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 안으로 들어서자 왕청여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나서는 확실히 조용해진 듯했다.전북망은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살림을 민소진에게 맡기겠다고 말했고 왕청여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건 원래 맏며느리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전 지금 임신 중입니다. 그렇지 않았어도 제가 어찌 살림을 맡는단 말입니까?”전북망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느질은 눈을 상하게 하니 어머니께 맡기시오. 보아하니 홍이도 바느질 솜씨가 좋던데 홍이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 같소.”“그래도 어미로서 아이에게 옷 한두 벌은 만들어주고 싶어서요.”왕청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아무리 우리 집에 녹봉을 받는 사람이 셋이나 있다고 한들 한 집안을 먹여 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도 약을 드셔야 하니 절약할 수 있으면 절약해야지요.”전북망은 그녀가 왜 절약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가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안에 분쟁만 없다면 일이 자연히 잘 풀릴 것이다. 그는 지금 출세를 바랄 여력이 없었고 그저 집안이 평온하기만을 바랐다.“오늘 일찍 오셨으니 마침 잘됐네요. 요즘 들어 배가 많이 나왔으니 유모도 찾아야 하고 산파도 최고로 좋은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 준비를 철저히 해야하지요. 지난번 영안 군주가 난산했다는 소식 들었지요? 우리도 미리 약왕당에 가서 약을 사두는 게 좋겠어요. 어머니께서 단설환을 사시러 가신 김에 함께 사오시면 될 것 같네요.”전북망도 산고의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소, 그 약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내일 집에 오는 길에 사 오겠소.”“심고환이라고 해요. 인삼과 아교에 진통제 성분이 더해진 약이죠. 출산 시 고통이 심하고 기운이 부족할 때 먹으면 제일 좋다고 하네요.”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내일 사 오겠소. 산파와 유모는 형수님에게
다음 날, 전북망은 직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는 바람에 심고환을 사지 못한 탓에 민소진에게 다음 날 약왕당에서 심고환 여덟 알을 사 오고 유모와 산파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다해이 민소진이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시어머니를 위한 단설환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비록 예전엔 몸이 불편해 가사를 돌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장군부가 얼마나 큰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약을 사러 가기 전날 장부에 들러 은자를 찾으려 했을 때, 장부에는 은자 열 냥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군부 전체에 고작 은자 열 냥만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최소한 이삼백 냥 정도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둘째네는 아직 분가 전이기에 대부분의 돈도 공금으로 바쳤다. 그녀의 서방과 시아버지, 그리고 전북망의 녹봉에 하사받은 황금 백 냥까지 포함하면 아무리 적어도 2,300냥은 남았을 텐데 왜 열 냥밖에 남지 않은 거지?장부를 확인했더니 시누이가 혼수품에 사용한 은자도 상당했고 이방의 인출과 왕청여의 월간 지출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약값과 하인들에게 들어가는 돈까지 어느 하나 적은 것이 없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연자육을 한 근이나 먹었고, 다른 보약들도 꾸준히 챙겼다. 민소진은 그런 왕청여의 소비가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집에 이미 보약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북망이 부상을 당했을 때 많은 이들이 보약을 보내왔고 왕청여의 친정에서도 여러 번 보약을 보내왔었다. 집에 있는 보약을 먹으면 되는데 왜 굳이 외부에서 따로 사야 하는 건지, 민소진은 답답한 마음에 문희거로 찾아가 왕청여에게 물었다. 민소진은 워낙 성품이 온화해 그저 궁금해서 찾아간 것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었는데, 왕청여는 그녀가 임신 중인 자기의 소비를 문제 삼는다고 오해해 크게 화를 냈다. 심지어 가위까지 들고 와 민소진에게 뱃속의 아이를 찔러서 없애라며 그러
시녀와 함께 약왕당에 도착한 그녀는 심고환의 가격을 물었는데 심고환의 가격은 하나에 무려 다섯 냥이나 했다. 근데 전북망이 민소진에게 심고환 여덟 알을 사 오라고 했으니.. 민소진은 추운 날씨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눈물을 머금은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민소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약왕당의 약부가 다가와 말했다. “부인, 이 심고환은 기혈이 부족한 산모에게 쓰는 것인데 단순히 기혈을 보하는 것이라면 그냥 약재를 사다 달여 드시면 됩니다. 게다가 이 약은 산모가 기운을 보태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한 알이라도 충분합니다. 여덟 명이 한꺼번에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민소진은 눈물을 닦으며 급히 물었다. "한 알이면 충분한가요? 정말인가요?""예,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불안하시면 두 알을 사셔도 좋습니다. 사실 이 약은 산모가 기운을 잃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니 산모가 힘이 없을 때 한 알이면 충분합니다. 만약 난산이나 출혈이 심하다면 이 약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참고하세요. 남은 한 알은 출산 후 반달 정도 지나서 복용하시면 좋습니다."민소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은자를 건넸다. "그럼 두 알로 살게요. 그리고 단설환도 두 알 주시지요."약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게를 달아 가격을 계산한 후, 엽전을 건네며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단설환은 다음 달부터 가격이 오를 예정입니다. 원재료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서요. 사실 노부인의 병은 전에 단 의원이 봐주셔서 많이 호전되었지요. 앞으로 두 해만 더 치료하시면 병이 다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약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민소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젠 단 백부님을 모셔 올 수도 없고 처방도 계속 똑같이 쓸 수는 없으니 단설환이 부담스러워지면 하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요."약부는 그녀에게 약을 전달하는 동시에 심고환의 복용법을 재삼 당부했다. “이 약은 꼭 네 시진 간격으로 복용하셔야 합니다.
민소진은 김순희의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휴서를 내려 쫓아내겠다니..?민소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돌아오지 못해? 아직 내 욕도 다 못 했는데 감히 가긴 어딜 가! 시어머니한테 장신구를 팔라고? 염치도 없는 년, 이 천한 것 같으니라고!"김순희는 민소진의 뒷모습에 대고 격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돌아오지 못해! 여봐라, 저년을 붙잡아라!” 민소진의 떨리는 몸은 마치 깨져버린 꽃병과도 같게 느껴져 아무도 감히 그녀를 붙잡지 못한 채 말로만 막을 뿐이였다. “부인, 멈추세요.” 하지만 민소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복도 끝에서 홍이의 부축을 받는 왕청여를 보았다. 민소진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순간 가위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던 왕청여의 이전 모습이 떠오른 탓에 온몸이 떨리며 겁이 났다.“형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두 알만 사셨다니요? 일여덟 알은 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청여가 불만을 토로했다. "은자가 없다는 말은 하지 마시지요! 어젯밤 그이하고 의논 끝에 이제 형님이 가계부를 맡으면 그이 녹봉의 3할을 공금으로 낼 생각입니다. 남은 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고요."“3할이요?” 정신을 차린 민소진은 그제야 얼굴이 화끈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볼을 감쌌다. “3할이요? 왜 3할인가요? 모두가 그대로 바치는데… 단 3할로 어떻게 가게를 꾸린단 말입니까?” “안 될 건 뭐가 있습니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예전에는 우리 그이 녹봉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어도 잘 지내왔던 거 아닙니까?”“그러니까.” 민소진은 침을 삼키고 계속 말했다. “앞으로 3할을 바치고 의식주는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왕청여는 싸늘하게 웃었다. “형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럴 거면 제가 3할은 왜 내겠습니까?” 민소진은 머리가 새하얘져 귀가 윙윙거렸지만 그래도 이성을
이제는 정말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사라져 버렸다. 지친 나날들, 숨이 막힐 듯한 시어머니와 동서, 그리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남자들, 거기에 길상거에 틀어박혀 있다가 가끔 나와서 물건을 빼앗아 가는 악녀 이방까지. 이 집은 더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마치 새장과도 같았다.그녀는 노부인의 방으로 끌려가 침대 옆에 억지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망연히 고개를 들어 시아버지와 전북망을 보았는데, 두 사람의 표정에는 그녀를 탓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다시 남편인 전북경을 보자 그의 눈에도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따귀를 한 대 때리고는 김순희에게 사과했다.“어머니, 부디 화를 푸십시오. 제가 이미 훈계했으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아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그제야 김순희는 민소진을 용서했다. “됐다. 어차피 저 아이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손이 작고 궁상맞은 것도 어쩔 수 없지.”민소진은 뺨의 통증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컸지만 결국 무뎌지는 자신을 느꼈다.다음 날 새벽, 장을 보러 가는 하인이 일어나 고기를 사러 나가려는데 열린 뒷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아니, 대체 누가 뒷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야? 이렇게 덤벙대서야. 뭐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하인은 투덜거리며 외투를 여미고 뒷문을 닫더니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렸다.“날이 점점 더 추워지네. 올해 겨울옷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지?”그는 낡은 뜰로 나가 수레를 밀고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민소진이 보이지 않았지만 전북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일찍 일어나 어머니의 방으로 가곤 했으니 말이다.어젯밤 한바탕 훈계했으니 더 부지런히 행동할 것이라 여겨 마음 한편이 편해진 것 이다.그러면서 자기는 둘째와 다르게 아내에게 휘둘리기는커녕, 아내를 손안에 꽉 잡고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곧이어 남자들은 각자 관청이나 당직을 위해 떠났고, 얼마지나지 않아 김순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아침상은
그 말에 손마마는 민소진이 여기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바로 돌아가서 보고했다. 김순희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어제 일 때문에 마음이 언짢아서 그런 거겠지. 어미가 정말 버릇없이 키운 것 같구나. 그리고 그년이 어디 갈 수나 있겠어? 친정은 이제 진성에 없고 아버지는 타지에서 작은 관리로 지내며 진성엔 돌아오지 않아. 돌아온다고 해도 계모가 있으니, 그런 와중에 감히 소란이라도 피우겠어?”손마마는 조금 걱정스러워하며 말했다. “그럼... 사람을 보내서 찾아볼까요? 한 번도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나간 적이 없으셨는데...”그러자 김순희는 더욱 분노가 가득 찬 말투로 말했다.“그년이 어디가 잘났다고 찾는다는 게야? 찾으면 자기가 아주 잘난 줄 알아. 잘못한 건 그년이야. 집안일도 제대로 못 하고 심지어 나에게 장신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라고 하다니. 허나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간 거지?”손마마는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민씨를 위해 용기내서 한마디 했다.“부인은 정말 열심히 하셨습니다. 불평 없이 매일 노부인을 돌보며, 아이들까지 챙겼습니다…”“나를 돌보는 건 그년의 본분이야. 게다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 또한 그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리고 내가 어디 그년에게 야박하게 군적이 있었느냐? 장군부에 시집와서 그년이 어디 고생이라도 했느냐? 심지어 예전에 몸이 아프다고 해서 일도 하지 않았을 때 난 눈도 감아줬단 말이다! 오늘 밤 북경이가 돌아오면 다시 한번 제대로 혼쭐을 내줄 거다.” “우선… 기다려 봅시다.” 손마마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지만 김순희는 여전히 확신에 찬 말투로 자신의 화를 풀 뿐이였다. “반드시 돌아올 거야. 휴서를 내려 내쫓겠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너도 보지 않았느냐?!” 김순희는 어떤 사람은 날개를 숨긴 채 평소에는 순종적이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날아가 버린다고 생각한다. 바로 송석석처럼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날개가 잘린 산닭 같다고 생각했다. 바
이전엔 황제가 사온의 역모사건을 중시했기 때문에 송석석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송석석이 바쁜 사건을 끝낸 후 처음으로 조정에 나가는 날이라 진복이 황실에 왔을 땐 송석석과 사여묵이 진작에 황궁으로 떠나고 저택에 있지 않았다. 진복은 아가씨를 만날 수 없게 되자 그 사실을 염 선생에게 알렸다. 염 선생은 장군부의 일이니 무시하지 않고 먼저 진복을 안으로 들여 차를 대접했다. 먼저양마마와 이야기를 나누게 한 후 시만자를 불러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왕비가 시만자 아가씨에게 전북망이 연왕과 계속 왕래하는지 주시하라고 부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만자 아가씨께서 장군부의 일을 조금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만자는 하품을 하며 대충 말했다. “나도 모릅니다. 장군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몰래 연왕의 행방을 주시하라고 했습니다만. 그가 누구와 접촉했는지는 알고 있지만 장군부의 일은 정말 모릅니다.” 그러자 염 선생이 말했다. “거 참 이상한 일이군요.” “장군부의 일을 왜 상관하십니까?” 시만자는 사실 이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민 씨에게 적의는 없었지만 호감도 없었다. “장군부의 일은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민 씨가 국공부의 앞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갔다는데 만약 그녀에게 일이 생기면 괜히 국공부도 영향을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시만자는 졸려서 여전히 연신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귀찮은 듯 싶었다. “그럼 내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론 민 씨가 장군부에서 노부인의 천대를 많이 받고 있는 데다 이방과 왕청여 때문에 억울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네.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염 선생은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국공부 앞에는 왜 앉아있었던 거지? 평상시에 왕비와 왕래도 없었는데 말이야..’ 장군부와 왕비가 물불 같은 사이는 아니였는데,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홍작이 말했다. “사부님이 전 씨 가문의 노부인을 치료하러 가기 싫어하지만 단설환을 복용하고 계시기 때문에 민 씨가 약을 사러 올 때마다 직원에게 분부해서 사정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민 씨가 직원과 친해지며 억울함이나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는데 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더랍니다. 예전에 그녀는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자기가 처리해야 하고, 노부인까지 보살펴야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장부는 왕청여가 관리하고 있어 돈도 마음대로 지출할 수 없어 때론 자신의 물건을 팔아가며 약을 산다 더군요. 아무튼 여러모로 억눌려서 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양마마의 방에 들어가자 진복이 아직 있었다. 두 사람은 옛이야기를 나누었고 보주는 옆에 함께 앉았다. 양마마는 안색이 좋지 않은 데다 그들이 민 씨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자 답답한듯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너무 연약한 게 문제입니다. 친정이 실력이 없는 데다 아버지가 밖에서 작은 벼슬을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듣기 좋게 말해서 벼슬을 맡고 있지 사실은 폄적된 것이었습니다. 장군부가 엉망진창이어도 친정에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봐서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겠지요. 아버지는 친아버지이지만 어머니가 계모이니 아버지도 도와주는 게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억울함에 습관 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양마마가 말했다. “억울함에 습관이 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억울함을 가만히 냅두다가는 언젠가는 폭발해버릴 것입니다. 장군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장군부에서 버틸 수 없다면 친정에도 기댈 수 없으니 죽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을 것입니다.” 양마마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애초에 그녀가 아가씨께 단설환을 사가지 않으면 노부인에게 쫓겨날 것이라며 빌 때 아가씨께서도 그 처지가 딱해서 약왕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라고 한 것입니다.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는 며느리로 소문이 난다면 장군
사여령은 한참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먹만 꼭 쥐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사여령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대리사 감옥 관리자가 되고 나서 사여령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천 수백 번을 생각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나중에 진소경이 사여령의 고민을 눈치채고 사여령에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에 닥친 일만 잘 해내면 된다고 방법을 제시했기에 사여령은 그 뒤로부터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여태까지 답을 얻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사여묵의 물음에 넋을 잃은 채 앉아있던 사여령은 위엄이 넘치는 사여묵 눈빛에 머릿속이 하얘졌다.덜컥 겁이 난 사여령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노주에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지는 모릅니다.”“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사여묵이 물었고 사여령은 노주에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 뒤 오히려 마음이 많이 진정되었다.선택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사여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주의 왕부에 서재가 두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 평소에 2층에서 책을 보는데 가끔 하루 종일 2층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바로 아래층에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서재가 너무 큰 탓에 정확하게는 듣지 못했습니다. 노주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왔고 노주 외에도 옹현, 간현, 부현 그리고 나현 등 지역도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지역도 있는데 지역명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식량을 노주에 가져가야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사여묵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왕이 여러 지역에서 병사를 키우고 있다고? 그럼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거지? 병사를 키운다는 게 점포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식량과 무기 공급은 문제가 없는 건가?’사여묵이 사전에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연왕에게는 그럴 만한 세력과 재력이 없었다.옹현과 간현은 그럴 가능성
북명왕 저택에는 호위병 외에 따로 비밀 호위무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밖에서 정보를 캐내는 무술 실력이 강한 부하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다들 매우 바빴기에 거의 한 달에 한번 저택으로 돌아와 얻은 정보를 보고하곤 했다.물론 정탐조도 있지만 이들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자들이기에 사적인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비밀 호위무사를 두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에 파견되기 전에 이미 큰 전공을 세웠고 현갑군도 거느리고 있었기에 선황제는 사여묵이 저택에 너무 많은 부병을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두 번째 이유는 사여묵이 남강 전쟁에 투입되고 나서 이런 부분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왔을 땐 황제의 의심과 경계 때문에 더더욱 비밀 호위무사를 키울 수 없었다.지금 만약 황제가 대외적으로 사여묵을 노주로 정찰을 보낸다고 발표한다면 현갑군에서 병사들을 보낼 수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는 것이기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갈 수 있었다.“제가 같이 갈까요?”송석석의 물음에 사여묵은 피식 웃으며 송석석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괜찮소. 위험한 건 아니오. 그저 정보만 수집하는 일이라 몸을 쓸 일은 없소. 몸을 써야 한다면 우리 몇 명만 가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 연말이라 경위부도 사건 사고가 많을 테니 이곳을 지키는 게 좋겠소.”사여묵이 말한 것처럼 연말에 경위부와 순방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이 많았기에 송석석이 간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하지만 몇 명만 보내기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음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심청화는 10일 뒤면 서원도 수업이 끝나니 며칠 앞당겨서 사여묵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했다.심청화가 함께 간다고 하니 송석석은 훨씬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이 일은 국태 부인과 상의를 해야 한다.심청화가 국태 부인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다들 동의했으며 출발까지 아직 3일이나 남았으니 서원 시험만 보면 된다고 했다.심청화는 당연히 진짜 행방을 얘기
시만자는 현재 사부 외에도 석소 사저 등 몇 명과 함께 팀을 이루어 여성들에게 변태 짓을 저지르는 범인들을 잡으러 다녔다.처음에는 이 일이 매우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범인을 잡아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할 때까지 때려서 관청으로 보낸 뒤, 범인들은 자신들이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말을 바꿨다.석소 사저는 몰래 피해자 여성들을 찾아가 봤지만 다들 부인하기 바빴다. 심지어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고 버럭 화를 내면서 석소 사저를 쫓아내기까지 했다.증거가 없는 탓에 범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시만자는 풀려난 범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이제 소속이 없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왕야는 공문 소속이고 송석석도 현갑군을 관리하고 있기에 시만자는 살인자가 될 수는 없었다.그렇게 밤낮없이 범인을 잡느라 갖은 고생은 다 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한 명도 감옥에 가두지 못했다.송석석은 화가 잔뜩 난 시만자를 위로했다.“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어쨌든 확실하게 팼으니까 범인들도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서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패는 걸로 분이 안 풀려. 그 놈들이 전부 관청에 끌려가서 벌받았으면 좋겠어.”시만자가 턱을 괸 채 한숨을 푹 내쉬자, 송석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들에게 당한 여인들은 쉽게 나서지 못할 거야. 되레 그 사실을 꽁꽁 숨기려고 하겠지.”“그럼 저 나쁜 놈들이 저렇게 밖에 돌아다니게 내버려둬?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다음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관청으로 끌고 갈 필요도 없어. 일단 죽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패는 거야. 손이나 발을 잘라버려. 아니면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도 좋고.”시만자는 송석석의 말에 착잡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좋은 방법이네.”“근데 조사는 확실하게 한 거야?”시만자가 가슴을 퍽퍽 치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확실하게 조사했으니깐. 절대 죄 없는 사람은 잡지 않아. 하지만 피해자들
며칠 뒤, 숙청제는 장춘궁에 나타났고 제황후는 붉어진 눈시울로 제자예가 퇴학 당한 일을 꺼냈다.한편, 이미 제씨 가문에게 이 일에 대해 주의를 주었는데 제황후가 다시 언급하자 숙청제는 속으로 살짝 언짢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치를 보던 제황후는 화가 난 듯한 황제의 표정에 이내 화제를 돌렸고 요즘 명문 가문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송석석의 인품을 칭찬하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제황후를 쳐다보며 말했다.“듣고 있으니 짐은 궁금하기도 하오. 왜 세가의 부인들은 황후가 아닌 송석석을 칭찬하는 걸까? 황후는 한 나라의 국모로써 짐에게 시집오기 전에는 진성에 소문이 자자한 천재 소녀였소. 그럼 황후야말로 백성들의 모범이고 찬송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겠소?”제황후는 황제의 말이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헷갈렸다. 웬지 요즘 따라 점점 황제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제황후는 황제에게 차 한 잔을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현재 북명 왕비의 위신이 매우 높습니다. 여학과 소진 소주방도 점점 잘 되고 있고 예전에 왕비에게 손가락질을 했던 사람들도 다들 칭찬하기 바쁩니다. 뿐만 아니라 북명왕도 황제 폐하의 큰 신임과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제가 보기엔 마냥 좋은 일은 아닌 듯합니다.”숙청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제황후는 황제의 반응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황제는 북명왕 부부에게 거리낌을 느끼고 있었다. 북명왕 부부는 너무 많은 찬송과 영예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부부에게 신뢰가 깊었기에 황제는 견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편, 송석석은 민소와 홍현 등 여인에게 교대로 여학을 지키라고 했다.예전의 제씨 가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제씨 가문 부인들은 각자 꿍꿍이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예가 학교에서 쫓겨난 일로 황후는 매우 화가 나 있을 것이다.특히 넷째 부인은 막무가내로 미쳐서 날뛸 때가 많았기에 언제든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한다.한동안 시만자와 두 사
조금 뒤, 저택으로 돌아간 제 상서는 넷째 부인을 불러 크게 호통을 치자, 그녀가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저희도 그저 마마의 뜻에 따랐을 뿐이에요. 광릉후의 셋째 도련님께 혼사를 제안하려고 했지만 마마께서 우리 가문에 무장의 힘이 없다고 하셨거든요.”넷째 부인은 제황후가 혼사를 허락하려고 했지만 태후에게 제지 당한 일을 얘기했다.“방씨 가문도 참 어이가 없네요. 우리 제씨 가문의 귀한 딸을 대체 뭐가 싫다고 거절한 거예요? 방씨 가문은 지금 우리 제씨 가문을 만만하게 여기고 있는 거라고요!”“방씨 가문에서 왜 우리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돼? 그럼 우리가 방씨 가문을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어?”제 상서가 버럭 화를 내며 되물었다. 이게 바로 문제점이다. 언젠가부터 제씨 가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제씨 가문의 체면을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제 상서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제씨 가문은 어느새 사람들 눈에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말문이 턱 막힌 넷째 부인이 한참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저희는 제씨 가문이잖아요.”이 일을 계기로 제 상서는 제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말과 행실을 조심하라고 했으며 절대 자만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고 괜히 잘난 척하지도 말라고 경고했다.그러다가 반역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제 상서의 말에 가문 사람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제 상서는 그래도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대황자가 멍청한 짓이나 악한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 제 상서는 괜히 대황자를 위해 모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어차피 대황자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 받은 자로 태자의 자리는 결국 대황자의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황자의 녹록함은 점점 더 눈에 띄게 드러났고 심지어 녹록할 뿐만 아니라 성격과 품행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황제도 분명 이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니 지금 이 상황에서 뭔가 모략하는 건 황제의 의심을 더욱 크게 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다행히 대황자는 아직
그러자 제 상서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인지하게 되었다.아군 여학의 학생들 일을 조정에서 얘기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제 상서는 그렇게 대신들이 전부 물러갈 때까지 멍하니 서있다가 숙청제의 부름에 궁에 남게 되었다.숙청제는 제 상서를 어서방으로 불렀지만, 계속 안으로 들어오라는 얘기도 안하고 밖에 세워 두기만 했다. 그렇게 칼바람이 부는 날씨에 제 상서는 두 시간이나 서있었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에게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온몸을 덜덜 떨면서 서있던 제 상서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어찌됐든 제 상서는 황제의 장인 어른인데 아무리 잘못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장인 어른을 이렇게 추위에 방치하는 건 너무했다.두 시간이 지나자 제 상서의 몸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오 대반이 제 상서에게 작은 손 난로 하나를 쥐여 주었다.한편, 오월은 빠른 걸음으로 어서방에 들어갔다가 조금 뒤, 밖으로 나와 제 상서에게 다가갔다.“제 상서, 왜 이곳에 이러고 계신가요?”제 상서가 이를 악문 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황제 폐하께서 저를 안으로 불러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제 상서의 말에 오월이 입을 떡 벌리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폐하께서 조금 전에 저를 불러 제 상서를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어서방으로 불렀는데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하셨는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폐하께서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제 상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굳어버린 두 다리를 힘겹게 옮기며 어서방으로 향했다.평소와 같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고 자리에 앉으라는 허락도 받았지만 제 상서는 황제가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제 상서를 두 시간 동안 밖에 세워둔 것도 그에게 확실하게 주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방 안은 따듯했고 제 상서도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 오 대반이 따듯한 차 한 잔과 함께 조사 보고서를 제 상서에게 건넸다.의아
송석석은 최씨와 함께 돌아갔다. 송석석은 자신이 타고 온 말을 하인에게 끌게 한 뒤 최씨와 함께 최씨의 마차에 타고 있었다.송석석은 최씨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오사형께서 안 좋은 걸로 골라서 또 몇 개 팔았고, 판 돈은 전부 왕경루 지하에 넣어뒀어요.”최씨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희 평서백부가 그분께 빚진 겁니다. 그 돈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편하게 쓰라고 전해주세요. 제가 따로 모아둔 돈도 조금 있습니다.”“오사형은 그 돈을 쓰지 않을 겁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니깐요.”잠시 침묵하던 송석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께서 고청우 신분을 조사하셨습니다. 고청우가 노주에 계신 한 부인을 양모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시씨는 강남 시씨 가문의 방계의 성씨를 따른 것 같습니다. 그 가문도 노주에서 장사를 하는 집안입니다. 전에 부인께서 고청우가 누군가와 비밀리에 왕래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상대방은 아무래도 시씨 가문 사람인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그 사람에게 손을 쓰면 좋은데 아직 움직임은 없으십니다. 그럼 평서백께서 깊이 연루될 가능성이 큽니다.”송석석은 중요한 정보까진 최씨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노주에서 사병을 엄하게 조사할 거라는 등등… 이런 말들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 정도 정보를 얘기한 것도 최씨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배려였다. 왕표가 지금이라도 멈추면 그저 작위만 잃을 뿐, 평서백부는 어떻게든 발을 뺄 수 있을 것이기에 처참한 최후는 면할 수 있었다.이 모든 것이 비록 평서백 부인이 왕표를 말릴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정되지만 최씨 부인은 그저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최씨는 최선을 다했지만 왕표가 그녀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고 있다.그 사실을 눈치챈 송석석은 최씨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고는 도중에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이 있다.예를 들
최씨와 딸 왕지아는 마당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당에는 나무와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지만 그리 무성하게 자라지 못했으며 특히 올해 겨울엔 더더욱 일찍 시들었다.“지아야, 너 왜 고모부… 방시원 장군님 편을 든 거야?”최씨는 손수건으로 왕지아의 상처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물었으며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고 싶었다.평서백부에 이런저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얘기해주지 않았으며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밖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너무 많았기에 아이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왕지아는 벌겋게 부은 얼굴을 살짝 들었다. 분명 맑고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지만 나이와 맞지 않는 성숙한 눈빛이 보였다.“엄마, 예전에 고모부가 고모와 함께 우리 집안에 처음 왔을 때 나에게 뭘 선물했는지 기억하세요?”왕지아의 말에 최씨가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엄마 기억으론 장군을 보필하는 마마가 너와 현이에게 금덩이 하나와 금열쇠 하나씩 선물했던 것 같은데?”왕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국태 부인의 산하지를 저에게 선물해 주셨어요. 그때 당시 고모부가 저에게 해준 말이 있었거든요. 지금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기 어렵다고 했어요. 다른 지역으로 시집을 가지 않는 이상, 집 밖으로 나간다는 건 쉽지 않지만 넓은 바깥 세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라고 했어요. 우리 상국의 아름다운 풍경들도 보고 바깥 하늘이 얼마나 푸르고 높은지도 보아야 시야가 넓어지고 쓸데없는 일에 고집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힘들게 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죠.”최씨는 딸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때 당시 방시원을 처음 봤을 때 최씨도 돈만 밝히는 사람이어서, 상대방이 무슨 선물을 들고 왔는지부터 따지기 바빴다.“고모부는 고모와 혼인을 하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 집안에 찾아와서 따지거나 고모를 힘들게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엄마, 고모
제자예는 넷째 부인의 손을 뿌리치곤 최씨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절대 사과 안 할 거예요! 저를 뭐 어떡하실 건데요? 그렇게 억울하면 저도 한 대 치세요!”최씨를 향해 얼굴을 들이민 제자예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세상 서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최씨는 그런 제자예를 보며 그저 어이없다는 듯이 차갑게 피식 웃었다.“그렇다면 지금 당장 제 제사한테 찾아가서 물어봐야겠네. 따님 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버릇이 없는 건지, 참.”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말했다.“훈장님, 그때 제 증인이 되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제 제사를 만난다면 전 당연히 솔직하게 얘기드릴 겁니다.”송석석의 대답에 제씨 넷째 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졌으며 이 일이 어르신에게 알려지면 넷째 부인은 크게 혼이 날 것이다.절대 어르신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넷째 부인은 이를 악문 채 제자예에게 말했다.“얼른 왕지아에게 사과해.”제자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엄마, 전 사과할 수 없어요. 쟤들이 날 괴롭혔고 날 서원에서 쫓아내려고 했어요.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쟤들이에요.”넷째 부인은 최씨와 송석석을 힐끗 흘겨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했다.“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야.”제자예는 자신이 며칠동안 서러운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어머니마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더욱 서럽고 슬펐다.“싫어요. 절대 사과 못 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세요! 전 절대 굴하지 않을 거예요!”말을 하던 제자예는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이내 송석석에게 잡혀 다시 최씨 곁으로 돌아왔다. 송석석이 최씨를 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저희 아군 서원에서 벌어졌으니 서원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자예 학생이 왕지아 학생의 얼굴에 상처를 냈으니 관아로 보내는 건 어떠세요? 관아의 처리에 따라 저희 아군 서원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은 반드시 책임지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