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있는 오래된 약을 분리 수거하고 주방과 식탁을 정리하고 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갑자기 노동했더니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피가 흘러나온 느낌이었다.서둘러 옷을 벗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피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심한 정도는 아니라 나는 혼자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때 마침 화장실을 나선 사모님이 내 어깨의 상처를 보고 다급히 물었다.더 이상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정태곤한테 죽을뻔한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참 명도 기네요. 정태곤 손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여정 말로는 정태곤이 해외에서 용병으로 일하면서 정말 사람을 죽인 적이 있대요.”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정태곤의 눈빛을 볼 때마다 섬뜩한 게 사람을 죽인 적 있는 것 같다고 여겼는데 그 짐작이 진짜였을 줄이야.“앉아 봐요. 내가 치료해 줄게요.”“네? 아니에요. 이따 가게에 가서 치료하면 돼요.”“앉으라면 앉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요?’사모님이 갑자기 화를 내는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모님이 이러는 모습은 매우 드물었기에 나는 순순히 의자 위에 앉았다.그러자 사모님은 약상자를 챙겨 오더니 나더러 티셔츠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사모님 요구에 따라 순순히 옷을 벗었다.사모님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상반신을 본 순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다만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사모님이 슬립 차림이라 고개를 들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거라도 볼까 봐 두려웠으니까. 더욱이 나는 의자에 앉고 사모님은 서 계셔서 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다만 내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사모님의 뽀얗고 긴 다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사모님의 피부는 하얗고 맑았는데 살짝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매우 여려 보였다. 심지어 발뒤꿈치마저 핑크빛이 돌아 부드러워 보였다.그런 사모님 곁에 있으니 가뜩이나 거친 내 피부가 더 거칠어 보였다. 나는 이렇게 몰래 훔쳐보는
‘설마 그날 밤 상대가 유미 사모님인가?’‘아니야. 그럴 리 없어. 사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나는 즉시 마음속 생각을 부인했다.다만 나와 함께 용천 호텔에 간 누나들과 모두 잔 적이 있는데 그중 누구도 나비 문신이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사모님 몸에 나비 문신이 있었다니.나는 그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이 자꾸만 그쪽으로 흘러갔다.만약 그 상대가 정말 사모님이라면 나는 사장님께 죄를 지은 거나 다름없다.‘아니야. 하정현 씨일 수도 있잖아.’그날 저녁 용천 호텔에 있었던 여자는 총 여섯 명인데, 유미 사모님 외에 하정현과 자보지 못했다. 게다가 하정현을 마사지해 줄 때 항상 가슴만 해준 터라 허리 아래를 본 적이 없다.‘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정현 씨 몸에 나비 문신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나는 애써 이쪽으로 생각을 돌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내가 한창 헛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모님이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사모님을 보니 내 추측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처럼 우아하고 점잖은 분은 절대 술에 취해 성관계를 할 사람이 아니다.더욱이 난 그 당시 술에 취해 내가 본 게 나비 문신인지 아니면 진짜 나비가 날아들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나는 절대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얼마 뒤, 사모님은 상처 소독을 끝낸 뒤 말했다.“전에 처방해 준 약 고마워요. 그걸 마셨더니 요즘 많이 좋아졌어요.”사모님은 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넋이 나가 더 이상 사장님 댁에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화인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긴 뒤 집을 나섰다.집에서 내려와 차에 올라탄지 한참이 지났지만 내 마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하정현에게 문자를 보내 몸에 나비 문신이 있는지 확인했다.하정현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그건 왜 갑자기 묻는데?][그냥 좀 궁금해서요.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 줘요.]나는 당
한참 동안 기다리니 주해진과 김진호가 나타났다.그동안 늘 거만하던 김진호는 기세가 한풀 꺾여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주해진 뒤를 따랐다.우리는 서로 소개를 한 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주해진이 건넨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때문에 나는 형빈도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그 말에 주해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다섯씩이나? 주주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형빈은 주주에만 가입할 뿐이지 경영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천수당의 경영과 관리는 나와 민우한테 맡기기로 했잖아. 두 사람 목적은 돈 버는 거 아니야? 돈만 벌게 해주면 되잖아.”그때 계속 침묵하던 김진호가 입을 열었다.“형, 나도 한의학 지식이 있고 의술을 아니 나도 같이 경영에 참여하는 건 어때요?”나는 바로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너도 경영에 참여한다면 협력은 없던 일로 해.”김진호는 워낙 우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만약 그도 경영에 참여하면 앞으로 분명 문제가 끊이지 않을 거다.주해진은 급히 김진호의 말을 잘랐다.“넌 끼어들지 마. 네가 경영에 참여하면 내가 네 뒷수습하고 다녀야 할 게 뻔해.”“그리고 수호 동생, 파트너 더 끌어들이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분은 본인들이 알아서 나눠. 우리 지분은 나눠줄 수 없으니까.”“오케이.”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러자 주해진은 이내 싱글벙글 웃었다.“그렇다면 문제없네. 사인해.”주해진의 목적은 단지 돈 버는 거였기에 본인 이익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바로 동의했다. 이번 협상은 매우 순조로웠다. 우리는 계약서에 사인한 뒤 바로 현장에서 돈을 이체했다.이후의 식사는 말할 것도 없이 화기애애했다. 어쨌든 이제 운명 공동체가 되었으니 천수당을 일으켜 세워 잘 운영해 그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었으니.그날 밤, 현성은 또 술김에 우리 집에서 지내겠다고 고집부렸다. 결국 나는 그 뒤처리를 민우한테 맡겼다. 나는 오늘 밤 사장님 댁에 가야 했으니까.윤미화는 매일 본인 일로 바쁜 터라 사모
나는 그날 나와 몸을 섞었던 사람이 사모님일까 봐 두려워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내가 아무리 사모님처럼 우아하고 고귀한 분위기의 미녀를 좋아한다지만, 그날 밤 여인이 사모님이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나는 사장님께 미안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사장님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곧장 욕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절대 내가 생각한 게 아니기를 기도했다.오늘 밤 사모님 몸매를 본 뒤로 나는 더 조마조마하고 심란해졌다. 심지어 내 추측이 들어맞을까 봐 사모님과 접촉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아닐 거라고 요행을 바랐다. 나는 그날 밤 사모님의 반응을 떠올렸다. 내 알몸을 본 사모님은 무척 부끄러워했었다. 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사장님을 제외한 이성의 몸을 본 적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렇게 부끄러워했던 거고. 만약 사모님이 아니면 하정현일 가능성밖에 없다. 다만 하정현은 용천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반응이 늘 똑같았고 이상할 게 없었다.나는 결국 내 추측을 다시 한번 뒤엎었다.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기분이었다.두 사람 모두 가능성 있을 것 같다가도 자세히 생각하면 모두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면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닐까? 그게 그저 꿈이었을지도 모르잖아?’‘하.’어쩜 생각할수록 더 심란해지기만 하는 건지.’“수호 씨.”내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사모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나는 너무 당황해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났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사모님의 얼굴은 발그스름해서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하지만 시선이 내 정중앙에 닿은 숙나 부끄러운 듯 이내 고개를 돌렸다.“뭐, 뭐 했던 거예요?”고개를 숙여 확인한 순간 나는 너무 난감했다.방금 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내 그곳은 어느새 발딱 서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걸 사모님께 들키다니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나는 너무 당황해 다급히 해명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저 나쁜 짓한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내가 여색을 밝히는 건 맞지만 나도 정도라는 게 있다.사장님이 나한테 얼마나 고마운 분인데, 사장님께 미안한 짓을 하겠나?내 설명이 통했는지 당황함이 가득하던 사모님의 눈빛은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한테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그럼 앞으로 주의해요. 특히 내 앞에서 다시는 그러지 마요.”사모님은 말하면서 내 가운데를 가리켰다.나는 너무 난감해 황급히 그곳을 가렸다.“알았어요. 약속할게요. 앞으로 절대 이러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내가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에 사모님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토록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나는 민망함을 감추려고 커다란 외투를 걸친 뒤 사장님을 부축하러 욕실로 향했다.“수호 씨, 날도 더운데 뭐 하러 외투를 입고 있어?”사장님은 내 이상한 옷차림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이 상황에 사실대로 말했다가 사장님이 나를 잡아먹으려 할지도 몰랐기에 나는 대충 변명을 지어냈다.“방금 실수로 바지가 젖었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어 외투로 가린 거예요.”“내 잘못이네. 수호 씨를 집에 불러들였으면서 갈아입을 옷도 준비하지 못했어.”“유미야, 전에 내 옷 두 벌 새로 샀던 거 아직 옷장에 있잖아. 그거 수호 씨한테 갖다줘.”사모님은 방으로 들어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 옷을 찾으려고 옷장을 열었다.그 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거절했다.“필요 없어요. 날이 더워서 바로 말라요.”무엇보다 사장님 옷은 모두 비싼 거라 아무렇지도 않게 받기 너무 민망했다.하지만 사모님은 벌써 옷장을 열어 새 옷 두 벌을 꺼냈다.“수호 씨 사장님이 주는 거니까 입어요.”사모님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이내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사모님은 나더러 연기를 끝까지 하라는 뜻이었다.나는 결국 마지못해 옷 두 벌을 받았다.“그, 그럼 전 돌아가서 옷 갈아입을게요.”나는 옷을 챙겨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외투를 풀
사모님은 성적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다.너무나도 모순되는 생각에 괴로워진 사모님은 결국 변기 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사모님은 남편이 꼭 괜찮아질 거라고 굳게 믿었다. 게다가 혼자 해결하는 것보다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사모님은 단순한 요구 해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었다.그걸 알 리 없는 나는 방 안에 숨어 욕구를 해소하느라 바빴다.그러다 거의 절정에 도달할 때쯤 문밖에서 갑자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정수호, 문 열어!”그건 다름 아닌 윤미화의 목소리였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문을 열지 않았다. 이제 절정까지 한 발만 남은 터라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윤미화는 미치기라도 한 듯 문을 부술 것처럼 두드렸다.“정수호, 안에서 뭐 해? 설마 나쁜 짓하고 있는 거야? 당장 문 열어.”“그만 두드려. 그러다 우리 남편 깨겠어.”그때 마침 사모님이 나서서 나를 도와줬다.하지만 윤미화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나 정수호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정수호 뭐 하는 거야? 당장 문 열어.”쾅쾅거리는 소리에 나는 겁이 나는 한편 스릴감이 느껴졌다. 결국 얼마 뒤 나는 겨우 절정에 도달했다. 나는 주위를 신속히 정리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대체 뭐 한 거야? 왜 이렇게 늦게 문 열어?”윤미화의 눈빛은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하지만 나도 이제는 점점 뻔뻔해져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거짓말했다.“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아무리 잠들어도 내가 그렇게 높게 문 두드렸는데 못 들었다고?”윤미화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나는 서둘러 해명하는 대신 나른하고 귀찮은 듯 말했다.“안 믿겠으면 믿지 마요. 저는 무슨 일로 찾았는데요?”윤미화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시트부터 확인했다.다행히 나도 이제는 이런 쪽으로는 도
윤미화는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꿍꿍이를 꾸미는 듯 뭐라 중얼거리며 말했다.그러던 그때 내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운미화는 한발 앞서 내 핸드폰을 빼앗아 확인했다.“베터리가 없다고? 80퍼센트나 남았으면서 이게 베터리가 없는 거야?”거짓말이 단번에 폭로된 나는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핸드폰 이리 줘요.”“베터리가 남아 있으면서 왜 없다고 했어?”“잘못 기억했나 보죠.”“이제 빌려줄 수 있지? 잠금 해제해.”“사모님 핸드폰을 빌리면 되잖아요. 왜 꼭 제 걸 빌려야 하는데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윤미화는 왜 항상 내가 난감해하는 꼴을 보지 못해 안달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때 윤미화가 나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연기 그만해. 방금 뭘 했는지 유미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나랑 거래 하나만 해.”나는 약간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반박할 수 없어 한동안 침묵했다.그때 윤미화는 내 핸드폰을 흔들며 싱긋 웃었다.“싫으면 까발릴 거야.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핸드폰 잠금 해제하는 거 나한테 식은 죽 먹기야.”윤미화의 신분을 떠올리는 나는 문득 겁이 났다.만약 이 자리에서 모든 게 까발려지면 사모님 앞에서 유지했던 내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 거다.“진짜 독하네요.”나는 결국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윤미화는 나한테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사모님을 향해 말했다.“이제 아무 일 없으니 가 봐.”“수호 씨 괴롭히지 마. 도움받으려고 사람을 집에 끌어들였는데 언니가 이러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윤미화는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대충 얼버무렸다.“알았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사모님은 그제야 뒤돌아 안방으로 사라졌다.사모님이 떠난 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윤미화를 바라봤다.“뭐 하자는 거예요? 저 사장님 직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장이 직원을 협박할 수 있어요?”“협박하면 뭐? 나 정말 볼일 있어서 그래.”“그럼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
“왕정민이 나를 찾아왔어.”윤미화는 입을 열자마자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그 말에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왕정민이 왜요?”“알아 맞춰 봐.”“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나더러 전승빈을 조사해 달라더라고.”나는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전승빈은 왕정민의 장인어른이다. 그런데 감히 장인어른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하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전승빈한테 들킬까 봐 두렵지도 않나?’나는 생각을 뒤로한 채 황급히 물었다.“혹시 전승빈도 바람피워요?”“부자들이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는 거 놀라운 일도 아니야. 부자들 세계에서 그건 바람이 아니라 능력이야.”그렇다면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그럼 왕정민이 뭘 조사하라고 했는데요?”나는 갑자기 뭔가 떠올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범죄 증거를 수집해달라는 건 아니겠죠?”윤미화는 제법이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바보는 아니네. 맞았어.”‘헐. 이젠 아예 장인어른한테 맞서려는 건가? 정말 비겁하네.’전승빈은 왕정민이 바람피운 증거를 내세워 그에게 제 딸과 잘 살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왕정민을 통제하려고 그의 회사까지 장악해 버렸다. 그렇게 하면 왕정민이 얌전히 제 딸과 잘 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왕정민이 똑같은 방법으로 저를 무너뜨리려 들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왕정민이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그와 동시에 애교 누나가 이런 사람과 빨리 이혼한 게 너무 다행으로 느껴졌다.나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그런데 왕정민은 왜 그런 의뢰를 사장님한테 한 거예요? 그것도 전승빈을 조사하라고.”왕정민은 분명 제 약점을 전승빈에게 넘긴 게 윤미화라는 걸 알 거다. 그렇다면 윤미화가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를 싫어해야 할 텐데 오히려 직접 찾아와 의뢰까지 한 건 너무나 아이러니했다.이건 너무 불합리했다. 때문에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윤미화는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구체적인 건 나도 몰라. 진짜
진동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난 지금 누구보다도 그 자식 죽이고 싶어. 젠장. 내가 돈 들여 대학교까지 보내줘서 이 정도 된 건데. 도움을 그렇게 많이 받았으면서 개 같은 게 감히 나를 물어?”“솔직히 궁금하네. 대학 내내 서포트해 주려면 돈이 적게 들지 않을 텐데, 그 돈 다 네가 낸 거 맞아?”왕정민은 고기 한 점을 집어먹으며 물었다.그러자 진동성이 대답했다.“내가 미쳤어? 그 자식이 대학 다닐 때 쓴 돈은 내가 그 자식 부모님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서 대출받은 거야. 그 자식 부모도 그 사실을 아들한테 알리지 않으려고 하니까 내가 한 것처럼 했지 뭐.”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뛰쳐나가 진동성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계속해서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진동성이 또 내 뒤에서 얼마나 양심 없는 짓을 했는지 들으려고.그때 진동성이 말을 이었다.“내가 그동안 준 용돈도 사실은 얼마 안 되는데 그 가족한테는 엄청난 은혜처럼 느껴졌나 봐. 내가 그 집에 찾아갈 때마다 정수호 부모가 나한테 얼마나 깍듯이 대하는데. 나를 조상으로 모실 판이라니까. 정수호 그 자식도 그동안 동성 형 하면서 내 말은 개처럼 따랐어.”둘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치밀어 나는 이를 갈았다.하지만 진동성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내가 전에 정수호 집에서 낡은 의학서적을 발견해서 몰래 훔쳐 왔는데 어땠는 줄 알아? 그게 고대 의서라는 거야. 엄청 희귀한 거래. 그걸 팔아서 1000만 원 벌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뛰쳐나갔다.“진동성!”나는 그 세 글자를 이를 갈면서 토해냈다.자리에 앉아 있던 네 명은 모두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특히 진동성이 가장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야? 너도 여기 있었어? 내가 한 얘기 다 들은 거야?”“그래, 들었어
나는 더 이상 방법이 없어 결국 타협했다.“알았어요. 동의하면 될 거 아니에요.”양동준은 그제야 손을 멈췄고 나도 겨우 내 체면을 지켜냈다.나는 신속히 옷을 입으며 속으로는 윤지은을 짓밟고 혼내줄 상상을 했다.‘어떻게 부잣집 아가씨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지? 너무하잖아.’난 꼭 언젠가 성공해 윤지은이 사람들이 앞에서 나한테 고백하는 걸 지켜볼 거다. 그때 가서 윤지은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꼭 구경할 생각이다.옆에 있던 하정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윤지은을 바라봤다.“지은아, 왠지 네가 이러는 게 나를 위한 게 아닌 것 같다? 너 일부러 정수호를 쪽팔리게 하려는 거지? 설마 질투해?”윤지은의 표정은 순식간에 변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질투해? 저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하정현은 혀를 날름거렸다.“혹시 알아? 정수호가 사모님 댁에 가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그 말인 즉 윤지은이 사모님을 질투한다는 뜻이었다.윤지은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계속 헛소리하면 너도 똑같은 수모를 당하게 해줄게.”하정현은 목을 움츠리며 싱긋 웃었다.“안 그럴게. 말 안 하면 되잖아. 누가 우리 강한 지은을 건드리겠어?”하정현은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표정만 보면 윤지은의 핍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태도를 누그러뜨린 듯했다.윤지은의 안색은 얼마나 어두웠는지 모른다.그러다가 그 화를 뜬금없이 나한테 풀었다.“당장 가서 음료수 사와.”‘참 재수가 없으려니까.’“웨이트도 있잖아요. 왜 제가 가야 하는데요?”윤지은은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양동준더러 너 모셔가라고 할까?”나는 헐레벌떡 일어섰다.“참 대단하네요.”내가 떠난 뒤 윤지은은 하정현에게 말했다.“봤지? 정수호는 나한테 하인이나 다름없어. 나 같은 부잣집 아가씨가 저런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그래. 알았어.”하정현은 겉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지은아, 너 다 티나.’‘증명하려고 과하게 행동하면 오히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설득한 끝에 하정현은 끝내 우리 설득에 넘어왔다.“그래, 알았어. 안 찍을게. 안 찍으면 되잖아.”“네가 또 쓸데없는 짓 하면 안 되니까 수호 씨가 그동안 쟤 좀 감시해.”나는 내 귀를 믿을 수 없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윤지은 씨 부하도 아니고 왜 지은 씨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뭐라고?”윤지은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나는 윤지은이 이럴 때면 가장 무섭다. 내가 그동안 만난 누나들 중 윤지은이 단연 가장 무섭다고 할 수 있다.윤지은이 나를 째려볼 때면 곧 화를 내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더군다나 상대는 하필 부잣집 아가씨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거다.나는 곧바로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해명했다.“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지은 씨 친구 남편도 돌봐야 하고 화인당도 관리해야 하고 무엇보다 저도 지금 다쳐서 여유 시간이 없어요.”“호섭 씨는 상관할 거 없어. 내가 전문적인 가사도우미를 구했으니까.”“네?”‘그럴 거면 왜 진작 말하지 않고 진작 부르지 않은 건데?’‘왜 윤지은이 내가 사모님 댁에서 지내는 걸 싫어하는 것 같지?’‘에이, 설마.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 여자는 절대 질투할 리 없어.’“그래도 안 돼요. 저도 따로 볼 일이 있어요.”나는 여전히 거절했다. 무엇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윤지은은 갑자기 테이블을 탁 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양동준한테서 복싱 배우고 싶은 거 맞아?”나는 변석호의 일을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윤해철을 배신하는 게 돼버려 꾹 참았다.하지만 죽어도 이 일을 승낙할 생각은 없었다. 하정현이 비록 덩치는 작아 보여도 너무 영리하고 비상해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나는 스스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자처할 생각이 없었다.“안 간다 이거지? 좋아.”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얼마 뒤 양동준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앵동준은 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정현은 화가 난 듯 벌떡 일어섰다.“지은의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수호 씨 마음속에 지은의 자리는 조금도 없어?”조금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윤지은은 내 첫 번째 여자기도 하고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하다.신분차이나 너무 큰 것도 있지만 성격 차이도 너무 커서 우리의 미래는 당연히 그려본 적이 없다.그런데 하정현이 갑자기 위협하니 나는 일부러 시비 거는 듯 대꾸했다.“그렇다면 실망하겠네요. 나랑 하정현 씨 친구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하정현은 갑자기 내 뒤를 흘긋거렸다.“이제 끝났네. 지은이 바로 뒤에 있거든.”뒤를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표정을 한 윤지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나는 깜짝 놀랐다.“지, 지은 씨가 여긴 어떻게 왔어요?”나는 마음이 찔려 도저히 윤지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내가 불렀어. 지은아, 이 인간이 글쎄 마음속에 넌 눈곱만치도 없대. 개도 이렇게 매정하지는 않겠다.”윤지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마루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정수호는 원래 개야. 개한테 뭘 바라?”‘그래. 뭐.’오히려 윤지은한테 시원하게 욕먹고 나니 내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윤지은은 항상 나한테 싸움을 걸어오기에 오히려 싸우지 않는 게 더 무섭다.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마음대로 말해요. 아무튼 두 사람한테 난 좋은 사람 아니잖아요. 오히려 지은 씨나 친구분 좀 말려 봐요. 야한 잡지 촬영하겠다고 하니까.”“야한 잡지라니? 그거 인체 보디아트든.”하정현은 강조했다.윤지은은 예쁜 눈매를 찌푸리더니 싸늘하게 하정현을 바라봤다.“보디아트라니? 제대로 말해.”“에이, 그냥 좀 노출 심한 사진 몇 장 찍는 거야. 하지만 가릴 곳은 가려. 얼굴도 안 나올 거고...”윤지은은 하정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네가 그렇게 돈이 없으면 나한테 말해. R국에 보내줄 테니까.”“R국은 왜?”“R국이 성진국인 데다 야동 사업이 발전됐잖아. 거기 가서 여주인공 맡으면 돈 빨리 벌 거야.
하정현은 나를 힘껏 걷어찼다.“어딜 보는 거야? 내 말은 공항이요 에어포트!”하정현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그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달아 너무 난감했다.“하. 대화 주제가 뭐 그렇게 빨리 변해요? 반응할 새도 없이.”“그런데 무슨 뜻이에요? 공항을 체험해 보다니요?”나는 여전히 하정현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러자 하정현이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B시에서 가슴 수술은 하지 못했지만 큰 수확을 얻었거든. 우리 동기를 만났는데 지금 광고 디자인 일을 맡고 있대. 그런데 나 같은 몸매가 요즘 보기 드물다고 공항 모델로 광고 한편 찍지 않을 거냐고 제안하더라고.”“난 이미 계약이 끝났는데 남자 모델 자리가 아직 비어 있어서 수호 씨가 해보지 않을 건가 해서. 보수도 짭짤해. 촬영 한 번에 100만 원 정도 벌 수 있어. 어때?”하정현은 나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앞에 그렇게 많이 했던 말들이 이걸 위한 빌드업이었어요? 저 지금은 시간 안 돼요. 요즘 일이 많거든요.”예전이었다면 나는 아마 고민도 없이 승낙했을 텐데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스케줄 조정이 어렵다.하정현은 일순 낯빛이 어두워졌다.“내가 이미 약속했단 말이야. 안 돼. 꼭 와야 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게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미리 말했어야지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내가 미리 말하면 동의 안 했을 거잖아. 이게 별로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절대 불법은 아니야. 돈도 빨리 벌고. 게다가 한번 얼굴 알리면 돈 버는 건 한순간이야.”나는 그 말에 하마터면 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뿜을 뻔했다. ‘그러니까 그 촬영이라는 게 살짝 야릇한 건가?’나는 얼른 거절했다.“정신 좀 차려요. 그런 사진이 나돌면 앞으로 어떻게 고개 들고 다니려고요? 게다가 하정현 씨 집 돈 많잖아요.”“그건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와야 해. 안 그러면 전에 물어본 건 대답 안 해줄 거야.”하정현은 팔짱을 끼고 거절은 사절한
“고마워요. 석훈 형님.”한 달이라는 시간은 나한테 충분했다.내가 도장에서 나오자마자 하정현의 전화가 걸려 왔다.[나 강북에 도착했으니 마중 나와.”나는 이 일을 잊고 있었다.나는 하정현에게 문자를 보낸 뒤 곧바로 차를 몰고 공항으로 향했다.그런데 이곳에서 한지영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사실 나는 한지영의 사촌 동생이 하정현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어제 식사할 때 한지영의 사촌 동생이 B시에 가슴 수술받으러 갔다고 했을 때부터 그 사람이 하정현일 거라고 대충 짐작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한지영은 여전히 말이 많아 나를 만나기 바쁘게 물었다.“여긴 웬일이에요? 나 스토킹한 거예요? 설마 나 좋아하는 건 아니죠?”나는 눈을 홉뜨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전 사람 마중하러 왔어요.”“누구요?”“하정현 씨요.”“내 사촌 동생을요? 내 동생이랑 알아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한지영의 질문은 끝날 줄 몰랐다.심지어 또 100퍼센트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 항목이 있다면서 나를 꼬드겼다. 다행히 얼마 뒤 하정현이 나타난 덕에 나는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나는 다급히 하정현 옆으로 다가갔다.“혹시 사촌 언니도 불렀어요?”“아니? 언니는 내가 오늘 돌아온다는 거 알고 자발적으로 마중 나온 거야. 우리 언니가 정신이 좀 산만하니까 조심해. 무엇보다 절대 속지 마.”하정현마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거리를 둬야겠네.’우리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모르는 한지영은 하정현의 팔짱을 끼며 싱글벙글 웃었다.“정현아, 왜 이제야 왔어? 보고 싶었잖아. 언니가 한턱 쏠게. 어때?”한지영이 사겠다고 한 가게는 바로 어제 봉섭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가게였다.그 가게 음식은 매우 비싼 데다 어제 보니 계산도 신용카드로 하는 것 같던데, 한지영은 대체 뭘 믿고 또 가겠다고 하는지 의문이었다.나는 얼른 하정현의 팔을 잡아당기며 절대 가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하지만 하정현은 내 사인을 이해하지 못
사모님은 늘 온화하고 착하기에 화내는 눈빛과 말투로 말하는 건 극히 드물다. 지난번에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무례를 저질러 나를 그렇게 대했다면 이번에는 내가 용천 호텔에서 있은 일을 언급하는 바람에 또 그럴 위기에 처했다.나는 순간 또 사모님의 한계를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모님이 이토록 화를 낼 리 없다.나는 너무 무서워서 말까지 더듬었다.이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가 사장님께 미안한 짓을 했다는 죄책감.“아, 아니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나는 거짓말했다.사모님도 숨기고 싶어 한다면 끝까지 숨길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나는 허둥지둥 화장실을 나왔다. 하지만 멘탈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난 솔직히 사모님의 분위기를 매우 좋아한다. 그렇다고 사모님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이제 어떡하지? 이제 사장님 얼굴 어떻게 보지?’나는 기분이 매우 다운되었다. 더군다나 앞으로 사장님과 사모님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나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마음이 가라앉았다.현재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을 떠올리지 않는 거다.나는 곧장 변석훈을 찾으러 떠났다.변헉훈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전투 기술과 도망치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뿐이야. 게다가 내가 너한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졌으니 내 속도를 따라오는지 못 따라오는지는 너한테 달렸어.”나는 변석훈이 진심으로 나를 가르치고 싶어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윤해철이 맡겨준 임무를 완수하려고 할 뿐이었다.다만 나도 감히 뭘 더 바랄 수는 없었다.“그래요, 알았어요.”말을 마친 뒤 나는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켜고 거치대 위에 핸드폰을 세워놓았다.그동안 격투기 같은 전투 기술을 배운 적 없기에 배우기 힘든지조차 가늠이 가지 않았다.때문에 우선 영상으로 녹화한 뒤 돌아가서 반복적으로 보면서 연구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변석훈은 아무 말도
만약 양동준이 갑자기 나한테 웃어준다면 난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다.“실력이 되면 그때 얘기해요.”“동준 형님, 그럼 볼일 봐요. 전 더 방해하지 않을게요.”나는 양동준 앞에서 배알이 조금도 없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다.양동준과 헤어진 뒤 나는 변석훈에게 전화해 얼른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그래.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변석훈은 나한테 주소를 보냈다.나는 그 주소를 적어 둔 후 이따가 찾으러 가기로 결심했다.사모님과 사장님은 한참 동안 산책했다. 그러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자 나는 얼른 사장님을 안으로 밀고 갔다.사장님은 너무 더워 땀을 흘렸는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슬립으로 갈아입었다.사모님이 걸어 다닐 때마다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날개를 활짝 편 나비가 자꾸만 내 눈에 들어왔다.나비가 움직이는 모습은 그날 내 눈앞에서 하늘거리던 나비와 똑같았다. 거기에 사장님이 전에 사모님이 용천 호텔에 다녀온 후로 사람이 변한 것 같다던 말을 연상하니 나는 그날 밤 나랑 산 사람이 사모님이 아닐까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결국 나는 사모님께 살짝 떠보기로 했다. 나는 일부러 화장실에 가 사모님 가까이로 다가갔다.“사모님,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사모님은 내가 화장실로 들어와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뭔데요?”“사모님이 용천 호텔에 다녀오신 뒤로 이상해졌다고 사장님이 그러셨는데, 혹시 그날 제 그런 모습을 봐서 그래요?”나는 너무 직설적으로 물어보면 사모님이 또 나를 무시할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은 그 말에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그, 그런 말 하지 마요. 내가 수호 씨 거기를 본 걸 우리 그이가 알면 얼마나 난감해요.”사모님은 고개를 숙인 채 내 눈을 피했다. 하지만 사모님의 백옥처럼 투명하고 흰 피부는 한번 보니 도저히 시선을 옮길 수 없었다.나는 그날 밤 그 나비를 본 것 외에 상대의 피부가 사모님처럼 하얀지 기억을 더듬었다.하지만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나는 급히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겨 변석훈의 명함을 꺼냈다.며칠 동안 요양한 덕분에 내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때문에 이제 변석훈을 찾을 때도 됐다.하지만 나는 양동준과 했던 열흘간의 약속에 대해서도 잊지 않았다.내가 양동준의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지켜야 할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우선 양동준에게 먼저 전화해 현재 상황을 말할 생각이었다.“동준 형님, 지금 어디예요?”“백조의 후수.”그 대답에 나는 일순 멍해졌다.백조의 호수라면 사장님과 사모님이 살고 계신 동네다.나는 다급히 물었다.“형님도 백조의 호수에서 사세요?”“아니요.”“그럼 이곳에서 뭐 하세요?”“임천호 쪽 사람을 감시 중이에요.”그 말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방금 임천호 쪽 사람이 나를 미행하는 걸 발견한 것도 놀라운데 그 뒤에 양동준까지 있다니 너무 충격이었다.이건 말하지 않아도 윤지은의 명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윤지은이 일부러 동준 형님을 보내 나를 지켜주려는 건가?’“동준 형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예요? 제가 찾으러 갈게요.”나는 양동준을 찾아가 정확히 묻고 싶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찾으러 갈 테니까.”얼마 뒤, 양동준의 그림자가 나 시선에 들어왔다.양동준을 본 순간 나는 순식간에 안심이 되었다.“동준 형님, 혹시 윤지은 씨가 형님을 여기에 보냈어요?”나는 양동준을 보자마자 다급히 물었다.양동준은 워낙 냉담한 성격이라 말하는 것도 조급하지 않았다.“네.”정말 윤지은이라니.“지은 씨가 정말 동준 형님을 보내 저를 지켜주라고 할 줄은 몰랐네요.”“김칫국 그만 마셔요. 아가씨는 나더러 수호 씨를 지키라고 한 게 아니라 임천호가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보라고 한 거예요.”비록 그렇다지만 난 이것조차 나에 대한 보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때문에 속으로 윤지은에게 고마웠다.“동준 형님, 열흘이 흘렀는데 형님이 말한 수준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