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몸을 돌려 다리 건너편으로 뛰어들어 물을 밟으며 민 씨를 찾으려 했지만 어두운 수면에서 민 씨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해졌고 전 씨 가문의 네 명은 그녀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특히 전북경은 아내의 연약한 성격을 잘 알고 알기에 강에 뛰어들기는커녕 물에 들어가 발을 적실 용기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을 보고 송석석과 경위까지 오게 해서 창피하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욕한 것이지, 그녀가 정말로 뛰어들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였다. 겁이 많던 사람이 어떻게 감히 급격한 강물에 뛰어들 용기가 생겼는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가문의 생계를 유지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왜 다른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녀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모두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할 때 송석석은 이미 물살을 따라 내려갔고 시만자도 강둑을 따라 달렸다. 물에 빠지면 위험하니 일 초라도 빨리 구조해야 했다. 전북망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시만자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이미 멀리 뛰어간 뒤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과 송석석과 시만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깨닫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살리려는 생각만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지만 본인은 아니였다. 송석석은 물결에 떠내려가는 민 씨를 보고 힘을 빌려 허공을 몇 차례 휘젓더니 민 씨 앞에 멈춰 순조롭게 차가운 물결 속의 그녀를 끌어 안았다. 하지만 민 씨를 안은 송석석은 경공을 펼칠 수 없었다. 물살이 너무 센 탓에 그는 먼저 평형을 유지해야 했다. 시만자는 뛰면서 망토를 찢어 묶은 뒤 돌멩이 하나 또한 같이 묶어 송석석에게로 던졌다. 망토 띠가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자 송석석은 한 손으로 민 씨를 안고 한 손으로 망토 띠를 잡아당겨 마침내 평형을 유지했다.송석석은 시만자를 향해 외쳤다. “당겨.” 그러자 시만자는 즉시 다른 쪽 끝
민 씨를 약왕당으로 보낸 후 송석석은 약왕당의 사람들에게 전 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막고, 민 씨가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따라간 전 씨 가문의 사람들 모두 약왕당의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약왕당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지금 환자를 치료하는 중이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전북경은 굳이 민 씨를 만나야겠다며 싫증을 부렸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약왕당은 4대 금강을 내세워서야 그들을 물리쳤다. 전북망이 움직이지 않자 다른 사람들은 싸울 자격조차 없었다. 그러자 전기가 말했다. “민 씨가 약왕당에 있는 한 위험은 없을 테니 우린 먼저 돌아가자꾸나.” 장군부에서 전기의 존재감은 매우 낮았다. 왜냐하면 그는 일이 있을 때마다 숨어서 한 번도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그가 입을 열었으니 전북경은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북경은 전당표를 쥐고 풀이 죽은 채 가버렸다. 그의 마음속엔 막막함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둘째 동생이 방금 승진했는데 이런 짓을 하면 장군부와 둘째 동생의 앞길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어째서 좀 이해해 줄 수 없는 것일까? 부귀만 함께 누릴 수 있고 고난은 함께 겪을 수 없다는 것인가? 시어머니가 편찮으면 며느리로서 조금 참아가면서 시중을 드는 게 어때서? 제수씨가 임신 중인데 돈을 좀 더 쓰는 게 어때서? 대체 왜 이렇게까지 따져야 하는 걸까?” 전북경은 순간 자신이 민 씨의 따귀를 때리고 어머니에게 사죄하라고 한 일이 생각났다.송석석이 구해 온 민 씨는 깨어났지만 사레가 들려 계속 기침을 했는데 송석석과 시만자가 보내온 사람이기에 단신의는 병이 남지 않도록 직접 진찰했다. 홍작은 자신의 옷을 가져와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갈아입힌 후 그들의 옷을 말렸다. 단신의가 민 씨를 진료한 후 약을 복용하게 하자 민 씨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서 단신의가 몇 번을 불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단신의는 사람의 병을 고칠
장군부에서 둘째 집과 이방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큰 집의 사람들이 노부인의 방에 모였습니다. 노부인은 화가 치밀어 오른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강에 뛰어든 것도 모자라 송석석이 그녀를 구했다고? 죽으려면 조용히 죽을 것이지 이렇게 소란을 피우기나 하고! 누구를 협박하려는 것인가? 누가 그녀에게 시켜서 그런 게 분명하다. 우리 장군부가 대체 언제 그녀를 박대했던가? 능력도 없고 친정에 기댈 곳도 없는 여자를 굳이 데리고 와 내 옆에서 병시중을 좀 들라고 했다고 마치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죽으려고 하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내가 악독한 시어머니라고 여길 것 아니냐?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날 죽이려고 그런 것이다. 정말로 죽고 싶었다면 사람들 다 보는데서 난리 피우지 않고 진작에 뛰어내렸겠지!” 전북경은 방금 겪은 일 때문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민 씨가 뛰어내리던 순간, 그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절대로 어머니의 말처럼 죽는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 밤이 어두워서 어떻게 구했는지 잘 보지는 못했지만 구조하기도 힘든 상황인건 분명했다. 하지만 전 씨 노부인은 계속 욕설을 퍼부울 뿐이였다. “이러면 우리가 송석석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 아니더냐? 외부인을 도와 우리 가문을 해치다니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 안 그래도 북망이 송석석의 부하로 굴욕을 당하고 있는데 이제 신세까지 졌으니 시동생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 것이냐? 나도 눈이 멀었지. 애초에 왜 그런 여자를 맏며느리로 선택했을까?” 그러자 전북망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실 요즘 형수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는데, 장부에 돈이 없어서 안 그래도 억울한 데다 형님이 그녀의 뺨을 때리고 범인을 호송하듯이 끌고 가서 어머니에게 사죄하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청여가 심고환을 사 오라고 하질 않나, 앞으로 3성의 봉급만 준다고 하질 않나…” 그러자 왕청여는 불룩한 배를 내밀고 일어서서
전북망은 힘이 다 빠진듯 어깨가 축 처졌다. ‘또 시작이군.’ 끊임없이 싸우기만 하고 평온한 날이 없는 가문을 보며 그는 순간 형수를 이해했다. 그도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마침 아버지가 몰래 나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매번 그랬던 것이었다.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그는 도망가군 했다. 그가 큰형과 셋째 동생을 보니 큰형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고 셋째 동생은 어머니를 위해 나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북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다들 그만하십시오! 형수가 돌아오면 살림은 여전히 형수에게 맡기고 내 녹봉은 모두 형수님께 맡길 것입니다. 어떻게 지출할지는 형수가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청여는 단호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당신이 두 사람의 몫을 내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전북망은 더욱 비분을 금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가장 많이 썼고 내가 이 집에 빚진 것이 가장 많기 때문이오.”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빚진 것이지 내가 빚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봉록으로 갚는다고 하지 않았소?” 전북망은 형수가 강물로 뛰어내리던 모습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졌다. “아무튼 당신은 우리 몫의 월례만 받으면 되오. 매일 먹고 마시는 것은 형수님이 안배하고 당신 방의 하인들의 월례도 저택에서 지급할 것이오. 만약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면 돈을 아껴 써야 할 것이오. 형수님은 자기가 안 먹더라도 당신을 굶기지는 않을 것이오.” “말도 안 됩니다.”왕청여는 냉소하며 말했다.“난 평서백부의 딸이오. 내가 장군부로 시집온 게 매달 몇 냥의 월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당신들과 함께 고생할 수 있어도 내 복중의 아기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일 년에 나에게 200 냥을 주지 않으면 나는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것입니다.”그러자 전노부인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모두 닥치고 나가거라. 북경은 내
다음날, 전북경은 약왕당으로 민 씨를 데리러 갔지만 약왕당 사람들이 그를 들여보내지 않아 그는 밖에서 한 시진 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 씨는 약왕당의 뒤뜰에서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차 한 잔을 마신 뒤 고개를 들어 홍작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홍작이 말했다. “당신만 원한다면 매일 오늘같이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잘 말해두었으니 약왕당에서 이제 당신을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민 씨는 찻잎 찌꺼기를 보다가 한참 뒤에야 일어나서 말했다. “나 그 사람과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러자 홍작이 말했다. “잘 생각하신 겁니까?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이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언젠간은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민 씨는 눈시울을 붉히고 웃으며 말했다. “홍작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그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약을 좀 지어줄 테니 돌아가서 복용하십시오.” “아닙니다. 전 이제 괜찮아져 굳이 약 먹을 필요까진 없습니다.” 민 씨는 밖으로 나가 아치 쪽으로 가더니 홍작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민소진입니다.” 그러자 홍작은 잠깐 멍하더니 말했다. “민소진, 이름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그렇지요. 아름다운 이름이지요.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러자 홍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럴 리가요? 당신의 부군께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습니까?” 민 씨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엔 불러주었지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저 차갑게 ‘야’라고만 부르더군요.” “‘야’라니요…?” 홍작은 멍하니 생각하더니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그렇게 부른다는 말입니까?” “예.” 민 씨는 짧게 대답한 후 홍작을 향해 몸을 굽혀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대신 송석석에게도 정말 고
전 씨 노부인은 침대에 반쯤 기대 누워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째려보며 차가운 말투로 호통쳤다.“무릎 꿇어라!”민 씨가 무릎을 꿇자 노부인이 민 씨의 뺨을 때리며 악독한 저주를 퍼부었다.“죽을 거면 멀리 가서 죽지 왜 다시 돌아온 것이냐? 목숨으로 협박이나 하다니. 네가 간이 제대로 부었구나!”ㄱ러자 손마마가 옆에서 말렸다.“노부인 일단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큰 부인께서도 잘못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노부인의 몸을 생각해서라도 화를 참으십시오.”전 씨 노부인은 옆에 있는 탁자의 찻잔을 집어 민 씨의 머리에 내리쳤다.“이제 와서 잘못을 알았다는 것이냐? 소란을 피울 땐 왜 알지 못했느냐? 우리 장군부의 체면을 모두 잃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꺼지거라. 마당에서 내일까지 무릎을 꿇고 있거라.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말거라.”찻잔이 덜커덕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따뜻한 찻물이 피와 섞여 민 씨의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손마마는 눈앞의 상황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큰 부인, 노부인의 눈앞에 계시지 마시고 어서 나가서 무릎을 꿇고 계십시오.”이건 손마마가 호의로 한 말이었다. 그녀가 빨리 나가야 더 이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민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 마당 입구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전 씨 노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저 년, 저 태도 좀 봐!”손마마는 노부인을 위로하더니 담요를 가지고 나가 민 씨에게 주었다. 그녀는 날씨가 추우니 노부인께서도 나와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녀들에게 분부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어서 와서 큰 부인의 상처를 싸매거라.” 민 씨는 내내 끄떡도 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그들이 싸매도록 두었다. 민 씨는 고개를 숙여 아무런 표정이 없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추위도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손마마가 말했다. “큰 부인께선 일단 무릎을 꿇고 계십시오. 저녁식사 후 제가 노부인께 사
전북경은 둘째 숙부의 말을 들어주긴 했지만 여전히 민 씨가 먼저 어머니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는 어머니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으로 가족을 협박하다니, 그런 생각은 애초에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북경은 모질게 마음먹고 그녀를 상관하지 않았다.오늘 밤에도 기온이 내려가 매우 추웠지만 민 씨는 여전히 조각상처럼 무릎을 꿇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손마마는 그녀에게 망토를 걸쳐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노부인을 설득했지만 노부인은 여전히 내일까지는 무릎을 꿇어서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고 했다. “엄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어떻게 잘못을 뉘우칠 수가 있겠느냐!”하지만 손마마는 계속 그녀를 설득했다.“하지만 큰 부인께서는 물에 빠졌다 나오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추운 날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그러자 노부인은 포악하고 위압감으로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그만 말하거라. 한 번 더 사정한다면 내일도 계속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손마마는 결국 더 이상 나서지 못할 것 같아 몰래 나가서 민 씨에게 옷을 한 벌 더 입히고는 하녀들에게 돌아가라 명하고 혼자 노부인을 시중 들기 위해 다시 방에 들어갔다.노부인은 밤마다 두세 번은 일어나는데 예전엔 민 씨가 시중들었을 때 매일 잠을 잘 못 잔 탓이라고 했다. 밤이 되자 전 씨 노부인은 평소처럼 일어났고, 손마마 타구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가자마자 마당에 비친 한 그림자를 보았는데 그 그림자는 나무에 걸려 노부인의 집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손마마는 너무 놀란탓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여봐라! 큰 부인께서 자살하셨다…!” 손마마의 외침소리를 듣고 전부인이 급히 일어나 대추나무에 매달린 여인을 보았는데 눈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노부인 또한 놀라서 기절해 버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부의 등불이 모두 켜지더니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민 씨의 몸은
노부인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는데, 문 밖에서 목 매달린 민씨의 모습이 아직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녀는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그렇게 한참 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천한 것! 자기 복도 모르는 천한 것!”손마마도 한바탕 울며 그때 민씨를 보러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아…… 조금만 더 일찍 나갔더라면. 어쩌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미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해진 그녀는 노부인이 민씨를 험담하자 참다못해 나지막이 변호하듯 말했다. “노부인, 대부인께서 부인을 정성껏 모신 것도 사실 아닙니까. 이제는 욕 좀 그만하십시오. 이미 떠나신 분이잖습니까……”그러자 노부인은 화가 잔뜩 난 채 소리쳤다."어찌 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죽으려면 저 멀리 가서 죽지, 왜 하필 내 문 앞에서 죽어서 나를 불쾌하게 하려는 것이냐?"노부인은 욕설을 내뱉고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저런 나쁜 계집을 진작에 알아보지 못했다니! 내 뜰 앞에서 목을 맨 건 내가 박한 사람이라고 소문이라도 내고 싶었던 겐가? 이제 큰놈이나 셋째가 장가를 들려고 해도 어렵겠구나. 어쩜 내 팔자가 이렇게 고달프냐, 다들 이 모양이니 원…”“우리 장군부의 명예가 전부 실추되어 버렸구나! 이러다가는 우리 둘째의 앞날에도 영향을 미칠지 몰라."노부인은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민씨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다음 날이 되자, 이 소식이 황실에 전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은 쉬는 날을 맞아 서원에 들러 서우를 데리고 식사를 함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만자가 들어와 민씨의 소식을 전해주면서 원래 외출 계획을 접어야 했다. 당연히 그 소식은 홍현이 알아낸 것이었다.송석석은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멍해져서 믿기지 않는 듯 시만자에게 물었다. “목을 맸다고? 살려내지 못한 거야?”“죽었어…” 시만자는 의자에 털썩 앉아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왜 인지 코끝이 시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최숙심은 왕청여에게 언제 어디에서 왕표를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물으며, 왕표 곁에 아이가 없었는지도 확인했다.“어제 냄비를 사러 밖에 나갔는데 소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작은 골목에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오라버니가 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오라버니를 알아보았거든요. 얼굴은 까맣고 눈썹도 다 잘랐는데 몸도 심하게 야위어서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라는 걸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데리고 있지는 않았고 혼자였어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도주하게 되었는데 체포 공문이 떠서 여기저기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이제 가진 돈도 다 썼고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3천냥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돈을 구하면 그자에게 어떻게 주기로 했어?”최숙심이 다급하게 물었고 왕청여가 대답했다.“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저희에게 돈부터 구하라고 하곤, 나중에 오라버니가 날 찾아오겠다고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숙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자가 눈썹이 없다고 했나?”“네, 오라버니는 눈썹이 짙어서 알아보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 잘라버린 것 같아요.”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왕표가 눈썹을 자른다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사실을 얼른 북명 왕비에게 알려야 하지만 눈썹을 다시 그릴 수도 있기에 눈썹이 없는 사람만 유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그럼 넌 이틀에 한 번씩 밖을 돌아다녀서 관찰해봐. 병부에 가서 왕이장을 만나기도 하고. 네 오라버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를 몰래 미행할 거야. 난 석소에게 지금 당장 북명 왕비를 찾아가 순찰에 더욱 힘써 달라고 부탁할게. 그래야 네 오라버니가 한 시라도 빨리 널 찾아올 거야.”“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이던 왕청여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 왕이장이 돈을 주기로 했고 지금 점포를 팔고 있는 중
한편, 최숙심은 뜨개질로 딸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현재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먹고 쓰는 것까지 황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최숙심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왕비가 했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표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무조건 진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진성에 돌아온 그가 자신을 찾아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왕표는 일단 노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노부인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노부인은 어떻게든 그의 이 일을 해결해주려고 할 것이다. 비록 오늘 노부인과 왕청여를 미행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왕표가 진성으로 돌아온 이유가 돈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돈만 구해지면 바로 진성을 떠날 것이다.노부인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없지만 진성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인맥은 넓다.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다면 그건 상대방들을 구렁이에 빠트리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탓에 노부인은 직접 돈을 빌리러 나갈 수도 없고 창피해서라도 절대 직접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보낼 사람은 남희나 왕청여밖에 없다.최숙심이 속으로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있을 때, 왕청여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최숙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왕청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새언니, 제가 예전에 멍청한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저 때문에 새언니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조카들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너무 후회돼요.”최숙심은 왕청여가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뒤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 지난 일이야. 이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지. 앞으로 다 잘 될 거야.”최숙심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
왕청여는 결국 왕이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뻔뻔하게 왕이장도 평서백부 핏줄이니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하는 게 맞다고 얘기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왕청여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평서백부가 무한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때 왕이장은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면 왕씨 가문이 패가망신한 지금, 왕이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왕청여는 그보다 이 사실을 새언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왕청여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참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이때, 석소 사저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청여를 보자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방향을 틀었고 조금 전의 말실수가 떠오른 왕청여가 다급하게 석소 사저를 불러 세웠다.“석소 사저,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예.”그러자 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왕청여는 자유롭게 사는 무림의 여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돌아서는 석소 사저에게 말을 걸었다.“석소 사저, 혹시 사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걸음을 멈춘 석소 사저가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왕청여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왕청여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석소 사저 손에 들고 있던 재봉실을 보며 물었다.“재봉실을 사신 거예요?”“아니요. 이씨 부인께서 보내왔어요.”석소 사저의 대답에 왕청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씨 부인은 사람이 참 선하네요. 소주방에 신경도 많이 써주고.”“다들 선한 사람들이죠.”“맞아요.”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그러자 왕청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함께 사는 얘기나 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
왕청여는 석소 사저가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문을 굳게 닫은 왕청여는 어머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약부터 드세요. 나머지는 다시 천천히 생각하시고요.”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청여야, 네가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가 평소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어머니, 하지만 저희는 이제 오라버니를 도울 능력이 없어요. 우린 지금 소주방에서 빌붙어서 살고 있고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시만자 아가씨가 돈을 줘서 살 수 있었던 거예요.”왕청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노부인이 반박했다.“네가 틀렸어. 그 돈들은 왕이장이 준 거야. 비록 왕이장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었다고.”“그자의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오라버니를 위해 그자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노부인이 솔직하게 얘기했다.“그 돈들은 왕이장 돈이 아니야. 그때 당시 왕이장이 돌아왔을 때 네 새언니가 왕이장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점포 여러 개를 왕이장에게 준 거야.”“그자에게 줬으면 그자의 것이잖아요. 그리고 왕이장 그자도 암암리에서 저희를 많이 챙기고 도왔는데 이제 와서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 이건 왕이장에게 불공평해요.”왕청여의 말에 노부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어차피 우리는 왕이장에게 미안한 짓을 이미 많이 저질렀어. 지금도 왕이장은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텐데 더 원망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네 오라버니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네 오라버니가 이대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고개를 푹 숙인 왕청여는 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어머니, 차라리 새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새언니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건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