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망이 싸늘한 얼굴로 반복했다.“형님, 송석석을 찾아가지 마세요.”김순희는 전북망이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우리 장군부의 마지막 생명줄이 송석석이다. 이방 때문에 장군부가 어떻게 된 줄 알아? 체면은 다 깎이고 남들 손가락질이나 받고 있지. 고약한 계집애가 감히 시아버지를 때려? 아버지 목숨이 위태로우면 내 당장 친정으로 내쫓아버릴 것이니 다시는 내 눈에 띄게 하지 마.”“그리고 왜 하필 폐하를 찾아가 이방과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간청을 한 것냐?”김순희는 전북망을 바라보며 쌓아뒀던 속내를 털어놓았다.“자기 시아버지를 때리고, 시어머니를 존경하지 않는 여인과 혼례를 하겠다고 간청하다니. 이제 헤어질 때 폐하께 뭐라고 변명할 셈이야?”전북망이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그만 하세요. 폐하께서 절 잊기를 바랄 뿐이에요.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떠올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다시 이혼하겠다고 폐하께 청하면 아마 제 벼슬길도 거기서 끝일 겁니다.”김순희가 깜짝 놀라 대꾸했다.“몇 년이 지난 뒤에 찾길 바란다고? 그럼 너한테 출셋길이 틀 것 같으냐? 무장이란 젊었을 때 싸우는 것이다. 이방을 단속 못 한 것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을 순 없다. 그리고 황제께서 너에게 상도 내리고 경공연에 초대한 걸 보면 아직 널 아끼시는 게 틀림없어.”전북망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전쟁에서 돌아와 단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잔 적이 없었고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그는 가족들에게 성릉관의 일에 관해, 이방이 저지른 참혹한 짓들을 입 밖으로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아들의 무기력한 모습에 김순희는 속으로 화만 삭였다. ‘이방 때문에 혼례 당일부터 지금까지 장군부는 체면만 잃었어.’김순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하필 그런 애를 염모해서는… 송석석과 비교도 되지 않는 애를.”전북망은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북망도 수천 번 후회했다.두 번의 군공은 그에게 출셋길을 열어주기 충분했으나 이방과 부부의 연을 맺기 위해 군
오랫동안 외원을 관리했기에 견문과 식견이 넓었던 진복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아씨, 폐하께서 아씨를 정말 궐에 들일 생각은 없나 봅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 어명을 내려 후궁으로 불러들여도 되지요. 그런데 석 달이나 기한을 주셨잖아요.”“나도 알아. 석 달 안에 시집가게 하려는 거야.” 송석석은 어이가 없었다.“내가 독신녀로 사는 게 폐하께 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버지 조서(诏書)에서 나와 혼인을 하는 자는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사항을 봤었는데,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으시려는 건가?”“저도 조서에 적합한 사내를 데려와 배양해야 한다고 쓴 걸 봤습니다. 추후에 가문의 대소사를 이어받을 수 있게요. 폐하께서 송씨 가문이 후계자를 찾는 걸 반대하시려는 것인지, 아니면 적합한 후보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네요. 그런데 석 달이라는 기한을 준 것으로 보아, 이미 마음에 드신 후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송석석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팔찌를 만지며 마음을 진정시켰다.“자네 말대로 이미 내정된 후보가 있나 보오.”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렸다.또다시 모르는 사람과 혼인을 해, 모르는 사람에게 가문을 맡겨야 했다.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유모 중 한 명, 양 마마가 입을 열었다.“만약 내정된 후보가 있다면 그분께서 데릴사위가 된다는 겁니까? 아이를 낳으면 송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데, 과연 어느 사내가 이를 받아들이려 한단 말입니까? 행여 받아들인다 해도, 직위를 얻고 나서 첩을 들여 서자에게 직위를 물려준다면 그땐 저희는 어찌합니까?”그녀 말대로, 데릴사위가 되어 혼자 들어오는 건 상관이 없지만, 가족 전체를 이 집안에 데려와 살게 할 수는 없었다.그녀의 어머니도 전북망과 혼사를 추진한 가장 큰 이유가, 전북망이 첩을 절대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으나 진성의 어떤 명문가도 첩을 들이지 않는 가문은 없었다. 심지어 평범한 백성조차, 첩을 들이는 게 다반사였다.혼인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었던
그리고 며칠 동안 국공부의 문턱이 닳도록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예전에 왕래가 드물었던 세가의 명부와 관솔들이 갑자기 번갈아 방문하게 된 이유는 황제의 구두 명령 때문이 아니라 송석석이 공을 세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국공가문에 그녀만 남았지만 국공가문을 책임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혼할 때, 관솔들은 사적인 모임에서 모두 송석석을 문제 삼았고, 그녀는 모든 사람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송석석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로 변해 아무도 감히 그녀를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송석석에게 있어 손님 접대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장군의 저택으로 시집오기 전에 어머니가 특별히 사람을 불러 1년 동안 훈련시켰기 때문이었다. 접대란 바로 연극을 하듯 웃고,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사람의 화제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즐겁게 말하고 웃고, 헤어질 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문을 나서면 얼굴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큰한 볼을 어루만지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음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 회왕비와 란군주도 왔다. 송석석은 퇴짜 맞은 선물들을 떠올리며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모랑 동생도 왔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회 왕비는 송석석이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송석석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석석아, 이모가 너한테 사과할 게. 그날 네가 사람을 보내서 사촌 여동생에게 선물한 거 좋은 마음이었을 텐데 이모는 네가 이혼하고 돈이 넉넉하지 못할까 봐 돌려보낸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모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이모도 저 위해서 그런 건데 제가 왜 이모 탓을 하겠어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하인에게 분부했다. “여봐라, 다과를 올려오너라.” 그러고는 내색하지 않고 회 왕비를 부축해 좌석에 앉히고 슬쩍 손을 빼냈다. 회 왕비는 진지하게 말했다.
회 왕비와 란군주는 30분 동안 앉아 있다가 떠났다. 송석석은 혐오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밖으로 배웅했다. 보주는 그녀 대신 억울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 군주께 선물을 드렸는데 회 왕비께서 돌려보낸 건 분명 아가씨를 경멸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아가씨는 왜 오늘 그분들에게 그렇게 잘해주신 거예요?” 송석석은 화장대 앞에 앉아 보주에게 비녀와 액세서리를 모두 떼라고 분부했다. “누굴 접대하든 다를 건 없어. 그냥 웃는 척하며 인사하면 그만인걸. 그리고 이모가 예전엔 나한테 잘해줬어. 주제도 모르고 이혼한 몸으로 사촌 동생에게 선물을 한 내 탓이지.” “하지만 아가씨께서 직접 간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아가씨께서 이혼당한 게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건데 왜 선물도 할 수 없어요?” “보주야,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일일이 따지면 피곤하지 않니?” 송석석은 동경 속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요 며칠 동안 파도처럼 사람들이 몰려와서 정말 쉴 새 없이 손님을 맞이했어. 진성에 관솔이 이렇게나 많은 지 몰랐었어. 하긴, 천하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모두 진성에 모였으니 당연한 건가?) 그러자 보주가 말했다. “아가씨께서 마음이 너그러우신 거예요.” 송석석은 동경 속의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까지 따지면 힘들어서 난 벌써 목숨을 끊었을 거야.) 송석석은 회 왕비에게도 다른 관솔들을 대하듯 조금도 진심을 섞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거야. 내가 이혼하고 국공부로 돌아왔을 땐 저택에 아무도 없었어. 그러니 쇠퇴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땐 전북망과 이방의 형세가 한창이었기에 회 왕비가 나와 거리를 두면 적어도 장군부의 미움은 사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거였고.) 진성에서 회왕부의 원칙은 되도록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었는데 만약 반드시 누군가의 미움을 살 일이 생긴다면 가장 만만한 상대를 골라 미움을 사는 것이었다. 오늘날 송석석은 공을 세웠는데 이방은 아무런 공훈도 없이 군
전 노부인은 전북경과 민 씨, 그리고 전소환과 함께 왔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전 노부인은 발목이 삐어 국공부 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석석아, 평소에 나는 널 친딸처럼 대했어. 네가 장군부에 시집와서 억울한 적 있었니? 내가 너에게 어떤 규칙도 세운 적이 없고, 이혼도 네가 황제 폐하께 부탁해서 한 것인데 왜 날 미워하는 거야? 넌 내가 단신의의 약을 써야만 연명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단신의가 날 치료하는 걸 금지하다니. 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이때 전소환도 울며 말했다. “그래요, 둘째 형수.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안 되지. 애초에 형수 집안이 참혹하게 멸문당했을 때, 어머니는 형수가 너무 슬퍼할까 봐 밤낮으로 형수와 함께 있었고 형수와 함께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어요?” 전 노부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가슴이 찢어질 듯 울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석석아. 이혼하는 날 네가 날 영원히 어머니로 대하겠다고 해서 내가 너 고생할까 봐 목돈까지 꺼내 너에게 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단신의가 나에게 치료해 줄 수 없게 막다니.” 이혼 당일 송석석이 장군부에서 나올 때 확실히 많은 물건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백성들도 모두 그 모습을 보았던 것이었다. 크고 작은 물건은 물론이고, 송 씨 자제들은 병풍, 의자, 심지어 생필품까지 모두 옮겼다. 그래서 전 노부인이 이렇게 울부짖으니 구경하는 백성들은 당연히 사실이라고 믿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의 허락 하에 이혼했으니 서로 좋게 헤어지면 그만이지, 왜 전 시어머니의 살길까지 막는 거야? 국공부의 명의로 단신의가 전 노부인을 치료하는 걸 금지하다니, 이건 시어머니를 죽이려는 거 아니야?”“이건 너무 지독하잖아. 장군부의 노부인께서 그 정도 했으면 괜찮은 거지. 새로운 규칙도 세우지 않고 국공부의 가문이 망했을 때 심지어 며느리와 밤낮 함께 있어줬다는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하는 시어머니가 어디 있어?”“그러게. 전
그의 말에 노부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바늘 하나 실오라기 하나 해준 게 없는데 뭘 말하겠는가? 노부인은 할 말이 없어 울기만 했다. “해준 게 있는지 없는지는 석석이 오면 알 수 있겠지.” 진복은 계속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게다가 노부인은 저희 아가씨를 친딸처럼 대했다고 했죠. 송 씨 가문이 망할 때 아가씨 곁에 있어준 게 틀린 건 아니지만 실은 노부인께서 편찮으셔서 저희 아가씨가 노부인을 돌보느라 같이 있었던 거잖아요. 심지어 전북망 장군께서 출정하신 후 줄곧 저희 아가씨께서 노부인을 돌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가씨께서 자신의 방에서 산 날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요. 그리고 장군부의 수입과 지출이 고르지 않아 궁중의 사람들이 일 년 사계절 입는 옷 역시 저희 아가씨의 혼수로 산 것이죠? 전 어르신부터 시누이까지, 비녀 고리에서 신는 신발까지 어느 하나 저희 아가씨가 마련한 게 아닌가요? 심지어 평처까지 신경 썼죠.마지막으로 저희 아가씨께서 단신의가 전 노부인에게 가는 걸 금지했다고 하는데 그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전 씨 가문으로 시집갈 때부터 노부인의 몸은 좋지 않아서 아가씨께서 단신의를 모셔 노부인의 병을 봐 드린 겁니다. 어르신의 병은 단신의가 만든 단설환을 드셔야 하는데 단설환은 한 알에 은 열 냥은 넘습니다. 일 년 동안 노부인께서 얼마나 드셨는지 모르신다면 단신의에게 기록이 있으니 모셔올까요?” “단신의를 한 번 모셔오는 게 좋겠네요. 저희 아가씨가 단신의에게 당신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게 금지한 것인지, 아니면 단신의가 그쪽 가문의 행위를 참지 못해 그런 것인지 알 수 있겠네요. 심지어 애초에 단설환도 주기 싫었는데 그쪽 큰 부인께서 약왕당에 가서 무릎을 꿇어 단신의가 감동해서 준 거였잖아요. 그리고 노부인께서 나잇값을 못하시니 이젠 더 이상 방문해서 치료하지 않겠다고 한 겁니다.” 진복은 백성들을 한 눈 보고 계속 말했다. “노부인께서 방금 하신 말씀은 구구절절 울부짖기만 했지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제
양마마는 냉담한 표정으로 노부인의 말을 끊었다. “황제 폐하께서 결혼을 하사했다니요? 전북망 장군이 전공을 세워 황제 폐하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애초에 이방 씨는 평처를 요구했던 거고요. 전북망과 이방이 함께 저희 아가씨에게 찾아가서 어떤 말을 했는지 제가 그대로 한 번 말해볼까요?” “전북망은 앞으로 이방과 결혼하면 다신 저희 아가씨의 방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라며, 아가씨더러 아내로서 계속 혼수로 장군부를 보조하되 앞으로 이방이 아기를 낳으면 저희 아가씨에게 맡길 테니 그거로 만족하라고 하셨죠. 어디 그것뿐입니까? 이방이 너무 많은 예물을 요구해서 장군부에서 내놓지 못해 저희 아가씨에게 요구했었죠. 저희 아가씨께서 줄 수는 없고 빌려줄 수는 있다고 하니 무정하다며 비난했었고요. 결국 방법이 없으니 저희 아가씨가 불효하다며 쫓아내려고까지 했죠. 쫓겨난 여자는 혼수를 가져올 수 없으니까요. 얼마나 독했으면 이럴 수가 있어요?” “저희 아가씨가 불효하다니요? 장군부로 시집간 후부터 매일 노부인의 병을 간호하고 신혼 첫날부터 출정을 간 전북망을 기다렸지만 그는 이방을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했죠. 저희 아가씨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는데 임신은 저희 아가씨 혼자서 한답니까?”진복과 마마의 말이 끝나자 백성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렇다면 송 씨 아가씨가 아직 결백한 몸이라는 건가?” “장군부에서 너무 한 거 아니야? 전북망이 결혼하겠다고 황제 폐하께 부탁해 놓고서는 송 씨 아가씨의 혼수까지 탐내다니.” “이렇게 뻔뻔한 가문이 어디 있어? 천벌받을까 봐 무섭지도 않나?” “내가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송국공 가문은 항상 떳떳하고 남강에서 전공까지 세웠는데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 “내가 듣기론 처음 이혼할 때 송태공께서 장군부에서 너무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화를 냈다던데.” “그리고 단신의의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작년에 내가 약왕당에 갔을 때 장군부 큰 부인이 문 앞에 무릎 꿇어 단신의에게 약을 부탁했지만
진복이 은근슬쩍 주위의 사람들을 치켜세워주고 듣기 좋은 말을 하니 사람들은 정의감이 자극되어 모두 장군부 사람들을 꾸짖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송석석에게 욕을 먹이기는커녕 송석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전 노부인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떠나버렸다. 전 노부인은 원래 송석석이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전북망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국공부에 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워 백성들의 화젯거리를 송석석에게로 돌리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소란을 피우면 송석석을 구설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국공부의 사람들이 그녀를 쫓아내기라도 하면 송석석은 더 이상 이치를 따질 수 없는 입장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증거까지 대며 반박하고 증인까지 찾아오겠다고 하니 전 노부인은 당황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조사하면 안 되는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송석석은 홀에서 차를 마시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진작부터 장군부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던 송석석은 그들의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송석석은 그들이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피운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이방에게 쏠려있던 백성들의 시선을 돌리고, 내가 화젯거리가 되어 이방과 장군부를 사람들의 입에서 해방시키려는 거겠지. 그리고 백성들의 동정을 얻어내 이방이 공을 탐한 소문을 덮으려는 거겠지. 못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일일이 화내고 따지면 살 수 있겠어?) 불타는 듯한 날씨에 보주는 송석석의 더위를 식히고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찬 음료를 만들어 주었다. 국공부에 돌아온 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송석석의 피부는 눈에 띄게 하얗고 보드랍게 변했다. 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 “집사와 두 마마에게도 나누어 줘. 화를 가라앉힐 사람은 그들이니까.” 그러자 보주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모두 준비했어요. 그리고 얼음도 충분합니다.” 진복과 두 마마는 돌아올 때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가 아가씨를 보자마자 웃음을 지었다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