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참모 우금과 부장 장대성이 돌아왔다. 방금 폭우가 내려 우금은 방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왕야님을 만나러 서재로 향했다. 우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제폐하께서 병권을 회수하려는 것 같은데, 어차피 왕야님께서도 돌려드릴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돌려주세요. 하지만 절대로 왕야님의 혼사로 거래를 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폐하도 왕야님께서 송 씨 아가씨와 결혼을 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그거로 상을 내려 맘 편히 병권을 회수하려나 본데, 제가 보기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병권을 돌려준 후 왕야님과 송 씨 아가씨의 결혼은 두 사람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거기에 황제폐하께서 참견한다면 본질이 변하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의 결정 하에 성사된 것이 아닌 혼인에 왕야님과 송 씨 아가씨가 모두 어색할 거예요.” (혼인은 자고로 순수해야 하는데 이익이 섞이면 왕야님의 감정까지 저버리게 될 거야.) 사여묵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북명군의 호부는 부황께서 나에게 하사한 거야. 애초에 부황께서 북명군은 영원히 나에게 속할 것이며 앞으로도 강산을 지키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문무백관 앞에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그걸 가져가려고 하니 형님도 나에게 큰 상을 내려야 부황과 문무백관에게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니까. 나는 황제폐하가 직접 혼인을 하사할 까봐 가장 걱정이야. 그리고 혼인을 하사하려면 문무백관에게 내가 출정하기 전에 송석석과 결혼을 청했다는 걸 알려야 할 거고.” 우금도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럼 모두들 송 부인께서 딸을 전북망에게 시집보낼지언정 왕야님이 남강을 정복하길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겠지요. 혹은 송 부인께서 왕야님이 남강을 정복할 수 없다고 여겼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튼 별의별 소문이 돌겠네요.” “그게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거야.” 사여묵은 손을 들어 탁자 위의 종이를 쓸어내며 말했다. “황제폐하의 이런 행위가 날 아주 곤란하게 하고 있어.”
우금이 장대성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라고 하자 장대성은 이해할 수가 없어 몰래 물었다. “우 선생, 왕야님께서 송석석과 결혼하고 병권을 내놓지 않으면 되지 않소?” 그러자 우금은 그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이런 멍청한 놈을 보았나? 병권을 넘기지 않으면 황제폐하께서 바로 태비마마를 내세워 이 혼사를 반대할 거 아니야?” 장대성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태비마마께서 막을 수 있잖아.” 태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누가 시켜서 막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지.” 우금은 더 이상 해명하지 않고 재촉했다. “얼른 가서 편지나 전해주고 와.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말고.” 장대성이 말을 끌고 나가는 것을 본 우금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왕야님께서 효도하지만 뒤에 황제의 지지만 없다면 태비마마께서 반대를 해도 송 씨 아가씨와 결혼했을 거야.) 국궁부에서 북명왕의 편지를 받은 송석석은 약간 의아했다. (북명왕께서 군무가 있다면 사람을 보내 나보고 오라고 하면 그만인데 왜 직접 방문해서 미리 편지까지 보내주셨을까? 이건 분명히 군무 때문에 보낸 게 아니야.) 송석석은 원수께서 실직을 맡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쓴 편지라고 생각하고 집사에게 내일 북명왕을 대접할 준비를 하라고 한 후 마음속으로는 단신의에게 연왕비의 몸상태가 어떤 지 물어볼 생각을 했다. 연왕 가문의 영지는 진성에서 백 리 떨어진 연주였는데, 애초에 전북망과의 혼사 역시 그녀가 중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혼할 때 연왕비가 소식을 전해오지 않은 걸 보아 이 일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단신의의 여제자인 국춘이 연주에서 연왕비를 돌보고 있어 송석석은 단신의께서도 연왕비의 병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리고 단신의가 자신의 일을 국춘에게 말했지만 국춘이 연왕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을 보아 병이 심각해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송석석은 보주에게 약왕당에 다녀오라고 했다. 왜냐하면 직접 나섰다가는 사람들에게 쫓기기 마련이기
약물로 목욕을 했더니 온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취침 전 명주가 발을 담그는 약물을 가져와 매일 발까지 담가야 한다고 했다. 송석석은 순순히 발을 담그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차를 마셨다. 이것 또한 단신의가 처방한 약인데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방금 돌아왔을 땐 너무 피곤해서 이틀 동안 기절한 듯 잠을 잤지만, 피곤이 사라지자 송석석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설령 잠이 들었다고 해도 악몽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 오빠 그리고 모든 살아있던 가족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녀의 앞에 나타나 놀라서 깨어나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문이 멸문당했을 때 그녀는 후사를 치르고 장군부로 돌아갔을 때도 매일 안정제를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단신의가 그녀의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약을 다 마시자 명주는 약과 한 알을 주며 말했다. “보주 언니가 아가씨께서 쓴 약을 먹는 것을 거부해서 약을 먹은 후에는 반드시 약과 한 알을 드셔야 한다고 했어요.” 송석석이 약과를 입으로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풍겼다. 사실 그녀는 이제 쓴 약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릴 땐 쓴 약이 두려워서 약을 먹은 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면 온 가족이 달래 줬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쓴 약을 먹어도,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잖아.) 순간, 입안의 단 맛은 사라지고 약의 쓴맛과 시큼한 맛만 남아 마치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그녀의 기분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감정을 억누르는데 익숙해 얼굴에 털끝만큼도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세심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가 기분이 나쁜 것을 알아채고 모두 마음 아픈 표정을 짓기 때문이었다. 진복은 약을 가져다 드리고 태공이 직접 그린 서화도 가져왔다.태공은 수십 년 동안 그림을 연구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송 씨 가문은 매년 은화를 기부하여 가난한 이들이 각자 꿈을 펼칠
미혼 남녀가 단둘이 한 방에 있겠다는데,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진복이 무조건 보주나 명주를 남겨 송석석의 옆에 있으라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원수와 장군이라는 호칭에 진복은 두 사람이 군무에 대해 말하려는 것을 알아채고 차를 한 잔 더 드리고 바로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사여묵은 찻잔을 들고 긴 손가락으로 잔에 그려진 꽃무늬를 만지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말을 하지 않자 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원수님, 혹시 남강 전쟁터에서…….” “그런 거 아니야!” 사여묵은 그녀의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고 말했다. “나는 오늘 개인적인 일로 온 것이지 군무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사적인 일? 나와 원수 사이에 무슨 사적인 일이 있지?) 사여묵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폐하께서 당신에게 3개월 내에 시집가라고 하셨지. 그렇지 않으면 궁에 들어가 황비가 되라고 하셨고, 그렇지?” 송석석은 사여묵이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혹시 입궁해서 마마가 되고 싶어?” 사여묵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송석석은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혹시 황제폐하께서 보내신 건가요?” “아니, 이 문제는 내가 묻는 거야.” 송석석은 그의 맑은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그러자 사여묵이 또 물었다. “그럼 마음에 둔 사람은 있어?”그는 송석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녀 얼굴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그럼 관심 가는 사람은?” “그것도 없어요.” 사여묵은 송석석의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관심 있는 남자가 없다고 하니 마음이 벌에게 쏘인 것처럼 살짝 아팠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모든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니까. 송석석은
감동스러운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송석석은 거절했다. “황제께서 저에게 3개월 안으로 남편감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후계자를 내정하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원수와 위장 혼인을 한다하면 황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사여묵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줄 몰랐다. 아직 황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고민한 뒤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건 자네가 걱정할 필요 없네.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후계자를 고민하시는 이유는 아마 전북망처럼 제멋대로에 난폭한 사람일까봐 걱정하셔서 그런 것일 세.”전임자를 비하하는 것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송석석은 전북망의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원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국공의 지위를 차지하고 뒤로는 송씨 가문의 군대를 두는 것이니, 후계자 선정은 신중해야 한다.예전에 아버지가 황제로부터 추봉 되었을 때, 훗날 그녀의 사위가 그 직위를 계승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녀가 전쟁에 참여해 송씨 가문 군대로부터 인정을 받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아무나 선택할 수는 없다.3개월 동안 그녀에게 남편감을 알아보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황제는 그녀가 적절한 사람을 고를 수있도록 돕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후계자로써 적합한 지만을 고려할 뿐, 그녀와 맞는 사람인지, 그녀의 인생을 함께 할만한 사람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다.사여묵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채고 말했다. “짐은 사모하는 여인이 혼인한 뒤부터아내를 들일 생각이 없었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원하시고 짐은 폐하의 동생이니, 그 명을 따를 수밖에. 다른 여인과 혼인하는 것보단 당신과 혼인하는 편이 나을 걸세.”송석석은 그의 깊은 눈빛을 마주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원수님, 소인이 혼인하여도 사모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면 저는 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인 그런 건 원치 않습니다. 소인은 이미 이
사여묵이 떠난 뒤, 진복과 두명의 유모가 들어왔다.송석석은 그들에게 숨기지 않고 사여묵이 혼인을 원했으며 그녀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진복과 두 유모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말을 잇지 못하다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이게 가장 최선의 방법일세.” 송석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와 원수 사이에는 어떠한 애정도 없네. 있는거라곤 전우애뿐이지. 그러니 혼인을 한다면 그자와 하는 것이 최선이야.”두 유모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말을 삼키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마음 단단히 하셔야 해요. 첩을 두지 않는 황실 남자들은 본적이 없어요.”같은 날 북명왕이 청혼하러 왔지만 부인이 그를 거절했다. 부인은 딸을 황실에 시집보내는 것을 원치않았다. 부인은 첩까지 여럿이 있는 집안은 일이 복잡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두 유모는 차마 아가씨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부인이 반대하긴 했지만, 북명왕의 청혼을 그녀가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상관없네.” 송석석이 말했다.“상관없으시다고요?” 양씨 유모가 의아해했다. “하지만 장군이 평처를 들이는 건…”송석석이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랑은 얘기가 다르네. 전북망은 모친 앞에서 첩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나는 그쪽 집안을 책임지며 그가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만을 기다렸지. 하지만 그자는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방을 첩으로 들였어. 나와 모친과의 약조를 어기고 나래에 대한 남편으로써의 책임을 어긴 것이지. 나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했지만 그 사람은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에게 헌신한 거야. 그런 주제에 나에게 그런 무정한 말까지 했으니 나로써도 당연히 참을 필요가 없네.”이 말에 진복과 두 유모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래, 아가씨가 이렇게 진심을 다했는데 그런 대접을 받다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나?송석석이 이어서 말했다. “나와 원수는 서로의 필요를 위해 혼인하는 것임을 서로 합의했네. 우리는 서로 애틋할 필요도, 잘 맞아
그는 오 대반이 건네준 호부를 바라보았고, 그는 여전히 오묘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송씨 가문 군대의 호부 절반을 꺼내 사여묵이 건넨 것과 합쳤다. 이로써 북명군의 호부가 완성되었고, 아바마마는 그날 그에게 북명군 호부를 그에게 주어 계속해서 북명군을 이끌고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것을 상납하지 않아도 되었고,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북명군 호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자 그의 손끝 사이로 이상한 감각이 전해졌다. "송석석이 동의했다고 하였느냐?"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폐하, 동의하였사옵니다."사여묵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동생처럼 기뻐하며 말했다."그날 소인이 출정하기 전에 청혼을 하러 갔고, 송 부인께서 그녀를 전북망과 혼인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돌고 돌아 결국 저의 곁으로 올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그는 고개를 들었고, 그의 입가에는 달콤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인은 폐하께서 내리신 3개월 간의 칙령이 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황제는 재빨리 얼굴의 흐릿함을 떨쳐 버리고 매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강요하지 않으면 또 한 번 더 그녀를 내줄 작정인겐가? 짐은 네 기질을 잘 알고 있고, 과거에는 청혼을 할 수도 없었고, 지금은 또 천천히 감정을 기르려고 하고 있지. 하지만 여자는 세월을 지체할 수 없고, 그녀의 가문도 작위가 계승되어야 하네."그러자 사여묵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소인이 겁이 많은 탓입니다."황제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송석석이 정말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폐하, 소인이 오랫동안 그녀를 흠모해 왔던 것을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사여묵은 한쪽 의자에 앉아 이어서 말했다. "본래 구휼과 보상이 끝난 후, 병부를 상납하고 천천히 그녀와 함께 지내며 감정을 키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칙령으로 인해 저는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
용춘궁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 북명왕비가 되고 싶거든 내가 죽지 않는 한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하거라!"사여묵은 혼란에 빠진 혜 태비를 침착하게 바라보았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 우렁찬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었다.하지만 송석석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혜 태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손을 뻗었고, 그녀의 긴 갑옷은 사여묵의 코끝에 닿았다. "나는 며칠 후에 황실에 가서 오래 거주할 것이다, 그녀가 황실 문을 한 발짝이라도 들어오려 한다면 난 그 다리를 끊어버릴 테야!"그러자 사여묵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예, 다리를 끊어버리십시오. 저는 그녀가 적의 두 다리를 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칼은 번개처럼 빨랐고, 사람을 세 동강을 내버리는 것을 보고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요."혜 태비가 손을 번쩍 들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가 송씨 가문의 적녀든, 무술이 강한 장군이든 내 눈에는 장군부에서 쫓겨난 버려진 여인이다! 넌 친왕이고, 진성의 얼마나 많은 순결한 귀녀들이 네 황실 문을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넌 헌신짝이나 고르다니! 단단히 돌아버린 게지?!"그러자 이때, 사여묵의 눈이 번쩍였다. "이런 말은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어마마마께서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황실에 살지 않고 이 궁에서 보살핌을 받으시면 되겠네요."혜 태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뭐라고? 네가 그…… 그 혼인을 한 번 한 여인 때문에 나를 황실에서 살지 못하게 하겠다는 거야? 사여묵, 이 불효막심한 놈!"불효막심한 놈이라는 말은 태산이 머리를 내리누르는 것과 같았고, 사여묵을 숨이 막히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확실히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백 번, 이백 번을 넘어 수없이 들은 후에 "불효막심한 놈"이라는 말은 사여묵에게 그저 어머니가 화가 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 모자 관계가 겉으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증언은 전부 상국 문자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신들은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두 명의 통역관이 서경어로 증언을 천천히 읽어주었다.정영수는 모든 죄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과거 송회안이 서경을 격퇴하며 수많은 서경 병사를 죽인 일과 송석석의 외조부인 소승이 성릉관을 지키며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러온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소 가문과 송석석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번에 진성에 오게 된 기회를 틈타 송석석을 죽여 그 원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증언을 모두 들은 후에도 서경 사신들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정영수의 행위가 어쨌든 송석석을 해치려 했다는 점에서 성릉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었다.서경 사신들은 북명왕이 이 문제를 담판 자리에서 꺼내지 않고 담판 전에 공정하게 따져 물었다는 점에서 그가 의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차라리 북명왕이 비열하게 이를 담판 자리에서 올렸다면 자신들도 체면을 차리지 않고 대응할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양안을 제외한 다른 사신들은 속으로 수란석을 온갖 욕설로 비난했다. 형인 수란키와 자신을 비교하려 들다니…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광대처럼 우스꽝스럽지 않은가!사여묵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담판은 결국 심리전이 가장 중요하다.원래 서경은 천리 길을 달려와 상국에 죄를 묻는 입장이었기에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분노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과감히 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왕비를 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 이상 그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잘못한 것은 송씨 가문과 관련된 부분 뿐이었지만, 암살 시도가 담판 하루 전날 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심리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수란석은 손등으로 증언 문서를 눌러 가리키며 사여묵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이 일 뿐이고, 암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사여묵은 감히 그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사부님,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어째서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너희는 너희 일에나 집중하거라. 나는 여기서 지켜보며 상황을 살필 테니. 일은 어떻게 됐느냐? 사람은 잡았느냐?"무소위의 질문을 듣고 보니 그가 오늘 밤의 암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사여묵은 다소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석석과 그들이 정영수를 붙잡아 대리사에 넘겼습니다. 정영수는 본인이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라 자부했지만 석석을 만나 결국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그렇군." 무소위는 담담히 응답한 후 송석석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다른 장점은 전혀 없고 그나마 무술만 조금 할 뿐이다. 게다가 정영수는 진짜 서경의 제일가는 고수도 아니지. 서경의 고수들은 대부분 조정에 나서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를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라.""알겠습니다." 송석석은 얌전히 대답했다.송석석은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완전히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고 어떤 이는 존경했으며, 또 어떤 이는 질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소위만은 매산에서 지냈을 때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염선생은 이들이 궁중 연회 이후에 겪은 일들과 연황실과 회왕부의 움직임, 그리고 회동관에서 전해온 보고 내용을 대략 정리해 무소위에게 보고했다.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사여묵이 말을 꺼내려 했으나 무소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잠자는 것만큼은 절대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네가 이번 담판의 주관자이니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어서 가서 쉬도록."사부의 명령에 사여묵은 거역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 물었다. "사백께서 마당을 폭파하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그러자 염선생은 깜짝 놀라며 얼른 눈짓으로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사여묵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그저 화약을 가지고
염선생은 배를 문지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왕부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소?”“마차 세 대가 후문에 대기 중이며 그 안에 물건들을 싣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니 금은과 귀중품으로 보였습니다.”“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군.”염선생이 말했다. “무사부님, 염선생님, 저희가 사람을 보내 도중에 그들을 막는건 어떠신지요?”염선생은 겸손하게 사숙의 의견을 물었다. “무사부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가 뭐 어디로 가겠나? 분명 연주로 갈 것이다. 사람을 붙여 중간에 그의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아라. 빈손으로 연주에 가게 두고 연주에 도착한 이후에는……” 그는 평무종을 한 번 쓱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사람을 보내 그를 감시하게 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해라.”평무종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알겠습니다!”염선생은 무사부님이 감시를 붙일 건 알았지만 금은과 귀중품을 모두 훔쳐 오라는 지시를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에 쏙 들었다.무소위는 두 사람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마침내 벌을 풀어주기로 했다. “물독을 밖으로 내가서 내려놓고 할 일을 하러 가거라.”두 사람은 대사면을 받은 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물독을 이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이 워낙 커서 문을 겨우 빠져나갔다. 문이 조금이라도 작았다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했을 터였다.두 사람은 물독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와 짧은 훈계를 들었다. 그들은 벌받는 것에 익숙해서 모든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사숙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무소위는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이 너희를 벌주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하느냐? 원망할거면 너희들의 못난 사부를 탓해라. 너희 사부는 산에서 화약을 연구하다가 내 마당을 날려 버리고도 뻔뻔하게 내게 진성까지 와 자기 제자들을 도와 달라 청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다. 너희가 벌을 조금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면 내 마음의 화가 도저히 풀리지
그녀는 결코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비루하게 살아남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그녀는 사람이 평생토록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했다. 여장군이 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이토록 넓은데, 충분히 강인하게 버틴다면 한 자리라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하지만 전북망은 그저 그녀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탈출 경로를 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번에 서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아시오? 합치면 백여 명이고, 시위만 해도 최소 예순 명이오. 내가 구해낼 수 있을 리 없잖소.”“혼자 할 필요 없으십니다, 장군님. 북명왕부가 도와줄 겁니다.” 이방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북망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제가 서경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반드시 소승도 함께 데려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북명왕부는 소승을 못 본체 하지 않을 겁니다. 장군님은 단지 그들이 소승을 구할 때 저를 구해내면 됩니다.”전북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온몸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하였소? 무슨 수로 서경 사람들이 소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다는 거요?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오?”이방은 그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알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일을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 장군님과 저 사이의 빚은 깔끔하게 청산되는 겁니다. 앞으로 제가 죽든 살든 장군님과는 아무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아니, 난 받아드릴 수 없소.” 전북망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도와줄 수 없소.”“장군님, 장군님의 마음속엔 언제나 송석석이 남아 있겠지요. 장군님은 결국 저를 저버린 셈이 되는 겁니다.” 이방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도 저는 장군님을 위해 진술까지 바꿨습니다. 정말 조금의 정마저도 잊
담판을 앞둔 전달 밤,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회동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대리사 역시 밤새 재판을 진행했다. 형부에서는 이방이 자백한 이후로 줄곧 전북망을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이방이 형부에 들어온 후 이렇게까지 약해진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택은 담판이 끝난 후 이방이 서경 사신에게 인계될 것이며 죽음도 쉽게 맞지 못할 잔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형수도 죽기 전에는 가족을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그는 오늘 밤 둘의 만남을 허락했다. 물론, 그 또한 감옥에서만 허용되었다. 이택은 전북망을 감옥으로 데려오라 명령하였다. 아전들이 감옥 문을 열어주자 전북망이 안으로 들어갔고 이택은 밖에서 대기했다. 당연히 전북망은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을 받아 어떠한 날카로운 물건도 지니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방이 자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이방은 현재 여성 수감자용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택은 엄중한 병력으로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작은 등불이 두 사람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었다. 성릉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당당함은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오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초라함, 그리고 절망과 혼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장군님을 위해 제 진술을 바꿨습니다.” 이방은 눈앞의 이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지가 꺾인 모습에 그녀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들에게 성릉관 일은 장군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니 장군님은 무사하실 것입니다.”전북망이 대답했다.“그건 사실이오.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소.” “하지만 장군님께서 개입하시기 전에는 소승이 모든 일의 주동자였습니다.”“그 말은 성립되지 않소. 황제와 형부는 믿지 않을 것이오.”이방의 얼굴이 더욱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상관없습니다. 서경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