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에 노부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바늘 하나 실오라기 하나 해준 게 없는데 뭘 말하겠는가? 노부인은 할 말이 없어 울기만 했다. “해준 게 있는지 없는지는 석석이 오면 알 수 있겠지.” 진복은 계속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게다가 노부인은 저희 아가씨를 친딸처럼 대했다고 했죠. 송 씨 가문이 망할 때 아가씨 곁에 있어준 게 틀린 건 아니지만 실은 노부인께서 편찮으셔서 저희 아가씨가 노부인을 돌보느라 같이 있었던 거잖아요. 심지어 전북망 장군께서 출정하신 후 줄곧 저희 아가씨께서 노부인을 돌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가씨께서 자신의 방에서 산 날이 손에 꼽을 만큼 적어요. 그리고 장군부의 수입과 지출이 고르지 않아 궁중의 사람들이 일 년 사계절 입는 옷 역시 저희 아가씨의 혼수로 산 것이죠? 전 어르신부터 시누이까지, 비녀 고리에서 신는 신발까지 어느 하나 저희 아가씨가 마련한 게 아닌가요? 심지어 평처까지 신경 썼죠.마지막으로 저희 아가씨께서 단신의가 전 노부인에게 가는 걸 금지했다고 하는데 그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전 씨 가문으로 시집갈 때부터 노부인의 몸은 좋지 않아서 아가씨께서 단신의를 모셔 노부인의 병을 봐 드린 겁니다. 어르신의 병은 단신의가 만든 단설환을 드셔야 하는데 단설환은 한 알에 은 열 냥은 넘습니다. 일 년 동안 노부인께서 얼마나 드셨는지 모르신다면 단신의에게 기록이 있으니 모셔올까요?” “단신의를 한 번 모셔오는 게 좋겠네요. 저희 아가씨가 단신의에게 당신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게 금지한 것인지, 아니면 단신의가 그쪽 가문의 행위를 참지 못해 그런 것인지 알 수 있겠네요. 심지어 애초에 단설환도 주기 싫었는데 그쪽 큰 부인께서 약왕당에 가서 무릎을 꿇어 단신의가 감동해서 준 거였잖아요. 그리고 노부인께서 나잇값을 못하시니 이젠 더 이상 방문해서 치료하지 않겠다고 한 겁니다.” 진복은 백성들을 한 눈 보고 계속 말했다. “노부인께서 방금 하신 말씀은 구구절절 울부짖기만 했지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제
양마마는 냉담한 표정으로 노부인의 말을 끊었다. “황제 폐하께서 결혼을 하사했다니요? 전북망 장군이 전공을 세워 황제 폐하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애초에 이방 씨는 평처를 요구했던 거고요. 전북망과 이방이 함께 저희 아가씨에게 찾아가서 어떤 말을 했는지 제가 그대로 한 번 말해볼까요?” “전북망은 앞으로 이방과 결혼하면 다신 저희 아가씨의 방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라며, 아가씨더러 아내로서 계속 혼수로 장군부를 보조하되 앞으로 이방이 아기를 낳으면 저희 아가씨에게 맡길 테니 그거로 만족하라고 하셨죠. 어디 그것뿐입니까? 이방이 너무 많은 예물을 요구해서 장군부에서 내놓지 못해 저희 아가씨에게 요구했었죠. 저희 아가씨께서 줄 수는 없고 빌려줄 수는 있다고 하니 무정하다며 비난했었고요. 결국 방법이 없으니 저희 아가씨가 불효하다며 쫓아내려고까지 했죠. 쫓겨난 여자는 혼수를 가져올 수 없으니까요. 얼마나 독했으면 이럴 수가 있어요?” “저희 아가씨가 불효하다니요? 장군부로 시집간 후부터 매일 노부인의 병을 간호하고 신혼 첫날부터 출정을 간 전북망을 기다렸지만 그는 이방을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했죠. 저희 아가씨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는데 임신은 저희 아가씨 혼자서 한답니까?”진복과 마마의 말이 끝나자 백성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렇다면 송 씨 아가씨가 아직 결백한 몸이라는 건가?” “장군부에서 너무 한 거 아니야? 전북망이 결혼하겠다고 황제 폐하께 부탁해 놓고서는 송 씨 아가씨의 혼수까지 탐내다니.” “이렇게 뻔뻔한 가문이 어디 있어? 천벌받을까 봐 무섭지도 않나?” “내가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송국공 가문은 항상 떳떳하고 남강에서 전공까지 세웠는데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 “내가 듣기론 처음 이혼할 때 송태공께서 장군부에서 너무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화를 냈다던데.” “그리고 단신의의 얘기가 나와서 생각난 건데 작년에 내가 약왕당에 갔을 때 장군부 큰 부인이 문 앞에 무릎 꿇어 단신의에게 약을 부탁했지만
진복이 은근슬쩍 주위의 사람들을 치켜세워주고 듣기 좋은 말을 하니 사람들은 정의감이 자극되어 모두 장군부 사람들을 꾸짖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송석석에게 욕을 먹이기는커녕 송석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전 노부인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떠나버렸다. 전 노부인은 원래 송석석이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전북망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국공부에 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워 백성들의 화젯거리를 송석석에게로 돌리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소란을 피우면 송석석을 구설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국공부의 사람들이 그녀를 쫓아내기라도 하면 송석석은 더 이상 이치를 따질 수 없는 입장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증거까지 대며 반박하고 증인까지 찾아오겠다고 하니 전 노부인은 당황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조사하면 안 되는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송석석은 홀에서 차를 마시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진작부터 장군부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던 송석석은 그들의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송석석은 그들이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피운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이방에게 쏠려있던 백성들의 시선을 돌리고, 내가 화젯거리가 되어 이방과 장군부를 사람들의 입에서 해방시키려는 거겠지. 그리고 백성들의 동정을 얻어내 이방이 공을 탐한 소문을 덮으려는 거겠지. 못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일일이 화내고 따지면 살 수 있겠어?) 불타는 듯한 날씨에 보주는 송석석의 더위를 식히고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찬 음료를 만들어 주었다. 국공부에 돌아온 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송석석의 피부는 눈에 띄게 하얗고 보드랍게 변했다. 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 “집사와 두 마마에게도 나누어 줘. 화를 가라앉힐 사람은 그들이니까.” 그러자 보주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모두 준비했어요. 그리고 얼음도 충분합니다.” 진복과 두 마마는 돌아올 때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가 아가씨를 보자마자 웃음을 지었다
사여묵은 문을 닫고 며칠 동안 면회를 사절했다. 요즘 찾아오는 사람이 엄청 많을 텐데 그는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사여묵은 황궁을 떠나자마자 장난기가 가득 찬 표정을 거두었다. 그는 이 어명 뒤에 숨겨진 황제폐하의 뜻을 알고 있었다. 송석석이 3개월 내에 시집가지 않으면 황궁으로 들어가 황비가 되어야 한다는 어명은 사실 사여묵에게 선택권을 넘긴 것이었다. 황실 서재에서 웃고 떠들던 말이 실은 진심이 담긴 말들이었다. 송석석이 입궁을 하든 말든 황제폐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건 황제폐하의 말 한마디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몇 년 전부터 황제폐하는 송석석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강 전쟁터에 나가기 전 송 부인을 찾아가 송석석의 혼인을 미뤄달라며 남강의 승리를 예물 삼아 송석석을 부인으로 맞이하겠다며 부탁했다. 황제폐하도 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강전쟁이 끝난 오늘날 그가 송석석과 결혼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 보였지만 실은 그날 황실 서재에서 했던 모든 말 중의 핵심은 바로 송석석이 어떤 세자와 결혼하든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위협이 있으니 그녀와 결혼하려면 병권을 내려놓고 북명군의 통솔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는 황제폐하가 자신을 줄곧 꺼려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시 남강 전쟁터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지만 황제폐하는 그와 북명군을 보내 남강을 지원하는 것을 주저했다. 황제폐하는 송원수가 남강을 한 번 되찾았으니 이번에도 꼭 성공할 줄 알았다.하지만 전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식량과 병기, 솜옷 등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송원수는 끝까지 버텼지만 지원군을 기다리지 못했다. 그들이 희생하자 황제폐하께서는 그제야 그를 보내 북명군을 통솔해 남강 전쟁터로 갔다. 그 후로 그는 남강 모든 병마를 인수하고 관리했다. (그러니 형님이 날 꺼려하지 않을 리가 없지.) 북명군은 그가 키운 것이었다. 그리고 부황이
사여묵은 역시 어릴 때 가 좋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는 형님과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고 할 말이 있어도 지금처럼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 얘기했으니까. 노 집사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황제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태비님을 여기로 보낸다고 해서 사람을 시켜 봉명원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태비께서 지목한 가구를 마련하는데 총 은 3만 냥이 들었습니다.그의 말에 사여묵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3만 냥? 무슨 가구를 사는데 3만 냥이나 써?” 말을 마친 그는 일어나 직접 봉명원으로 갔다. 정원에 들어서자 모란, 작약이 심어져 있었는데 특별히 온실까지 제작했다. 하지만 이 여름엔 쓸모가 없고 겨울을 대비해서 제작한 것이었다. “원래 있던 매화나무는 모두 베었어?” 사여묵은 미간을 더 찡그리고 물었다. 노 집사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태비께서 매화는 곰팡이가 껴서 싫다고 해서 모두 옮겼습니다.” 사여묵이 궁에서 나온 후부터 정원에 각종 매화나무를 심었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정원에 매화의 향기가 풍겨 마치 매산에 사는 것 같이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가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모든 건 배나무로 제작한 것이었는데 그래도 3만 냥이 될 만큼 비싸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로 비싼 건 골동품 선반 위의 골동품과 벽에 걸려 있는 서화였다. 그리고 침실에 있는 화장대, 여름 침대, 푹신한 침대, 귀비의자, 이 모든 건 다 배나무로 제작되었고 조각 솜씨가 정교해서 황궁의 물건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이것도 노 집사가 가격을 깎고 깎아서 3만 냥에 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여묵은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이 아니라 쓸 땐 쓰고 아낄 땐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은 3만 냥으로 정원을 장식하기엔 너무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다. 사여묵도 어마마마와 함께 살고 싶지 않지만 출정하기 전에 형님께서 남강을 정복하면 어마마마와 황궁 밖에서 사는 걸 허락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모셔온 것이었다. 듣기에는 은혜
이틀 후, 참모 우금과 부장 장대성이 돌아왔다. 방금 폭우가 내려 우금은 방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왕야님을 만나러 서재로 향했다. 우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제폐하께서 병권을 회수하려는 것 같은데, 어차피 왕야님께서도 돌려드릴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돌려주세요. 하지만 절대로 왕야님의 혼사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폐하도 왕야님께서 송 씨 아가씨와 결혼을 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그거로 상을 내려 맘 편히 병권을 회수하려나 본데, 제가 보기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병권을 돌려준 후 왕야님과 송 씨 아가씨의 결혼은 두 사람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거기에 황제폐하께서 참견한다면 본질이 변하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의 결정 하에 성사된 것이 아닌 혼인에 왕야님과 송 씨 아가씨가 모두 어색할 거예요.” (혼인은 자고로 순수해야 하는데 이익이 섞이면 왕야님의 감정까지 저버리게 될 거야.) 사여묵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북명군의 호부는 부황께서 나에게 하사한 거야. 애초에 부황께서 북명군은 영원히 나에게 속할 것이며 앞으로도 강산을 지키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문무백관 앞에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그걸 가져가려고 하니 형님도 나에게 큰 상을 내려야 부황과 문무백관에게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니까. 나는 황제폐하가 직접 혼인을 하사할 까봐 가장 걱정이야. 그리고 혼인을 하사하려면 문무백관에게 내가 출정하기 전에 송석석과 결혼을 청했다는 걸 알려야 할 거고.” 우금도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럼 모두들 송 부인께서 딸을 전북망에게 시집보낼지언정 왕야님이 남강을 정복하길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겠지요. 혹은 송 부인께서 왕야님이 남강을 정복할 수 없다고 여겼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튼 별의별 소문이 돌겠네요.” “그게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거야.” 사여묵은 손을 들어 탁자 위의 종이를 쓸어내며 말했다. “황제폐하의 이런 행위가 날 아주 곤란하게 하고 있어.”
우금이 장대성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라고 하자 장대성은 이해할 수가 없어 몰래 물었다. “우 선생, 왕야님께서 송석석과 결혼하고 병권을 내놓지 않으면 되지 않소?” 그러자 우금은 그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이런 멍청한 놈을 보았나? 병권을 넘기지 않으면 황제폐하께서 바로 태비마마를 내세워 이 혼사를 반대할 거 아니야?” 장대성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태비마마께서 막을 수 있잖아.” 태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누가 시켜서 막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지.” 우금은 더 이상 해명하지 않고 재촉했다. “얼른 가서 편지나 전해주고 와.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말고.” 장대성이 말을 끌고 나가는 것을 본 우금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왕야님께서 효도하지만 뒤에 황제의 지지만 없다면 태비마마께서 반대를 해도 송 씨 아가씨와 결혼했을 거야.) 국궁부에서 북명왕의 편지를 받은 송석석은 약간 의아했다. (북명왕께서 군무가 있다면 사람을 보내 나보고 오라고 하면 그만인데 왜 직접 방문해서 미리 편지까지 보내주셨을까? 이건 분명히 군무 때문에 보낸 게 아니야.) 송석석은 원수께서 실직을 맡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쓴 편지라고 생각하고 집사에게 내일 북명왕을 대접할 준비를 하라고 한 후 마음속으로는 단신의에게 연왕비의 몸상태가 어떤 지 물어볼 생각을 했다. 연왕 가문의 영지는 진성에서 백 리 떨어진 연주였는데, 애초에 전북망과의 혼사 역시 그녀가 중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혼할 때 연왕비가 소식을 전해오지 않은 걸 보아 이 일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단신의의 여제자인 국춘이 연주에서 연왕비를 돌보고 있어 송석석은 단신의께서도 연왕비의 병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리고 단신의가 자신의 일을 국춘에게 말했지만 국춘이 연왕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을 보아 병이 심각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송석석은 보주에게 약왕당에 다녀오라고 했다. 왜냐하면 직접 나섰다가는 사람들에게 쫓기기 마련이기
약물로 목욕을 했더니 온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취침 전 명주가 발을 담그는 약물을 가져와 매일 발까지 담가야 한다고 했다. 송석석은 순순히 발을 담그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차를 마셨다. 이것 또한 단신의가 처방한 약인데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방금 돌아왔을 땐 너무 피곤해서 이틀 동안 기절한 듯 잠을 잤지만, 피곤이 사라지자 송석석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설령 잠이 들었다고 해도 악몽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 오빠 그리고 모든 살아있던 가족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의 앞에 나타나 놀라서 깨어나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문이 멸문당했을 때 그녀는 후사를 치르고 장군부로 돌아갔을 때도 매일 안정제를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단신의가 그녀의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약을 다 마시자 명주는 약과 한 알을 주며 말했다. “보주 언니가 아가씨께서 쓴 약을 먹는 것을 거부해서 약을 먹은 후에는 반드시 약과 한 알을 드셔야 한다고 했어요.” 송석석이 약과를 입으로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풍겼다. 사실 그녀는 이제 쓴 약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릴 땐 쓴 약이 두려워서 약을 먹은 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면 온 가족이 달래 줬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쓴 약을 먹어도,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잖아.) 순간, 입안의 단 맛은 사라지고 약의 쓴맛과 시큼한 맛만 남아 마치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그녀의 기분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감정을 억누르는데 익숙해 얼굴에 털끝만큼도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세심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가 기분이 나쁜 것을 알아채고 모두 마음 아픈 표정을 짓기 때문이었다. 진복은 약을 가져다 드리고 태공이 직접 그린 서화도 가져왔다.태공은 수십 년 동안 그림을 연구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송 씨 가문은 매년 은화를 기부하여 가난한 이들이 각자 꿈을 펼칠
문 앞의 이야기꾼들을 쫓아내고 나니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이번에는 중매쟁이들이 번갈아가며 안여옥을 위한 것이랍시고 혼담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그들이 말하는 혼처들은 안여옥의 부모의 얼굴을 울긋불긋하게 만들 정도로 황당한 인물들이었다. 평소에는 청혼은커녕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침을 뱉고 지나갔을 법한 이들이었다.집안 배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품행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통방과의 사이에서 이미 서장자와 서장녀를 둔 사람이었고, 어떤 이는 매일 도박장에 들러 두 눈이 빨개지도록 돈을 탕진하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였다. 또 어떤 이는 기루의 단골 손님이거나, 바깥에 첩을 둔 사람이었다.이들은 평소라면 감히 청혼하러 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같이 은혜라도 베풀듯 거만하게 굴며 안여옥이 자신들과 혼인하지 않으면 다른 길은 없을 것처럼 굴었다.안태부는 평생 이렇게 큰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사람들을 쫓아냈지만, 결국 또 새로운 구설수만 만들어졌다.이 일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단 한 마디로 요약되었다.‘웃음거리.’"마치 그녀가 아직 선택할 여유가 있는 것처럼 굴지만, 누군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주겠다고 나선 것만으로도 조상님 덕분이지.""그 더러운 남자에게 안겨 순결도 잃은 주제에 여전히 체면 따위를 챙기겠다고?""평생 시집가지 못할 팔자지. 누가 그녀를 데려가겠어? 빨리 머리 깎고 여승이나 되라지. 여자들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고 이런 말들을 쏟아내기 바빴다. 본인들이 당하는 일이 아니기에, 모두혀끝으로 상대를 아프게 하며 즐거워했다.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즐거워한 사람은 바로 제자예였다. 그녀는 원래부터 안여옥을 몹시 싫어했다. 황후가 그녀에게 안여옥을 괴롭히고 골칫거리를 만들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안여옥을 자신의 적으로 삼았다.그래서 이번에 안여옥에게 일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친구 주창우를 찾아가 함께 안여옥 이야기를 하
연말이 다가오자 백성들은 설 맞이 장을 보느라 바빴다. 각 집안은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분주했다.하지만 분주한 만큼 사람들 사이의 교류도 늘어나게 되면서 온갖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 태후가 안여옥을 칭찬하며 내린 하사도 효과가 크지 않았고, 오히려 태후가 직접 칭찬한 것이 안여옥이 단순히 모욕만 당한 것이 아닐 거라는 의혹으로 이어졌다.심지어 이 의혹은 점점 사실로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듯했다. 북명황실이 나서서 공정한 말을 하거나,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이 나와 안여옥이 학생들을 보호하다가 그 인간에게 잠시 몸이 닿은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백성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백성들은 신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했고, 신을 무너뜨리는 일에는 더욱 열광했다.과거 안여옥의 규수로서의 명성,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 훌륭한 집안 출신을 부러워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만큼 배로 그녀에게 악의를 퍼부었다.그녀의 과거까지 들춰내며 사실 그녀는 고고하고 자만하여 사람을 깔보고 학문이 부족한 동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장공주의 연회에서 사슴을 말이라 지칭하며 분명 그 그림이 심청화 선생의 작품이 아님에도 우긴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그 당시 안태부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할 수 없이 사슴을 말이라 칭했고 또 그것이 심청화 선생의 작품이라 주장했지만, 사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모두 비웃었다는 것이다. "심청화의 인장도 아니었는데, 그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 누가 비웃지 않았겠어? 다만 체면을 봐서 들추지 않았을 뿐이지.”또한 그녀의 시와 그림이 명백히 표절이며, 이는 안태부가 그녀의 명성을 높여 북명왕과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북명왕은 차라리 재혼한 여성을 선택할지언정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방시원에게 시집가기를 꿈꿨으나, 방시원은 어리석지 않아 그녀의 속셈을
송석석이 궁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시만자가 급히 들어와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갔다.“여학 사건 말이야, 황제와 황후의 짓인 것 같아.” 시만자의 표정은 심각했고 눈에는 은근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송석석은 뜻밖의 소리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황제와 황후? 누가 그런 말을 했어?”“장기문이. 그가 황제가 황후에게 멋대로 굴었다고 꾸짖는 소리를 들었대. 황후는 변명하며 황제도 여학을 좋아하지 않으니 네가 진성의 권력 있는 명부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자신이 황제의 걱정을 덜어드린 거라고 했다는 거야.”송석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냉정을 잃으면 안 돼. 이 일을 장기문에게서 들었다는 걸 들키면 그의 앞날이 망가질 거야.” 시만자가 말했다.송석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과감한 추측을 해본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를 의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황후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있었지만 말이다.그리고 황후는 지금쯤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어야 했다. 이럴 때 이렇게 세가를 적으로 돌려서 무슨 이익을 본단 말인가? 비록 이번 일이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애초에 이런 일을 계획했다면 그 결과도 충분히 예측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 작업반장이 죽지 않았다면? 혹은 그 작업반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해버렸다면?장기문이 한 말을 잠시 생각해보니, 황제 역시 여학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황후가 여학을 공격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후를 꾸짖은 이유는 여학을 공격한 행위가 아니라 그 방식 때문이었다.즉, 그가 화를 낸 건 수단 때문이지 황후의 행동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송석석은 순간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황제의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사여묵을 부려 명절에 그를 노주로 보내면서, 그는 황제임에도 정작 그녀가 서원의 훈장이 되어 세가의 명부들과 교류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더욱 받
태후는 평소 정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나 오직 이 여학만은 특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직접 명을 내려 세운 것이니 말이다.“혹시 여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 내부에서 벌어지는 다툼일 수도 있지 않을까?”송석석이 묻자 염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겠지요.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많은 집안이 겉으로 보기엔 본처와 첩의 사이가 화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었다. 첩은 아무리 귀한 첩이라도 본처 앞에서는 감히 건방진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주군이 첩을 편애해 본처의 지위가 흔들릴 때이다. 이럴 때면 본처와 첩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온갖 더러운 수단이 동원되기도 한다.본처와 첩이 각각 딸을 두었는데, 본처의 딸은 아군여학에 들어가고 첩의 딸은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아군여학에 정원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첩이 본처의 딸의 명예를 망가뜨리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엮어서 함께 수치를 당하게 만드는 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이는 인식의 한계가 상황 판단을 흐리게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하는 일을 완벽히 감춰졌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도 꽤 은밀히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니 입막음으로 살인까지 한 것이 아니겠는가.만약 이러한 상황일 경우엔 조사해야 할 범위가 너무나 넓어진다.송석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우선 경조부에게 그 작업반장을 조사하게 해야겠다. 그가 평소 어떤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누구의 일을 봐준 적이 있는지 전부 다 알아보게 말이야. 그때 가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고 여론도 안여옥을 도와줘야 하니, 내가 옷을 갈아입고 입궁해 태후께 이 일을 아뢰고 오겠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죄를 씻기 위해 찾아뵙는 셈이지.”유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석석이 입궁해 죄를 청하겠다고 하자, 혜 태비가 나서며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내가 함께 가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오늘 아군여학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여학과 공방은 원래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큰일이 터졌으니 떠들썩 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군다나 이 일은 태부의 손녀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귀하디귀한 여인이 한 상스럽고 천한 자에게 농락당했으니, 앞으로 어느 집안의 자제가 감히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어리석다고 말했다. 고귀한 집안의 규수로서 조용히 살면 될 것을 굳이 여부자가 되겠다고 나서더니, 이제 평생을 망쳐버렸다고 말이다.송석석은 일부러 말을 천천히 몰며 백성들 입에서 안여옥이 학생을 보호했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마음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현갑군 지휘사를 맡게 된 이후로 그녀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암살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며 모든 일을 늘 완벽하게 해낼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공방 역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그 모든 일에도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뭐든 서두르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번 일은 그녀의 정신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렸다.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워 스스로 자책했다. ‘조금만 더 잘 대비했더라면...... 어쩌다 이렇게 경계심을 놓아버린 걸까? 사여묵이 진성을 떠난 이후 이별의 슬픔에 잠겨 마음이 흐트러져서 경계를 소홀히 했던 걸까?’그녀는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려 발생할 수 있는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예측했음에도 예방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황실로 돌아온 그녀는 홀로 의사당에 앉아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선생이 급히 돌아왔다. 그 역시 이 일을 듣고 경조부에 가서 알아보았다. 왕비가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황실에 도착하니 왕비가 의사당에 쓸쓸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염
범인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으며 특히 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진한은 통곡하면서 부러진 다리로 무릎을 꿇은 채 송석석과 공 대인에게 애원했다.“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돈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집에 아픈 아버지도 있고 셋째를 임신한 아내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끌려가면 제 가족들은 어떡합니까?”진한은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울부짖었지만 공 대인은 차갑게 명령할 뿐이었다.“끌고 가!”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절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그렇게 잔뜩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학은 다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으며 한데 둘러앉은 사람들은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홍현은 말없이 난로를 피웠고 서원 안은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서원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태 부인과 정씨 부인 그리고 무씨 아가씨와 안여옥, 송석석에 이어 홍현까지 말이다. 한편, 송석석은 이내 죄책감에서 벗어나 정신을 번쩍 차렸으며 계속 미안해하고 있기만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너무 많은 명문 가문과 관직자의 딸이 연루되어 있기에 반드시 확실하게 처리하여 하루 빨리 그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유일하게 피해를 입은 안여옥도 떠나지 않고 함께 방법을 고민했다.사실 송석석은 조금 전에 사람들에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자신은 염 선생에게 찾아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상해를 최소한으로 낮출 수 있는지 상의해보려고 했지만 다들 끝까지 서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안여옥의 마음도 위로해야 할 뿐더러 어떻게든 힘을 보태서 곧 외부에 터진 소문을 막고 싶었다.이 일이 안여옥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다들 잘 알고 있었으며 내일만 되면 안여옥에게 악언과 유언비어들이 폭우처럼 쏟아질 것이다.안여옥이 피해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그저 그녀가 남자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고 순정을 잃었다는 말만 떠돌
송석석은 속으로 너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 남풍관 일로 밤에도 외출해야 했기에 아군 서원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청화는 전에도 계속 여학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송석석이 여학에 사람 몇 명만 더 보냈어도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경조부의 공 대인이 직접 현장에 출동한 걸 보면 경조부에서는 이 일을 매우 중시한다는 뜻이다.총 여섯 명의 범인은 전부 밧줄에 묶여 있었고, 뺨 몇 대를 때리자 안여옥을 침범하려고 했던 남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정신을 번쩍 차리고 사실대로 순순히 자백했다.범인 여섯 명은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매일 무거운 물건을 나르면서 돈을 벌었지만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해도 푼돈밖에 받지 못했다.어젯밤, 부둣가 주인장이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고 아홉 명이서 둘러 앉아 술을 마셨으며 그러던 중, 누군가가 그들에게 맡길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인당 50냥을 줄 수 있다고 했다.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군 여학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며 딱히 할 것도 없이 그저 여학생들에게 겁만 주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된다고 했다.매일 부둣가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들도 마냥 순진하지는 않았기에 이렇게 쉬운 일을 하고 많은 돈을 준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50냥이란 그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2년을 넘게 무거운 물건을 날라야 벌 수 있는 돈인데 여학에 쳐들어가는 것만으로 그 큰돈을 준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들 중에서 두 명은 거절했고 부둣가 주인도 당연히 거절했으며 나머지 여섯 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동의했다.그렇게 하룻밤이 흘렀고 여학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부둣가 주인은 그들에게 술 한 잔씩 먹였으며 절대 긴장하지 말라고 그들을 다독였다.그들 중에는 진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소에도 겁이 제일 많았기에 불안한 마음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고, 아내는 셋째를 임신한 상태라 진한은 돈이 매
송석석은 차분하게 질서를 잘 정돈한 뒤,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저택으로 돌려보냈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소문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러고는 홍현에게 청작과 경조부의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이 범인은 약을 먹은 게 확실하기에 반드시 매달아서 심문해야 하며 청작을 통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야 한다.한편, 도망친 범인들도 오진에게 전부 잡혀왔고 그들은 묶여 있는 중년 남성보다 정신이 훨씬 멀쩡해 보였지만 송석석과 홍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여전히 야릇하고 이글거렸다.송석석은 안여옥을 살포시 안아주었고, 이제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안여옥이 되레 송석석을 위로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습니다.”“왜 그런 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자신을 망가트린 거라고요.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요?”국태 부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얼굴이 창백한 안여옥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국태 부인께서 제 걱정을 이리 하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애초부터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저에게 있어서 명성은 그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짐을 벗어 던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그렇지만 모든 화를 혼자서 떠안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선생님을 어찌 얘기하고 다닐지 걱정됩니다. 선생님 조부께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국태 부인은 안씨 어르신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이번에 안여옥을 여학 선생으로 데리고 올 때에도 안여옥을 잘 보살피겠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안 그래도 몸이 허약하신 안씨 어르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충격에 쓰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다들 안여옥을 위로하기 바빴고 안여옥은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얼른 웃으면서 말했다.“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더한 일도 경험하게 될 텐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안여옥은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사람
이때, 송석석이 서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 밖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송석석이 나타나자 부인들은 우르르 몰려가 송석석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닥달했다. 감히 대놓고 따져 묻지는 못했지만 송석석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송석석은 겉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다. 여학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오늘 서원 대문이 열려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과 데리러 온 가문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올 때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범인들이 이 틈을 노리고 학교 안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이 일은 분명 여학을 겨냥해서 벌인 일이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송석석의 말에 부모들이 너도나도 한 마디씩 보탰다.“왕비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쳐다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이 많은 입들을 다 단속할 수 있습니까?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없는 사실도 있는 일처럼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여학에 호위병을 좀 많이 세워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한편, 안여옥은 송석석이 궁지로 몰리자 얼른 눈물을 닦은 뒤,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말했다.“여러분, 걱정하시 마십시오. 한 명도 다친 학생이 없습니다. 저 범인은 그저 저를 잠깐 껴안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을 해치지 못했습니다.”안여옥의 말에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다들 안여옥이 이 일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다.범인이 안여옥을 껴안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숨겨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한단 말인가?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안여옥은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이때, 정신을 번쩍 차린 국태 부인이 다급하게 부인했다.“선생님은 범인에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범인은 선생님에게 손을 댈 기회가 없었습니다.”하지만 안여옥은 국태 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