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혜민과 문은혜는 차우미의 옆에서 짐을 들어주고 있는 온이샘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그들은 왜 온이샘이 차우미와 함께 있는지, 그들이 무슨 관계인지 무척 궁금했다.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가족의 짐을 거의 다 들고 있는 온이샘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문은혜는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온이샘이 이런 곳에서 차우미와 함께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주혜민의 시선도 온이샘과 차우미를 향하고 있었다.하선주는 주혜민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가 문이 열리자 먼저 차우미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차우미의 어깨를 부딪히고 휙 나가버렸다.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온이샘 쪽으로 상체가 기울어졌고 온이샘은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인상을 찌푸리며 나간 사람을 노려보았다.임상희였다.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이었다.온이샘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어깨와 손을 동시에 부딪힌 차우미는 통증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밀치고 지나간 임상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임상희는 뭐에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로비까지 걸어갔다.문은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차우미와 하선주에게 다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아침에 애랑 다툼이 좀 있었는데 철이 없어서 그래요.”하선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보다가 문은혜의 사과를 듣자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었다.“괜찮아요. 어서 애나 따라가 봐요.”화가 났지만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사과를 하는데 안 받아줄 수도 없었다.“정말 죄송합니다.”재차 사과한 문은혜는 다급히 임상희를 쫓아갔다.“상희야, 같이 가.”주혜민은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차우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는 온이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확신이 선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구나. 이제 안심이네.’주혜민은 그제야 밝은 표정으로 임상희 모녀를 쫓아갔다. 하선주가 떠나는 그들을 보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재수가 없으려니까 쟤만
문은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주혜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아까 그 사람 기억해?”문은혜가 멈칫하며 물었다.“가온그룹 후계자 말이야?”주혜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은혜는 잠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당연히 기억하지. 그런데 해외에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국내로 들어온 줄은 몰랐어.”잠시 숨을 고른 문은혜가 말했다.“게다가 차우미랑 같이 있을 줄은 몰랐지. 둘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걸까?”아까 두 사람 모습을 봤을 때 온이샘이 차우미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나상준과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변에 벌써 남자가 생겼을 줄은 몰랐다.주혜민은 차우미를 살뜰히 챙기던 온이샘의 모습과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던 차우미의 태도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인연이라는 건 참 복잡하고 묘한 거라니까.”문은혜가 말했다.“그래. 너랑 상준이도 마찬가지잖아.”주혜민이 말했다.“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청주 공항.멕시코에서 출발했던 비행기가 서서히 청주 공항에 착륙했다.평소처럼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은 나상준이 VIP통로를 나오고 있었다.“차우미 씨는 이미 퇴원하셔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주혜민 씨와 임상희 씨도 오늘 퇴원해서 공항으로 갔고요. 문 박사님께서도 이번에 돌아오셔서 같이 청주로 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그래.”나상준은 앞만 보고 걸으며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티켓은 예매했지?”“당연하죠. 열한 시 십분 비행기입니다.”나상준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열 시 정각이었다.그들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출구로 향했다.그 시각, 안평.낡은 아파트로 돌아온 뒤, 하선주는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치더니 한 시간이 지나 풍성한 밥상을 차렸다.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를 끝냈다.식사가 끝난 뒤, 하선주는 온이샘이랑 시내를 둘러보고 오라고 딸을
“전화 좀 받고 올게.”온이샘이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차우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녀는 낡은 건물이 줄지은 거리를 조금 앞장서서 걸었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딘 건물은 색이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길가 양쪽에 벚나무가 줄지어 있었는데 나무에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가지가 풍성하게 뻗어나간 나무는 해마다 벚꽃철이 되면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이곳은 길가 노점에서 각종 생필품과 지역 특산물을 팔고 있었다. 점주 대부분이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었으며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이었다.돌아온 뒤로 이렇게 느긋하게 거리를 걸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곳은 3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여전히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이곳이 주는 느낌은 그녀에게 조금 새로웠다. 아마 세월이 흘러 그녀가 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차우미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둘러보며 이곳의 모든 것을 차분하게 느꼈다.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 안에 들어온 그림자가 그녀의 상념을 멈추게 했다.운동복 차림에 가방을 멘 십대 소년이 입에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소년은 자기보다 키가 작은 남자 아이의 멱살을 잡더니 그 소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는 소년은 차우미도 아는 얼굴이었다.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소년은 외삼촌네 아들 준혁이었다.3년 만에 처음 보는 아이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이목구비도 더 입체적으로 자랐다.그녀가 결혼식을 올리던 해에 소년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식에 참석하지는 못했다.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바로는 아이는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원하던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들었다.3년이 지났으니 이제 수능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반항심이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어렸을 때부터 준혁이는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비록 외삼촌 내외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부부
“그래. 넌 돌아가서 푹 쉬고 의사가 당부했던 말 잊지 말고 지켜. 시간 나면 또 보러 올게.”“그럴 필요 없어. 나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자꾸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차우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나중에 시간 나면 내가 한번 선배 보러 갈게.”살짝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온이샘은 자신을 보러 온다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철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나를 보러 온다고 말한 건가?’그가 오매불망 꿈에서 그리던 상황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했다.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정말이야?”차우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어서 가서 일 봐. 서흔 씨 기다리겠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로 연락해.”“그래.”온이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대화를 끝내고 차우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소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부모님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인자한 부모님은 지역 특산물을 잔뜩 싸서 그의 차에 넣어주었다.온이샘이 극구 사양하자 차우미가 말했다.“선배, 받아 둬. 두고 간식처럼 먹으면 맛있어. 부모님께도 가져다드려.”그녀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안 받을 수는 없었다.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다음에는 우리 고향 특산물 가져올 테니까 먹어봐. 엄마는 강원도 분이신데 강원도 음식도 맛있어.”차우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하선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두 분도 어서 들어가세요.”차에 오른 온이샘은 하선주 부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웃는 얼굴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차우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는 천천히 시동을 걸고 아쉬운 마음으로 아파트를 벗어났다.백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우미도 천천히 나를 받아들이고
차동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차우미와 하선주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하선주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어?”차우미가 말했다.“준혁이 걔 요즘 어떻게 지내나 해서.”“준혁이?”하선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나도 한동안 못 봤는데 아마 지금쯤 수능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몇 달 전 추석이었던 것 같아.”“준혁이 걔 키가 엄청 컸어. 네 외삼촌보다 더 크더라. 얼굴도 잘생겨서 얼마나 예쁨을 받는지 몰라.”준혁이 얘기가 나오자 하선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우리가 그때 그랬거든. 조금만 더 크면 여자 여럿 울리겠다고.”하선주의 말을 통해 들은 준혁이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하지만 오늘 봤던 준혁이의 모습은 그들이 기억하는 모습과 전혀 달랐다.차우미는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아마 대학 입시 끝나면 안평을 떠날 것 같아. 네 외숙모 얘기 들어보니까 준혁이 걔 청주대학을 지망하는 것 같더라고.”“청주대학?”차우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청주대학은 국내 명문대학 중 한 곳으로 오랜 역사와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낸 것으로 유명했다.청주대학에 입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이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어쩌면 희망이 있었다.하지만 어렸을 때 준혁이가 지망하던 곳은 차우미가 다녔던 대학교였다.하선주는 말이 없어진 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도 놀랐지?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했어.”“어릴 때 준혁이는 네가 다니던 대학에 간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잖아.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더니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더라. 지금 전교 1등이라고 들었어.”엄마의 말을 들으니 차우미는 걱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줄곧 전교 1등이었어?”“그래.”“3년 동안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을걸. 네 외숙모가 매번 준혁이 얘기할 때마다 얼마나 자랑하는지 몰라.”“애가 참하고 성실해. 손이 안 가는 아이라니까. 요즘 애들에 비하면 네
그녀의 상황은 진작에 진정국에게 얘기했는데 지금 연락이 왔다는 건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차우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손이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거길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차동수가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냥 밥 먹는 자리라고 괜찮다고 하셨어. 그쪽에서 너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나 봐. 네 상황을 얘기했는데도 괜찮다고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신다더라.”“물론 네가 가고 싶지 않으면 내가 아저씨한테 잘 얘기할게.”차동수는 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차우미는 지금 거절하면 박물관 이미지에도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밥만 먹는 자리라고 했으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갈게.”주최측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조각사들의 집까지 차를 보냈다.차우미는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차에 올랐다.“우미 씨, 손 다쳤다던데 지금은 좀 어때?”박물관에서 일한지 가장 오래된 선배 박종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차우미를 살뜰히 챙기는 선배였고 차우미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딱지가 앉았으니 천천히 아물 거예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어디 봐봐.”박종웅은 핸드폰 불빛으로 그녀의 손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바닥 대부분이 화상으로 피딱지가 앉아 있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박종욱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뼈는 괜찮아?”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뼈는 멀쩡해요.”“그럼 다행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뼈 다치면 귀찮아져. 최근에는 일도 하지 말고 상처 치료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물도 묻히지 말고. 피딱지가 떨어지면 괜찮을 거야.”“걱정 마세요. 저 괜찮아요.”“그래.”박종욱은 최근 그녀가 없는 사이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작품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는 많이 밀려 있었고 주문 의뢰와 인터뷰, 복구 작업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차우
날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밝은 보름달이 하늘에 걸렸다. 환한 가로등 불빛과 별하늘이 어우러져 조용한 안평 도심도 번화 도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오두막은 번화가를 조금 벗어난 교외의 명승지에 지어졌다. 고대의 왕궁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해마다 안평에 여행 오는 손님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었다.게다가 음식도 맛있다고 소문 나서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다녀간 뒤로 안평을 대표하는 명승지가 되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이 처음 만난 곳이 이곳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그들은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3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는 3년 전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그에게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다시 나상준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짙은 회색 정장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그는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가 살짝 아래로 드리웠다.주변의 형형색색의 복고풍 가로등과 그의 모습은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차우미는 3년 전 그와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밤이었고 이런 아련한 풍경이었던 것 같았다.“벌써 도착했어? 자,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다른 차를 타고 온 박물관 조각사들이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그들은 전부 이 업계에서 최소 몇십 년을 일한 노장들이었다.담당자가 다가와서 조각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박종욱은 차우미가 멍 때리고 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미 씨, 빨리 들어가지 않고 뭐 해?”차우미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요.”비록 나상준이 무슨 이유로 여기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고 왜 하필 이 시간에 그녀와 마주쳤는지도 알 길이 없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차우미는
“비서한테 연락 받았는데 그쪽에서 다 도착했다고 하더라고. 넌 어디야? 도착했어?”“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건 아닌지 모르겠네.”수화기 너머로 자애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상준은 멀어지는 가녀린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도착했어요.”“정말? 내가 괜한 약속을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 바쁘면 억지로 자리 지킬 필요 없어. 언제든 돌아가도 돼. 다음에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야.”“아니에요. 이번 이벤트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 네가 공예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 네가 있으니 이번 이벤트 잘될 것 같아.”“문 앞이야? 내가 비서 내보낼게.”“아니요. 이미 들어왔어요.”“그래.”전화를 끊은 뒤, 나상준은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진 복도 끝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담당자는 차우미 일행을 룸으로 안내했다.족히 스무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룸이었다.주최측 인원들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담당자가 진정국을 바라보며 소개했다.“이분은 하 교수님이십니다.”진정국은 곧바로 하 교수라는 노인에게 악수를 청했다.“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평 박물관 관장 진정국입니다. 하 교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반가워요. 다들 편하게 앉아요.”하 교수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70대 노인이었다.차우미가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려는데 하 교수가 입을 열었다.“저분이 박물관 최연소 여자 조각사인가 봐요?”오기 전에 이미 안평 박물관에 대해 조사를 끝냈기에 차우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진정국이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친구의 외동딸인데 어려서부터 제 친구를 따라 목공예를 익혔죠. 타고난 재능이 남달라서 나이는 어려도 이 일을 몇십 년 동안 해온 선배들 못지 않아요.”말을 마친 진정국은 차우미를 향해 손짓했다.“우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