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말했다."선황께서도 마음속에 한 사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 원수를 형제로 여기기에 송 부인이 참석하는 자리나 궁으로 들어오면 모두 피했지요. 형제에 대한 가장 큰 존중입니다. 심지어 송 부인은 죽을 때까지도 선황의 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황제의 표정은 멈칫했고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대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마마마의 말씀을 잘 새기겠습니다."그는 잠시 침묵한 후 물었다."어마마마는 개의치 않으십니까? 송석석을 이리 아끼기까지 하시다니."태후는 천천히 웃으며 유유자적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신경 쓰이겠습니까? 이 후궁에 여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이 어미는 태자비, 황후 심지어 황태후가 되기 위해 그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제왕가에 시집을 가면서 제왕의 진심을 요구하는 건 오히려 자신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그리고 선황도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황제니, 근면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국토를 호위해야 합니다. 빼앗긴 국토를 앗고 탐관을 숙청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은 적 없습니다. 어떤 일은 잘 해내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지극히 높으나 그도 그저 한 쌍의 눈과 두 손뿐입니다. 많은 일들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겨야 하고 그자들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요. 선황께서 아프신 후 여러 가문이 일떠서고 탐관들도 많아져 지금 폐하를 힘들게 했습니다."태후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폐하 앞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가장 좋은 사람이 바로 형제입니다. 병권을 회수한 이상, 동생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맡기십시오. 어려서부터 봐왔으니 그 아이의 심성과 인품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동생 중에 그 아이가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충성스럽습니다.""폐하,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태후의 의미심장한 말에 황제는 오랫동안 사색에 잠겼다.한참 후
사여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원수와 전하는 무슨 차이가 있지?’"전하께서는 어찌 여기서 기다리셨습니까?"송석석이 물었다.사여묵은 생각을 접고 답했다."아, 어마마마께서 힘들게 하진 않는지 보려고 궁으로 왔소. 지내기 어렵지 않소? 하지만 걱정하지 마오. 이제 왕부에서 지내면 궁에서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하지 않을 테니. 왕부의 사람은 나의 명을 따르고 자네의 명도 따를 테지만 어마마마의 명을 듣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웃으며 답했다."지내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괴롭힌 적은 있지만 수단이... 다소 간단하여 쉽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사여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단이 간단하다는 말은 확실히 정확하다. 어마마마는 응석받이로 자라 성질을 내고 응석을 부리면 누군가가 도와주니 수단을 모르는 사람이다."확실히 수단이 없는 사람이오. 내가 아직 궁에서 지낼 때 어마마마께서 가장 독한 수단으로 덕 귀태비를 대했던 것이 기억나오. 덕 귀태비가 일곱 여동생을 품고 있을 때 아바마마께서 자주 궁으로 가니 아바마마를 청하려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찬물에 몸을 담갔소. 하지만 물에 들어가자마자 추워서 바로 일어나더니 오든 말든 상관없으니, 자신을 학대할 순 없다고 중얼대셨소."송석석은 그 장면을 생각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비께서는 역시 재미있으십니다."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사여묵은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재밌소? 난 당신의 재밌다는 말이 더 재밌소."어마마마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여묵 기억 속의 그녀는 교활하고 제멋대로였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세걸음 양보하면 열걸음 앞으로 가 소란을 피우고도 남을 사람이다.외태조부는 당대의 대유로서 이런 손녀를 키운 것에 대해 한이 맺히셨다. 죽기 전에 절대 그녀가 무슨 화를 일으켜 집안의 명성을 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신신당부를 하셨다.황제가 태비에게 궁에서 나와 사여묵과 지내게 하는 것도 그녀가 두려워서이다.궁 안 모두가 그녀를 무서워한다. 그녀가 대단해서가 아
"그래?"사여묵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모의 성격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입으로는 좋은 말만 하지만 사실을 독한 사람이다. 다례와 연회를 좋아하고 진성의 권세가 가족들과 왕래하며 적지 않은 귀부인들을 알고 있다.많은 권세 있는 집안의 혼사는 모두 그녀의 연회에서 이어졌다.어마마마께서 누군가로 인해 손해를 본 적 있다면 단연 고모일 것이다. 그녀는 수단에 능해 많은 음험한 짓들을 했다.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딸을 낳은 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부마에게 첩을 많이 들였다. 첩이 아이를 낳으면 그녀는 빼앗아 왔고 첩을 잔인한 수단으로 처형해 죽였다.그중 한 첩이 몇 마디 논박해, 그녀는 아예 아이도 남겨두지 않고 첩의 면전에서 아이를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고 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하나 잘라 며칠 동안 고통스러워하다 죽게 했다.이렇게 사악한 짓은 물론 아주 잘 숨겨졌다. 필경 공주부의 일이니 누가 염탐하려 하겠는가?사여묵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부마인 고모부가 그 해 연말 술에 취해 측간을 찾다 길을 잃었다. 그가 찾으러 갔을 때 고모부는 가산 뒤에 숨어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고 있었다.물어보니 공주부에 그렇게 잔혹한 일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고모에게 실망하여, 될수록 멀리하고 지냈다.과거 아바마마께서 계셨을 때 그녀를 조금 단속할 수 있었지만, 지금 아바마마까지 안 계시니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그녀의 딸 가의 군주는 그녀와 성격이 똑같아 늘 시녀와 하인을 때리고 괴롭혔다. 태비도 그녀가 던진 돌에 맞아 머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그러나 태비는 어른이기에 따질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장 공주의 음흉한 수단을 알고 있는 터라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장 공주와 송석석의 아버지는 원한이 있었다.송 국공은 젊었을 때 위풍당당하고 준수하여 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17살 때 800병의 군사를 이끌고 흉인의 1만 병마를 몰살하여 전국의 주목을 받았다.19살 때 성릉관에서 고작 1000명의 군
장 공주의 초대장은 국공부에 보내졌다. 내일이 바로 생일인데 오늘에야 보내온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 선물을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송석석은 창고에서 골라야 했다.양 마마는 걱정이 가득했다."장 공주는 본디 우리 국공부를 거슬려 했습니다. 예전에 부인께서 계실 때 무슨 연회가 있어도 부인을 청하지 않았는데, 왜 아가씨를 청한 것입니까? 말 많은 부인들이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송석석은 초대장을 한쪽에 놓았다."그건 물론이네."부모님과 장 공주의 옛일을 그녀도 들은 바가 있다.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희생된 후 그녀가 매산에서 돌아온 해에 장 공주가 선물을 보내온 적 있었다. 그것은 장 공주가 특별히 사람을 시켜 조각한 정절 패방이였고 독하게 전승이라는 두글자까지 새겼다.얼마나 악랄한가? 정절 패방을 전승하라는 것은 송씨 집안 여자들 모두 과부를 해야 하며 두 번 시집갈 수도 없는 뜻이다.아마 공을 세우고 돌아왔고 국공 적녀 신분이 있기에 이번에 초대를 한듯하다. 그녀와 혼약을 가지면 승작할 수 있으니 몰락한 후부 부인들이 관심 가질법하다.장 공주는 그녀의 길을 망쳐 시집을 가더라도 상인이나 평민에게 시집을 보내려는 것이다. 상인과 평민이 어찌 승작을 할 수 있겠는가? 승작이란 모두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보주가 말했다."아가씨, 가지 마십시오."송석석은 자리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가자!""우리가 왜 그곳으로 가서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당해야 합니까?"보주는 그 장면을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가씨가 당한 억울함이 적은가?명주와 다른 시녀들은 뒤에 사 온 시녀들이라 아가씨와 장 공주의 원한을 모른다. 그러나 다들 보주의 말을 따른다. 보주가 아가씨에게 억울함을 당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은 분명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들 연이어 말했다."예, 아가씨. 가지 마십시오. 괜히 선물만 준비해야 합니다."시녀들에게 있어 선물하는 것은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다. 상대방이 장
양 마마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조금은 아쉬운 듯한 눈치였다.“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네요. 매화꽃은 딱 눈앞에서 피어난 듯 하고 가지는 힘 있게 뻗어 나가고 푸른 잎사귀는 갓 피어난 듯 한데 이걸 버린다고 하기엔 제 눈엔 완벽하기만 합니다. 이걸 장공주한테 바치는 건 아깝습니다.”“괜찮네. 오라버니가 매화를 그리기 좋아하셔서 지금까지 그린 매화 그림만 해도 서재에 차고 넘쳐날 지경이야. 참, 이제 황제전하한테도 한 폭 올려야겠구나.”황제전하는 오라버니를 경배하다 못해 오라버니의 묵보도 소장하고 계시지만 매화도는 아직 없다. 오라버니의 매화도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우나 송석석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갖고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송석석은 오라버니의 묵보를 올려바치는 것이 곧 북명왕이랑 친분을 쌓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황제전하가 자안궁에서 물었던 일들이 왠지 모르게 자꾸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오라버니의 그림으로 먼저 손을 뻗어 왕야님과의 선의를 전하고 싶었다.양 마마는 하인 몇 명 데리고 창고에서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그래도 이 그림이 제일 괜찮다고 했다.금은보화를 올리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장공주가는 나름 고상한 물건들에 관심이 많은 듯하지만 진정으로 예술을 감상할 줄 아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라, 이게 뭐지?”명주가 상자밑에서 한 뭉테기의 손수건을 찾아냈다. 그녀는 그 중 하나를 펼쳐보더니 가만히 웃음을 흘렸다.“하하하, 이렇게 못나게 수를 놓았는데 왜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거지?”양 마마는 조급히 명주 손에 쥐어져 있는 손수건을 빼앗아 오더니 다시 상자에 넣고는 눈치를 주었다.“다시는 꺼내지 마.”하지만 이미 낌새를 차린 송석석은 손수건을 꺼내 보았다. 역시나 자수가 엉망진창이었다.청죽도를 수놓았지만, 참대나무가 어찌나 꼬불꼬불한지 마치 벌레와 같았다.다른 하나를 보니 연꽃인 듯했다. 꽃잎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대충 보아낼 수는 있다지만 그건 그냥 잎이 갈라진 꽃이라고 여기고 싶은 송석석이
그녀는 이를 악물더니 양 마마한테 말했다.“오늘 밤부터 다시 자수를 가르쳐줘.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손수건을 수놓을 것이야.”어릴 적에 범한 잘못이라면 지금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자신의 완벽하지 못한 점은 견딜 수 있다지만 이런 쓰레기 같은 걸 선물이라고 다른 사람한테 준 건 참을 수 없었다. 다만 송석석은 그저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손수건을 숨긴 건 이해가 되지만 북명왕은 왜 손수건을 숨길 뿐만 아니라 수시로 갖고 다니는 거지?’뭔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송석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혹 북명왕께서 못난 물건을 모으시는 게 취미인 건가?’두 마마는 창고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진복이 육 선생이 장부를 정리했으니 한 번 보라고 송석석에게 건넸다.“그래, 서재에 놔둬. 저녁에 보도록 하지.”진복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장 점포쪽에 장부도 정리해 왔습니다. 육 선생이 총액수를 계산했고 세분한 액수도 적어 놨습니다. 제가 얼핏 보았는데 엄청 꼼꼼히 하셨더라고요. 역시 나으리께서 고른 사람은 믿을 만합니다.”장부를 관리하는 사람은 송세안이 소개해온 사람이다. 장사를 잘 하기로 소문난 송씨 가문이 소개해 준 사람은 꽤 쓸만할 것이다.보주는 명주를 데리고 송석석의 옷을 맞추러 갔다. 내일 출석할 사람이 많으니 송석석은 무조건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일 빛나야 했다.마침, 송석석이 내일 장공주의 연회에 참가여부를 물으러 왕부의 육 총관이 왔다. 이를 본 송석석이 직접 말을 전했다.“왕야께 전해주시오. 내일 참석할 거라고요.”육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송석석은 사여묵이 굳이 사람을 보내 집까지 찾아와 묻는 의도를 알고 있다.“왕야께 전해주시오. 왕야께서 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가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육 총관은 웃으며 답했다.“아씨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왕야께서 저더러 댁까지 와서 여쭤보라고 하신 이유는 그저 아씨께서 참석하신다면 어떤 선물을 장공주께 드릴 건지 궁금하셔서입
보주는 한번 보더니 대답했다.“월백색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연한 하늘색이 아씨 피부색과도 잘 어울립니다. 장신구는요? 붉은 산호로 할까요?”“붉은색은 과하니 무난한 거로 하면 돼. 너무 차려입을 필요 없어.”송석석은 직접 옥 비녀를 골라 월백색의 끈까지 단장했다.“너무 소박한 것 같습니다.”보주가 말했다.“소박한지 아닌지는 입어 보아야 알지.”송석석은 옷을 들고 병풍 뒤로 들어가더니 갈아입고 나왔다. 머리를 말아올려 비단 끈으로 묶은 뒤 흰 비녀를 꽂았다.그녀는 한 바퀴 돌아보며 물었다.“어떠하냐?”하녀들은 송석석을 보고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아직 화장도 하지 않았는데 선녀처럼 예뻤다. 특히 머리에 묶은 비단 끈은 월백색 치마에 화룡점정이 되었다.보주는 명주한테 다급히 타일렀다.“입술연지, 귀고리, 향낭, 옥패, 어서 뭐든 줘봐.”“응!”하녀들은 조급히 여러 물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보주는 송석석을 거울 앞에 앉혀 입술연지를 발라주고 눈썹을 다듬어준 후, 허리춤에 노리개를 달아줬다. 거기에 얇은 비단옷을 더하니 더욱더 선녀 같았다.보주는 머리를 굴리더니 소매를 조금 거두어 주었다. 그러니 더 청순하고 몸이 가벼워 보였다.붉은 입술연지는 흰 피부를 더욱더 백옥같이 보이게 하였고 아무런 분을 바르지 않은 두 뺨에는 붉은 기가 조금 맴도는 것이 단신의의 기혈을 조리하는 약이 역시 효과가 있는 듯했다.보주는 어깨가 으쓱해선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고의 소재로 만든 옷들은 역시 달랐다. 심지어 치맛자락도 비단으로 만들어 움직일 때마다 흐르는 시냇물을 방불케 했고 머리를 묶은 비단끈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송석석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고운건가?’매산에 있을 적부터 송석석을 아름답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원숭이를 닮았다고 할 뿐이었다.혼례준비를 하면서 어머니가 가꾸어주시고 집에서 휴식을 취한 덕분에 피부가 매끄러워졌다. 그제서야 송석석을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아름답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튿날, 장 공주의 생신 연회.이른 아침부터 문 앞에는 마차가 가득 서 있었고, 붉은 천을 길게 골목 어귀까지 뻗어 놓았다. 공주부 밖에서 300척 떨어진 곳에 있는 공터에 천막을 쳐서 서른개의 식사 자리를 대접해 백성들도 사람만 모이면 먹을 수 있었다.장 공주는 매해 생일 연회 때마다 이렇게 진행하였다. 겉보기에는 백성들과 함께 즐기려는 것이지만 사실 겉치레만 하여 자상하다는 명성을 얻으려는 것이다.식사 자리뿐만 아니라 그녀는 소밥까지 준비하여 특별히 승려만 접대했다. 장 공주가 부처님을 믿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녀는 매해 사찰과 도관에 많은 은을 기부했다.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은 늘 부처님의 가호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장 공주가 오늘 청한 손님은 아주 많았다. 그녀는 심지어 전 장군부도 청하였다.전북망과 이방은 오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큰형, 그리고 큰 아주머니가 국공부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줄곧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방은 당연히 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명성을 망쳤을 뿐 아니라 반쪽 얼굴도 훼손되어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노부인과 큰며느리 민 씨, 셋째 아들 전북삼, 그리고 딸 전소환은 참석하였다.장 공주가 초대를 한 이상 오지 않으면 미움을 살 것이다. 다행히 전북망에게는 황실에서 하사한 황금이 있어 조금 좋은 선물을 살 수 있었다.물론 그녀도 사심을 가지고 왔다. 아직 혼약이 없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와서, 자리에 있는 부인의 눈에 들어 혼사를 결정지으려 헀다.장 공주의 생일 연회에 올 수 있는 손님은 있는 집안이지 않으면 귀한 집안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노부인은 이방으로 인해 장군부가 비난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며느리와 자식들을 데리고 참석했다.권세가 있는 귀부인들 앞에서 노부인은 얼마나 비루해 보이는지 모른다.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온 손님들을 보면서 그녀는 과거 장군부의 화려한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갓 장군부로 시집을 왔다.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