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유는 여전히 울먹였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손가락만은 량소의 옷자락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몹시 두려움에 차 있는 모습이였다.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억울하고 가련하게 들려왔다.“일어나시오. 이 지저분한 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사여묵이 송석석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던 혜태비를 향해 말했다.“어머니, 이제 돌아가시지요.”그러자 혜태비도 놀란 표정을 거두고 일어서고는 회왕비를 한 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아까 제가 란이를 보러 갔을 때, 그대가 온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아니어서 실망했지요. 어미가 이토록 나약하니, 딸도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지 그대도 잘 알고 있지요? 어미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싶다면, 오늘 일은 쉽게 넘기지 말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그대를 경멸할 것입니다.”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니, 가시지요. 어머니라면 누구든 모성애를 가질 것이니 숙모께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실 겁니다.”“석석아!” 그녀를 불러 세운 회왕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네가 란이를 위해 온 것은 알겠다만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란이가 승은백부에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은 생각해 보았느냐?”“지금은 뭐, 잘 지내고 있습니까?” 송석석은 반문하며 방 안을 한 번 쭉 가리켰다. “이들을 보세요. 란이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석소 사저가 그를 때리지 않았다면, 란이를 밀친 일도 그저 몇 마디 질책으로 끝났을 겁니다.”송석석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그녀는 회왕부부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회왕은 실권이 없고 조정에서 직무를 맡고 있지 않더라도, 친왕이라는 칭호는 작은 백작부를 능가하기에 충분했다.그러나 란이가 이토록 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왕비는 오히려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 왕비가 그녀의 입을 막고 경고했다.“다시는 그 두 글자 절대 꺼내지 말거라. 너는 군주라 연봉과 식읍이 나오는데 승은백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너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량세자가 반드시 잘못을 반성하고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 여자는 장공주의 딸이다. 그녀가 저택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음모가 있을 것이다.”란이는 속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란이는 그 여자의 수단이 아무리 비겁해도 량소가 자신을 믿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란이는 그렇게 량소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회 왕비는 란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말 대로 하겠다는 뜻인 줄 착각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내 말을 듣거라. 아이가 태어나면 량세자가 아이를 보아서라도 변할 것이고, 노부인께서도 증손자를 예뻐하지 않을 리가 있겠나?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도 너에게 잘해줄 것이야. 이 기간만 버틴다면 괜찮아질 것이니 좀만 참거라.”“사실 아무리 말해봤자 모두 그 여자의 문제다. 너희 시부모는 그 천한 년을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내가 오늘 그녀를 만나보니 량세자가 왜 그녀에게 현혹되었는지 바로 알겠더구나. 모습은 다소 낭패스럽긴 했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게 남자 다 홀리게 생겼더군.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백부에서는 그녀를 들일 리가 없다. 그녀는 장공주가 홍등가로 보낸 사람이다. 들이면 분명 장공주와 맞서는 게 될 텐데 그렇게 할 리가 없잖니?”회 왕비가 란이의 야윈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리고 량세자는 네가 고른 남편이니 잘못 골랐더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넌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겸손하게 행동하는지 아느냐? 네 아버지의 분배받은 땅이 혹독하게 추운 곳에 있는 데다 만약 겸손하지 못하게 행동하다 사고를 쳐서 황제폐하를 불쾌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니? 남은 생에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 것 같냐?”
회왕 부부가 떠나자 승은백부의 하인들이 저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량소와 연유만 화청에 남았고, 승은백도 부인과 함께 노부인을 배웅하러 떠났다.다른 방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노부인은 밖으로 나가면서 승은백에게 다시금 량소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우리 가문에 량소처럼 뛰어난 자가 어디 있더냐? 그는 황제가 친히 책봉한 탐화랑이니 면직도 일시적일 것이다. 지금 첩이 없는 남자가 또 어디 있느냐?“어머니, 이제 그만 돌아가 쉬세요.”승은백은 노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부인보고 노부인을 부축하라고 말할 뿐이였다. 그러고는 량소 품에 안겨 흐느끼는 연유를 보고 짜증이 나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울긴 왜 우느냐? 오늘 네가 군주를 도발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냐?”그러자 량소가 연유를 감싸며 말했다.“아버지, 어떻게 연유 탓할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도 군주 방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들은 나도 감히 때릴 수 있습니다.”“못난 놈, 닥치거라!”승은백은 그만 화가 치밀어 올라 연유를 향해 소리쳤다. “넌 당장 가서 무릎 꿇거라.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그러자 량소가 말했다.“그럴 순 없습니다. 연유의 얼굴을 보십시오. 연유는 이미 그 악독한 여자에 의해 온 몸이 다 상했습니다.”승은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량소의 뺨을 후려갈겼다.“이런 못난 놈, 너는 아직도 어떤 재앙이 닥칠지 감이 안 잡히느냐?”여러 번 뺨을 맞은 량소는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해 소리쳤다.“그래요. 모두들 나와 연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니 세자의 신분도 포기하고 우린 백부를 떠나겠습니다. 나도 이 작은 백부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그는 말을 한 후 당장 방에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승은백은 의자에 앉아 세자가 짐을 싸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연유가 세자를 말리던가?” “아니요. 오히려 세자와 함께 짐을 쌌습니다.” 승은백은 눈을 감고 북명왕비
량소는 정착하자마자 북명황실을 규탄하는 글을 썼다.랑소는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학생 열여 명을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 온 학생은 그저 서너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학생들조차도 그가 쓴 글을 보고 놀라서 일이 있다는 저마다의 핑계로 재빨리 자리를 떴다.량소는 어리둥절해서 급히 뒤쫓아가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너희는 왜 북명황실이 사람을 괴롭히는 걸 뻔히 보고서도 나를 돕지 않느냐?”그 학생은 성이 무 씨고, 이름은 무삼랑이다. 그는 작년에 국자감에 입학해 량소를 존경해 왔다. 하지만 그건 량소가 홍등가의 여인을 첩으로 맞기 전에 일이고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량소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량소가 쓴 글 속엔 남강을 수복한 친왕을 규탄하는 듯했지만 잘 들여다보면 북명왕이 연유라는 여인을 경시하는 내용들이었다.무삼랑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이 글이 발표되는 순간 량소가 세상 사람들에게 꾸짖음을 당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이 일에 엮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몸가짐이 바르면 말하지 않아도 따르고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말을 해도 따를 수 없느니라.”량소의 질문에 무감랑은 이렇게 대답하고 떠났다.그러자 량소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난 황제폐하께서 직접 책봉한 탐화랑인데 몸가짐이 바르지 않을 리가 있나? 권세에 빌붙어 아부나 하는 것들이라고! 예전엔 그들이 기골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명왕의 명성을 이렇게나 두려워하다니.’량소는 화가 나 찻집에서 물건을 부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존귀한지 호통을 쳐도 찻집 주인은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배상을 요구했다.북명황실에서 사여묵이 관아로 돌아간 후 혜 태비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송석석이 문안드리러 오자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석석아, 그 연유라는 여인은 어떻게 된 것이냐? 진정 장공주의 서녀란 말이냐?”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어머님, 모두 사실이옵니다. 그리고 고청우.. 그러니까 연
송석석은 만자에게 사람을 보내 량소를 감시하게 했다. 탐화랑이 노부인의 보살핌을 받아 여전히 패기가 넘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들고 국자감으로 가 황제에게 제출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국자감에선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자감의 사람들이 인재를 질투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분개하여 한림원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려 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기만 하면 피하기 바빴다. 황제께서 직접 면직을 선포한 탐화랑이 첩을 들여 아내를 냉대한 것도 모자라 백부를 떠나 세자까지 포기했다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그가 상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내의 돈으로 홍등가의 여인을 데리고 나온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학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욕하 바빴다. 그리고 연유의 신분이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꺼려했다. 량소는 며칠을 계속 뛰어다녔으나 성과가 없자 분노가 극에 달했고 시여묵의 압박 때문에 자신과 왕래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속으로 분해서 술을 잔뜩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며 마구 소리쳤다. “황권은 권세만 지켜주는구나! 사여묵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 군공을 믿고 멋대로 행패를 부리는데 어쩜 나서서 막는 사람 한 명 없느냐? 조정의 문무백관은 모두 겁쟁이인 것이냐?!”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심한 말을 하자 불과 3일 만에 돌풍처럼 온 진성을 휩쓸어 결국 조정의 문무백관들까지 다 알게 되었다. 그 말에 탐화랑이 안하무인격으로 잘난 체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상주문이 승상에게로 날아왔다. 묵 승상은 이 일을 숨기지 않고 황제에게 바로 알렸다. 그러자 황제가 사여묵에게 물어 그날의 일을 알게 되었다. 란이는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다. 황제는 사촌 여동생이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철이 들어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에 그녀에게 그렇게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유의 신분이 장공주의 서녀라는 사실에 황제는 이상을 느꼈다.연유의 정
재스민 차의 향기가 혼 화청에 풍겼다. 보주는 구름떡을 들고 들어왔는데 밖에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어 그녀의 수놓은 신발이 흠뻑 젖어 바닥에 두줄의 발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송석석은 말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렇게 이모와 조카는 네모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보주는 구름떡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가 문밖을 지켰다. 송석석은 보주가 놓고 간 손으로 구름떡을 집어 천천히 먹었는데 떡을 먹는 소리가 하도 작아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회 왕비도 젓가락으로 한 조각을 집어서 부스러기가 보라색 꽃무늬 저고리 치마에 떨어지지 않도록 우아하게 작은 접시로 받치고 조금씩 집어 먹었다. 회 왕비의 피부가 안 그래도 노란 축에 속해 있는데 보라색 옷을 입으니 피부색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눈 밑이 검푸른 것이 며칠 동안 밤을 설친 게 분명했다. 송석석이 계속 입을 열지 않자 회 왕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접시와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석석아, 넌 이모가 낯설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뇨, 전 이모가 절 낯설어한다고 생각하옵니다.” 회 왕비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가 란이에게 혼수를 보탠 일 때문에 그러느냐? 그 일은 이모가 사과할 테니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니? 가족끼리 이러는 걸 네 어머니가 하늘에서 본다면 얼마나 속상하시겠어.” “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시는 것이 저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회 왕비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모께서 란이에게 보낸 혼수를 거절하신 일을 저는 전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어머니 얘기는 그만하시고 오늘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는지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그러자 회 왕비가 복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다고 하지만 너 때문에 회왕부가 황제에게 한 달 동안 금족을 당한 건 알고 있느냐? 그 해 섣달 그믐날에도 우리는 너 하나 때문에 궁에 들어
송석석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물음을 무시했다. “보주야, 손님을 배웅하거라.” 자신보다 어린 조카에게 무시를 당하자 회 왕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송석석,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날 쫓아내려는 것이냐? 내가 네 이모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회 왕비는 화가 나서 찻잔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이 났다. 송석석은 깨진 찻잔과 자신의 젖은 발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승은백부에서 찻잔을 던지며 화를 내고 량소를 양심 없는 자식이라며 욕해줬다면 저도 무척이나 기뻐하고 이모가 존경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지금 란이가 얼마나 큰 억울함을 당했는지 그날 밤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모는 계속 일을 구워삶기만 했습니다. 란이가 이혼하면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느냐고 물어볼 때 이모가 참으라고만 하지 말고 고개를 끄덕였어도 그녀에겐 엄청난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억울함 때문에 이혼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모가 단칼에 거절하니 란이가 얼마나 절망했을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란이는 이혼하면 안 된다.” 회 왕비는 안색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이제껏 말했는데 넌 지금까지 뭘 들은 것이냐? 내가 이혼을 허락했다가 란이가 정말로 임신한 몸으로 처가로 돌아오면 어떡할 것이냐? 넌 진심으로 란이를 위해서 생각해 보았느냐? 란이는 널 그렇게 존경하는데 어떻게 그녀를 해칠 수 있느냐!” 회 왕비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리며 손수건으로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잠깐의 억울함이 뭐 어때서 그러느냐! 란이는 군주고 본처인데 홍등가의 출신인 첩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냐? 아무리 장공주의 서녀라고 해도 홍등가 같은 곳에 버러 져 자랐으니 시간이 지나면 량세자도 그녀에게 싫증이 날 테고, 난 결국엔 란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네가 란이에게 이러한 도리를 설명해 주면 된다. 란이는 네 말을 잘 듣지 않느냐? 그러니 네가 말하면 분명 들을 것이다.”회 왕비는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더
몇일 후 송석석이 회 왕비에게 화를 낸 일이 혜 태비의 귀에 들어갔다.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발을 동동 굴리며 보주를 불러 설명하게 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석석이 아무리 친척이라도 그렇지 나였으면 따귀를 몇 대나 때렸을 것이다!” 그러고는 급히 보주에게 명령했다. “어서 부엌에 가서 석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라고 하거라. 계화꽃떡, 대추떡.. 아니다, 차라리 진성의 8가지 만두를 사 와서 석석에게 주거라. 그딴 사람 때문에 자신의 몸을 망치면 가치가 없는 일 아니겟느냐?” 소월이 급하게 사러 나가려 하자 시만자가 말했다. “제가 날렵하니 제가 가서 사오겠습니다.” “그래, 만자가 가서 사 오도록 해.” 혜 태비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녀도 이전에 며느리가 화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에이런 상황이 마치 언니에게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언니는 그래도 도리를 따지고 날 위해서 화내는 것인데 어떻게 자신의 딸도 돌보지 않는 회 왕비와 같겠어?’ 하지만 이내 자신의 언니가 더 낫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송석석은 화가 나서 매화원으로 돌아가서도 오래도록 진정할 수 없었다. ‘책봉한 땅으로 들어갈까 봐 이렇게 비천하게 군다고? 친왕의 존엄마저 버리고 란이까지 자신들처럼 모욕을 당하라는 거야?’ 송석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들 여자들은 다 엄마가 되면 강해진다고 하던데, 회 왕비는 왜 일반 여자들보다 더 나약한 거야?’ 송석석은 란이가 분명 군주인데도 찍소리도 못 하는 연약한 성격이 모두 그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송석석이 고민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시만자가 혜 태비의 팔짱을 끼고 손에는 붉은색으로 칠한 찬합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시만자가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웃으
향병의 행동에 장공주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겉옷을 걸친 채로 의자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내일 오후에 다시 협상을 재개할 것이니, 조건은 협상 가능하도록 하지요. 너무 고집부릴 필요는 없습니다.”수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협상이라? 어떻게 협상한단 말이오? 설마 그들이 국경을 물러서라고 해도 그걸 가만히 받아들이란 말이오?”장공주는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다. “국경 문제는 일단 보류할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협정을 체결하고 즉시 귀국하는 것이 목표지요.”“그건 안 되오…” 수란석이 강하게 반발하자 장공주는 그를 냉랭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의견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결정이니 불만이 있어도 모두 삼가세요.”수란석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는 소리쳤다. “이건 독단이오! 국경 문제를 보류하면 황제와 조정의 문무백관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장공주는 위엄 있는 눈빛으로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설명은 내가 하면 되지 수 상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정을 오랜 시간 이끌어온 인물로서 항상 권위와 기세가 넘쳤다. “당장 나가서 초안을 다시 작성하고 상국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대신 국경 문제는 제외하십시오. 그리고 2년 후에 이 문제로 다시 협상하는 것으로 하지요. 나는 협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수란석은 이를 악물며 불만을 드러냈다. “나약하오, 정말 나약하오!” 그는 장공주가 서둘러 귀국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향병을 원망했다. “난 동의할 수 없소. 국경 문제는 분명히 해야 하오.”장공주는 화가 나 향로를 내던지며 강하게 명령했다. “당장 나가서 다시 작성하십시오.”한편, 북명황실의 의논 자리에서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단신의는 정좌에 앉았고 무소위조차도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만종문의 구성원들은 세력을 등에 업고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잘난 척했다.그러자 단신의가 설명했다. “이번에 사용된
향병은 뺨을 맞은 얼굴을 가린채 억울함과 분노를 모두 토해냈다. “장공주님. 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사망하셨는지 잊으셨습니까? 그건 우리 서경 백성들의 영원한 고통인데 어찌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 전하는 장공주님의 친동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모진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장공주가 움켜쥔 손바닥은 젖어 있었고 불빛에 비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그를 위해 복수를 하지 않으려고 전쟁을 반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공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빛에 노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아직 허약하지만 손을 뻗어 향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향병,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모든 계획과 절차를 너에게 말했고,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조금도 파악하지 않다니. 넌 경역에게 충성을 다했으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라. 그가 지금 상국과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겠느냐?” 그러자 향병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지금 내우외환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식량 30만 석과 소성을 요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으니까요. 장공주님, 저희는 지금 승리로 하늘에 계신 태자를 위로해야 합니다.” 장공주는 오열하는 향병을 보며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침통함을 느꼈다.그녀는 안운여와 곽아정을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도 향병의 말에 동의하느냐? 뒤에서 나를 모해할 생각 하지 말고 이 참에 다 말하거라.” 곽아정과 안운여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님,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향병은 고개를 돌려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안운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운여, 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넌 전하의 보살핌을 잊었느냐?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니.”
단신의는 독충을 가져가지 않고 향로 안에 남겨두었는데 독충은 약의 피비린내를 탐내 평생 안에 있을 수 있지만 몸에서 꺼낸 독충은 오래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단신의가 말했다. “바로 향로 안에 있으니 가져가서 장공주께 보여드리거라.” 독충은 작지만 무서운 존재라 금태의는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추고 물었다. “이 독충이 다시 인체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까?” 평무종은 금태의가 감히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가가 향로를 들고 뚜껑을 열어 장공주에게 가져가 보여주었다. 독충을 본 장공주는 헛구역질을 하며 토할 뻔했다. 그녀는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어서야 토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았다. “반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독충은 죽을 것이오. 독충이 몸에서 나오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소.” 그러자 장공주는 다시 한번 감사의 의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러니 결국엔 누군가가 독을 탔다는 것이겠지?” 수란석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물었다. “자백할지 본관이 직접 조사할 때까지 기다릴지 결정하거라.” 장공주는 답답한 가슴을 누르며 힘없이 말했다. “작은 외삼촌, 먼저 나가십시오. 향병, 운여, 곽아정만 남고 모두 나가거라.” 그러자 수란석이 말했다. “냉옥아, 무리하지 말고 독을 탄 사람부터 밝혀내거라. 감히 네 목숨을 해치려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지.”그러자 냉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먼저 나가십시오. 채희야, 사람들을 배웅해드리거라.” 채희가 그들에게 나가라고 청하자 수란석는 채희를 보고 다시 향병을 보더니 역시 향병의 혐의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 물어보고 못 찾으면 내가 직접 심문하러 가겠다.” 수란석은 말을 마치자마자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장공주는 채희에게 등잔을 두 개 더 켜라고 분부했다. 등불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자 방금 이상할 정도로 붉었던 윤기는 물러가고 눈엔 피로밖에 남지 않았다. 장공주는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앉았다
총 네 마리의 선충이 있었는데 마지막 두 마리의 선은 색깔이 조금 달랐다. 피를 빨아서인지 앞부분은 붉은색을 띠었고, 뒷부분은 옅은 붉은색이었다. 이때 단신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네 마리의 선충이 모두 피를 빨아들였다면 장공주는 살 수 없었을 것이오.” 그가 향로를 한쪽에 놓자 사람들은 모두 한 발짝씩 물러섰다. 그들은 본 적이 없는 선충에 겁을 잔뜩 먹었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서로 바라보더니 구역질이 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향병은 놀라서 거의 서 있지 못하고 한 손으로 탁자를 받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신의는 담담하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장공주가 깨어날 것이오. 금태의, 당신은 지금 가서 자공주가 아직 혈맥이 막혔는지 맥을 짚어보오.” 수란석은 멍하니 보고 있다가 금태의를 밀며 말했다. “가서 맥 짚어보거라.” 금태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맥을 짚어보더니 한참 후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럴 수가? 맥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독충이 이렇게 많이 나온 걸 보면 변한 게 당연합니다.” 안운여는 침대 옆에 앉아 채희에게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분부하고는 잠시 후 장공주가 깨어나면 따뜻한 물을 먹이라고 했다. 그러자 단신의가 말했다. “장공주에게 설탕 소금물을 준비하오.”그의 약상자에는 약이 아주 많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장공주가 복용하기에 적합했지만, 장공주가 깨어나기 전에는 주지 않을 것이었다. 장공주가 깨어나 그에게 치료를 부탁해야만 약을 처방할 것이었다. 채희는 서둘러 설탕 소금물을 준비했고, 당황한 나머지 발걸음이 흐트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송석석이 부축하고 나서야 제대로 설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왕비님.” 채희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처음에 그들이 기회를 틈 타 소란을 일으킬까 봐 화장실에서 장공주의 일을 북명왕비에게 알린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그들이 침입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수란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일은 그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도 향병의 문제를 발견했지만 향병이 무슨 짓을 했든 장공주가 협상에 참여할 수만 없다면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에게는 전제가 있었는데 바로 냉옥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왜냐하면 냉옥은 그의 조카딸이기 때문이었다. 경역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냉옥은 그가 전쟁을 벌이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숨만큼은 보호해야 했다.그가 이상한 건 냉옥의 심복이었던 향병이 왜 그녀를 배신했냐는 것이었다.‘혹시 전쟁을 지지하게 된 건가? 하지만 처음엔 분명 반대했는데. 냉옥을 죽게 하기는 싫고 여기서 포기하는 것도 싫은 것인가? 이건 그녀 혼자 한 일이 아닐 것이야. 그녀에게 냉옥을 배신하라고 지시한 사람이 있을 텐데 누구일까? 설마 황제는 아니겠지?’많은 의혹이 수란석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는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그는 회왕과 결탁했기 때문에 향병에게 문제가 있다고 추측한 것이었다. 향병이 줄곧 냉옥의 충실한 심복이었으니 다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수란석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평무종이 향병에게 말했다.“우리가 여기에 있는 한 독이 있으면 우리도 함께 중독될 것이다.”그러자 향병이 반박했다.“당신들이 독을 탔는데 무슨 해독제가 없습니까?”그러자 평무종이 물었다.“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우리 상국 진성에서 당신들을 독살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말이다.”사신들도 상국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모두 금태의를 바라보았다. 금태의만 동의한다면 그들도 믿고 향을 피울 것이었다.금태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묘독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본 적도 없고 해독법도 몰랐다. 그리고 장공주가 구혼선충의 독에 중독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작은 것이 장공주를 깨울 수 있다는 것은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그들이 모두 말하지 않자 단신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공주가
사신들은 금태의를 보고, 다시 단신의를 보더니 마음이 금태의에게로 기울은 듯했다. 단신의의 의술도 뛰어나 서경에서 명성이 자자했지만, 금태의는 장공주를 오랫동안 치료해 온 태의인 데다가 지극히 충성적이라 자연스럽게 그를 믿는 것 같았다. 평무종이 금태의의 말을 번역하자 단신의는 맥을 짚던 손을 떼고 평무종이게 말했다. “중독된 것이라고 알리거라.” “우리도 다 알아들으니 굳이 번역할 필요 없습니다.” 이때 고공이 급히 물었다. “장공주님께서 무슨 독에 중독된 것입니까?” 그러자 단신의는 송석석을 보았는데 송석석도 비주의 사건이 생각난듯 했다. 구혼선충의 독에 중독되었던 나약했던 부인이 힘이 세지고 발광했던 사건을 말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점은 그 부인은 성공적으로 조종되었고, 장공주는 혼수상태에 빠져서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인 것이었다. 금태의는 여전히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 “장공주는 원래 몸이 허약한 데다 두통 고질병까지 있습니다. 혈기와 혈맥이 막히고 두통이 심한 것으로 보아 머리에 혹이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평무종이 금태의의 말을 단신의에게 전하자 단신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릿속에 혹이 난 건 아니지만 혈맥이 막힌 것은 맞소. 그건 장공주의 머릿속에 독충이 있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인데 내가 중독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건 독충도 독이지만 사람에게 중독되었다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소. 독충은 중독자의 심신을 방해해서 두통을 악화시킬 뿐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머릿속에 있으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도 있소.” “그럴 리가 없습니다…!” 향병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단신의를 노려보며 상국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독충은 무슨,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장공주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니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그저 돌팔이 의사인 것 같은데 감히 신의라고 자칭하다니. 황당하기 그지없군요.” 단신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봐 온 덕분에 한눈에 향병이 무언가를 들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향병은 침실로 들어가 장공주의 커튼이 걷어진 것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안운여를 꾸짖기 시작했다. “어떻게 외간 남자에게 장공주가 자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 그녀는 앞으로 가서 커튼을 내리고 단신의를 쫓아내려고 했지만 안운여에게 가로막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진단해 봅시다.” “안운여! 너 너무 건방진 것 아니냐?” 향병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노호했다. 안운여는 출신이 좋지 않은 데다 관직도 그녀보다 높지 않아 잠깐 망설이다가 확고하게 말했다. “장공주님의 옥체보다 더 종요한 건 없습니다. 장공주님께서는 이미 두 시간이 넘도록 혼미했으니 당장이라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옥체에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여관인 곽아정도 안운여를 지지했다. “온 김에 진단을 받아보겠다는 것인데 넌 왜 계속 반대를 하는 것이냐? 내가 보기엔 넌 장공주를 걱정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러자 향병이 다짜고짜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마. 내가 장공주를 걱정하지 않는다니? 상국인들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잊었어? 그들이 마을 백성들을 학살한 일을 잊었냔 말이야!” 평무종은 그들의 대화를 듣더니 즉시 서경어로 반격했다. “백성들을 학살한 것은 바로 이방이다. 그것 때문에 모든 상국인들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너희 서경의 정찰이 송 씨 가문을 도륙했는데, 그럼 모든 서경인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냐?” 대학사 고공은 상황을 보더니 얼른 말했다. “장공주의 옥체가 중요하니 다들 그만합시다. 금 태의도 장공주가 왜 혼미에 빠졌는지 알아내지 못했으니 단신의에게 진단을 받아봅시다.” 그러자 홍려사경도 말했다. “그래, 그래. 이왕 들어왔으니 맥을 짚어 일단 중독의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 이때 금태의가 말했다. “장공주님께선 중독되지 않으셨습니다.” 향병은 단신의의 얼글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금 태의의 말을 그냥 믿기로 했다. 한편, 송석석과 시만자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향병은 비록 중요한 여관은 아니었지만 장공주의 믿음을 얻었고 방금도 그녀가 극구 반대를 해서 원래 지지하던 사람들까지도 따라서 반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홍려사경을 비롯한 두 세 사람은 여전히 상국의 단신의를 청하는 것을 지지했다. 단신의의 명성은 서경에까지 퍼졌다. 애초에 선제의 병이 위독했을 때 조정의 신하도 단신의에게 치료를 청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선제는 스스로 상국인의 손에 목숨을 맡기기 싫다며 결국엔 포기했다. 그들은 또다시 말다툼을 벌였는데 송석석과 평무종은 상황을 보더니 단신의를 모시고 곧장 동원으로 달려갔다. “막아라!!” 향병이 소리쳤다. “저기요, 내 말 좀 들어보십시오……” 시만자는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향병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우리도 장공주님을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장공주님의 시녀가 옆에 있으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몽동이도 수란석을 가로막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저 맥만 짚어보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태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른 들어가서 지켜보라고 하십시오.” 태의는 진작에 뛰어 들어갔다. 비록 장공주의 곁에는 두 명의 의사가 간호하고 있었지만 상국의 사람이 들어가자 태의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바로 따라 들어갔다. “놔, 이거 놔주십시오.” 향병은 시만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것입니까? 날 해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시만자는 그녀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들어가려는 거면 같이 들어가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몽동이도 말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다 같이 들어갑시다! 모두들 장공주의 건강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니 같이 들어갑시다.” 경위들도 송 대인이 손찌검을 하지 말라고 분부해서 밀치락달치락 하며 공격을 어깨로 되받아 칠 수밖에 없었다.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혼란스러웠지만 몽동이가 수란석을 잡고 있기 때문에 시만자는 힘껏 향병의 손을 잡고 동원 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평무종이 회동관 입구에 나타났는데, 혼자 온 게 아닌 것 같았다.방금 송석석이 그녀를 보았을 땐 야행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평범한 복장을 입고 있었고 야행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저, 무슨 상황입니까?”송석석은 얼른 마중 나가서 물었다.그러자 평무종이 답했다.“내가 장공주 방의 옥상에서 잠깐 들었는데 장공주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더라고.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시녀 몇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장공주가 미친 듯이 발광하다가 사람까지 물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하더군.”시만자는 의아해서 물었다.“미친 듯이 사람을 물었다고요? 설마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니겠지요?”이때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혹시 정원에서 들었습니까? 그들이 뭐라고 하던가요?”“그들이 정원에서 다투고 있었는데 태의나 단백부를 모시러 가자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난 옥상에서만 듣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고 지지하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그럼 신의를 모시러 간다는 의견에 반대하던 사람 중 여자의 목소리가 있었습니까?”“있었다.”평무종이 몽동이를 만났을 때 이미 여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향병은 아니었다.”“반대하던 사람이 많았습니까?”“서너 명인 것 같았는데 그들도 침착하게 분석할 뿐이지, 무작정 반대했던 건 아니다. 유독 한 여자의 반대가 심했는데 그녀는 우리 상국의 태의와 의사들은 그들이 수행하는 어의보다 못하며 가해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지.”“그러니까 그녀를 따라 반대하던 사람들은 장공주가 자신들 때문에 문제가 생겨 책임을 질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군요.”평무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고 할 수 있지.”그러자 송석석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럼 쳐들어갑시다!”이때 몽동이가 걱정하며 말했다. “왕야님께 알려서 결정지으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아니, 이건 내 개인적인 결정이지 왕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송석석은 밤을 지키고 있는 경위를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