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민이 나를 찾아왔어.”윤미화는 입을 열자마자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그 말에 나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왕정민이 왜요?”“알아 맞춰 봐.”“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나더러 전승빈을 조사해 달라더라고.”나는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전승빈은 왕정민의 장인어른이다. 그런데 감히 장인어른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하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전승빈한테 들킬까 봐 두렵지도 않나?’나는 생각을 뒤로한 채 황급히 물었다.“혹시 전승빈도 바람피워요?”“부자들이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는 거 놀라운 일도 아니야. 부자들 세계에서 그건 바람이 아니라 능력이야.”그렇다면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그럼 왕정민이 뭘 조사하라고 했는데요?”나는 갑자기 뭔가 떠올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설마 범죄 증거를 수집해달라는 건 아니겠죠?”윤미화는 제법이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바보는 아니네. 맞았어.”‘헐. 이젠 아예 장인어른한테 맞서려는 건가? 정말 비겁하네.’전승빈은 왕정민이 바람피운 증거를 내세워 그에게 제 딸과 잘 살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왕정민을 통제하려고 그의 회사까지 장악해 버렸다. 그렇게 하면 왕정민이 얌전히 제 딸과 잘 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왕정민이 똑같은 방법으로 저를 무너뜨리려 들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왕정민이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그와 동시에 애교 누나가 이런 사람과 빨리 이혼한 게 너무 다행으로 느껴졌다.나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그런데 왕정민은 왜 그런 의뢰를 사장님한테 한 거예요? 그것도 전승빈을 조사하라고.”왕정민은 분명 제 약점을 전승빈에게 넘긴 게 윤미화라는 걸 알 거다. 그렇다면 윤미화가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를 싫어해야 할 텐데 오히려 직접 찾아와 의뢰까지 한 건 너무나 아이러니했다.이건 너무 불합리했다. 때문에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윤미화는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구체적인 건 나도 몰라. 진짜
나는 왕정민의 도발을 피하고 싶지도, 그한테 얕잡다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탐정 조사는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의뢰를 해온다면 나는 그걸 받으면 그만이다.하지만 왕정민이 전승빈 손을 빌려 나를 제거하려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왕정민한테 제가 의뢰를 받았다고 전해줘요.”내 대답에 윤미화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봤다.“혹시 상대할 방법이 생긴 거야?”“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분명 해결 방안이 있을 거예요.”윤미화는 그제야 찌푸린 미간을 펴며 만족하는 지소를 지었다.“아랫도리로만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대담하네. 그런데 전에는 왜 그렇게 임천호를 무서워한 거야?”“헉, 설마 저 미행했어요?”“누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소여정한테서 들었어.”소여정과 사모님은 친한 친구 사이고, 윤미화는 사모님 사촌 언니기에 가끔 서로 만나는 건 이상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윤미화의 질문에는 반드시 대답해야 했다.“자기보다 몇 배나 강한 사람이 앞에 있으면 누구라도 겁먹어요. 게다가 임천호에 대한 소문이 좀 어마무시해요? 모든 사람이 임천호를 이 시대의 효웅이네 뭐네 하며 떠받들고 잔인하고 권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어요?”“하지만 왕정민은 달라요. 왕정민은 본질을 따지면 저랑 다를 게 없거든요. 저보다 성과가 더 많다 뿐이지. 더군다나 왕정민은 장인어른의 통제를 받고 있지만, 전 그 누구도 막지 못해요. 그런데 나라고 왕정민이 하는 일을 못 할 게 뭐 있어요? 내가 그런 상대를 왜 무서워해야 하는데요?”윤지화는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뭐 약간 오글거리긴 하지만 용기는 가상하네. 이번 조사는 나도 함께할 거야. 전승빈 신분이 대단한 만큼 들키는 즉시 수호 씨를 죽이려 들지도 몰라.”“그럼 사장님이 같이 조사하면 사장님도 위험한 거 아니에요?”탐정 사무소에 사람도 많은데 윤미화는 충분히 내 파트너로 다른 사람을 붙여줄 수도 있었다.내 말에 윤미화가 설명했다.“이런 일을 하는
물론 나도 이곳이 사모님 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올 때 깨끗한 바지로 갈아입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불을 켜고 들어갔다.예전에 형수와 애교 누나 집에서 신세 질 때는 이런 점에 유의하지 않아 나중에 혼자 살 때 몇 번이나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모님 댁이라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나는 각별히 주의했다.화장실에 들어간 뒤 나는 평범하게 목욕했다. 다행히 샤워하는 내내 아무 상황도 벌어지지 않아 무사히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와 방금 씻은 옷을 널려고 베란다에 도착한 순간, 사장님이 베란다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사장님은 의자에 앉아 창밖의 달을 보고 있었다.내가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할 때까지 사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사전에 나를 잠깐 부르기만 했어도 내가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사장님, 시간도 늦었는데 왜 주무시지 않아요?”나는 옷을 널려던 것도 잊은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곧게 서 있었다.그러자 사장님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잠이 안 와서 그래. 혹시 놀랐어? 갑자기 미안해지네. 아까는 뭘 좀 생각하느라 소리를 내지 않았어.”나는 점차 냉정을 되찾은 뒤 의자를 끌어와 사장님 옆에 앉았다.“사장님,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뭐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세요.”“하하. 건강 걱정한 게 아니라 다른 일을 생각한 거야.”“다른 일이요? 무슨 일인데요?”나는 현재 치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나 싶었다.그때 사장님이 유유히 말을 꺼냈다.“예전 일을 회상했어. 내가 아프기 전에는 유미와 참 행복했거든. 우리 장인 장모도 어릴 때부터 나를 친아들처럼 키워주셨고. 아직도 그게 다 어제 일 같아.”사람은 늘 이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은 그게 별것 같지 않은 것 같지만,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과거를 회상하면 그 순간들이 그렇게 행복하고 그리울 수가 없다.“저도 그래요. 제 어머니는 제가 집에
“유미가 용천 호텔에 다녀온 뒤로 많이 달라진 것 같거든. 하지만 뭐가 달라졌는지 말하라고 하면 잘 모르겠어.”‘설마 그날 상대가 정말 사모님이었나?’‘사모님이 내 앞에서 너무 잘 위장한 바람에 내가 그동안 눈치 못 챈 건가?’‘에이, 아닐 거야.’난 그 상황만은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그 상대가 하정현이기를 빌었다.그때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유미는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거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나한테 먼저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자꾸만 나한테 암시하는 것도 모자라 가끔은 노골적으로 요구할 때가 있거든...”사장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식은땀이 났고 털이 곤두섰으며 마음도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아마도... 사모님 친구분들 영향을 받아 마인드가 개방적이 된 건 아닐까요?”“그럴 수도 있지. 지난번에 용천 호텔에 갔을 때 유미 친구들이 모두 간 거 나도 알아. 게다가 그 친구들은 남녀 사이의 일에 특히 개방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수호 씨한테 묻고 싶은 거야. 혹시 그때 친구들이 유미한테 뭘 가르쳤어?”나는 조마조마해서 말했다.“아마도요. 사실 상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전 기사 노릇 하러 따라간 거라서요. 게다가 친구분끼리 따로 놀 때 저를 부르지 않아 구체적으로 뭔 대화가 오갔는지 저도 몰라요.”“하하. 하긴.”사장님은 싱긋 웃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장님을 방으로 모셔갔더니 사모님도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사장님을 문 앞까지 밀고 간 뒤 바로 내 방으로 사라졌다.하지만 방 침대에 누운 뒤 아무리 잠을 청해도 머릿속이 온통 사장님이 했던 말로 가득 차 잠을 잘 수 없었다.나는 결국 밤새도록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날이 밝을 때쯤 겨우 잠이 들었다.하지만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윤미화가 갑자기 내 택배가 도착했다며 나를 깨웠다. ‘최근에 뭘 산 기억이 없는데 대체 뭔 택배가 있다는 건지.’
“그럼 솔직히 불어. 이거 다 어디서 났어? 누구랑 사용하려고 산 거야? 설마 유미는 아니겠지?”나는 황급히 도리질했다.“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전 사모님을 존경해요. 맹세코 사모님을 상대로 그런 더러운 생각 한 적 단 한 번도 없어요.”“오호라. 그 말은 그러면 나를 상대로 그런 상상한 적 있다는 뜻이야?”‘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생각이 이쪽으로 튀는 거지?’나는 너무 어이없어 바로 반박했다.“윤 사장님을 상대로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내 대답에 윤미화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봤다.“왜? 내가 안 예뻐?”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제야 인터넷에서 왜 자꾸 여자한테는 도리를 따지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도리를 따진다고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니까!“진짜 할 말이 없네요. 윤 사장님,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맙시다.”나는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내가 물건을 챙겨 떠나려 할 때, 윤미화가 또 앞을 막아섰다.“그거 두고 가.”“이걸로 뭐 하시려고...”나는 문뜩 뭔가 떠올랐다.“설마 남편이랑 같이 즐기려고요? 그래요. 그렇게 원한다면 가져요.”나는 상대가 나를 또 괴롭힐까 봐 대범한 모습을 보였다.솔직히 나도 이걸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이영미가 기어코 시험하라며 주는 바람에 이런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던 거지.때문에 윤미화가 그렇게 원한다면 줘 버리면 그만이었다.“그럼 전 가도 되죠?”“가 봐. 난 오늘 안 올 거야. 나 대신 제부 잘 돌봐 줘.”나는 윤미화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를 리 없었다. 윤미화는 분명 집에 돌아가 남편과 함께 체험하려는 속셈이었다.때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방을 나갔다.오늘부터 사장님은 침술 치료를 해야 했기에,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곧장 하봉섭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다.봉섭 할아버지는 커다란 군용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가방은 전에 집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도 예전에 똑같은 걸 갖고 계셨으니까.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봉섭 할아버지가
임민수는 안쓰러운 듯 제 사위를 훑어보더니 말투를 누그러뜨렸다.“호섭아, 나도 한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간암은 한의학적 방법으로 완치할 수 없어. 나랑 네 어머니가 이미 B시에서 훌륭한 전문의를 찾았으니 오늘 다 같이 B시로 가자.”한영심도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맞아. 우리가 찾은 병원은 간암 치료로 유명한 곳이래. 게다가 주치의는 간암을 십몇 년 동안 연구한 교수분이고. 우리 말 믿어 줘.”두 사람은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 다만 두 사람이 사장님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건 다정한 말투에서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제삼자인 우리마저 두 분이 사장님을 친아들처럼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사장님과 사모님이 어떻게 설득하든 두 분은 결단코 한의학적 치료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봉섭 할아버지도 인정을 봐서 도와주러 온 입장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료라는 건 원래 환자가 원해야 해줄 수 있는 거니까.나는 이 선생님을 바라봤다.그러자 이 선생님이 앞으로 나서서 두 분을 설득했다.“우선 진정하고 제 말 좀 들어주세요.”“들을 거 뭐 있나? 말도 없이 우리 아들 몸으로 마구 실험한 사람들인데, 난 자네들과 할 얘기 없네.”임민수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찌나 날카로운지 방금 전과 딴판이었다. 게다가 엄숙하고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이 선생님도 어르신을 무서워하는 눈치였지만 사장님의 안위를 위해 이를 악물고 말했다.“저도 두 분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두 분이 찾은 의사 선생님도 아마 100퍼센트 완치할 수 있다고 확답을 주지는 못할 거예요. 서의학은 기껏해야 약물치료나 화학 치료뿐일 텐데, 치료 과정에 느끼는 고통은 일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두 분이 사위의 병을 치료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건 바라지 않을 거잖아요.”이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민수가 귀찮은 듯 말을 끊었다.“됐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어. 상관없는 사람은 다 나가게.”“어르신...”임
임민수와 한영심은 나른하게 누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나도 내 행동이 너무 지나치고 무례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나는 단지 봉섭 할아버지가 얼른 사장님 병을 치료하기를 바랄 뿐이었다.치료 과정에 나는 두 어르신 옆을 지키며 감각이 돌아오려고 할 때마다 협곡혈을 찔렀다.그 과정에 임민수의 눈빛은 나를 잡아먹으려던 데로부터 갈기갈기 찢어발기려는 것처럼 살의를 띄었다.사실 나도 너무 난감했다. 심지어 너무 무서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그러다 약 3시간이 지났을 때쯤 봉섭 할아버지의 입에서 겨우 끝났다는 말이 들렸다.나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 몸은 어느새 식은땀에 흠뻑 젖어 티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나는 얼른 달려 나가 사장님 상태를 살폈다.“사장님, 어때요?”사장님은 힘에 부친 듯해 보였다.그때 봉섭 할아버지가 말했다.“치료가 방금 끝나 아직은 몸이 허약할 거야. 한동안은 몸조리해야 해.”이 선생님은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어르신, 침술 실력이 참 대단하네요. 저도 30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이렇게 안정적인 침술 수법은 처음 봐요.”봉섭 할아버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자네도 내 침술 실력이 보통이 아닌 걸 눈치챈 걸 보면 실력이 만만치 않군.”사모님은 얼른 사장님 곁으로 다가가 땀을 닦아주었다.그사이 나는 봉섭 할아버지와 이 선생님의 대화를 열심히 엿들었다. 심지어 얼마나 집중했는지 침대에 있는 임민수 내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나를 잡아먹을 듯한 임민수의 눈과 딱 마주쳐 얼른 목을 움츠렸다.“어르신, 죄송합니다.”“죄송?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당장 나가! 당장!”임민수가 폭발한 모습은 너무 무서웠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기 두려워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봉섭 할아버지와 이 선생님도 잇따라 밖으로 나왔다.사모님 집에서 나오기 바쁘게 두려움은 싹 가셨다
어여쁜 여자가 웃으며 달려오더니 봉섭 할아버지 품에 와락 안겼다.“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너무 보고싶었어요.”“다 큰 여자애가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 참, 네 동생도 이틀 전에 B시에 갔다던데. 둘이 만났어?”“네. 그 계집애가 글쎄 가슴 수술 하겠다는 걸 내가 호되게 혼냈어요. 그랬더니 삐쳐서는 같이 오자고 했는데도 거절하더라요.”“걔는 갑자기 왜 가슴 수술을 받겠다는 거야? 세상에 각양각색의 미녀가 얼마나 많은데. 다 똑같이 생기면 뭔 의미가 있어?”할아버지가 손녀와 얘기하는 도중에 끼어들 수 없었기에, 나는 살짝 거리를 두고 지켜봤다. 그러는 와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그때 한창 얘기하던 여자가 나를 보더니 누구냐고 물었다.봉섭 할아버지는 우리를 서로 소개해 주었다.“여긴 정수호라고 내 친구네 손자. 아까 이 친구가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수호야, 여긴 내 손녀 한지영이야.”“반가워요.”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한지영이 나를 훑어보는 눈빛은 너무 불편했다.노골적인 시선에 나는 상대가 왜 이러나, 내 얼굴에 꽃이라도 있나 의심했다.한지영은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외할아버지께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초대했다.결국 나도 그 자리에 끼는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고심 끝에 한 중식당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지영은 수많은 음식을 주문했다. 그 모습만 봐도 상대가 얼마나 돈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수호 씨도 나랑 같이 음료수 선택하러 가지 않을래요?”나는 한지영이 왜 갑자기 나를 따로 불러내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뒤따라갔다.음료를 고를 때 한지영이 갑자기 물었다.“혹시 무슨 일 해요?”“한약관에서 마사지사로 일해요.”“몸매도 좋아 보이는데 혹시 모델에 관심 있어요?”나는 눈을 홉뜨며 단번에 거절했다.“없어요.”한지영은 아까부터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훑어봤는데, 그 시선은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게다가 한의대를 졸업한 나더러 모델을 하라
“한 번 더 해요. 한 번 더...”이다연은 신이 나서 점점 게임에 몰입했다.하지만 나는 바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늦었어. 이제 자.”“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요?”“너 생활 패턴이 너무 불규칙적이야. 계속 이러면 호르몬 분비에 영향 줄 거야.”나는 말하면서 이다연의 맥을 짚었다.“이것 봐, 속에 열이 많잖아. 어쩐지 얼굴에 여드름이 많고 성격이 급하다 했네.”이다연은 내 손을 탁 쳐냈다.“오빠도 왜 우리 아빠랑 똑같아요? 잔소리 대마왕, 짜증 나!”나는 이제야 이다연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다연은 몸에 화가 많아 다른 사람이 저를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하고 조금만 잔소리해도 화내고 짜증 낸다.“이거 병이야. 알아 몰라?”이 다연은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병 있는 건 오빠겠죠. 우리 아빠도 의사거든요. 내가 병이 있는지 없는지 아빠가 모르겠어요?”“네가 이 선생님과 말도 안 섞으려 하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알아? 네가 그럴 기회를 줬어?”이다연은 할 말이 없었는지 조용해졌다.나는 이내 말투를 누그러뜨렸다.“하나만 묻자. 너 이런 증상 몇 년이야?”“이런 증상이라니요?”“화가 많고 인내심이 없고 자꾸만 짜증 내고, 사람을 만났다 하면 싸우고 소통하기 싫어하는 거 말이야. 너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지?”이다연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어떻게 알았어요? 아빠한테서 들었어요?”“이 선생님은 그런 말씀 없으셨어. 이건 네 맥을 짚어보고 안 거야.”“못 믿겠어요. 지금 내 문제를 알아낸 건 둘째 치고 예전에 어땠는지까지 안다고요?”이다연은 눈을 부라렸다.나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네가 예전에 어땠는지 난 확실히 몰라. 하지만 네 부모님이 저렇게 좋은 분들이신데, 네가 두 분 자식이니 인성이 나쁘지는 않겠다 생각한 거지.”“게다가 네 맥을 짚어봤는데, 너 몸에 문제 많아. 지금 네가 이러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이다연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그 모습에 나는
윤지은은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 지금 모습 고릴라 같은 거 알아?”“일부러 그런 거예요. 이러지 않으면 지은 씨가 안 웃을 거잖아요.”윤지은이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윤지은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일은 상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정말이에요? 절대 무리하지 마요. 두 사람 지난번에 싸웠을 때, 지은 씨가 잔뜩 취해서 내 앞에서 술주정했잖아요.”윤지은은 손을 뻗어 내 다리를 꼬집었다.“그건 옛날 일이야. 왜 또 그 자식 얘기는 꺼내는 건데? 그때는 내가 어리석었어. 그 자식과 나눈 게 사랑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제는 알았어. 그 자식은 그냥 쓰레기야. 그런 자식 때문에 눈물 흘릴 가치가 없어.”나는 윤지은이 꼬집은 곳을 문지르며 위로했다.“맞아요. 내 눈에도 보여요. 지은 씨 많이 성장했어요. 하지만 우선 나를 좀 놔주면 안 돼요? 아파요.”윤지은은 그제야 손을 풀었다.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윤미화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젠장.’윤미화는 뭔가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윤미화는 안 그래도 나와 윤지은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우리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그 추측을 확신했다.나는 작은 소리로 윤지은에게 귀띔했다.“앞으로 저기에 앉은 윤미화 사장님을 만나면 조심해요. 저 사장님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고 있어요.”“의심하는 게 뭐 어때서? 증거도 없는데 무서워할 거 뭐 있어?”윤지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나야 괜찮죠. 난 지은 씨가 안 괜찮아할까 봐 걱정했던 거예요. 지은 씨가 괜찮다면 난 상관없어요.”그렇다면 나도 이제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윤지은은 또다시 나를 노려보았다.“밥 먹으면서 좀 조용할 수 없어? 말 참 많네.”‘흠. 또 내가 눈치 없이 굴었네.’식사 자리는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나는 이 선생님 가족을 집에 데려다주려고 민우와 현성한테 다른 사람을 부탁했다.이 선생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다연은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다이아라고요? 정말이에요?”나는 직접 핸드폰을 열어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다연은 바로 관심을 가졌다.“오빠는 어떤 캐릭터 좋아해요?”“다 돼. 넌 어떤 거 좋아하는데? 내가 서포트줄게.”“난 아리요. 마법사.”“그럼 내가 유미할게. 서포터. 어때?”“좋아요. 해 봐요.”이다연은 말하면서 캐릭터를 골랐다.하지만 나는 서둘러 고르지 않고 입을 열었다.“이거 끝나면 안에서 식사도 끝나겠어. 우리도 먼저 들어가서 밥부터 먹자. 그러고 나서 같이 해줄게.”이다연은 나를 꿰뚫어 볼 듯 훑어봤다.“지금 장난해요?”“나 다이아야. 골드인 너랑 뭐 하러 장난해? 뭐든 정도가 있어야지. 너처럼 일만 있었다 하면 쌩 나가버리면 네 부모님이 난처해하셔. 이 오빠 체면 살려준다 생각하고 같이 들어가자. 약속할게. 밥 다 먹으면 같이 놀아줄게.”이다연은 화가 난 듯 콧방귀를 뀌었다.“됐어요. 딱 보면 아빠 대신 나 설득하러 왔네. 가요.”“그래. 그럼 말하지 않을게. 너 혼자 여기서 놀아. 너처럼 그렇게 놀면 백날 놀아 봐야 레벨이 안 오를 거야.”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그 말에 이다연은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했다. 이다연은 평소 게임을 즐기지만 실력은 확실히 부족해 골드 이상 올라가 본 적이 없다. 때문에 내가 데리고 놀아 주기를 무척 기대했다.결국 이다연은 내가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내 뒤따라왔다.“잠깐만요. 아까 말 지킬 거죠? 밥 다 먹으면 데리고 놀아준다는 거?”“당연하지. 하지만 너도 약속해. 앞으로 그렇게 자리 박차고 나가지 마. 네 가족 체면 깎지도 말고.”나는 이 기회에 요구를 제기했다. 이다연은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일은 조급히 해결하면 안 된다. 우선 상대 마음을 잘 달래고 협조할 수 있도록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내가 이다연을 데리고 들어오자 이 사모님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자기가 나은 딸이기에 그녀는 딸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내가 정말
“이걸 빼고 평소 유입량만 기준해서 계산하면 매일 6백만에서 천만 원 정도라도 괜찮은 편이야.”“거기에 임대료, 직원들 월급, 약재 비용 등등을 제외하면 한 달에 3천만 원 정도 남을 거고.”게다가 계속 이런 수익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그때 민우가 의욕적으로 말했다.“노력해야지. 어찌 됐든 사업하기로 했으니 잘해봐야지.”“늦었는데 아직도 안 갔어?”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윤미화였다.나는 놀라운 듯 물었다.“윤 사장님도 오셨네요?”“낮에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지 못해 퇴근하고 왔어. 이건 개업 선물.”윤미화는 커다란 마네키네코를 선물했다. 나는 그걸 카운터에 진열했다.내가 윤미화와 얘기하는 도중에 민우의 여자 친구 임설아도 왔다.주선영, 하정현, 한지영 그리고 이다연까지...이 사람들은 낮에 일이 있어 오지 못하고 밤이 되어서야 온 거였다.마침 우리도 바쁜 시간이 지난 터라 나는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윤지은은 아침에 와서 선물을 주고 간 뒤 저녁에도 또 왔다.나는 개업식 날이 되니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게 축복을 보내줄 줄은 몰랐다.나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감동했다.나는 역시 다연 한식당을 예약했다. 이 한식당이 가게와 가깝기도 했고 음식도 괜찮았으니까.우리는 둘러앉아 먹으면서 대화했다. 분위기는 매우 즐거웠다.하지만 유독 한 사람이 계속 어울리지 못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선생님의 딸 이다연이었다.이다연은 여전히 예전처럼 손에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했다.이 선생님이 주의를 줬지만, 이다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이 선생님은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나는 얼른 다가가 이 선생님께 술을 한 잔 따랐다.“이 선생님, 됐어요. 상관하지 마세요. 큰일도 아닌데요 뭘.”이 선생님은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다 내 탓이야. 내 탓. 내가 자식 교육 잘못했어.”“됐어요. 안 좋은 얘기는 그만하세요.”내가 이 선생님과 하
“형, 어떻게 됐어? 정수호가 동의해?”김진호는 온 신경이 이 일에 쏠려 있어 주해진이 다가오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주해진은 돌아오는 길에 김진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때문에 이내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직은 가게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네.”“나중에? 나중에 언제? 이거 분명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거예요. 형, 우리도 계속 참을 수만은 없어요. 안 그러면 정수호가 우리를 점점 무시할 거라고요.”주해진은 김진호가 제 말을 들으면 분명 화를 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도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말했다.“우선 조급해하지 말고 앉아서 들어 봐.”“형. 제가 조급하지 않게 생겼어요? 천수당은 우리가 인수한 가게예요. 그런데 정수호 사람들만 가게에서 돌아다니고 우리는 공기처럼 아무 역할도 못 한다고요.”“지금 짜증 내 봐야 소용 있어? 짜증 낸다고 문제가 해결돼?”주해진은 이내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차분히 달랬다.“우선 앉아서 내 말 들어 봐.”주해진은 자기 생각을 말했다.“가게에 돌아오는 건 당연해. 하지만 정수호는 가게가 아직 안정된 기로에 서지 않았다는 말로 거절하는데 나라고 어떻게 하겠어? 우선 인내심을 갖고 한 달만 기다려 보자. 가게 장사가 안정되면 내가 무조건 너를 여기에 꽂아줄게.”“네 말이 맞아. 우리는 절대 가게를 완전히 정수호한테 맡길 수 없어. 안 그러면 그 자식들이 장부에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그 말을 들은 김진호는 형이 아직도 자기편을 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한 달은 너무 길지 않아요? 형, 조금 더 앞당길 수는 없어요?”김진호는 마음이 조급해 한 달 동안이나 기다릴 수 없었다.주해진은 웃으며 김진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큰일을 할 사람이 왜 이 정도도 못 받아들여? 한 달이면 마침 가게 월매출을 볼 수 있잖아. 그때면 나도 기회를 잡을 수 있고.”김진호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형 말에 일리가 있어
나는 고수연이 만든 장부를 보고 있었다.고수연이 작성한 장부는 아주 명확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문외한인 나마저도 단번에 이해했다.보아하니 내가 참 보물을 찾은 모양이다.주해진이 다가오자 나는 장부를 얼른 고수연에게 건넸다. 나도 주해진을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주해진과 김진호는 우리와 같은 마음이 아니니 경계할 수밖에.애초에 내가 자금만 충족했어도 두 사람과 손잡을 일은 절대 없다.남을 해치는 마음은 있으면 안 되지만 경계하는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모든 건 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다.“수호, 잠깐 할 말이 있는데.”나는 휴게실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주해진도 이내 따라왔다.주해진은 방금 내가 장부를 내려놓는 걸 목격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파트너인 자기마저 경계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때문에 김진호를 여기 붙여 놓는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우리는 각자 꿍꿍이를 갖고 있었다.그때 주해진이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까 진호가 가게에서 일하는 게 너무 좋았다는데 앞으로도 진호한테 잡일거리라도 맡겨주면 안 될까? 도움이라도 될 수 있게.”“우리 술집은 너도 알잖아. 장사가 잘됐다 안 됐다 해서 요즘은 거의 손님도 없어. 진호가 거기 있어도 쓸모가 없고.”주해진은 눈을 접고 배시시 웃으며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뒷길마저 막아두었다.하지만 나도 내 생각이 있는지라 웃으며 말했다.“주해진, 애초에 약속했잖아. 가게 일은 내가 혼자 관리하기로. 직원 모집도 포함해서. 이건 다 계약서에 있는 내용일 텐데.”“알아, 나도 다 알아. 그래서 이렇게 상의하는 거잖아. 우리가 그래도 파트너인데. 이제 같은 배를 탄 사람 아니야? 그러니 예전 일은 이제는 내려놓을 때도 됐잖아.”“원수가 원한을 풀기는 쉬워도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 친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원수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역시 사회에서 구른 사람이라 그런지 말은 참 그럴듯하게 했다.나도
오후에는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사장님들을 모두 보낸 것도 있었고 손님도 오전보다 훨씬 줄었다.그제야 다들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우리가 돌아왔을 때 김진호는 배우 바삐 보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면서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민우는 그 모습이 무척 의외라는 듯 말했다.“저 자식 왜 저렇게 좋아해?”현성은 의아한 눈빛으로 김진호를 바라봤다.“저 자식 무슨 꿍꿍이지? 수호야, 차라리 저 자식 쫓아내는 건 어때?”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김진호도 주주야. 비록 비중은 작다고 해도 아예 무시하면 안 돼. 저렇게 하고 싶어 한다면 하라고 해. 그런데 너희 둘이 잘 지켜보면서 잡일거리면 시켜. 절대 기밀 손대게 해서는 안 돼.”나는 김진호에 대해 여전히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래야 오래 가고.재무, 약재 구매 경로 그리고 중요한 고객 정보 등은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게 더 안전했다.김진호는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는지 자기도 겨우 일할 수 있다고 좋아하며 만족해했다. 비록 땀투성이가 되어도 그는 여전히 흐뭇해했다.주해진은 그런 김진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너 이럴 필요 있어? 우리는 밖에서 맛있는 거 먹으며 즐기고 있을 때 혼자 여기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고. 너 바보야?”김진호는 주해진이 가져온 밥을 먹으며 싱글벙글 웃었다.“형, 그건 틀린 말이에요. 내가 왜 남은 줄 알아요?”“지금 가게는 정수호가 권력을 쥐고 있고 우리는 아예 아무런 권한도 없잖아요. 우리도 이 가게 주주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으면 가게 직원들이 우리를 알아나 봐요?”“그런데 내가 오늘 가게에 얼굴을 비추니 달라지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나와 형도 주주인 걸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 가게가 안정되면 내가 다시 들어오는 것도 문제없잖아요.”주해진은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지었다.“너 이 자식, 그런 속셈이었구나. 몰라봤는데 너 은근히 머리 잘 굴리네?”김진호는 형의 칭찬에 더 흐뭇해하
그리고 이 순간 김진호는 희망을 보았고 서서히 자기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것도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오늘이 개업 첫날이라 정 사장님은 많은 손님을 소개해 주며 한 명씩 소개해 주었다.“조 사장님, 안녕하세요!”“연 사장님, 안녕하세요!”“신 사장님, 안녕하세요!”나는 사장님들께 일일이 인사하며 접대했다.그러면서 모든 사람의 모습과 전화번호를 마음속에 기억했다.이왕 혼자 하기로 했으니 인맥과 관계는 가장 중요하다. 게다가 정 사장님이 나한테 소개해 준 인맥은 모두 어렵게 얻은 것이라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했다.손님들을 한 바퀴 접대하고 나니 나는 목이 말라 타는 것 같았다.민우가 때마침 나에게 물 한 컵을 건넸다.“얼른 물 마셔. 너 목소리 갈라졌어.”나는 컵을 받아 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제야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비록 피곤했지만 나는 아주 보람이 느껴졌다.이건 가게 발전에 두 도움 되는 것들이었다. 현성마저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연신 칭찬했다.“수호, 너 정말 대단하네. 기억력 너무 좋다. 모든 사람을 제대로 기억하네. 난 사람 얼굴이 너무 헷갈려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민우도 맞장구쳤다.“나도 사람 얼굴이 헷갈리는 것 같아. 문제는 다 비슷한 옷을 입기도 했고 생긴 게 정말 너무 비슷해.”솔직히 나도 이런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이 정도 할 수 없었을 거다.하지만 이제는 천수당의 발전을 등에 업고 수억을 투자한 이상 절대 돈 낭비해서는 안 된다.사람의 잠재력은 모두 극단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오늘 이렇게까지 할 수 있던 건 나 스스로도 매우 놀라웠다.물을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나는 또 귀한 손님들을 접대하러 갔다.민우와 현성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점심에 나는 민우더러 다연 한식당에 프라이빗 룸을 예약하라고 당부하고는 사장님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나는 당연히 함께 가야 했기에 다른 사람을 가게에 남겨두기로 했다
“잠깐.”그때 내가 소리쳤다.연승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바라봤다.“또 뭐 하려고 그래?”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눈빛으로 연승호를 빤히 바라봤다.“연승호 씨,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지 모르겠으나 한마디 경고하죠. 오늘 같은 일은 이번 한 번뿐이어야 할 겁니다. 만약 다음에 또 이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요!”연승호는 주먹을 꽉 그러쥐며 눈에서 불꽃을 뿜어냈다. 그가 화를 내려고 할 때 백연우가 얼른 그를 끌어당겼다.“승호 씨, 우리 가요. 얼른 쇼핑해요.”연승호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발산할 수 없었다.나는 윤지은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고마워요.”“계속 이런 환경에 처하면 영향 안 받을 리 없잖아? 앞으로 조심해.”윤지은의 말속에는 뭔가를 내포하고 있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게 뭐 내 탓인가? 백연우가 먼저 나를 찾아왔고 그 때문에 연승호가 나를 질투하는 건데 뭐.’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만약 연승호가 또다시 찾아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작은 사고가 있고 난 뒤 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임천호 옆에 있는 시커먼 떡대, 이제는 이름도 아는데 바로 강용재였다.나는 임천호가 사람을 보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강용재는 선물도 가져오지 않고 임천호의 말만 전했다.“임 회장님께서 정수호 씨더러 시간 날 때 소여정 씨를 보러 오라고 하십니다.”나는 임천호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문이었다. 나를 믿는 건지 아니면 시험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하지만 어떤 것이든 좋은 의도는 아니다.오늘은 천수당 개업일인데 수많은 사람 앞에서 거절하면, 사람들은 우리 천수당 의술이 별로라고 생각할 거다.때문에 잠깐 고민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우는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수호야. 동의하면 어떻게? 임천호는 분명 좋은 의도가 아닐 거야.”현성마저 그렇게 얘기했다.그때 나는 내 생각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