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송석석은 보주와 함께 입궁했다.그녀는 가장 먼저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다. 그녀를 본 태후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사여묵에 관한 일을 물었다.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전장에서 서로 정을 나누게 되었고 귀경한 뒤에 혼인을 하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고 말했다.태후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거짓말을 까발릴 이유도 없었기에 흐뭇하게 웃으며 이것도 인연이라 말해주었다.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태후는 혜 태비를 불러들이려 했다.송석석은 태후의 마음은 알지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혜 태비께서는 저에게 장춘궁으로 문안 올리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소녀가 태후 마마의 총애를 등에 업고 그분의 말씀을 거역한다면 나중에 혼인하더라도 저를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나중에는 가족이 되에 함께 생활해야 하는데 태후께서 매번 저를 도와주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태후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네가 이렇게 참하고 심성이 바르니 내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다. 내 동생은 어릴 때부터 친정 식구들의 총애를 받고 자라서 성격이 모난 구석이 많아. 앞으로 같은 저택에서 생활하게 되면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거다. 오늘은 혜 태비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너무 선을 넘으면 내가 잘 타이르마.”송석석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마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마마가 계시니 소녀는 든든하옵니다.”태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어서 가보거라. 난 좀 있다가 가보마.”“예, 그럼 소녀 물러가겠사옵니다.”송석석은 예를 올린 뒤에 태후궁을 나왔다.한창 햇볕이 강하게 내리 쬐는 정오, 송석석은 보주와 함께 태감을 따라 화원을 걷고 있었다.길을 안내하는 태감은 장춘궁 출신이었는데 그녀가 태후궁에 있을 때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늘진 곳으로 가도 되는데 그는 더운 곳만 골라서 인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곳을 두 번이나 지나쳤는데도 아직도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무공을 연마한
보주를 밖에 남겨 두고, 송석석은 고개를 숙인 채 전에 들어갔다. 발밑에 보이는 백옥 바닥은 사람이 보일 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곳곳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이 놓인 것을 여광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녀는 눈을 올려 재빨리 힐긋 보았다. 정중앙에 놓인 의자에는 보라색 궁복을 입은 귀인이 앉아 있었다. 가체는 구름과도 같았고 머리에는 화려한 장신구들을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원수와 조금 비슷했다.이분이 바로 혜 태비라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그녀는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신녀 송석석, 태비마마를 뵙사옵니다."그녀는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눈을 내리깔았다. 옷과 치마도 가지런하고 무릎을 꿇을 때 비녀와 장신구도 살짝만 움직여 예의에 맞아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골라낼 수 없게 했다. 매산에서 1년간 궁중 마마에게 예의를 배웠기 때문이다.혜 태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 보거라. 얼마나 여우 같은 여인인지 봐야겠다."송석석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혜 태비를 마주했다. 눈동자는 마주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싸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그래, 역시나 고운 얼굴이구나. 어쩐지 내 아들이 홀렸다 했더니."혜 태비가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고 마마가 내려오는 것을 부축하였다.그녀는 송석석의 앞에 서서 긴 손을 내밀며 송석석의 뺨을 때리려 했다."천한 계집애, 감히 내 아들을 꼬드겨?"따귀를 때리기도 전 송석석은 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노여워하는 혜 태비가 입을 열기도 전 송석석이 먼저 말했다."태비 마마께서 신녀를 훈계하시려면 옆에 있는 궁녀에게 시키면 되옵니다. 신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고 내공을 닦아, 누군가 신녀를 해치면 체내의 내공이 몸을 보호하옵니다. 신녀의 얼굴에 가한 힘이 어느 정도면 내공이 몇 배로 반격할 것이 옵니다. 신녀, 마마를 다치게 할 수 없사옵니다. 마마께서 계속 때리시려거든 신녀의 죄를 용서해시옵소서."혜 태비는 멈칫하다 사여묵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가 전
송석석은 갸름한 턱을 들어 올려 정중하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용서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그러나 신녀가 어떤 신분인지, 왕에게 어울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가 결정할 것이 옵니다. 만약 혼약을 얘기하러 온다면 저도 시집가는 것을 허락할 것이 옵니다."화가 치솟아 오른 혜 태비가 답했다."잠시 넋을 잃어 정신을 못 차리는 것뿐이니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것이다. 넌 장군부에서 버려진 여인일 뿐, 잠깐의 호기심이지 시간이 지나면 널 버릴 것이다. 결국 손해를 볼 사람은 네가 아니더냐? 나도 너를 위해 생각하는 것인데 어찌 이리 주제를 모르는 것이냐?"송석석이 답했다."신녀는 전북망과 화리한 것이지 버려진 게 아니옵니다. 게다가 화리는 신녀의 뜻이니, 버린다고 해도 신녀가 그를 버린 것이 옵니다. 결코 장군부의 버림을 받지 않았사옵니다. 신녀를 위해 생각해 주셔서 참 고맙사옵니다, 태비 마마."혜 태비가 노발대발했다."누가 누구를 버렸든 너는 두 번 시집을 가는 것이다. 좋은 아가씨가 어찌 두 번을 시집간단 말이냐? 기왕 화리를 선택한 이상 조용히 지내야지. 높은 집안 자제와 엮여 여인의 명성을 해치지 말거라."송석석이 정색하고 답했다."남자는 부인을 버리고도 다시 장가를 갈 수 있고 처첩까지 여럿인데, 어찌 여인은 다시 시집을 못 간단 말입니까? 신녀에게 여인의 명성을 해쳤다고 하셨사옵니까? 천하의 여인들은 모두 신녀를 본보기로 삼고 있고, 폐하께서도 피로연에서 천하의 여인은 저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사옵니다."혜 태비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입만 살았구나. 만약 천하의 여인들이 모두 너와 같다면 대란이 생길 것이다. 여인은 마땅히 삼종 사덕을 지키고 부덕, 부언, 부용, 부공을 따라야 하거늘.""너는 고작 군공을 좀 세운 것뿐인데 어찌 여인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느냐?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여인들은 그럼 살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이 말은 아주 익숙하다. 송석석은 과거 이방에게 이렇게 물은 적 있다.송석석은 침착하게 반박했다
혜 태비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왕가에 시집오려는 생각을 버리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말아야 한다.송석석은 상관없는 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과거 매산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적지 않아 익숙해졌다.그녀는 혜 태비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것이다. 혜 태비의 곁에는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많은 데다, 원수와의 혼사는 원래 각자 필요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 잘 보일 필요가 없다.사실 혜 태비와 같은 성격은 오히려 대처하기 쉽다. 모든 것이 쉬이 드러나고 꿍꿍이가 없어 뒤에서 몰래 수작을 부리는 자들보다 낫다.그녀는 혜 태비를 괴롭히지 않을 테지만 혜 태비의 괴롭힘을 당하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과거 장군부의 노부인도 전북망이 돌아오기 전 흠집을 잡지 않고 온화하게 대해줬기에 그녀도 노부인에게 효도했다.다만 공을 세우고 돌아온 전북망이 이방과 혼사를 치르려 하자 노부인은 온화하지 않았고 그녀도 참지 않았다.팽팽히 맞서고 있을 무렵,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소리와 함께 한녕 공주가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한녕 공주는 올해 15살이고 금방 계례를 넘겼다. 예쁘게 생겼으며 귀여움에 왕실의 귀티가 배어 있었다. 살구색 저고리에 동색 치마를 입고 들어와 몰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송석석을 살펴보며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송 장군이 장춘궁에 왔다는 궁인의 말을 듣고 급히 찾아온 것이다.그러나 모비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듯 이곳에 무릎을 꿇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송석석은 고개를 들었고 마침 한녕 공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미 꿇고 있는 터라 바로 입을 열었다."공주를 뵙사옵니다.""송 장군? 정녕 송 장군입니까?"한녕 공주는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바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어서 일어나시지요.""원이야!"혜 태비는 한녕 공주의 아명을 부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누가 오라고 한 것이냐?""송 장군이 왔다는 것을 듣고 이리 찾아왔습니다."한녕 공주는 송석석을 부축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어찌 송 장군에
어수룩하고 예쁜 공주를 보면서 송석석은 그녀의 통통하고 귀여운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지금은 살이 좀 빠졌지만, 볼은 여전히 통통하다. 아주 예쁘고 귀여울 뿐만 아니라 웃을 때 보조개도 있고, 눈웃음도 예뻐서 보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만약 문제가 없다면 황 언니가 될 것입니다."한녕 공주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팔을 흔들었다."정말 송 장군을 존경합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그리고 오라버니까지 모두 장군께서 상조에서 가장 뛰어난 여 무장이라 하셨습니다. 전에 그 이방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 번 본 적 있는데, 쌀쌀맞고 행동도 거칠었습니다. 언니는 무장의 위엄도 있고 여인의 아름다움도 잃지 않았습니다."그녀는 말하다 장난스럽게 혀를 내둘렀다."어마마마께서 여인으로서 함부로 여인을 의논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해로 인해 여인의 명성을 실추시킬 수 있다 하셨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송석석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발랄한 여자아이는 늘 사람을 기쁘게 한다.한녕 공주는 계속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바깥에 있는 상궁이 그녀를 불렀다."공주마마, 태비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니, 궁으로 돌아오라 하시옵니다."한녕 공주는 대답하고 난 뒤 아쉬운 마음으로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언니, 어마마마께서 찾으십니다. 어마마마는 무서우신 분이 아니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예. 태비마마는 아주 상냥하고 유쾌하십니다."송석석이 웃으며 말했다.만나기만 하면 뺨을 때리려는 상냥함과 비틀거리며 도망가는 유쾌함이랄까?한녕 공주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아주 상냥하고 재밌으신 분입니다. 언니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공주마마!"상궁이 계속 재촉했다."가고 있습니다."한녕 공주는 아쉬워하며 송석석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언니, 언제 다시 궁에 들어오십니까? 전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송석석이 답했
다 마시고 나서야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태후마마, 사실 태비마마와 지내기 쉬울 듯하옵니다."적어도 지내기 어렵진 않다."잘 지낼 수 있다니. 내 동생을 말하는 게 아닌 것 같구나."태후는 웃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눈웃음을 지으며 송석석을 바라보았다."내 동생은 궁 안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고 황후조차 피해 다니지."송석석은 생각했다.‘그 교만하고 사나운 성격에 누가 피하지 않을까? 무릇 정상이라면 걸어가다 개에게 물리고 싶지 않겠지.’그러나 그녀에게 황후나 혜 태비와 지내라고 한다면 혜 태비를 선택할 것이다. 사납긴 하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쉽다.황후의 말은 겉으로 듣기에 별것 아니어도 자세히 생각해 보면 모두 가시 돋친 말이었다.송석석은 한 그릇 더 마시고 싶었지만, 보주가 다급히 말렸다."아가씨,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 신의께서 몸을 조리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시원한 물도 차가운 물도 많이 마시면 안 됩니다."태후는 그 말을 듣고 따뜻한 차를 올리라 명했다."날이 이렇게 더우니 차를 마시는 것이 갈증 해소에 좋을 것이다. 의사의 말을 듣고 몸을 잘 조리해야 혼사를 치르고 하루빨리 왕부의 아이를 낳을 게 아니냐?"송석석은 얼굴을 붉히고 다급히 고개를 돌려 차를 마셨다.태후가 웃으며 야유했다."쑥스러워하지 말거라. 조만간 있을 일 아니냐?""조만간 있을 일이 무엇입니까? 어마마마."전문에서 황제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밝은 노란색 옷차림이 번쩍이더니 황제가 문으로 들어섰다. 늘씬한 몸매에 궁전 중앙에 멈추어 서더니 웃음을 띠었다."소자, 어마마마께 인사 올립니다!"송석석은 재빨리 일어섰다."신녀, 폐하를 뵙사옵니다."황제의 눈빛이 송석석의 얼굴에 떨어졌고 담담히 스쳐 지나갔다."그래. 송 장군도 여기 있었네?"송석석이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예, 폐하. 신녀 태후와 태비 마마께 문안을 드리려 궁으로 왔사옵니다."황제는 자리에 앉아 웃음을 머금고 송석석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 어마마마께서 송 장군을 아끼시니
송석석은 이상하다 느꼈다. 그녀의 예민한 마음은 적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것을 느꼈다.특히 마지막에 웃으며 한 말은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먼저 감싸다니?사실이 그러한데.그녀는 멈칫하다 말했다."폐하.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한 결단은 없습니다. 특히 결전은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시몬을 공격하는 진법은 틀리지 않았으니, 일부 작은 착오는 용서할 만하다 생각되옵니다. 최종적으로 남강을 수복하고 승리를 거두지 않았습니까?"황제는 하하 웃으며 답했다."짐은 그저 한두 마디 물었을 뿐인데 그리도 긴장되는가? 긴장할 필요 없네. 그냥 생각나서 물은 것뿐이니."송석석은 등 뒤가 흠뻑 젖은 것 같았다. 그냥 생각난 김에 묻다니? 방금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에 죄라도 물을 줄 알았다.남강을 수복하였으나 아래 장병들의 실수로 대첩의 원수를 추궁할 필요는 없다.그러나 성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송석서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숙여 말했다."신녀는 그럼 태후마마와 폐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사옵니다. 신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계속 얼굴을 굳히고 듣던 태후는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가거라."송석석은 문 앞으로 물러난 뒤, 몸을 돌려 나가 보주의 손을 잡았다.보주도 송석석처럼 손바닥에 땀이 났다.황제는 갑자기 와서 잡담을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죄를 묻듯이 굴어 보주를 겁에 질리게 했다.송석석이 떠나는 것을 보고 황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 태후의 엄숙한 시선을 마주하고 괜히 찔린 그는 웃으며 말했다."저 아이가 놀라는 것 좀 보십시오."태후가 한숨을 쉬었다."무엇 하러 겁을 주었습니까?""재밌지 않습니까? 그저 농이었습니다. 늘 담담한 표정이라 어렸을 때처럼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와는 확연히 다릅니다."태후의 표정은 엄했다."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요 몇 년 큰 변화를 겪어 지내기 어려울 텐데, 이리 놀리셔서 조급
태후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말했다."선황께서도 마음속에 한 사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 원수를 형제로 여기기에 송 부인이 참석하는 자리나 궁으로 들어오면 모두 피했지요. 형제에 대한 가장 큰 존중입니다. 심지어 송 부인은 죽을 때까지도 선황의 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황제의 표정은 멈칫했고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대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마마마의 말씀을 잘 새기겠습니다."그는 잠시 침묵한 후 물었다."어마마마는 개의치 않으십니까? 송석석을 이리 아끼기까지 하시다니."태후는 천천히 웃으며 유유자적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신경 쓰이겠습니까? 이 후궁에 여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이 어미는 태자비, 황후 심지어 황태후가 되기 위해 그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제왕가에 시집을 가면서 제왕의 진심을 요구하는 건 오히려 자신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그리고 선황도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황제니, 근면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국토를 호위해야 합니다. 빼앗긴 국토를 앗고 탐관을 숙청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은 적 없습니다. 어떤 일은 잘 해내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지극히 높으나 그도 그저 한 쌍의 눈과 두 손뿐입니다. 많은 일들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겨야 하고 그자들은 각기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요. 선황께서 아프신 후 여러 가문이 일떠서고 탐관들도 많아져 지금 폐하를 힘들게 했습니다."태후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폐하 앞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가장 좋은 사람이 바로 형제입니다. 병권을 회수한 이상, 동생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맡기십시오. 어려서부터 봐왔으니 그 아이의 심성과 인품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동생 중에 그 아이가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충성스럽습니다.""폐하,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태후의 의미심장한 말에 황제는 오랫동안 사색에 잠겼다.한참 후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