 죽어
“아야!”왕청여는 급히 몸을 돌려 노부인이 던진 약그릇을 피했고, 약그릇은 바닥에 퍽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며칠 동안 계속된 피로로 아랫배가 이미 아파왔던 왕청여는 넘어진 충격으로 태기가 심하게 흔들려 피가 비칠 정도였다.이 모습을 본 노부인이 소스라치게 놀랐고, 손마마는 급히 사람을 불렀다. "어서 왕청여를 문희거로 옮기고 의관과 산파를 불러오너라!"급히 소식을 들은 전북망이 집에 돌아왔는데, 이미 의관과 산파가 도착해 있었다. 태아는 아직 달이 차지 않았고 태위 또한 바르지 않은 상태였는데, 왕청여가 넘어지면서 피가 비친 데다 양수까지 터져 버렸다. 심각한 상황에 산파는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전북망 또한 분만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첫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는 순간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찼었다. 그간 아이를 위해 왕청여와 다투지 않으려 애써 참아왔는데,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의관은 진성에서 굉장히 유명한 명의였지만, 상황이 몹시 긴박한 탓에 그마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맥을 짚은 후 병풍 뒤로 물러나 처방을 지시했지만 그 역시도 긴장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여섯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자궁이 다 열리지 않았다. 분만 촉진제도 써 보았지만 왕청여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왕청여는 고통이 밀려오는 순간마다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힘을 주어 보았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며 말했다.“부군……부군……! 제 친정 사람들 좀 불러… 주세요…!”왕청여가 힘들게 외치자 그 소리를 들은 전북망은 곧장 사람을 보내 평서백부로 달려가게 했다. 분만실 안에서 손마마도 돕고 있었다. 손마마는 비록 산파는 아니지만 과거에 노부인과 민씨의 출산을 보필했던 경험이 있어 나름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
결국 전북망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사실 낮에 청여와 제 어머니가 몇 마디 언쟁을 했사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약그릇을 던지셨고 그 바람에 청여가 넘어졌습니다......" 평서백부 노부인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한참을 숨을 고른 뒤에야 겨우 몸을 가누며 물었다.“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머님께서 제 딸을 치셨단 말입니까?” 전북망은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 일은 분명히 제 어머니께서 잘못하신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청여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지 않겠습니까. 의관님께서 말씀하시길 청여가 예전에 낙태를 하며 자궁이 손상되어 출혈이 많아질 수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지금 출혈이 이미 심각한 상태라 아이를 꺼내고 지혈제를 써야 한다고 하옵니다."평서백부 노부인의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순식간에 굳어졌다.‘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최씨가 나서며 말했다.“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옵니다. 일단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이오니 의관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시지요."그러자 전북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의관께서 말하길 단신의를 모셔오거나 아이를 꺼내고 지혈제를 쓰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 단신의께서 약왕당에 계실지 알 수 없으니, 그의 방법을 따르는 수밖에 없을 듯 하옵니다.” 의관은 지혈제 조제를 마쳤고, 최씨는 그 뒤를 따라 안으로 같이 들어갔다. 왕청여는 마치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은 무척 창백했고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지독한 고통이 그녀를 눈에 띄게 수척하고 지쳐 보이게 만든 것이다. 언뜻 형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찾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이 순간,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최씨는 그녀의 볼을 살짝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지혈제를 먹게. 어머니께서는 바로 밖에 계시니 이것만
평서백부 노부인은 분만실에 잠시 머물다 최씨에게 말했다.“지금 장군부에는 주모가 없어 일 처리가 어려운데다, 노부인께서는 병약하시고 청여는 이번 난산으로 몸과 마음에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네가 며칠 동안 여기 머물며 도와주면 좋겠구나.”사실 그녀는 딸이 이 집에서 위축될까 염려되었다. 그 노부인은 무척 사납고 거칠어서 서슴없이 그릇을 던져버릴 정도였으니, 평소에 자신의 딸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노부인을 찾아가 따지지는 않았다. 그 집에서 최근에 사람 목숨이 끊어진 일이 있었는데다가, 딸은 난산을 겪으며 아이마저 잃었으니 말이다. 만약 노부인 쪽에서 또 무슨 사고라도 친다면 큰일이지 않은가.‘어휴…… 됐다!”‘낙태한 일은 이미 더 이상 숨길 수 없겠지. 전북망은 아마 내 딸이 예전에 방시원과 사이에서 아이를 가진건 맞지만, 단지 그때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러니 이 일은 그냥 덮고 지나가자. ‘최씨 역시 이 일에 대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진심으로 장군부의 이 복잡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왕청여의 어머니가 이미 명을 내렸고, 또 장군부에도 주모가 없으니 자신이 며칠간 돌보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는 셈이라 생가하기로 했다.장군부에 머물며 돌보지는 않고 그저 매일 오가며 돌볼 생각이었다.평서백부 노부인이 떠난 후, 최씨는 분만실에 남아 깊은 잠에 빠진 왕쳥여를 지켜보았다. 안쓰러운 그녀를 보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전북망은 침대 곁에 서서 지친 모습으로 잠든 왕청여를 바라보았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연민이 밀려왔다. 결국 자신의 어머니가 그릇을 던져 그녀를 넘어지게 했고, 그로 인해 아이를 잃게 된 것이니 마음이 무척이나 괴로웠다.하지만 의관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전북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청여가 예전에 방시원과 아이를 가진 적이 있었소? 그 아이는 어찌하여 지키지 못한 것이오?”최씨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이 이야기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