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바로 그때, 심재경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강문희 씨.”심재경의 목소리에 안이슬은 잠깐 멈칫했다.“제가 소개를 못했군요.”그는 여유롭게 티슈로 입을 닦고는 안이슬을 가리키더니 비비안에게 말했다.“이분은 제가 새로 모셔 온 베이비시터세요.”심재경에게 반찬을 집어주고 있던 비비안은 그 말을 듣더니 허리를 곧게 폈다.“베이비시터셨군요.”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투였지만 안이슬은 비비안과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의 적개심을 느낄 수 있었다.“이분은 제 비서, 비비안 씨예요.”심재경은 일부러 안이슬에게 비비안을 소개했다.하지만 안이슬은 별다른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저는 심 대표님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베이비시터예요. 아이의 일상적인 보살핌을 책임지고 있어요.”안이슬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는데 능력 있는 베이비시터셨군요. 우리 대표님께서 모셔 올 정도면 엄청 대단한 분이시겠죠?”비비안은 떠보며 물었는데 겉으로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대표님은 워낙 안목이 훌륭하셔서 아이를 강문희 씨에게 맡겼다는 건 분명 강문희 씨의 능력이 대단하시다는 것을 뜻하겠죠. 앞으로 아이를 잘 보살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요.”비비안이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살갑게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제가 오늘 특별히 아이를 위해 아기용품을 좀 샀어요. 확인해 보시고 모자란 것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세요, 그럼 제가 내일 사러 갈게요.”비비안은 도시락 외에 큰 종이 박스도 하나 챙겨왔다.안이슬은 바로 종이 박스를 챙겨왔는데 그 안에는 적지 않은 아기용품이 있었다.“모두 해외 브랜드예요.”안이슬이 멍한 채 제자리에 서 있자 비비안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더니 빠르게 그녀가 산 젖병 세척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이 브랜드, 국내에서 사기 힘들어요. 워낙 안전한 재료로 만들어졌고, 사용감도 좋다고 해서 저
“아니요.”비비안은 다급하게 거절하면서 자기가 산 물건들을 안이슬의 손에 마구 쥐여주었다.“대표님께서 워낙 바쁘시기에 강문희 씨를 믿고 대신 아이의 물건을 사라고 하셨을 거예요. 그러니 강문희 씨께서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인 건 맞지만 저도 대표님 비서로서 대표님의 하나뿐인 아이를 신경 써야죠. 그리고 대표님께서도 저를 신임하셔서 비서로 뽑으신 게 아닐까요?”마지막 한 마디는 안이슬이 아닌 심재경에게 한 말이었다.그녀는 강제로 안이슬의 손에 물건을 쥐여준 후 웃으면서 심재경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대표님, 아이는 정성을 들여 키우셔야죠. 특히 여자아이면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해요.”비비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심재경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심재경은 바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옆으로 피하면서 그녀와 거리를 뒀다.‘정말 징그럽네.’그는 비비안을 집에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안이슬의 변화된 표정을 보고는 끝내 그 말을 입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안이슬도 자신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는 걸 인지하고는 일부러 비비안이 가져온 물건들을 살펴보는 척했다.‘다 좋은 물건이긴 한데. 한낱 비서로서 무슨 돈으로 이 많은 걸 산 거야? 심재경의 마음을 얻으려고 돈을 제대로 썼겠는데?’안이슬은 여기에 남아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비비안이 가져온 물건을 챙기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서 아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안이슬은 아이가 누워있는 바운서 옆에 앉고는 창밖을 내다봤다.밤이 깊어져 하늘은 어둠으로 뒤덮였다.바운서에 누워 고요히 자고 있는 딸을 보더니 안이슬의 마음도 차츰 평온해진 것 같았다.“쪽쪽...”바운서에 누워있던 아이가 입을 꾸물거렸다.앵두같이 빨간 입술을 가진 아이는 너무나도 귀여워 안이슬은 손을 내밀어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줬다.아이는 이미 잠에서 깼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게 궁금한 듯 큰 눈을 똘망똘망 뜨곤 했다.안이슬은 웃으면서 아이와 놀아주고는 아이의 볼을 어루만지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
안이슬이 아이를 신경 쓸수록 비비안은 더욱 위기감을 느꼈다.“저는 대표님께서 특별히 고용한 베이비시터예요. 아이를 달래는 일은 저에게 맡기면 돼요. 비비안 씨는 대표님과 함께...”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비안이 덥석 그녀의 손을 잡고는 눈썹을 치켜들었다.“저도 사촌 언니네 아이를 집에서 안아본 경험이 있거든요. 강문희 씨는 음식도 안 드신 것 같은데 나가서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떨까요?”두 사람은 그 누구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두 사람 뭐 하는 거예요?”심재경이 갑자기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방 안에는 아직도 아이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지만 눈앞의 두 사람은 마치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대표님.”비비안은 바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이가 갑자기 울길래 혹시나 아이가 불편한 데는 없는지 확인하러 왔어요.”안이슬이 그 틈을 타 비비안에게서 벗어나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대표님,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줄 시간이에요.”안이슬이 말했다.“마침 잘됐네요.”핑계를 대고 방을 나서려고 했는데 안이슬의 말을 듣고 비비안은 눈을 번쩍 떴다.“제가 사 온 기저귀로 바꾸죠?”말을 마친 후 비비안은 주위를 훑어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자기가 가져온 종이 박스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안에 들어있던 기저귀를 꺼냈다.“바로 이거예요! 외국 회사에서 아이 맞춤으로 기저귀를 제작하더라고요, 특별 제작한 기저귀가 일반 기저귀보다 훨씬 아이들에게 좋대요.”비비안이 심재경에게 잘 보이려는 모습을 보고 안이슬은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계속 퀄리티와 가격을 강조했지만 진짜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건 맞는가?지금까지는 그저 아이를 이용해 심재경의 환심을 사려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면...안이슬은 차마 더 생각하고도 싶지 않았다.이런 사람이 심재경의 곁에 남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아이를 대할 것인가?“이런 거 필요 없어요.”안이슬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그녀는 심재경 쪽으
심재경은 테이블 위에 놓인 티슈로 입을 닦고 시간을 확인했는데 벌써 저녁 열 한시였다. 하지만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특히 비비안이 들어온 후로 샛별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평소라면 이 시간은 안이슬이 기저귀를 갈아준 후 아이를 재우는 시간이었다.심재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안이슬을 바라봤다.그는 안이슬이 남기를 원했다. 게다가 전에 두 사람은 약속까지 했었다. 다만 그는 어떻게 이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자칫 말실수라도 하면 안이슬에게 밉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그리고 안이슬은 분명 근처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구체적인 위치를 안 알려주는 걸로 봐선 아마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안이슬은 심재경이 고민하는 모습을 알아챘다.사실 그녀는 이곳에 남고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대표님?”심재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비안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다가갔다.비비안이 드디어 아이의 방에서 나가사 안이슬은 재빠르게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줬다.“강문희 씨, 혹시 오늘 저녁 샛별이를 좀 봐줄 수 있을까요? 게스트 룸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었어요. 필요한 다른 물건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기저귀를 정리하던 안이슬은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그녀는 심재경이 자기를 머물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결국 비비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를 남게 하는 걸 보면 그래도 아직은 아이가 먼저인 듯싶었다.적어도 여자와 아이 사이에서 심재경은 아이를 선택했다.그 생각에 안이슬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럼 오늘 저녁은 신세를 질게요.”대답을 한 뒤 안이슬은 샛별이가 썼던 기저귀를 계속 정리했다.아무리 아이의 기저귀라고 하지만 그 냄새는 고약했다.하지만 안이슬은 이미 습관 되었고, 심지어 이것보다 몇 배는 더 고약한 냄새도 많이 맡았었다.그녀와는 달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비안은 차마 견
샛별이를 천천히 바운서에 내려놓고 안이슬은 바운서를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아이의 방은 곧이어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안이슬도 시간이 이대로 멈추길 바랐다.화기애애한 이쪽 분위기와는 달리, 심재경과 비비안이 있는 서재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싸늘했다.“오늘 도시락만 주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닐 텐데요?”비비안은 그의 비서이긴 했으나 그의 개인적인 일정까지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게다가 비비안은 오늘 그렇게나 많은 아기용품을 가져왔고, 수시로 강문희를 관찰했다.이 모든 걸 심재경은 알아챘지만 강문희 앞에서 비비안에게 따지고 싶진 않았다.심재경의 서재는 유난히 심플했다. 한 줄로 늘어선 책장과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뿐이었다.지금 이 시각, 비비안은 심재경의 맞은편에 서 있었는데 그녀는 심재경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어떤 행동이 심재경의 의심을 샀는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분명 아까 밥 먹을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의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저는 그저 대표님을 챙겨주고 싶어서요. 어젯밤에 잘 주무시지 못한 것도 아이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제가 대표님 비서로서 그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어요.”비비안이 솔직하게 말하더니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다만 심재경이 볼 수 없을 만큼 고개를 푹 숙이고는 교활하고 사악한 눈빛을 반짝였다.오늘 비비안이 이곳으로 온 목적은 바로 안이슬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심재경이 안이슬을 그저 베이비시터로만 대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안이슬의 얼굴은 그렇게 출중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매는 동영상 속 몸매보다 훨씬 더 우월했다.“비비안 씨, 이건 제 사적인 일입니다.”심재경은 딱 비비안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얘기했다. 그는 비비안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뜻을 알아챌 거로 생각했다.“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세요.”하지만 비비안은 어금니를 깨물었다.심재경은 그 베이비시터를 남기면서도 이 늦은 시간에 그녀를 집으로
인기척을 느낀 심재경은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대표님, 술 마시려고요?”들통난 심재경은 그제야 자기 손에 맥주 한 캔이 쥐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는 당황한 나머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손에 쥐었다.“아, 우유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맥주가 앞을 가려서 들고 있었어요.”심재경은 재빨리 맥주를 도로 넣었다.다시 고개를 들 때 안이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어리둥절했는데 곧이어 코끝에 우유의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자, 여기요.”안이슬은 심재경의 손 뒤로 냉장고에서 우유를 찾아 심재경에게 건넸다.‘내가 전에 정리할 때 위치를 바꿨나? 그래서 못 찾는 건가?’안이슬이 준 우유를 건네받고는 심재경은 저도 모르게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강문희 씨도 좀 마실래요?”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였기에 김이 나고 있었다.예전의 안이슬은 이런 찬 음식을 가장 좋아했다. 특히 냉장고에 넣어둔 우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체질 때문에 찬 음식은 되도록 피했다. 예전처럼 찬 음식을 찾게 되지도 않았다.무심결에 심재경과 눈이 마주쳐 안이슬은 심재경의 떠보려는 속셈을 알아챘다.“저녁에 우유를 마신 습관이 없었어요. 그리고 찬 음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대표님께서 혹시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서 쉬겠습니다.”안이슬이 자리를 뜬 후 심재경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차가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아니면 정말 차가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심재경은 살포시 샛별의 방문을 열었는데 깊이 잠든 샛별을 보고는 또다시 살포시 문을 닫았다.안이슬은 역시 샛별은 잘 돌보고 있었다.가정부보다 나은 부모는 없으니 말이다...심재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안이슬이 아이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심재경은 잘 알고 있었다.심재경의 방은 바로 안이슬의 방 맞은편에 있었다. 안이슬이 문을 열면 바로 심재경의 방문과 마주할 수 있었다.안이슬은 밤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무래도 새 침대였기에 쉽게
“괜찮아요. 집이 워낙 크기도 하고, 강문희 씨가 아이를 돌보면서 청소까지 하는 건 힘들죠.”심재경은 그녀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게 잘 타일렀다.안이슬이 대답했다.“네, 대표님. 오늘은 아이를 위해 세 가지의 이유식을 준비했습니다.”안이슬은 미리 준비한 쌀죽, 계란찜, 그리고 야채즙을 꺼냈다.“아이는 지금 젖을 떼고 이유식으로 넘어가야 해요. 이 이유식은 아이가 새로운 식단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심재경이 하나하나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부분에 대해서 심재경이 많은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는 안이슬을 믿었다.“강문희 씨라면 안심하고 믿어도 되죠? 다만 이것만 먹이면 좀 단조롭지 않을까요?”심재경은 아이의 영양소 문제가 걱정되었다.안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녀 또한 생각했던 문제였다.“이유식을 시작한 초기에는 천천히 음식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 좋아요. 그래야 아이가 어떤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심지어 알레르기가 있는지 체크할 수 있어요.”심재경은 그녀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 많이 배우고 공부한 걸 보아낼 수 있었다.“역시 강문희 씨가 주도면밀하시네요. 샛별이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말해주세요.”심재경이 옷을 입자 안이슬은 그가 곧 출근할 것을 예상했다.안이슬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별장을 나서는 심재경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오늘 그녀는 샛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샛별이도 이제 천천히 젖을 뗄 수 있을 것이다.회사에 도착한 후 비비안은 가장 먼저 심재경에게 업무를 보고했다.“대표님, 혹시 가정부 찾고 계시나요?”비비안은 무심결에 심재경의 스크린을 보고서 그가 가정부를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네. 집에 가정부가 한 명 모자라서요.”아침에 안이슬이 조심스럽게 램프 커버를 씌우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재경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다만 오랫동안 찾았는데도 심재경의 마음에 든 가정부는 단 한 명도 없었다.“대표님, 전에 제가 소개했던 가정부 말이
비비안은 미간을 구기고는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안이슬을 쳐다봤다.눈앞의 여자는 겨우 베이비시터인데도 대표님의 비서인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는 아이를 보며 비비안은 결국 목소리를 낮췄다.샛별이는 처음에 겁을 먹어 울음을 터뜨렸으나 다행히도 안이슬의 품에 안긴 채 다독임을 받고 곧바로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조그마한 얼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안이슬은 부드러운 손길로 샛별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고서야 고개를 돌려 비비안을 바라봤다.“비서라는 사람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예의조차 몰라요?”심재경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예의와 침착함을 구비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비비안 같은 성격의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채용되었는지 안이슬은 의심이 가기만 했다.“당신!”비비안은 안이슬의 말에 제대로 자극받아 손찌검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이곳은 심재경의 별장이었고, 혹시라도 그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기면 그녀만 손해였기에 비비안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언니, 정말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비비안은 겉으로 잘못을 인정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안이슬을 하찮게 여겼다.안이슬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언니? 참 친한 척은 잘하네.’“무슨 일로 나 찾아왔어요?”안이슬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손가락을 빨고 있는 샛별이를 바라봤다. 비비안에게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대표님께서 언니랑 같이 가정부 아주머니를 고르라고 저를 보내셨어요. 지금 바로 출발하죠? 기사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안이슬이 흠칫했다.지금 집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집을 비운다면 샛별이는 누가 돌본단 말인가?“괜찮아요. 비비안 씨 혼자 다녀와요.”안이슬은 샛별이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비비안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심재경이 직접 내린 분부이기도 했고, 그녀는 안이슬 앞에서 뽐내고 싶었기에 당
결혼식을 마친 후 방유정 아버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떠나기 전에 임지훈에게 회사를 완벽하게 인계하려고 회사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임지훈은 송연아와 강세헌 일행과 같이 먼저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쪽 일을 마무리했다. 비록 임지훈이 회사에 있으면 강세헌은 보다 한가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다고 해도 그냥 조금 더 바쁠 뿐이다. 어느 회사든 누가 떠나면 절대 안 되는 건 없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임지훈은 프랑스에서의 일들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서 방씨 가문 회사에 들어갔다.임지훈도 국내에 집이 있었지만 방유정과 같이 방씨 가문에 들어갔다. 데릴사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유정 아버지의 병을 알고 방유정이 부모님과 많을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지훈 역시 사위로서 그럴 의무가 있었다....반년 후, 방유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방유정 어머니는 그 충격에 순식간에 많이 늙었다.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집안 분위기는 아주 저조했는데 방유정의 대부분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예전의 임 비서는 이제 임 대표가 되어 그의 능력으로 방씨 가문은 아주 관리가 잘 되었고 3개월 후 방유정 어머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방유정이 드디어 임신하게 되면서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간 일도 어느 정도 잊혀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방유정도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방유정 어머니 역시 곧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정말로 모두 행복해할 만한 일이었다.방유정이 임신 6개월 때 그들은 프랑스로 갔는데 구애린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심재경의 딸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샛별이가 유일한 여자아이여서 모두가 예뻐했다. 샛별이는 아직 작고 어렸지만 찬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찬이는 샛별이 다리가 짧다고 계속 놀려줬으며 그게 재밌다고 샛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찬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샛별이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너무 귀여웠다.방유정이 말했다.“저도 딸을 낳고 싶어요.”구애린이 말했다.“그게
비록 손을 놓기 싫었지만, 방유정 아버지는 결국 방유정의 손을 임지훈에게 넘겨줬다.“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방유정도 아버지에게 말했다.“꼭 그렇게 할게요.”이어서 결혼식은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피로연까지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방유정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는데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결혼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런데 결혼시키고 나니 또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세상의 부모들은 다 그런가 보다.임지훈은 방유정을 데리고 강세헌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비록 모두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모두 방유정을 다시 한번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재경 친구의 사촌 동생이 아닌 임주훈의 아내로 말이다.구애린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방유정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윤이도 어른들 따라 한마디 했다.“축하해요.”방유정은 윤이를 보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그녀가 손을 뻗어 윤이의 얼굴을 만지자, 윤이가 손을 내밀었다.“안아줘요.”송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야, 안 돼.”방유정이 말했다.“괜찮아요.”그녀는 윤이를 안으며 말했다.“무겁지 않아요.”윤이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금색 비녀를 보고 만지려고 했다. 방유정이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다. 방유정은 아주 시원하게 바로 비녀를 빼서 윤이에게 주었는데 송연아는 윤이를 제지하지 못해서 미안해했다.“이러면 안 돼요.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괜찮아요.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윤이가 좋아하니 놀게 해요.”방유정은 정말 성격이 좋았다.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만큼 성품이 좋았다. 가끔 조금 오만하긴 하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두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송연아는 윤이를 안고 달래려고 했다.“윤이 착하지. 이건...”송연아는 윤이가 방유정을 어떻게 부르면 될지 생각했는데 방유정이 웃으며 말했다.“호칭일 뿐이니까 편
“지금 막 들었는데 유정 씨와 결혼한다면서요. 지금 방씨 가문에서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임지훈이 웃었다.“저 이래 봐도 능력 있는 남자예요.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봐요, 결혼도 금방 하죠?”구애린이 말했다.“이제 우리 모두 짝이 있네요.”찬이도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지훈이 삼촌, 축하해요.”“고마워.”임지훈이 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심재경이 물었다.“그런데 데릴사위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심재경의 말에 모두 놀라며 시선이 일제히 임지훈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다. 임지훈의 조건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충분히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데 말이다.“하긴, 방씨 가문에 가장이 필요하긴 해요.”심재경이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한마디 했다....임지훈의 결혼식으로 송연아와 강세헌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정을 늦췄다. 아무도 심재경의 결혼식을 보러 왔다가 임지의 결혼식까지 보게 될 줄을 생각을 못 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건 임지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듯이 방유정과의 결혼은 정말로 찰나의 결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 역시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임지훈이 진원우에게 말했다.“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진원우가 말했다.“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방씨 가문은 돈도 많고 유정 씨도 예쁘고 그 정도면 만족해야지.”“만족해. 다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글이었는데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결혼식은 방씨 가문에서 모두 준비했는데 방유정 딸 하나이고 또 사위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방씨 가문의 친척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록 데릴사위라고 하지만, 임지훈 측은 심재경이 준비했는데 심재경 본인도 금방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에 익숙한지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방유정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값진 웨딩드레스를 입었는
“잠도 잤는데 왜요? 모른 척하려고요?”방유정이 옷을 입더니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임지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임지훈이 말했다.“내 옷을 가져오지 않았잖아요. 나 입을 옷 없어요.”방유정은 그제야 임지훈이 옷이 없다는 걸 생각했다.“가져다 줄게요.”그녀는 곧바로 차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뭐 입을지는 알아서 찾아서 입고 내려와요.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방유정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지훈은 침대에서 내려 결혼 얘기이니만큼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가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방유정은 부모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부모는 그를 보자마자 더욱더 열정적이었다.임지훈이 건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저기...”“우리 딸 줄게요.”“아니에요. 지훈 씨가 저한테 시집 오는 거예요.”방유정이 정정했다.“...”“...”“...”방유정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유정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유정은 자신이 여자이며 이 집안에 다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버지가 중병이고 자기는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기에 어찌 보면 자기가 남편을 찾는다기보다는 방씨 가문의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인제야 그녀는 부모가 조급해하는 의도를 이해했고 그녀 역시 가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임지훈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임지훈을 각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겠는가.“유정 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임지훈은 뼈대가 있는 남자로서 데릴사위 할 생각은 없었다.방유정이 말했다.“후회하면 안 돼요!”“왜 안 돼요? 유정 씨가 뭘 원하든지 저 모두 만족시켜 줄 수...”“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방유정이 외치자, 임지훈은 오히려 우스웠다. 한 여자가 나한테 시집오라고 하다니!“우리 유정이가 시집가는 거 맞아요
지금 그녀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물으면 부모님은 더 속상해할 것 같았다.‘나 이제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좀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결혼, 그래 결혼해야 해.’그녀는 자기가 결혼해야만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상대도 지금 바로 방에 있지 않겠는가?‘남자 친구인 척을 해줬으니 이제 남편인 척해달라고 해야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도 되니까 결혼하자고 해야겠어.’방유정은 진료 기록부를 다시 원래 위치에 넣고 비틀거리며 부모님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임지훈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임지훈은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침대에 자기의 옷이 보이지 않아 방유정의 옆에 서서 물었다.“내 옷은요?”그는 방유정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내 옷은 지금 당신 차 트렁크에 있어요.”방유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훈 씨, 우리 결혼해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약을 잘못 먹었어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는데 임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울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얘기해 봐요. 제가 가서 때려줄게...”임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유정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임지훈은 갑작스러운 친밀감에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게... 유정 씨...”그가 말하려고 할 때 방유정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아래로 드리는 순간 몸에 걸친 유일한 가운마저 벗겨져서 흘러내렸다.“...”방유정은 워낙 임지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행동이 충격에 의한 도발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옷의 단추를 벗겨 가슴을 드러내고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하며 말했다.“저를 좀 봐봐요.”임지훈은 참을 수 없었는지 목젖을 굴렸는데 이름 모를 불길이 아랫배에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딱딱해졌다.“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임지훈도
방유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을 하시는 거였다.“화이팅!”방유정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지금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만 좋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선 자리를 만들어주고 남자를 유혹하라고까지 하시다니?그녀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엄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이제 나가야 해.”방유정의 아버지는 기사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갔고 방유정은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차가 떠나자,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차피 임지훈이 자고 있었기에 지루할 것 같아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그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임지훈을 놀려주려고 그가 곤히 자는 방으로 올라가서는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가져다가 침대 옆에 앉아 임지훈에게 예쁜 화장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임지훈이 깨지 않자, 옆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눈이 아파 오니 옆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임지훈은 이미 깨어나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언, 언제 깼어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유정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훈의 얼굴은 정말로 오페라 가수 같았는데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아팠다. 임지훈은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물었다.“다 웃었어요?”방유정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맘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임지훈이 말했다.“유정 씨를 저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이에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뭐라고요?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면 프랑스까지는 갈 거예요. 그런데 지훈 씨는 내가 싫다고요?”임지훈이 흠칫하자, 방유정이 그를 잡고 물었다.“지금 그
“방유정은 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알았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어서 지훈 씨 방으로 데려가.”방유정이 물었다.“어느 방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어머, 어떡해. 게스트룸은 아직 준비가 안 돼있어. 우선 네 방으로 데려가서 휴식하게 해.”방유정은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아빠, 엄마, 이 정도로 오픈 마인드였어요? 어떻게 제 방에 술 취한 남자를 데려가라고 하세요?”“네 말대로 취했는데 뭐 어때?”“술김에 어떤 짓도 한다는 말 몰라요?”방유정이 묻자, 그녀의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몰라.”방유정은 철저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과 임지훈이 정말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임지훈이 그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엄마 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고 하고 바로 결혼시킬 거야.”임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바탕 뿜었다. 방유정의 부모님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본인이 천당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로 귀여운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다.‘방유정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봐.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말이야.’방유정은 역겨워하며 말했다.“지훈 씨,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화장실로 가야지.”“취했잖아.”방유정 어머니가 가정부를 불러 치우게 했다.“그만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어서 방으로 데려다 쉬게 해.”방유정은 혼자서 임지훈을 옮길 수 없어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함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임지훈을 침대에 던졌는데 임지훈은 몸이 포근한 세계에 떨어진 듯 따뜻하고 향기로웠다.“무슨 향수를 써요?”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유정이 말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잠이나 자요.”임지훈은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말짱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말했다
임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해명하지 않아도 화는 나지 않았을 건데, 굳이 해명하니 용서해 줄게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거렸다.“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럼 좋은 말이 안 나가니까.”“...”임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그때 방유정의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요리를 집어 그의 앞접시에 건넸다.“이건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요리인데 맛봐요.”임지훈이 집어서 입어 넣고 먹어보더니 말했다.“맛있습니다.”방유정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고 방유정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따랐다.“평소 주량이 어떻게 돼요?”임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못합니다.”방유정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잘 마실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하시네요.”임지훈이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방유정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아빠, 지훈 씨는 일이 바빠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술을 많이 주지 마세요.”방유정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네. 그러니까 한 잔씩만 해요.”말하면서 방유정은 술을 가져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정말 분위기를 깬다.”방유정이 말했다.“두 분의 건강을 생각해서예요.”방유정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임지훈에게 한 잔 따르고 또 남편에게도 한 잔 따랐다.“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그냥 휴식하면 돼요. 비행기는 내일 타면 되는데 급해 할 거 없잖아요.”방유정은 어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엄마, 이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서 잠을 자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요?”“걱정하지 마. 조사해 봤는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방유정과 임지훈이 순간 놀랐다. 방유정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방유정 아버지는 아내를 힐끗 쳐다
“지훈 씨는 취미가 뭐예요?”방유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임지훈은 방유정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는데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재경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의 생활이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를 맞이해서 함께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방유정을 바라봤는데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유정은 아직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줄은 모를 것 같았다.“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봐요?”방유정의 물음에 임지훈이 되물었다.“어디가 이상한데요?”방유정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왜요? 설마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죠?”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당신은 성격도 안 좋고 또 엄청 잘난체하는데 내가 왜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요.”시간을 보며 임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굶었어요?”방유정이 그를 비웃었다.“식사 끝나면 저는 가도 되죠.”방유정은 순간 왠지 서운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여기는 제집이 아닌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방유정은 그를 향해 입을 삐쭉거리자, 임지훈은 의아해했다.“왜 그래요?”“내가 뭐요?”방유정은 짜증을 냈다.“유정 씨는 정말 변덕이 많네요. 그걸 고쳐요. 남자들은 변덕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방유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임지훈은 고개를 돌려 못에 있는 물고기들을 한 번 더 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방유정이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만 보였기에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