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화는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꿍꿍이를 꾸미는 듯 뭐라 중얼거리며 말했다.그러던 그때 내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운미화는 한발 앞서 내 핸드폰을 빼앗아 확인했다.“베터리가 없다고? 80퍼센트나 남았으면서 이게 베터리가 없는 거야?”거짓말이 단번에 폭로된 나는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핸드폰 이리 줘요.”“베터리가 남아 있으면서 왜 없다고 했어?”“잘못 기억했나 보죠.”“이제 빌려줄 수 있지? 잠금 해제해.”“사모님 핸드폰을 빌리면 되잖아요. 왜 꼭 제 걸 빌려야 하는데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윤미화는 왜 항상 내가 난감해하는 꼴을 보지 못해 안달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때 윤미화가 나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연기 그만해. 방금 뭘 했는지 유미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나랑 거래 하나만 해.”나는 약간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반박할 수 없어 한동안 침묵했다.그때 윤미화는 내 핸드폰을 흔들며 싱긋 웃었다.“싫으면 까발릴 거야.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핸드폰 잠금 해제하는 거 나한테 식은 죽 먹기야.”윤미화의 신분을 떠올리는 나는 문득 겁이 났다.만약 이 자리에서 모든 게 까발려지면 사모님 앞에서 유지했던 내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 거다.“진짜 독하네요.”나는 결국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윤미화는 나한테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사모님을 향해 말했다.“이제 아무 일 없으니 가 봐.”“수호 씨 괴롭히지 마. 도움받으려고 사람을 집에 끌어들였는데 언니가 이러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윤미화는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대충 얼버무렸다.“알았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사모님은 그제야 뒤돌아 안방으로 사라졌다.사모님이 떠난 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윤미화를 바라봤다.“뭐 하자는 거예요? 저 사장님 직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장이 직원을 협박할 수 있어요?”“협박하면 뭐? 나 정말 볼일 있어서 그래.”“그럼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
“왕정민이 나를 찾아왔어.”윤미화는 입을 열자마자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그 말에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왕정민이 왜요?”“알아 맞춰 봐.”“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나더러 전승빈을 조사해 달라더라고.”나는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전승빈은 왕정민의 장인어른이다. 그런데 감히 장인어른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하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전승빈한테 들킬까 봐 두렵지도 않나?’나는 생각을 뒤로한 채 황급히 물었다.“혹시 전승빈도 바람피워요?”“부자들이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는 거 놀라운 일도 아니야. 부자들 세계에서 그건 바람이 아니라 능력이야.”그렇다면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그럼 왕정민이 뭘 조사하라고 했는데요?”나는 갑자기 뭔가 떠올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범죄 증거를 수집해달라는 건 아니겠죠?”윤미화는 제법이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바보는 아니네. 맞았어.”‘헐. 이젠 아예 장인어른한테 맞서려는 건가? 정말 비겁하네.’전승빈은 왕정민이 바람피운 증거를 내세워 그에게 제 딸과 잘 살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왕정민을 통제하려고 그의 회사까지 장악해 버렸다. 그렇게 하면 왕정민이 얌전히 제 딸과 잘 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왕정민이 똑같은 방법으로 저를 무너뜨리려 들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왕정민이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그와 동시에 애교 누나가 이런 사람과 빨리 이혼한 게 너무 다행으로 느껴졌다.나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그런데 왕정민은 왜 그런 의뢰를 사장님한테 한 거예요? 그것도 전승빈을 조사하라고.”왕정민은 분명 제 약점을 전승빈에게 넘긴 게 윤미화라는 걸 알 거다. 그렇다면 윤미화가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를 싫어해야 할 텐데 오히려 직접 찾아와 의뢰까지 한 건 너무나 아이러니했다.이건 너무 불합리했다. 때문에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윤미화는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구체적인 건 나도 몰라. 진짜
나는 왕정민의 도발을 피하고 싶지도, 그한테 얕잡다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탐정 조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의뢰를 해온다면 나는 그걸 받으면 그만이다.하지만 왕정민이 전승빈 손을 빌려 나를 제거하려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왕정민한테 제가 의뢰를 받았다고 전해줘요.”내 대답에 윤미화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봤다.“혹시 상대할 방법이 생긴 거야?”“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분명 해결 방안이 있을 거예요.”윤미화는 그제야 찌푸린 미간을 펴며 만족하는 지소를 지었다.“아랫도리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대담하네. 그런데 전에는 왜 그렇게 임천호를 무서워한 거야?”“헉, 설마 저 미행했어요?”“누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소여정한테서 들었어.”소여정과 사모님은 친한 친구 사이고, 윤미화는 사모님 사촌 언니기에 가끔 서로 만나는 건 이상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윤미화의 질문에는 반드시 대답해야 했다.“자기보다 몇 배나 강한 사람이 앞에 있으면 누구라도 겁먹어요. 게다가 임천호에 대한 소문이 좀 어마무시해요? 모든 사람이 임천호를 이 시대의 효웅이네 뭐네 하며 떠받들고 잔인하고 권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하지만 왕정민은 달라요. 왕정민은 본질을 따지면 저랑 다를 게 없거든요. 저보다 성과가 더 많다 뿐이지. 더군다나 왕정민은 장인어른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전 그 누구도 막지 못해요. 그런데 나라고 왕정민이 하는 일을 못 할 게 뭐 있어요? 내가 그런 상대를 왜 무서워해야 하는데요?”윤지화는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뭐 약간 오글거리긴 하지만 용기는 가상하네. 이번 조사는 나도 함께할 거야. 전승빈 신분이 대단한 만큼 들키는 즉시 수호 씨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그럼 사장님이 같이 조사하면 사장님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탐정 사무소에 사람도 많은데 윤미화는 충분히 내 파트너로 다른 사람을 붙여줄 수도 있었다.내 말에 윤미화가 설명했다.“이런 일을 하는
물론 나도 이곳이 사모님 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올 때 깨끗한 바지로 갈아입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불을 켜고 들어갔다.예전에 형수와 애교 누나 집에서 신세 질 때는 이런 점에 유의하지 않아 나중에 혼자 살 때 몇 번이나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모님 댁이라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나는 각별히 주의했다.화장실에 들어간 뒤 나는 평범하게 목욕했다. 다행히 샤워하는 내내 아무 상황도 벌어지지 않아 무사히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와 방금 씻은 옷을 널려고 베란다에 도착한 순간, 사장님이 베란다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장님은 의자에 앉아 창밖의 달을 보고 있었다.내가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할 때까지 사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사전에 나를 잠깐 부르기만 했어도 내가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사장님, 시간도 늦었는데 왜 주무시지 않아요?”나는 옷을 널려던 것도 잊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곧게 서 있었다.그러자 사장님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잠이 안 와서 그래. 혹시 놀랐어? 갑자기 미안해지네. 아까는 뭘 좀 생각하느라 소리를 내지 않았어.”나는 점차 냉정을 되찾은 뒤 의자를 끌어와 사장님 옆에 앉았다.“사장님,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뭐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세요.”“하하. 건강 걱정한 게 아니라 다른 일을 생각한 거야.”“다른 일이요? 무슨 일인데요?”나는 현재 치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나 싶었다.그때 사장님이 유유히 말을 꺼냈다.“예전 일을 회상했어. 내가 아프기 전에는 유미와 참 행복했거든. 우리 장인 장모도 어릴 때부터 나를 친아들처럼 키워주셨고. 아직도 그게 다 어제 일 같아.”사람은 늘 이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은 그게 별것 같지 않은 것 같지만,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과거를 회상하면 그 순간들이 그렇게 행복하고 그리울 수가 없다.“저도 그래요. 제 어머니는 제가 집에
“유미가 용천 호텔에 다녀온 뒤로 많이 달라진 것 같거든. 하지만 뭐가 달라졌는지 말하라고 하면 잘 모르겠어.”‘설마 그날 상대가 정말 사모님이었나?’‘사모님이 내 앞에서 너무 잘 위장한 바람에 내가 그동안 눈치 못 챈 건가?’‘에이, 아닐 거야.’난 그 상황만은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그 상대가 하정현이기를 빌었다.그때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유미는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거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나한테 먼저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자꾸만 나한테 암시하는 것도 모자라 가끔은 노골적으로 요구할 때가 있거든...”사장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식은땀이 났고 털이 곤두섰으며 마음도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아마도... 사모님 친구분들 영향을 받아 마인드가 개방적이 된 건 아닐까요?”“그럴 수도 있지. 지난번에 용천 호텔에 갔을 때 유미 친구들이 모두 간 거 나도 알아. 게다가 그 친구들은 남녀 사이의 일에 특히 개방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수호 씨한테 묻고 싶은 거야. 혹시 그때 친구들이 유미한테 뭘 가르쳤어?”나는 조마조마해서 말했다.“아마도요. 사실 상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전 기사 노릇 하러 따라간 거라서요. 게다가 친구분끼리 따로 놀 때 저를 부르지 않아 구체적으로 뭔 대화가 오갔는지 저도 몰라요.”“하하. 하긴.”사장님은 싱긋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장님을 방으로 모셔갔더니 사모님도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사장님을 문 앞까지 밀고 간 뒤 바로 내 방으로 사라졌다.하지만 방 침대에 누운 뒤 아무리 잠을 청해도 머릿속이 온통 사장님이 했던 말로 가득 차 잠을 잘 수 없었다.나는 결국 밤새도록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이 밝을 때쯤 겨우 잠이 들었다.하지만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윤미화가 갑자기 내 택배가 도착했다며 나를 깨웠다. ‘최근에 뭘 산 기억이 없는데 대체 뭔 택배가 있다는 건지.’
“그럼 솔직히 불어. 이거 다 어디서 났어? 누구랑 사용하려고 산 거야? 설마 유미는 아니겠지?”나는 황급히 도리질했다.“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전 사모님을 존경해요. 맹세코 사모님을 상대로 그런 더러운 생각 한 적 단 한 번도 없어요.”“오호라. 그 말은 그러면 나를 상대로 그런 상상한 적 있다는 뜻이야?”‘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생각이 이쪽으로 튀는 거지?’나는 너무 어이없어 바로 반박했다.“윤 사장님을 상대로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내 대답에 윤미화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봤다.“왜? 내가 안 예뻐?”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제야 인터넷에서 왜 자꾸 여자한테는 도리를 따지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도리를 따진다고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니까!“진짜 할 말이 없네요. 윤 사장님,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맙시다.”나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내가 물건을 챙겨 떠나려 할 때, 윤미화가 또 앞을 막아섰다.“그거 두고 가.”“이걸로 뭐 하시려고...”나는 문뜩 뭔가 떠올랐다.“설마 남편이랑 같이 즐기려고요? 그래요. 그렇게 원한다면 가져요.”나는 상대가 나를 또 괴롭힐까 봐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솔직히 나도 이걸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영미가 기어코 시험하라며 주는 바람에 이런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던 거지.때문에 윤미화가 그렇게 원한다면 줘 버리면 그만이었다.“그럼 전 가도 되죠?”“가 봐. 난 오늘 안 올 거야. 나 대신 제부 잘 돌봐 줘.”나는 윤미화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를 리 없었다. 윤미화는 분명 집에 돌아가 남편과 함께 체험하려는 속셈이었다.때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방을 나갔다.오늘부터 사장님은 침술 치료를 해야 했기에,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곧장 하봉섭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다.봉섭 할아버지는 커다란 군용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은 전에 집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도 예전에 똑같은 걸 갖고 계셨으니까.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봉섭 할아버지가
임민수는 안쓰러운 듯 제 사위를 훑어보더니 말투를 누그러뜨렸다.“호섭아, 나도 한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간암은 한의학적 방법으로 완치할 수 없어. 나랑 네 어머니가 이미 B시에서 훌륭한 전문의를 찾았으니 오늘 다 같이 B시로 가자.”한영심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맞아. 우리가 찾은 병원은 간암 치료로 유명한 곳이래. 게다가 주치의는 간암을 십몇 년 동안 연구한 교수분이고. 우리 말 믿어 줘.”두 사람은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 다만 두 사람이 사장님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건 다정한 말투에서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제삼자인 우리마저 두 분이 사장님을 친아들처럼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사장님과 사모님이 어떻게 설득하든 두 분은 결단코 한의학적 치료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봉섭 할아버지도 인정을 봐서 도와주러 온 입장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료라는 건 원래 환자가 원해야 해줄 수 있는 거니까.나는 이 선생님을 바라봤다.그러자 이 선생님이 앞으로 나서서 두 분을 설득했다.“우선 진정하고 제 말 좀 들어주세요.”“들을 거 뭐 있나? 말도 없이 우리 아들 몸으로 마구 실험한 사람들인데, 난 자네들과 할 얘기 없네.”임민수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찌나 날카로운지 방금 전과 딴판이었다. 게다가 엄숙하고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이 선생님도 어르신을 무서워하는 눈치였지만 사장님의 안위를 위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저도 두 분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두 분이 찾은 의사 선생님도 아마 100퍼센트 완치할 수 있다고 확답을 주지는 못할 거예요. 서의학은 기껏해야 약물치료나 화학 치료뿐일 텐데, 치료 과정에 느끼는 고통은 일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두 분이 사위의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건 바라지 않을 거잖아요.”이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민수가 귀찮은 듯 말을 끊었다.“됐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어. 상관없는 사람은 다 나가게.”“어르신...”임
임민수와 한영심은 나른하게 누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나도 내 행동이 너무 지나치고 무례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나는 단지 봉섭 할아버지가 얼른 사장님 병을 치료하기를 바랄 뿐이었다.치료 과정에 나는 두 어르신 옆을 지키며 감각이 돌아오려고 할 때마다 협곡혈을 찔렀다.그 과정에 임민수의 눈빛은 나를 잡아먹으려던 데로부터 갈기갈기 찢어발기려는 것처럼 살의를 띄었다.사실 나도 너무 난감했다. 심지어 너무 무서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그러다 약 3시간이 지났을 때쯤 봉섭 할아버지의 입에서 겨우 끝났다는 말이 들렸다.나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 몸은 어느새 식은땀에 흠뻑 젖어 티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나는 얼른 달려 나가 사장님 상태를 살폈다.“사장님, 어때요?”사장님은 힘에 부친 듯해 보였다.그때 봉섭 할아버지가 말했다.“치료가 방금 끝나 아직은 몸이 허약할 거야. 한동안은 몸조리해야 해.”이 선생님은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어르신, 침술 실력이 참 대단하네요. 저도 30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이렇게 안정적인 침술 수법은 처음 봐요.”봉섭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자네도 내 침술 실력이 보통이 아닌 걸 눈치챈 걸 보면 실력이 만만치 않군.”사모님은 얼른 사장님 곁으로 다가가 땀을 닦아주었다.그사이 나는 봉섭 할아버지와 이 선생님의 대화를 열심히 엿들었다. 심지어 얼마나 집중했는지 침대에 있는 임민수 내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나를 잡아먹을 듯한 임민수의 눈과 딱 마주쳐 얼른 목을 움츠렸다.“어르신, 죄송합니다.”“죄송?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당장 나가! 당장!”임민수가 폭발한 모습은 너무 무서웠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기 두려워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봉섭 할아버지와 이 선생님도 잇따라 밖으로 나왔다.사모님 집에서 나오기 바쁘게 두려움은 싹 가셨다
하지만 형수는 너무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에 반해 양춘옥은 힘이 넘쳐나 손쉽게 형수를 제압했다.형수는 순간 폭발해 버렸다.“당, 당신 뭐 하는 거야?”양춘옥은 얼른 아들에게 말했다.“아들, 뭐 해? 얼른 밧줄을 찾아오지 않고. 이 여자 윗몸만 움직일 수 있고 아래는 못 움직여. 너한테 마침 좋은 기회잖아.”양춘옥의 아들은 얼른 벨트를 풀더니 형수의 손을 묶으려고 다가갔다.그 순간 나는 방으로 쳐들어가 그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양춘옥은 그 순간까지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양춘옥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나는 양춤옥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뺨을 후려갈겼다.형수는 위험한 순간에 나타난 나를 보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형수가 깨어난 걸 보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형수!”“수호 씨, 타이밍 너무 좋았어요. 이 둘은 인간도 아니에요! 감히...”형수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얼른 형수의 두 손을 꼭 잡았다.“알아요. 다 알아요. 형수, 걱정하지 마요. 이 사람들이 한 짓 내가 모두 찍었어요. 지금 경찰에 신고할게요.”양춘옥은 경찰에 신고한다는 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마구 달려들어 내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나는 또다시 양춘옥의 뺨을 내리쳤다.그러자 이번에는 양춘옥의 아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모자 둘이 달려들어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양춘옥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그제야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정 사장님, 제발 신고하지 말아 주세요. 제 아들이 이제 막 출소했는데 또 잡히면 이번에는 끝장이에요.”나는 이를 악물며 양춘옥을 바라봤다.“당신 아들 생각하기 전에 우리 형수는 생각했어? 내가 마침 집에 오지 않았다면 당신과 당신 아들이 형수한테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거잖아.”“내가 아줌마를 얼마나 믿었는데,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정말 악독하기도 하지. 오늘 당신도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거야.”“안 돼요. 정 사장
“뭐요?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에요?”“까다로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얌전하지 않은 여자인 것 같아. 남편과 잘 지내지 않고 별 같잖은 남자랑 바람이 났어. 정수호라는 사람인데, 매일 이 여자 몸을 닦아주러 와서 이 여자를 형수라고 불러...”“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 여자도 참 뻔뻔하네요.”아들의 말에 양춘옥이 말했다.“그러니까 내가 널 불러온 거잖아. 이 여자도 워낙 얌전하지 않은 여자니까 너도 욕구나 풀어보라고. 아들, 너 이제 막 감방에서 나와 많이 쌓였을 거 아니야?”“밖에서 아가씨 찾기보다 이 여자한테 욕구를 푸는 게 더 나아. 적어도 이 여자는 깨끗하잖아.”고태연은 두 모자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일어나 양춘옥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그녀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그녀가 혼자 집에 있을 때 말이다.이런 상황에서 당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를 거다.고태연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심지어 이 두 모자에게 이토록 모욕당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 시각 양춘옥과 아들의 대화를 들은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안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나는 우선 거실에 설치했던 감시 카메라를 찾았다. 그랬더니 카메라는 어느새 구석으로 옮겨졌다.‘이 아줌마가! 나는 그래도 믿고 매일 카메라를 돌려보지 않았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나는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켜고 방 안을 몰래 촬영했다.탐정 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된 이후로 나는 뭐든 증거싸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남자가 형수 몸에 바짝 붙어 다리에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냄새 좋다. 식물인간한테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다니. 피부도 이렇게 좋고. 대박, 몸매도 완전 끝내주잖아.”양춘옥은 옆에서 키득거렸다.“당연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자는 깨끗해. 아들, 얼른 하지 않고 뭐 해?”“헤헤. 그럼 엄마는 밖에서 망 좀 봐...”양춘옥은
“나 그만 놀려요. 내가 보고 싶은데 왜 애교 누나 집에 와서 혼자 술을 마셔요?”나는 아직 어려 정치계 판을 잘 모른다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남주 누나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우리 푸들 많이 똑똑해졌네? 예전처럼 타격감이 좋지 않아. 하지만 점점 더 귀여워.”나는 자꾸만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남주 누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말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에 무슨 문제 생겼어요?”“응. 이 세상에서 날 괴롭힐 수 있는 건 일밖에 없어.”“왜죠? 왜 혼인이나 가정 문제는 될 수 없어요?”“헛소리 아니야? 혼인과 가정이 나보다 중요할 리 없잖아.”‘맞다. 누나도 가정보다 자기 지위가 우선인 여자였지. 백연우처럼.’“그래서 일은 해결됐어요?”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후회했다. 해결되었으면 술로 기분을 달랠 리 없을 테니까.하지만 남주 누나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해결된 셈이지. 하지만 강등됐어.”“얼마나요?”“아무 실권도 없는 말단직으로. 그래도 괜찮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내 약점을 잡고 나 협박하는 사람 없을 테니까.”남주 누나는 강등된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아마도 자기 위로일 수 있었다.“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시간도 아까운데 계속 즐겨볼까?”남주 누나는 또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심지어 리듬 있는 음악을 틀어 놓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나에게 또 충격을 안겨주었다.나와 남주 누나는 그사이 애교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몰랐다.애교 누나는 내가 걱정되어 직접 와 봤다. 하지만 방에서 들리는 나와 남주 누나의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남주였네. 다른데 좀 가지. 왜 우리 집에서 수호 씨를 꼬시는 거야?”애교 누나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나와 남주 누나는 한밤중까지 몸을 섞고 피곤한 몸을 한 채 잠이 들었다.오랜만에 푸는 욕구에 우리 둘 다 너무 흥분해 버린 탓이었다.심지어 남주 누나는 열정적이다 못해 심지어 내가 지금 동영상 촬영 현
남주 누나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정수호네. 이리 와, 와서 한잔해.”나는 남주 주나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봤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와인 두 병 중 한 병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남주 누나도 이미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했다.“누나, 혼자 이렇게 마신 거예요?”남주 누나는 똑바로 앉아 내 팔을 감싸안았다.“너 아니면 애교를 불러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요즘 바쁘다고 해서 안 불렀어. 그런데 마침 이렇게 와 버렸네? 나랑 한잔해.”나는 지난번 남주 누나를 봤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누나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아마도 일 때문인 것 같았다.그런데 이번에 이토록 취해 있는 걸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나는 남주 누나 손에 있는 와인을 빼앗았다.“그만 마셔요. 취했어요. 부축해 줄 테니 방에서 휴식해요.”“정수호, 예전에 너한테 장난치던 때가 그리워. 도 장난칠 테니까 내 장난 받아줘. 응? 나도 기분 좀 좋아지게.”남주 누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게 대체 뭐가 그립다는 건지.’나는 그때 너무 단순해 항상 남주 누나한테 농락당했다. 심지어 몇 번이나 나를 유혹하는 남주 누나를 눈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며 마음을 졸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가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을 때면 마음대로 하는 지금이 더 좋다.“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남주 누나는 내 목을 끌어안고 취한 말투로 말했다.누나의 완벽한 몸매를 보니 나도 솔직히 몸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남주 누나는 지금 많이 취한 상태고, 기분도 안 좋아 보이니 몸을 섞는다고 즐겁지는 않을 거다.“됐어요. 누나 지금 취했어요. 부축해 줄 테니 방에서 자요.”“나 많이 안 마셨어. 그냥 조금 알딸딸한 정도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있잖아. 나 요즘 너무 바빠서 남자 만날 시간도 없었어. 그러니 오늘 너 땡잡은 거야.”남주 누나는 말하면서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나는 술에 취한
“정 사장님, 물 바꿔드릴까요?”내가 형수의 팔을 닦아주는 동안 양춘옥이 방에 들어와 열정적으로 물었다.그 모습에 나는 간단히 말했다.“아니에요. 거의 다 닦아요.”나는 형수가 뭘 걱정하는지 몰랐다. 무엇보다 양춘옥이 문제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때 양춘옥이 목적성이 다분한 질문을 했다.“정 사장님, 요즘 안 보이시던데 바쁘셨나요?”“네. 요즘 일이 바빠서 매일 오지 못해요. 그러니 이모님이 우리 형수님 잘 돌봐주세요. 참, 요즘도 제가 바쁘니 부탁드릴게요.”양춘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싱긋 웃었다.“정 사장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조건 잘 돌봐드릴게요.”“형수, 다 닦았어요. 형수가 깨끗한 걸 좋아하는 거 알고 특별히 피부 관리하는 스킨로션도 발라줬어요.”나는 형수를 돌본 뒤 옆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고아연이 돌아온 뒤에야 떠났다.고아연은 나를 집 앞까지 마중하며 물었다.“요즘 바빠?”“네, 왜 그래요?”“아니, 별 건 아니고. 지난번에 찍는다던 영상을 안 찍었길래 바쁜가 해서.”“요즘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이건 단순한 오락이라 돈을 버는 것에 비하면 당연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그래. 그럼 앞으로 안 찾을게. 내 연락처 삭제해.”고아연은 갑자기 말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여자들은 다 이래요? 심심하면 연락처 삭제하고? 이런 거 엄청 예의 없는 거 알아요?”고아연은 팔짱을 낀 채 웃었다.“우리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도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바빠서 영상 찍을 시간도 없다는데 내가 네 연락처를 왜 남겨? 난 원래 이래. 연락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삭제해. 수호 씨도 마찬가지야.”나는 일부러 고아연에게 맞섰다.“그럼 형수가 지금 이러니까 형수도 삭제했겠네요?”“그래.”“흥. 누가 믿을 줄 알고.”“믿든 말든.”고아연의 모습은 거짓 같지 않았다.나는 이 순간 고아연을 또다시 봤다.“바쁜 일 다 처리하면 도와줄게요. 연락처 삭제하지 마요. 앞으로 또다시 추가하
애교 누나 얘기를 언급하니 내 기분은 저절로 다운되었다.“난 누구랑 결혼할지도 모르겠어.”“왜? 애교 누나랑 사이가 틀어졌어?”민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애교 누나랑 나는 결혼할 사이가 같지 않아. 애교 누나가 나한테 너무 관대하고 너무 풀어줘. 그래서 너무 진실감이 없어.”“헐. 여자 친구가 풀어주는 게 얼마나 좋은데? 네가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도 뭐라 안 하고 오히려 응원해 준다며? 그렇게 좋은 여자 손전등 켜고 찾아도 없어.”현성과 민우는 나를 부러워했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똑같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애교 누나는 너무 좋고 너무 관대하여 질투도 하지 않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가끔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생각도 들곤 한다.그에 반해 윤지은은 또 나에게 너무 현실을 체감하게 해준다. 좋아할 때도 질투할 때도 있어 오히려 더 커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정수호, 너 진짜 쓰레기네. 너 설마 애교 누나 버리려고 그래?”현성이 갑자기 물었다.“헛소리. 내가 언제 버린다고 했어?”“그럼 아까 발언 무슨 뜻인데?”“난 그냥 애교 누나가 너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지 버리겠다는 뜻 아니야. 함부로 누명 씌우지 마.”나는 바로 현성을 반박했다.하지만 그때 민우가 바로 끼어들었다.“사실 나도 네가 좀 쓰레기 같아. 아마 네가 만난 누나들이 다 너 같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나 보다.”“젠장. 내가 너희들한테서 무슨 좋은 말을 듣겠냐?”그날 저녁 퇴근 후 나는 형수네 집에 들렀다.그동안 너무 바빠 형수를 보러 오지도 못하고 몸을 닦아주지도 못했기에, 나는 얼른 따뜻한 물을 담아 형수 몸 곳곳을 닦아주었다.형수는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지만 뺌은 여전히 발그스름하고 피부도 백옥 같은 피부에 핑크빛이 감돌았다.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잠자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내가 형수의 몸을 닦아주는 동안 형수의 가슴은 사실 콩닥콩닥 북을 쳤다.‘수호 씨가 이제야 날
“이 얘기는 이쯤에서 하고. 말해요, 서나연 씨 일 외에 다른 볼 용건 있어요?”나는 화제를 다시 끌어왔다.그러자 소여정은 내 턱을 잡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있지 그럼. 너 놀리러 왔어. 내가 너 놀리는 거 오랜만이잖아.”“미쳤어요?”나는 다급히 소여정의 손을 쳐냈다.“날 미친X 취급해? 내가 진짜 너 가만 안 둔다?”“못 믿겠어요. 나 이제 임천호도 안 두려운데 소여정 씨를 두려워하겠어요?”나는 소여정에게 계속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소여정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오호라. 며칠 새에 많이 컸네? 그런데 그런 모습 점점 더 좋아지는데?”소여정은 정말 역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번 나타났다 하면 나에게 귀찮은 일을 던져주곤 한다.물론 내가 이제 임천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그저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내가 소여정을 무시하자 소여정도 나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스로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결국 몇 가지 선물 세트를 골랐다.소여정이 계산하려고 할 때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선물 세트 사서 누구한테 주려고요?”“이젠 임천호 안 두렵다며? 내가 누구한테 주든 무슨 상관이야? 아니면 내가 이 선물을 가져갔다가 이 가게에서 샀다는 걸 들킬까 봐 그러는 거야?”소여정은 마치 내 배에서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빠삭하게 알았다.“찾아오겠으면 찾아오라고 해요. 소여정 씨는 정상적인 소비예요.”나는 말발로 소여정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바로 뒤돌아 떠나갔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후들거렸다.소여정은 물건을 구매한 뒤 가게에서 택배로 보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에 점원 한 명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소여정은 주소 하나를 남기고 직원더러 선물 세트를 주소에 적인대로 보내달라고 당부했다.소여정이 떠난 뒤 나는 그 위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주소는 H시로 되어 있고, 받는 이는 ‘소원규’로 되어 있었다.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한참을 떠
“누구한테 들었어?”“그건 상관하지 마요.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요.”나는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다.다행히 소여정은 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맞아. 나도 예전에 윤지은과 임유미처럼 잘 사는 집 딸이었어. 안 그러면 우리 넷이 왜 친구가 됐겠어?”하긴. 소여정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뭐 하나만 물을게.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강북에 있지?”“그걸 어떻게 알아요?”나는 흠칫 놀랐다.그 말에 소여정이 대답했다.“어떻게 알았는지는 알려고 하지 마. 맞는지 아닌지만 말해.”소여정이 이렇게 묻는다는 건 이미 단서를 찾았다는 뜻이기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맞아요. 임천호 아내가 강북에 와서 요즘 유미 사모님과 같은 동네인 백조의 호수에 살아요.”“백조의 호스? 보아하니 나도 그곳에 집을 마련해야겠네.”소여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 말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지금 제정신이에요?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데 멀리 숨지는 못할망정, 같은 동네에 살겠다고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설마 서나연 씨를 쫓아내고 본인이 임천호 아내가 되려고 그래요?”소여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안돼? 임천호가 얼마나 대단해. 나한테도 잘해주고.”“대단하긴 무슨. 부시장님과 윤 회장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만.”나는 내가 임천호 뒷담화를 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소여정은 나를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정수호, 대단하네. 임천호를 그렇게 말하고. 임천호가 안 뒤 죽이려고 할까 봐 두렵지 않아?”“내가 임천호 산하의 대출 회사도 무너뜨렸는데, 임천호를 무서워하는 거로 보여요?”나도 비록 내가 너무 잘난체 한다는 걸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이 세상에 허영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게다가 이건 내가 평생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일이기도 하다.소여정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아주 어깨뽕이 하늘로 치솟는구먼? 그 대출 회사 임천호한테 엄청 중요한 회사인 건
“오, 오빠가 뭘 하려는지 알아요. 만약 하고 싶으면 날 오빠한테 줄 수 있어요.”주선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옷자락을 잡고 긴장한 표정으로 고백했다.이건 현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현성은 너무 설레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두말없이 주현영을 와락 끌어안았다.그러자 주현영이 이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여, 여기서는 안 돼요. 우리... 호텔 가요.”“그래, 바로 가자.”나는 현성과 주현영이 손잡고 뛰쳐나오는 걸 본 순간, 현성이 오늘 소원을 이룰 거라는 걸 알았다.나는 싱긋 웃으며 현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파이팅.”“당연하지.”현성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이윽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떠나갔다.나는 얼른 이 기쁜 소식을 민우에게 알려주려고 전화했다.[수호야. 왜 그래? 나 지금 바빠.]민우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그 목소리에 나는 의아했다.“너 지금 뭐 해? 가게 보는 거 아니었어?”[설아가 점심에 나 찾아와서 지금 설아랑 호텔에 있어.]“헐, 너 뭐야? 임설아랑 결실을 보는 거야?”‘왜 친구들한테 버림당해 혼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민우는 헤실 웃었다.[이만 끊어. 설아가 샤워하러 갔다가 지금 나와. 우리 오늘 마지막까지 갈 거거든.]민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대충 음식을 먹고 가게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하지만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을수록 기분이 안 좋았다.예전에는 내가 민우와 현성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현재는 내가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 꼴이 되었으니.하지만 윤지은과 애교 누나한테는 연락할 엄두도 나지 않고 형수는 아직 혼미해 있으니 누구를 찾아야 할지 고민이었다.나는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 않다고 이렇게 외로이 혼자 남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정수호 몰락했네. 몰락했어!’내가 속으로 감개무량해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직원 한 명이 나를 불렀다.“정 사장님, 누가 찾아왔어요.”“알았어요. 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