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제의 얼굴에 기쁨도 분노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대반은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회왕비가 그럴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렇게 많은 장신구로 궁녀를 매수할 능력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스스로를 챙기기 바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이 일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 아우가 이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궁에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를 발견했지만, 조사하지 않고 궁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은 너무 많은 문제에 휘말리기 싫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나 사람을 돌려보냈음에도 아무런 실마리도 얻지 못하였으니 숙청제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청제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태의를 불러 목숨을 붙들어 두도록 하고 끝까지 심문하거라.”이 사건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거대한 함정을 파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느낌이었다.“예!” 오대반은 명을 받고 물러났다.그렇게 다시 반나절 동안 심문이 이어지고 오대반이 마침내 다시 보고하러 왔다. “전하, 그녀가 한 사람을 자백했사옵니다. 바로 장공주가 그녀에게 지시했다고 하였사옵니다. 회왕비를 지목한 이유는 장공주가 그녀의 가족을 해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죽었느냐?” 숙청제가 대뜸 물었다.“태의께서 가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자리를 뜰 때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으니,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숙청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외부에 알리지 말고, 심문했던 자들의 입을 막아라. 내일 아우를 궁으로 부를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지도 오래되었구나. 그리고 송지안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아라. 지금쯤이면 진전이 있을 것이다.”오대반은 밖으로 나가 지시를 내린 후, 다시 궁으로 돌아와 시중을 들었다. 차를 따르던 오대반은 생각에 잠긴 숙청제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물
고개를 숙인 오대반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는 공손히 대답했다. “저도 들었사오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북명왕께서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남강 전장으로 가셨고, 남강을 수복하여 전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이는 분명 공이옵니다. 황제께서도 공을 칭송하시고 천하에 알리셨으니, 제 생각으로는 북명왕께서 신하로서 공을 세우신 것은 분명하나, 공업이 기록될 때에는 전하를 먼저 기리고, 주로 삼아야 마땅하다 생각하옵니다.”숙청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이제 내 눈치를 보는구나. 오대반, 나는 그리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공이 높아 군주를 위협한다는 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전신묘를 세우겠다는 말이 남강을 수복하고 돌아왔을 때가 아닌 왜 지금에서야 그 얘기가 나왔느냐는 것이다. 그때가 백성들이 가장 격동되었을 때가 아니었느냐?”잔을 들어 올린 숙청제는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여러 현사들이 그를 칭송한 바 있었다. 그런데 또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혹시 같은 자들이 아닌지 묻는 것이다.”오대반은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전신묘를 세우자는 제안은 남강을 수복한 직후 나왔어야 했을 터인데 흥분이 가라앉아 일상에 집중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리도 소란스러우니 저도 당황한 것뿐입니다.”숙청제는 붓을 들고 상소문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오대반은 숙청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사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 마음이 불편해져 누가 먼저 이런 소동을 일으켰는지, 북명왕부와 관련은 없는 것인지 알아보게 하였다.조사 결과, 왕부는 이 일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 칭송하는 글을 보게 된 북명왕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남강을 수복하는 것은 선황제께서 뜻을 세우셨고, 황제께서 계획을 세우셨
그들이 태후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온 것을 알고 있었던 장공주는 내심 분노하면서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교류가 있었기에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었다. 특히 황형이 방금 진성으로 돌아온 시점에서 그들을 거절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다가올 10월 15일에 있을 송석석의 계획에도 그들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장공주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들을 모두 초대했다.안태부 부인이 손녀 안여옥과 함께 가장 먼저 도착했다. 장공주는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며 태후가 재물을 내려주신 덕에 후궁의 빈비들까지도 자비의 마음으로 많은 부인들이 참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에 태부 부인은 문제 될 것 없다며 선한 마음이지 않냐고 개의치 않았다.태부 부인은 오랜 세월 불교를 믿으며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고 가끔 목 승상 부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으나,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사는 매년 한 번씩 열리는 한의절뿐이었다. 그녀는 돌아가신 영혼을 초도하기 위해서였고 고승들에게 불법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원래 안여옥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안여옥이 스스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손녀가 불교에 믿음이 없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착한 심성에 항상 타인의 신앙을 존중했기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오늘은 밤새워 경을 읽어야 할 예정이었다.정청 밖에는 이미 향단이 차려졌고, 경을 읊는 단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연 대사께서는 오셨는지요?”태부 부인이 물었다. “이미 도착하였습니다. 지금은 진지를 드시고 있고 밤이 되어야 시작할 것입니다. 먼 길을 오신 탓에 쉬도록 했습니다.”“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경문을 베끼기로 합시다. 이미 많이 베꼈지만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장공주는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려 했으나 승상 부인의 마차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태부 부인이 문방사우를 준비해 놓았으니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다. 승상 부인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태부인과 육태부인도 도착했다. 그들 역시 각각 자손들을 데려왔다. 이태부
장공주가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고 김도연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시민주를 잘 감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김도연 또한 불쾌했다. 하지만 측비 신분이라 시민주가 사람들을 붙잡고 인사를 나눌 때 직접 개입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오기 전 그녀도 미리 경고했었다. 오늘 밤은 엄숙하게 보내야 하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말해두었다. 침묵 속에서 경문을 베끼고 경을 읊어 자비심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 했거늘 시민주는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나누며, 마치 연회에 참석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 탓에 몇몇 태부인들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김도연은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왕비님, 우리 함께 경문을 베낍시다.” 그녀는 ‘지장보살본원경’과 ‘태상구고’을 챙겼다. 그녀는 궁에서 병자를 돌보며 몇 차례 베낀 적이 있었다. 시민주는 마지못해 방석에 앉아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경문은 난해하고, 글자는 쓰기 어려웠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손목이 아파왔다. 하여 붓을 내려놓으려 했으나, 장공주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와 어쩔 수 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시민주가 있는 한, 장공주는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부인들이 도착하고 있었고 특별히 대접할 필요는 없었지만 손을 모아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해야 했다. 경단 밖에는 이미 제물을 공양하는 상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최고의 단향과 촛불이 준비되었다. 비용은 장공주가 혼자 부담하는 것이 아니었고,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부담할 예정이었다.고승들은 이미 식사를 마쳤다. 지원 스님을 필두로 7명의 명망 있는 스님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스님들을 맞이했다. 태부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올해도 지원 대사와 여러 고승들을 뵐 수 있어 기쁩니다.” 가사를 걸친 지원 스님도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그는 이미 여든을 넘었으나, 육십 정도로 보였고 길고 흰 눈썹과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부인의 건강이야말로 기쁨이지요.
오늘 밤 장공주부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그들은 오히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객이 출동했으니, 지하감옥은 반드시 침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공주부의 법회로 인해 많은 고승들이 모였고, 순방영과 경위도 그곳을 중점으로 순찰할 것이기에 자객이 나타나면 염 선생이 준비한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며 그들을 유인할 것이다. 자객은 장공주부의 구조를 알고 있었고, 지하감옥의 입구도 알고 있기에 그곳으로 유인할 계획이었다.송석석은 이 모든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태후께서 물품을 내려 장공주를 지원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태후는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태후께서도 이러신 적이 없었으니, 황제께서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정심이 궁에 돌려보내져 심문을 받았으니, 그 과정에서 장공주의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황제께서도 오늘 밤의 법회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일 뿐 아닌가?모든 분석을 마친 송석석이 염 선생에게 물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장공주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유인하려는 것이냐? 필경 사이가 돈독하지 않다면 초대도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그러자 염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는 오히려 오늘 밤 장공주부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왕비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황제의 목적은 장공주부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그 말에 깜짝 놀란 시만자가 물었다.“우리의 계획을 황제께서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확실하진 않습니다.” 염 선생은 시만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의심이 많고,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 왕부에 누군가를 심어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 차례 조사했지만 깊이 잠입한 생태라면 거듭 조사한들 무용지물일 것입니다.”송석석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이 일을 아는 자는 우리들뿐이었
술시 무렵, 자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든 자객들이 한 줄로 나란히 야행복을 입고, 조용히 장공주부에 침입하였다. 그때 공주부의 정원에서는 고승들이 경을 읊고 있었고, 부인들은 베낀 불경들을 모두 태웠고 일부는 계속해서 경을 베끼고 일부는 외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객이다!" 비명소리는 밤하늘을 가르며 장공주의 심장을 내리 찔렀다. 정원에 있었던 장공주는 자객을 보지 못했기에 중원과 후원으로 침입한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곧바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안여옥이 급히 장공주를 붙잡으며 말했다. “장공주님, 자객이 있습니다. 밖은 위험합니다.” “놔라.” 장공주는 매서운 표정으로 안여옥의 손을 뿌리쳤다. 그 표정에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놀랐다.정원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으나, 고승들과 몇몇 태부인들만이 침착했다. 지원 스님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자객은 사위와 병사들이 상대할 것이니, 장공주께서는 위험을 무릅쓰지 마시고 계속 경을 읊으시오.” 장공주는 경단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지원 스님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모은 그는 자비롭고 경건한 모습이었으나, 눈빛에는 뭔가 번뜩였다.경호병들이 후원으로 급히 달려가는 발소리를 들은 장공주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몸이 떨렸다. 송석석은 15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밤 움직인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속였고, 정심을 속였다. 이 자객들은 송석석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지하 감옥에 갇힌 고청란의 어머니를 구하러 온 것인가? 지하 감옥! 불길함을 느낀 장공주는 주변의 만류는 뒤로하고 서둘러 서원으로 뛰어갔다. 자객들은 이미 경호병들과 격돌 중이었다. 도준은 부병의 일부를 고승들과 부인들을 보호하는 데 배치해, 그들이 공주부에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했다. "자객이라니! 너무 무섭구나! 얼른 도망쳐야 하지 않느냐?" 잔뜩 겁에 질린 시민주가 계속해서 김도연에게 묻자, 경
전북망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과 고승들이 모여 있었기에, 만약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하여 급히 지원 스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사님, 일단 안으로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객들을 잡고 난 뒤 다시 경을 이어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원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임무를 수행하시지요. 경단은 열렸으니, 경을 다 읊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북망은 다급해졌다.“자객들이 침입했습니다. 위험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지원 스님은 두 손을 합장하며 조용히 말했다. “자객은 제가 목표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것 또한 제 운명입니다.” 스님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전북망은 남겨진 경호병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스님과 부인들을 보호하여라.” 말을 마친 전북망은 검을 들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원에 도착한 장공주 30여 명의 경호병들과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는 지하 감옥의 네 개 입구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장공주는 송석석이 고청란의 어머니를 구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를 구한다 해도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기에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서원만큼은 결코 뚫려서는 안 되었다. 필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서원에 도착했을 때, 자객이 보이지 않자 급히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 “장공주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 피하십시오. 자객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필명을 본 장공주는 차가운 눈빛을 쏘며 말했다.“필요 없다! 당장 나가거라. 공주부의 병사들로도 충분하니 너희들이 끼어들 필요 없다.” “자객들은 무공이 뛰어나 공주부의 병사들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장공주는 급기야 분노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내 병사들이 어찌 몇 명의 자객을 당해내지 못하겠느냐? 당장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 너희들을 공주부에 무단 침입한 죄로 고발하겠다!
감옥 바닥에는 묶여 있는 화살 더미와 노기, 그리고 한 줄로 늘어선 칼, 검, 활들이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커다란 통들이 쌓여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통들은 밀봉되어 있었고 위에 여러 겹으로 덮여 있었지만 화약 냄새는 여전히 새어 나왔다. 그 통들이 있는 곳에는 등불이 없었고, 지하 감옥의 입구 쪽에만 등불이 있었다. 사여묵이 뒤를 돌아보자, 경호병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감옥 안의 상황을 본 그들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자객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까먹은 듯했다. 검을 휘둘러 몇 명을 쓰러뜨린 사여묵은 전북망이 경위병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전북망은 아직 이곳을 둘러볼 새도 없이 자객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사여묵은 그와 몇 차례 칼을 맞대었고, 어두운 불빛 아래 전북망은 그의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 순간, 전북망은 잠시 멈칫했다. 사여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몸을 날려 계단을 세 걸음에 뛰어올라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전북망은 지하 감옥에 가득한 무기와 장비들을 보고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던 그가 경위병들에게 외쳤다.“당장 필명 대감에게 보고하라!” 전북망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으며 덧붙였다.“그리고 순방영의 총령 육 대감도 불러오거라! 빨리 움직여라!” 바로 그때, 지하 감옥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장공주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내려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필명을 찾아가려는 경위병들에게 겨누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 경위병들은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자 그녀는 부병들에게 명령했다. “이들을 모두 죽여라.” 경위병들과 전북망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뿐이었지만 부병들은 약 30명 가까이 있었다. 부병들이 사여묵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지만, 전북망과 네 명의 경위병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부병들이 검을 들고 다섯 명을 향해 다가가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