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3일 뒤에 가정법원에서 기다릴게.”나는 송지유와 함께 차에서 내렸고, 육준서는 빨개진 눈으로 같이 가려고 악을 썼지만 육상준에게 제지당했다.그리고 발버둥 치면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울며불며 외쳤다.“엄마, 제가 잘못해요.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앞으로 게임도 안 하고 장난감도 필요 없으니까 곁에 있어 줘요.”차 문이 쿵 하고 닫히고, 유리창 너머로 육상준에게 꽉 붙잡힌 육준서의 모습이 보였다.송지유는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왜?”나는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무덤덤하게 물었다.하지만 울컥하는 목소리까지 감출 수 없었다.그는 까치발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속상해하지 마세요. 전 절대 말썽을 피우지 않기로 약속할게요.”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아낌없이 퍼준 적이 있었기에 갑자기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되는 순간 이루 형언하기 힘든 고통이 밀려왔다.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이 또한 지나갈 테니까.3일 뒤, 나는 육상준과 이혼 수속을 마치고 곧바로 송지유를 데리고 입양 절차를 밟았다.신고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법적으로 한 가족이 되었다.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게를 얻어 작은 꽃집을 차렸다.사실 나의 오래된 꿈이었고, 그동안 육준서를 돌보느라 바쁜 것도 있지만 허연서와 기 싸움을 하느라 미처 실현하지 못했다.이제 구속에서 벗어난 이상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다.물론 장사가 잘되는 편은 아니지만 송지유와 나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했다.그렇게 평범한 나날이 이어졌다.꽃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이웃이고, 점차 단골도 생겼다.송지유는 학교에서 착한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중에서 유독 친하게 지내는 한 여자아이가 있는데 매일 하교하면 가게에 와서 한참 놀다가 갔다.그리고 여학생의 아버지가 매번 데리러 오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분홍색 장미 한 송이를 샀다.어느 날 나는 무심코 아이 엄마에게 선물하는 거냐고 물었고,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
송지유는 뿌듯한 얼굴로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보여주었다.“엄마, 방금 하린한테 위치를 공유했는데 동호 삼촌이 벌써 오셨네요.”신동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손을 뻗어 송지유의 머리를 쓰다듬고 몰래 눈짓을 주고받았다.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내가 비에 젖을까 봐 그는 외투를 벗어서 머리 위로 씌워주었고, 매너손으로 차까지 에스코트해서 태웠다.뒷좌석에 앉아 송지유와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자 나는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집에 도착하자 신동호는 기어코 장바구니를 들고 가져다주겠다고 했다.나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송지유가 가운데 서서 양손으로 각각 우리를 붙잡았다.이때, 빗물에 비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이대로 세 식구가 함께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올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육준서가 정교한 상자를 들고 우리 집 앞에 서 있었고, 곁에는 만면에 미소를 띤 육상준이 보였다.신동호를 발견하는 순간 육상준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이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라희야, 요즘 잘 지냈어?”“그럭저럭.”나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육상준 부자를 피해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신동호는 송지유의 손을 잡고 내 뒤를 따랐다.육상준도 육준서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나는 팔을 뻗어 막아섰다.“딱히 볼 일 없으면 이만 돌아가.”육상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더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육준서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팔 밑으로 허리를 숙여 지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육상준에게 목덜미를 잡혀 다시 현관 밖으로 끌려왔다.육상준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라희야, 오늘 무슨 날인지 기억 안 나?”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보자 육준서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외쳤다.“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잖아요.”그리고 활짝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들어 올렸다.“아빠가 엄마
그러나 육상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늘 침착하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갑자기 화를 버럭 냈다.이내 씩씩거리며 신동호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을 뻗었다.“꺼져. 우리 집안일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들지?”막무가내가 따로 없는 모습에 나는 분노가 차올랐다.‘짝’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육상준은 얼굴을 가린 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나는 앞으로 다가가 신동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살짝 지었다.“소개가 늦었네. 내 남자친구 신동호라고 해. 그래서 끼어들 자격이 있을 거라고 보는데?”육상준은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내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이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사실 그가 후회하는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그런데 막상 찌질하게 우는 전남편을 목격하자 예상 외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어쩌면 이미 사랑이 식어서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타격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떠나기 전, 육상준이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마. 나도 이제 조용히 살고 싶거든. 알았지?”육상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육준서를 데리고 몸을 돌렸다.녀석은 끌려가면서도 내 다리를 꼭 붙잡고 제발 같이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심지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펑펑 울면서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엄마, 진짜 절 버릴 거예요? 앞으로... 다시는 말대꾸하지 않을게요. 숙제도... 열심히 하고,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육상준은 어두운 얼굴로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질질 끌고 갔다.그리고 앞만 주시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문이 닫힐 때까지 눈길조차 안 줬다.이 또한 지나갈 것이며 이제 각자의 삶을 살면 그만이다.6개월 후 신동호는 나한테 청혼했다.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꺼내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다이아몬드는 유독 컸고, 디자인도 예뻤다.예전에 매장에서 봤던 반지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그가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 남편이 초조한 얼굴로 다른 여자를 껴안고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목숨을 바쳐 구한 아들은 행여나 그녀가 떨어질까 봐 곁에 딱 붙어서 살뜰히 챙겨주었고 가끔 손으로 부축하기도 했다.처음부터 끝까지 두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내 속상한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진정한 가족은 따로 있는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버림받는 신세가 되다니.30분 전, 허연서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더니 아들을 데리고 생일을 같이 보내주겠다고 했다.나는 싸늘한 얼굴로 거절했고, 방에서 숙제하던 육준서가 인기척을 듣고 뛰쳐나와 자기 엄마를 밀치고는 여자의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결국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어떻게든 막아서려고 기를 썼다.하지만 나한테 붙잡힌 아들은 팔을 세게 깨물더니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엄마가 뭔데 연서 이모랑 못 가게 막는 거죠? 엄마만 없었더라면 난 연서 이모의 아들이 되었을 텐데, 엄마는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피가 날 정도로 깨문 것만 보더라도 아들이 나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 수 있다.그렇게 대치하던 중 복도에서 큰불이 났다.우리 셋은 갇힌 상태에서 애타게 구조 대원을 기다렸다.아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었고, 허연서의 곁을 지키면서 마치 어른처럼 침착하게 달래주었다.“연서 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가 이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아마 제일 먼저 구해주러 현장에 도착할 거예요.”나는 속상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은 설령 반려동물을 키우더라도 정이 들기 마련일 것이다.하지만 아들은 해당되지 않았고, 오로지 나를 향한 증오심뿐이었다.사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단지 비싼 장난감을 사주지 않고, 숙제를 다 하기 전까지 휴대폰을 못 만지게 했기 때문이다.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이혼하면 허연서가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 텐데 끝까지 버텨서 불만이 더 컸다.그런데도 아들의 머리 위로 파편이 떨어지는 순간을 목격하자 일말의 망설
육상준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뻔한 사실이었다.4년 동안 대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누구를 짝사랑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하지만 상대방은 첫사랑을 잊지 못했기에 나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다.졸업을 앞두고 허연서는 집안의 권유로 해외에 유학하러 갔다.그녀가 떠난 날, 육상준은 술에 취해 나를 찾아왔다.게다가 비몽사몽 한 와중에 허연서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을 나눴다.나는 좋아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설령 다른 여자로 착각한들 본능에 이끌려 찰나의 쾌락 속에 젖어 들었다.하지만 결국은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는 굳은 얼굴로 옷을 내동댕이치면서 나한테 꺼지라고 호통쳤다.단지 원나잇인 줄 알았으나 뜻밖에 임신하게 되었다.육상준은 나와 결혼식을 올렸고, 비록 아이를 낳게 했지만 이름은 육준서라고 지어주었다.대체 나를 얼마나 싫어했으면 허연서가 귀국해서 도전장을 내밀 때마다 눈 감아 주고, 심지어 우리 집에 와서 아들을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하냐는 말이다.행여나 내가 악을 쓰며 육상준에게 따지면 육준서도 같은 편에 섰다.“엄마는 연서 이모보다 못생기고 성격도 안 좋은데 왜 이혼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빠는 연서 이모랑 재혼하고 우리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을 텐데.”나는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이내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쓰러진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매캐한 연기 속에서 작은 머리 하나가 문틈으로 쏙 비집고 들어왔다.그리고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아줌마, 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나는 힘겹게 눈을 떴고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를 발견했다.얼굴은 꼬질꼬질했고, 짙은 연기 속에서 눈동자만큼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녀석은 자그마한 몸집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손으로 부축해서 조금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탈출하는 길이 워낙 험난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남자아이는 이를 악물고 내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했다.화재 현장을 벗어
이렇게 된 이상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음대로 생각해.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걸 보니 꽤 실망스럽나 본데? 하지만 이제 괜찮아...”그리고 무미건조한 육상준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육상준, 우리 이혼해. 자유를 줄 테니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가.”말을 마치고 나서 육준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네 소원대로 앞으로 날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충격에 휩싸인 부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다들 고통 속에서 해방되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은가?하지만 뒤돌아서 떠나려는 순간 육상준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연서를 먼저 구해줬다고 이혼을 운운하는 거야? 몸도 멀쩡하고 심지어 임신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사람을 용서해줬더니 되레 이혼하자고 해? 꼭 그렇게 해야겠어?”나는 변명할 가치조차 못 느끼고 입을 꾹 닫은 채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그러나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고, 어찌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발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시종일관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송지유가 펄쩍 뛰면서 나섰다.그는 씩씩거리며 육상준의 손가락을 떼어내더니 내 앞을 막아서고 고래고래 외쳤다.“우리 엄마한테 손대지 마세요! 방금 수술이 끝나서 아직 컨디션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아파하는 게 안 보여요?”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녀석은 마치 새끼 호랑이처럼 눈앞의 남자를 호시탐탐 노려보았고,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 날 지켜주려고 최선을 다했다.다만 안타깝게도 또래보다 너무 말랐다. 결국 육준서가 달려들자 손쉽게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졌다.육준서는 주먹을 높이 들어 녀석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았다.“헛소리하지 마. 네 엄마는 무슨! 우리 엄마야.”흠씬 두들겨 맞은 송지유는 반격할 힘조차 없었고, 머리를 감싸고 요리조리 피하면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이제 아니야. 네가 먼저 엄마를 버렸다고 했어. 심지어 불구덩이에 두고 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유산 수술 말고 또 있나?”가벼운 말투로 대답하는 나를 보며 육상준은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그는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했다.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서운함까지 숨기지는 못했다.“우리 아이를 지웠어? 왜...?”나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게 무슨 질문이지? 소방대원이라는 사람이 화재 연기 속에 얼마나 많은 유독가스가 있는지 정녕 몰라? 내가 임신했다고 알려줬는데도 방독면을 허연서에게 줬잖아. 이제 와서 모르는 척 물어보면 어떡해?”육상준이 꼴 보기 싫은 나머지 단 1초라도 쳐다보기 싫었다.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를 껴안으려고 했다. 이때, 시종일관 잠자코 있던 허연서가 갑자기 이마를 짚고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하지만 공교롭게도 육상준의 품을 향해 몸이 기울어졌다.결국 나를 향해 뻗었던 손도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그녀를 부축했다.허연서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미안한 듯 말했다.“라희야, 미안해. 일부러 가족 상봉을 망치려고 한 건 아닌데 단지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상준이도 내가 몸이 안 좋은 걸 알거든.”나는 허연서의 연기를 묵묵히 지켜보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등 뒤에서 들리는 육상준 부자의 애타는 외침에도 송지유를 끌고 뒤도 앞만 보고 저벅저벅 걸어갔다.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이후로 육상준과 육준서는 갑자기 나한테 부쩍 관심을 보였다.하루가 멀다고 병실에 찾아오는 건 물론 송지유를 대하는 태도 또한 점점 좋아졌다.나도 이혼하기 전에 굳이 얼굴을 붉힐 생각은 없어서 딱히 제지는 안 했고 끝까지 무덤덤한 모습으로 일관했다.반면, 송지유는 육상준 부자가 찾아올 때마다 안색이 사뭇 어두웠다.그리고 병실을 떠나면 그제야 다시 귀염둥이로 돌아왔다.어느 날 송지유가 물었다.“엄마, 육준서랑 꼭 친구 해야 해요?”나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아니, 그런데 왜 싫어하는지 물어봐도 돼?”나이가 비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