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주가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고 김도연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시민주를 잘 감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김도연 또한 불쾌했다. 하지만 측비 신분이라 시민주가 사람들을 붙잡고 인사를 나눌 때 직접 개입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오기 전 그녀도 미리 경고했었다. 오늘 밤은 엄숙하게 보내야 하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말해두었다. 침묵 속에서 경문을 베끼고 경을 읊어 자비심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좋은 태도라 했거늘 시민주는 도착하자마자 인사를 나누며, 마치 연회에 참석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 탓에 몇몇 태부인들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김도연은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왕비님, 우리 함께 경문을 베낍시다.” 그녀는 ‘지장보살본원경’과 ‘태상구고’을 챙겼다. 그녀는 궁에서 병자를 돌보며 몇 차례 베낀 적이 있었다. 시민주는 마지못해 방석에 앉아 경문을 베끼기 시작했다. 경문은 난해하고, 글자는 쓰기 어려웠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손목이 아파왔다. 하여 붓을 내려놓으려 했으나, 장공주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와 어쩔 수 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시민주가 있는 한, 장공주는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부인들이 도착하고 있었고 특별히 대접할 필요는 없었지만 손을 모아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해야 했다. 경단 밖에는 이미 제물을 공양하는 상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최고의 단향과 촛불이 준비되었다. 비용은 장공주가 혼자 부담하는 것이 아니었고,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부담할 예정이었다.고승들은 이미 식사를 마쳤다. 지원 스님을 필두로 7명의 명망 있는 스님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스님들을 맞이했다. 태부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올해도 지원 대사와 여러 고승들을 뵐 수 있어 기쁩니다.” 가사를 걸친 지원 스님도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그는 이미 여든을 넘었으나, 육십 정도로 보였고 길고 흰 눈썹과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부인의 건강이야말로 기쁨이지요.
오늘 밤 장공주부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그들은 오히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객이 출동했으니, 지하감옥은 반드시 침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공주부의 법회로 인해 많은 고승들이 모였고, 순방영과 경위도 그곳을 중점으로 순찰할 것이기에 자객이 나타나면 염 선생이 준비한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며 그들을 유인할 것이다. 자객은 장공주부의 구조를 알고 있었고, 지하감옥의 입구도 알고 있기에 그곳으로 유인할 계획이었다.송석석은 이 모든 상황이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태후께서 물품을 내려 장공주를 지원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태후는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태후께서도 이러신 적이 없었으니, 황제께서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정심이 궁에 돌려보내져 심문을 받았으니, 그 과정에서 장공주의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황제께서도 오늘 밤의 법회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일 뿐 아닌가?모든 분석을 마친 송석석이 염 선생에게 물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장공주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유인하려는 것이냐? 필경 사이가 돈독하지 않다면 초대도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그러자 염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저는 오히려 오늘 밤 장공주부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왕비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황제의 목적은 장공주부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그 말에 깜짝 놀란 시만자가 물었다.“우리의 계획을 황제께서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확실하진 않습니다.” 염 선생은 시만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의심이 많고,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 왕부에 누군가를 심어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 차례 조사했지만 깊이 잠입한 생태라면 거듭 조사한들 무용지물일 것입니다.”송석석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이 일을 아는 자는 우리들뿐이었
술시 무렵, 자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든 자객들이 한 줄로 나란히 야행복을 입고, 조용히 장공주부에 침입하였다. 그때 공주부의 정원에서는 고승들이 경을 읊고 있었고, 부인들은 베낀 불경들을 모두 태웠고 일부는 계속해서 경을 베끼고 일부는 외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객이다!" 비명소리는 밤하늘을 가르며 장공주의 심장을 내리 찔렀다. 정원에 있었던 장공주는 자객을 보지 못했기에 중원과 후원으로 침입한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곧바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안여옥이 급히 장공주를 붙잡으며 말했다. “장공주님, 자객이 있습니다. 밖은 위험합니다.” “놔라.” 장공주는 매서운 표정으로 안여옥의 손을 뿌리쳤다. 그 표정에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놀랐다.정원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으나, 고승들과 몇몇 태부인들만이 침착했다. 지원 스님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자객은 사위와 병사들이 상대할 것이니, 장공주께서는 위험을 무릅쓰지 마시고 계속 경을 읊으시오.” 장공주는 경단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지원 스님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모은 그는 자비롭고 경건한 모습이었으나, 눈빛에는 뭔가 번뜩였다.경호병들이 후원으로 급히 달려가는 발소리를 들은 장공주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몸이 떨렸다. 송석석은 15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밤 움직인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속였고, 정심을 속였다. 이 자객들은 송석석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지하 감옥에 갇힌 고청란의 어머니를 구하러 온 것인가? 지하 감옥! 불길함을 느낀 장공주는 주변의 만류는 뒤로하고 서둘러 서원으로 뛰어갔다. 자객들은 이미 경호병들과 격돌 중이었다. 도준은 부병의 일부를 고승들과 부인들을 보호하는 데 배치해, 그들이 공주부에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했다. "자객이라니! 너무 무섭구나! 얼른 도망쳐야 하지 않느냐?" 잔뜩 겁에 질린 시민주가 계속해서 김도연에게 묻자, 경
전북망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과 고승들이 모여 있었기에, 만약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하여 급히 지원 스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사님, 일단 안으로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객들을 잡고 난 뒤 다시 경을 이어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원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임무를 수행하시지요. 경단은 열렸으니, 경을 다 읊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북망은 다급해졌다.“자객들이 침입했습니다. 위험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지원 스님은 두 손을 합장하며 조용히 말했다. “자객은 제가 목표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것 또한 제 운명입니다.” 스님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전북망은 남겨진 경호병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스님과 부인들을 보호하여라.” 말을 마친 전북망은 검을 들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원에 도착한 장공주 30여 명의 경호병들과 함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는 지하 감옥의 네 개 입구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장공주는 송석석이 고청란의 어머니를 구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를 구한다 해도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기에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서원만큼은 결코 뚫려서는 안 되었다. 필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서원에 도착했을 때, 자객이 보이지 않자 급히 다가가 공손히 말했다. “장공주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 피하십시오. 자객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필명을 본 장공주는 차가운 눈빛을 쏘며 말했다.“필요 없다! 당장 나가거라. 공주부의 병사들로도 충분하니 너희들이 끼어들 필요 없다.” “자객들은 무공이 뛰어나 공주부의 병사들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장공주는 급기야 분노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내 병사들이 어찌 몇 명의 자객을 당해내지 못하겠느냐? 당장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 너희들을 공주부에 무단 침입한 죄로 고발하겠다!
감옥 바닥에는 묶여 있는 화살 더미와 노기, 그리고 한 줄로 늘어선 칼, 검, 활들이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커다란 통들이 쌓여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통들은 밀봉되어 있었고 위에 여러 겹으로 덮여 있었지만 화약 냄새는 여전히 새어 나왔다. 그 통들이 있는 곳에는 등불이 없었고, 지하 감옥의 입구 쪽에만 등불이 있었다. 사여묵이 뒤를 돌아보자, 경호병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감옥 안의 상황을 본 그들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자객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까먹은 듯했다. 검을 휘둘러 몇 명을 쓰러뜨린 사여묵은 전북망이 경위병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전북망은 아직 이곳을 둘러볼 새도 없이 자객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사여묵은 그와 몇 차례 칼을 맞대었고, 어두운 불빛 아래 전북망은 그의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 순간, 전북망은 잠시 멈칫했다. 사여묵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몸을 날려 계단을 세 걸음에 뛰어올라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전북망은 지하 감옥에 가득한 무기와 장비들을 보고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던 그가 경위병들에게 외쳤다.“당장 필명 대감에게 보고하라!” 전북망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으며 덧붙였다.“그리고 순방영의 총령 육 대감도 불러오거라! 빨리 움직여라!” 바로 그때, 지하 감옥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장공주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내려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필명을 찾아가려는 경위병들에게 겨누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 경위병들은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자 그녀는 부병들에게 명령했다. “이들을 모두 죽여라.” 경위병들과 전북망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뿐이었지만 부병들은 약 30명 가까이 있었다. 부병들이 사여묵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지만, 전북망과 네 명의 경위병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부병들이 검을 들고 다섯 명을 향해 다가가
자객들은 필명과 순방영의 육 대감을 이끌고 다른 지하 감옥에 침입했다. 그곳에서 송지안의 일가족 네 명과 더불어 일곱, 여덟 명의 미쳐있거나 병약한 여인들이 발견되었다. 필명은 송씨 가문의 네 식구를 보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즉시 이들을 부인들 곁으로 호송하라. 그곳에는 경위병과 부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안전하다.” 옆방에 갇혀 있던 여인들은 모두 불구 상태였다. 어떤 이는 팔이 잘렸고, 어떤 이는 다리가 잘렸으며, 또 어떤 이는 얼굴이 망가졌거나 혀가 잘려 있었다. 상처는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아물지 않았고 그중 한 여인의 잘린 다리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경위병들은 이곳이 공주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곳은 지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들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참으며 한 명 한 명 구출했다.정원에서는 지원 스님이 고승들과 함께 계속해서 경을 읊고 있었다. 경위병과 순방영의 병력은 점점 많아지자 이에 몇몇 사람들은 자객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시민주를 비롯한 몇몇 부인들은 도망치고 싶었으나, 지원 스님이 그들을 저지했다. 자비롭고 온화하기로 유명한 지원 스님이 드물게도 날카로웠다.“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있어야 합니다. 다시 자리에 앉으시오.” 시민주는 두려움에 떨며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자객이 있는데 왜 나갈 수 없단 말입니까? 영혼을 위로하려다 목숨까지 잃는 건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자비를 말하면서 사람 목숨을 위협하고 있군요.” 그러자 승상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경위병과 순방영이 모두 왔거늘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요? 김측비를 보시지요. 얼마나 침착합니까.” 김측비는 침착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지경이었다.연왕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그녀이기에 연왕의 모든 계획을 알고 있었고 장공주의 지하 감옥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물건들이 발각된다면,
그들에게서 악취가 진동했다. 그중 두 명은 정신이 온전치 않았고 들어오자마자 제사상에 놓인 과일을 미친 듯이 먹어 치웠다. 마치 굶주려 미쳐버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몇몇은 그저 바닥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병에 시달린 듯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이 이들의 정체를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또 다른 무리가 들어왔고 들어오기 전부터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그 냄새는 마치 썩은 고기에서 나는 냄새처럼 역겨웠다. 시민주는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몸을 숨겼다. 손발이 불구인 여인들이 한 명씩 들려오는 것을 본 고승들은 ‘아미타불’이라 되뇌었다.자비심을 지닌 이들조차 이 끔찍한 광경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들은 숨을 삼키며 하나같이 뒷걸음질을 쳤다. 안여옥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가리고 태부인들과 함께 상황을 확인하러 다가갔다. 그들이 다가가 보니, 상처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안여옥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렸다. “어서 이들을 의원에 보내거라.” 안여옥이 다급히 외쳤지만,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견디기 힘든 악취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 때문이었다. “부의가 있지 않느냐? 부의는 어디에 있느냐?” 량아진은 밖으로 도망치는 어느 한 시녀를 붙잡고 덧붙였다.“어서 부의를 모셔 오거라!” 시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정원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로, 지하 감옥의 실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끔찍한 상태로 들려오는 여인들 중 몇몇은 낯익었고, 또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모두 형편없었다. 량아진의 외침에 시녀들은 헐레벌떡 부의를 찾아 나섰다.평소에 손끝 하나 베어도 난리가 났던 부인들은 이 처참한 광경에 완전히 혼비백산했다.다리가 잘린 여인은 너무나 쇠약해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두 눈을 뜬 그녀는 슬피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크게 웃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너무나 소름 끼쳤다.“마침내 죽이려는 겁니까? 제발 빨
싸움이 계속될수록 전북망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처음 성릉관 전장에 나갔을 때를 떠올렸다. 적에게 포위되어 죽을 뻔했을 때, 소장군이 그를 구하려다 팔을 하나 잃었다. 그때도 죽음이 임박한 두려움을 느꼈었다. 잠시 한눈판 순간, 전북망은 적에게 발로 차여 바닥에 쓰러졌고 다음 순간, 번쩍이는 칼날이 날아와 본능적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장공주의 발밑에 다다르자, 장공주가 사악한 얼굴로 칼을 들어 그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죽어라!”전북망은 두 손으로 칼을 간신히 붙잡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 순간 부병들이 다시 달려들었다.바로 그때, 경위병들이 지하 감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계단 위에 있던 필명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전북망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부병을 차버리고 전북망을 구했다.싸움은 계속되었다. 필명이 이끄는 정예 부대는 순식간에 적을 제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병들의 목에 칼이 겨눠졌다. 장공주는 순식간에 뒤집힌 상황을 바라보며, 이미 각오는 했지만 너무나 빠르고 갑작스러운 패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기운이 빠진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경위병들은 횃불을 들고 지하 감옥을 밝혔다. 이곳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었다. 이곳은 작은 무기고였다. 화약을 발견한 필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장 횃불을 꺼라.” 필명은 즉시 명령했다. 횃불이 꺼지자, 희미한 등불이 은은한 빛나고 있는 무기들을 비추었다. 이 무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필명은 전북망과 부상을 입은 경위병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명령했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은 끌려 나갔다. 장공주에 대해서는 처벌할 권한이 없었기에, 필명은 사람을 보내 지하 감옥을 지키게 하고 장공주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녀의 행동을 제한하진 않았으나, 공주부를 떠나는 것은 금지되었다. 처분은 황제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부상을 당한 전북망과 네 명의 경위병들은 상태가 심각하여 우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