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미가 두 번이나 불렀지만 나상준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입술을 달싹이던 차우미는 다시 부르려다 말았다.대답도 없는 그를 가만히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시선을 돌린 차우미는 병뚜껑을 닫고 물을 한쪽에 두려고 했다.그러나 이 순간 옆에 있던 나상준이 그녀의 손에 있던 생수를 가져갔다.멈칫하던 차우미가 옆을 바라보니 나상준이 눈을 뜨고 병뚜껑을 열어 물을 마시고 있었다.차우미는 냉정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도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근처에 있는 평이 좋은 레스토랑을 찾았어. 그곳에 가서 밥 먹자.”물을 마신 나상준이 병뚜껑을 닫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응.”그의 대답을 들은 차우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그는 마치 아이 같았다. 비록 화가 났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느낌이었다.이 시간에 차가 많이 없기에 차는 순조롭게 십여 분 만에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비록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만 나누고 다시 말하지 않았지만 차우미는 분위기가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차가 멈추자 나상준과 함께 차에서 내린 차우미가 입을 열었다.“오늘 나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점심은 상준 씨가 샀으니 저녁은 내가 살게.”조금 전에 나상준에게 돈을 내지 말라고 해서 나상준이 화를 냈었다. 그래서 차우미는 이번에는 미리 말해 마음을 전달하면 오해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차우미의 말에 나상준은 대답이 없었다.그는 팔에 양복 외투를 걸치고 곧바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차우미는 걸음을 멈추고 그가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그를 따라 들어갔다.차우미가 나상준을 따라 테이블에 앉자 종업원이 곧 메뉴판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나상준은 이번에는 차우미에게 주문을 맡기지 않았다. 그는 메뉴판을 보며 요리 이름을 하나씩 말했고 차우미는 맞은편에 앉은 그를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주문을 마친 나상준은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넸다.가기 전 종업원은 그들에게 차
차우미와 나상준은 함께 밥 먹을 때 본래 말이 적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상준은 평소 사람들과 함께 밥먹을 때처럼 별다른 점 없이 종종 차우미에게 음식을 집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마쳤다.배가 부르자 차우미는 냅킨을 들어 입술을 닦으며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차우미와 나상준은 밥을 빨리 먹는 편이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듯했다.핸드폰 화면에 보이는 10시를 보면서 차우미는 조금 놀랐다.지금 10시니 호텔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고 씻으면 11시가 될 것 같았다. 또 한 번 늦게 자게 될 것 같았지만 더 늦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생각하던 차우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상준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깊은 눈빛과 마주쳤다. 그는 입술을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에 차우미가 입을 열고 물어보려 했다. 그때 나상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은이 보러 언제 갈래?”갑작스러운 질문에 차우미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무슨 일 있어?”갑자기 예은이의 이름을 들은 그녀는 긴장하며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나상준을 바라봤다. 나상준은 냅킨을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잖아. 예은이가 나한테 물어보더라. 이건 좀 아니지 않아?”순간 차우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과 나상준의 이혼 사실을 예은이가 알고 있는지, 어른들이 예은이에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예은이의 물음이 나상준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건 알 수 있었다.차우미는 즉시 사과했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예은이가 상준 씨에게 전화했어? 난...”“회성에서 일 끝나면 나와 함께 청주로 돌아가자.”차우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상준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함께 청주로 가자는 의미는...'생각할 틈도 없이 나상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은이 보러 함께 가자. 약속은 지켜야지. 벌써 몇 달이 지나갔잖아. 이건 아이에게도 상처가 될 수
차우미는 예은이를 보러 청주로 가겠다고 말했다. 조금전 나상준은 차우미와 함께 가자고 말했지만 차우미의 말에 나상준은 포함되지 않았다.차우미가 나상준을 빼먹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나상준은 없었다.나상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차우미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내려 앉은 불빛이 신중함을 더해줬다.차우미의 말을 들은 나상준은 그녀의 확고한 눈빛을 보며 “응.” 이라고 말했다.혼자 가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가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식사를 마친 뒤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눈 둘은 더 이상 할게 없었기에 일어나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레스토랑을 빠져나가기전 나상준이 계산을 했다. 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오기전 나상준의 태도에서 어느정도 예상을 했었기에 차우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곧바로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고 운전기사는 호텔로 차를 몰았다.다만...만약 오늘 하성우가 두 사람과 함께 있었다면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놀랐을 것이다. 나상준의 태도와 그가 한 말, 그리고 처음과는 다르게 변화된 그의 모습에 말이다. 특히 마지막에 나상준이 한 일을 그가 알았다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그는 차우미를 도와주며 그녀에게 빚진 느낌을 주고 경계를 늦추게 했다. 거절당했을 때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차우미의 죄책감을 유발했고 차우미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려 할 때 그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차우미가 더 잘못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차우미가 자신도 모르게 나상준에게 마음을 열 때 나상준은 자신의 의도를 밝혔다. 그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차우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에 대해 말했기에 그의 행동은 순수하고도 좋은 의도로 보일 수 있었고 정정당당했다.만약 그의 의도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나상준의 문제는 아니었다.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아무 문제도 찾을 수 없었다. 나상준이 틀리지 않
차우미의 시선을 느낀 나상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를 돌봐주는 거 아니었어?”나상준은 차우미가 자신을 돌봐줘야 하기에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물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려 했다.차우미는 위층과 아래층을 번갈아 오고 가야 하는 자신을 위해 나상준이 저렇게 말했다는 걸 알아차렸다.“돌봐줘야지. 이 물건들은 내일 점심에 택배로 보낼 것들이라서 괜찮아. 내일 점심에 택배 기사분 불러서 보낼 거야.”나상준은 진지하게 대답하는 차우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나 내일 점심에 약 안 먹어도 돼?”“응?”‘이게 무슨 말이지?'차우미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상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일 점심에 사람들과 함께 밥 먹고 와서 약 먹을 거야. 약 먹고 나와 함께 물건들을 보내자.”차우미는 나상준이 도와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건들이 많았기에 그녀 혼자서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차우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괜찮아. 나는...”“나 아직 약 먹지 않았어. 지체하지 말고 올라가자.” 말을 마친 나상준은 몸을 돌려 호텔로 들어갔다.들어가기 전 나상준은 운전 기사에게 눈빛을 보냈고 나상준의 눈빛을 본 운전기사는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고 3208호가 아닌 3918호로 물건을 옮기려 했다. 멍해 있던 차우미가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3918호로 가져다주세요.”직원이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네, 알겠습니다.”차우미는 미소를 지으며 나상준을 따라갔다. 그녀는 나상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점심에 함께 밥 먹고 호텔로 돌아가서 약을 먹은 다음 물건을 보내면 시간도 지체되지 않고 나상준도 그녀를 도울 수 있었다.나상준은 항상 신중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의 맘속에는 결혼생활 3년간의 정이 계속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무정하게 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차우미는 빠른 걸음으로 나상준을 쫓아가 함께 엘리베이터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나상준은 차우미가 몸을 돌려 그를 올려봐서야 답했다.그녀는 테이블 앞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는 나상준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다시 한번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다른 곳은? 다른 곳은 다 나았어?”개인의 체질에 따라 감기가 낫는 속도는 천차만별인데 나상준의 회복 속도로 볼 때, 그는 남들보다 회복이 빠른 편에 속했고 약을 하루만 더 먹으면 완쾌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리고 나상준의 감기가 빨리 낫는다면 차우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나상준의 귀에 차우미의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응, 다른 곳은 다 괜찮아.”차우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한시름을 놓았고, 이내 고개를 다시 숙이면서 컵을 씻기 시작했다.“그러면 오늘 밤까지 약을 챙겨 먹고, 내일은 물에 타 먹는 감기약으로 바꾸는 게 좋겠어. 지금의 회복 속도라면 금방 괜찮아지겠네.”나상준의 상태를 파악한 차우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컵을 씻는 데 집중했고, 곧이어 그녀는 키친타월을 가져와 컵을 꼼꼼하게 닦았다.나상준도 그녀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다가 발길을 돌려 침실로 향했다.주방 정리가 끝나자마자, 주전자의 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고, 차우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리 중약이라도 적정하게 복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약의 효능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나상준에게 필요한 약들로만 골라냈다.그녀가 준비된 약과 따뜻한 물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상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침실 문이 열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차우미는 물컵과 약을 식탁 위에 다시 내려놓으면서 나상준을 불렀다.“상준 씨, 약 먹어요!”“...”아무리 불러도 그가 답이 없자, 차우미는 침실로 향했고 때마침 욕실에서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그녀는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상준 씨, 다 씻고 나와서 약 먹어, 밖에서 기다릴게.”차우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저벅저벅 침실을 나왔고,
나상준은 발걸음을 돌려 침대 옆 협탁으로 가서는 그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양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는 먼저 휴대폰에 비친 시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으면서 옷방으로 걸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여보세요?”“상준이 형, 나 할 말이 있어.”나상준은 늦은 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심각한 목소리에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무슨 일이야?”“오늘 밤 형수님이랑 차 안에 있을 때,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양훈은 자기가 차 안에서 들은 내용과 알아낸 정보들을 나상준에게 숨김없이 말했다.“다음 달 중순쯤에 형수님 큰외삼촌의 딸이자 사촌 언니인 하지유가 안평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어. 지인들에게 이미 청첩장도 다 전달한 상황이라 형수님도 별일 없으면 참석할 것 같아.”나상준은 단번에 양훈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알겠어.”“형수님의 사촌 언니와 예비 형부를 조사한 자료가 있는데 보내줄까?”“응, 보내줘.”“알겠어.”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훈은 두 사람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나상준은 자료를 다 보고 나서, 캄캄한 어둠이 드리워진 짙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소리 없이 흔들렸다.얼마 뒤, 그는 옷방에서 빠져나와 휴대폰을 다시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놓고 침실을 나왔다.한편, 차우미는 추운지 몸을 웅크리고 거실 소파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나상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짙은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새근새근 자는 차우미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그녀가 준비한 약과 물컵이 주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따뜻했던 물은 이미 다 식은 상태였다.나상준은 소파 앞에 와서 허리를 굽혀 차우미를 안아 들었고, 그 순간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뜨면서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면서 정신을 차렸고 이내 나상준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약 아직 안 먹었지? 일단 약부터 먹어.”이어 차우미는 나상준의 품에서 내려오려고
나상준의 강한 힘에 차우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갔다가 서서히 풀렸고, 그녀도 잠시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기를 잡았는지 몰라서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차우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물었다.“왜? 무슨 일 있어?”나상준은 잡았던 손을 놓으면서 조심스레 말했다.“우미 씨, 그냥 여기서 씻으면 안 돼?”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긴장했던 차우미는 그의 황당한 물음에 실소를 터뜨리면서 답했다.“옷들이 다 아래층에 있어서 거기서 씻는 게 편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피곤하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상준 씨가 먹은 약 중에 수면에 도움이 되는 약이 있어서 잠이 잘 올 거야.”“응, 알겠어.”모처럼 나상준은 차우미의 말에 고집을 피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차우미는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스위트룸을 나갔고, 나상준도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본 뒤 돌아서서 침실로 들어갔다.자기의 방에 들어온 차우미는 부랴부랴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그의 스위트룸에서 눈을 조금 붙인 탓인지 잠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지도 않았고, 샤워를 하니까 정신이 아까보다 더 말짱해진 것 같았다.잠시 후, 그녀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방 안에 있는 짐들을 깔끔하게 정리한 다음에야 휴대폰과 방 카드를 가지고 나상준의 스위트룸으로 향했다.이미 저녁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라 호텔 안은 엄청나게 조용했고, 그의 스위트룸에도 정적만이 맴돌았다.나상준이 이미 침실에 들어가서 자는 듯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를 위해 특별히 열어둔 것 같이 침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침실의 등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주위의 모든 것이 마치 깊은 겨울잠에 빠진 것처럼 아무런 기척이 없자, 차우미는 자기도 모르게 숨소리조차 나지막하게 내쉬면서 침실로 들어갔다.다음 순간, 그녀는 방 안의 광경을 보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그도
차우미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건 내가 병원에 가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잖아. 넌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서 방심하면 안 돼. 난 정말 괜찮으니까, 내 말대로 얼른 침대에 가서 자.”“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갑작스러운 그의 반문에 차우미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이때, 나상준이 담담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갔다.“넌 더 이상 내 아내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네 말을 꼭 들어야 하는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나상준이 예상치 못한 말을 계속 내뱉자, 그녀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 먼저 잘 테니까 방해하지 마.”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상준은 소파에 다시 누웠고 담요를 덮으면서 눈을 감았다.어린이 맞춤용으로 제작된 담요가 건장한 나상준한테는 너무 작았고,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발이 튀어나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그러나 차우미는 입안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맴돌 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그렇다고 해도 나상준과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오늘 밤 무조건 소파에서 자겠다는 그의 강경한 태도에 그녀는 결국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그래, 담요는 너무 얇아서 감기가 심해질 수 있으니까 여벌 이불이라도 있는지 찾아봐야겠어.’그러나 그녀가 옷장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여벌 이불은 존재하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호텔에서 이불을 더 배치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늦은 시간이라 웨이터에게 연락한다고 해도 언제 가져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고민에 빠져있던 차우미는 금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빠른 걸음으로 스위트룸을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향했다.‘아참, 내 방에도 이불이 있었지. 그걸 가져다 상준 씨한테 덮어주면 되겠네.’나상준은 차우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듣고 슬며시 눈을 떴다.그러나 그는 차우미가 무슨 생각으로 급하게 방을 나갔는지 아는 데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