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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육상준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뻔한 사실이었다.

4년 동안 대학교에 다니면서 내가 누구를 짝사랑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첫사랑을 잊지 못했기에 나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허연서는 집안의 권유로 해외에 유학하러 갔다.

그녀가 떠난 날, 육상준은 술에 취해 나를 찾아왔다.

게다가 비몽사몽 한 와중에 허연서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을 나눴다.

나는 좋아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설령 다른 여자로 착각한들 본능에 이끌려 찰나의 쾌락 속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결국은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는 굳은 얼굴로 옷을 내동댕이치면서 나한테 꺼지라고 호통쳤다.

단지 원나잇인 줄 알았으나 뜻밖에 임신하게 되었다.

육상준은 나와 결혼식을 올렸고, 비록 아이를 낳게 했지만 이름은 육준서라고 지어주었다.

대체 나를 얼마나 싫어했으면 허연서가 귀국해서 도전장을 내밀 때마다 눈 감아 주고, 심지어 우리 집에 와서 아들을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하냐는 말이다.

행여나 내가 악을 쓰며 육상준에게 따지면 육준서도 같은 편에 섰다.

“엄마는 연서 이모보다 못생기고 성격도 안 좋은데 왜 이혼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빠는 연서 이모랑 재혼하고 우리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을 텐데.”

나는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눈도 서서히 감겼다.

이내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쓰러진 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작은 머리 하나가 문틈으로 쏙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줌마, 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

나는 힘겹게 눈을 떴고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얼굴은 꼬질꼬질했고, 짙은 연기 속에서 눈동자만큼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녀석은 자그마한 몸집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손으로 부축해서 조금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탈출하는 길이 워낙 험난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이를 악물고 내 손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했다.

화재 현장을 벗어나는 순간 녀석은 진이 빠져 쓰러지기 직전에도 무릎을 꿇은 채 재빨리 의사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를 껴안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남자아이와 함께 병원으로 실려 가는 길에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마저 화재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구급차 안에서 슬픔을 못 이겨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제대로 울지도 못 했다.

나는 마음이 짠한 나머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아들로 입양해도 되는지 물었다.

비록 기뻐서 눈빛이 반짝였지만 괜히 성가시게 하기 싫다면서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녀석한테 나는 안 그래도 골칫거리라서 다른 사람이 폐를 끼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결국 남자아이와 퇴원하고 나면 입양 절차를 밟기로 약속했다.

나는 3일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고, 연기를 너무 많이 흡입한 탓에 배 속의 아이는 지켜내지 못했다.

그동안 육상준 부자는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고 연락조차 없었다.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병실에서 멀쩡한 허연서를 돌보느라 바빴다.

반면,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사람은 목숨을 다해 구해준 어린 소년뿐이었다.

송지유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줬다고 했는데, 만약 아들로 입양한다면 개명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널 입양해도 개명은 하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남의 눈치는 안 봐도 돼, 알았지?”

송지유는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리고 내 팔을 껴안고 볼로 비비적대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했다.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감사의 인사인가?

그동안 육상준 부자는 짜증만 내고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감동을 금치 못하고 간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그리고 복도에서 육상준 부자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낙태 수술을 마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송지유는 나를 부축하고 조심스럽게 병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코너를 도는 순간 육상준 부자에게 에워싼 허연서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웃고 떠드는 세 사람의 모습은 한 가족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예상과 달리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서 조금 놀랐다.

나는 묵묵히 셋을 스쳐 지나갔다.

오히려 육상준이 참지 못하고 나를 먼저 불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보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물었다.

“라희야, 어디 다친 데 없어?”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천식이 발병해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할 질문은 아닌 듯싶었다.

게다가 머리도 몇 바늘 꿰매고 붕대도 칭칭 감고 있는데 장님도 아니고 정녕 안 보인단 말인가?

그리고 배 속의 아이도 잃지 않았는가? 하지만 다행일지도 모른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가족을 둔 게 과연 아이에게 축복일지 싶었다.

내가 묵묵부답하자 육상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이내 납작한 배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네가 정말 임신한 줄 알았는데 연서 말이 맞았네. 단지 먼저 구조받기 위한 이기적인 거짓말에 불과했어.”

옆에 있는 육준서도 원망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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