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이건 승낙할 수 없어요.”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내가 따로 창업하려는 걸 사장님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으니까.난 비록 위대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양심을 속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시를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선이 존대한다. 만약 내가 오늘 양심을 저버리고 이 일을 승낙하면 단기간 내에 부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계속 시달릴 거다.사장님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내가 왜 수호 씨를 이렇게 믿는지 알아?”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사장님이 말했다.“수호 씨는 절대 쓸데없는 욕심을 안 부려서 믿는 거야. 난 20년 넘게 화인당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 봤어. 가정 형편이 안 좋은 사람도 만나 보고, 잘 나가다가 크게 실패한 사람도 만나보고, 가정 형편이 좋은 사람도 만나 봤어.”“그 사람들도 처음에는 모두 성실히 일에 임했지만, 눈앞에 이익이 주어지니 유혹을 이기지 못하더라고. 하지만 수호 씨는 달랐어. 수호 씨는 쓸데없는 욕심에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야. 나도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사장님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사실 나는 절대 그 정도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사장님 뒤를 잇지 않으면 강북 약재 시장은 분명 엉망이 되어버릴 거다. 그러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당연히 강북 주민들이 될 거다.나는 단 한 번도 정 사장님처럼 대단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단지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거두어 이태웅한테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사장님이 여러 번 부탁하는데 계속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마지못해 동의했다.“이 명단은 잘 보관해야 해. 절대 가짜 약재를 만드는 사람들 손에 넘어가면 안 돼.”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종이 쪼가리 한 장이 천근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어깨에 짊어진 짐도 더 무거워졌다.나는 먼저 약속을 하고 사장님 건강이 회복되면 명단을 다시 돌려줄 계획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오래된 약을 분리 수거하고 주방과 식탁을 정리하고 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갑자기 노동했더니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피가 흘러나온 느낌이었다.서둘러 옷을 벗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피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심한 정도는 아니라 나는 혼자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때 마침 화장실을 나선 사모님이 내 어깨의 상처를 보고 다급히 물었다.더 이상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정태곤한테 죽을뻔한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참 명도 기네요. 정태곤 손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여정 말로는 정태곤이 해외에서 용병으로 일하면서 정말 사람을 죽인 적이 있대요.”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정태곤의 눈빛을 볼 때마다 섬뜩한 게 사람을 죽인 적 있는 것 같다고 여겼는데 그 짐작이 진짜였을 줄이야.“앉아 봐요. 내가 치료해 줄게요.”“네? 아니에요. 이따 가게에 가서 치료하면 돼요.”“앉으라면 앉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요?’사모님이 갑자기 화를 내는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모님이 이러는 모습은 매우 드물었기에 나는 순순히 의자 위에 앉았다.그러자 사모님은 약상자를 챙겨 오더니 나더러 티셔츠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사모님 요구에 따라 순순히 옷을 벗었다.사모님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상반신을 본 순간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다만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사모님이 슬립 차림이라 고개를 들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거라도 볼까 봐 두려웠으니까. 더욱이 나는 의자에 앉고 사모님은 서 계셔서 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다만 내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사모님의 뽀얗고 긴 다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사모님의 피부는 하얗고 맑았는데 살짝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매우 여려 보였다. 심지어 발뒤꿈치마저 핑크빛이 돌아 부드러워 보였다.그런 사모님 곁에 있으니 가뜩이나 거친 내 피부가 더 거칠어 보였다. 나는 이렇게 몰래 훔쳐보는
‘설마 그날 밤 상대가 유미 사모님인가?’‘아니야. 그럴 리 없어. 사모님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나는 즉시 마음속 생각을 부인했다.다만 나와 함께 용천 호텔에 간 누나들과 모두 잔 적이 있는데 그중 누구도 나비 문신이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사모님 몸에 나비 문신이 있었다니.나는 그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각이 자꾸만 그쪽으로 흘러갔다.만약 그 상대가 정말 사모님이라면 나는 사장님께 죄를 지은 거나 다름없다.‘아니야. 하정현 씨일 수도 있잖아.’그날 저녁 용천 호텔에 있었던 여자는 총 여섯 명인데, 유미 사모님 외에 하정현과 자보지 못했다. 게다가 하정현을 마사지해 줄 때 항상 가슴만 해준 터라 허리 아래를 본 적이 없다.‘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정현 씨 몸에 나비 문신이 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나는 애써 이쪽으로 생각을 돌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내가 한창 헛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모님이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사모님을 보니 내 추측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처럼 우아하고 점잖은 분은 절대 술에 취해 성관계를 할 사람이 아니다.더욱이 난 그 당시 술에 취해 내가 본 게 나비 문신인지 아니면 진짜 나비가 날아들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나는 절대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얼마 뒤, 사모님은 상처 소독을 끝낸 뒤 말했다.“전에 처방해 준 약 고마워요. 그걸 마셨더니 요즘 많이 좋아졌어요.”사모님은 말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넋이 나가 더 이상 사장님 댁에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화인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긴 뒤 집을 나섰다.집에서 내려와 차에 올라탄지 한참이 지났지만 내 마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하정현에게 문자를 보내 몸에 나비 문신이 있는지 확인했다.하정현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그건 왜 갑자기 묻는데?][그냥 좀 궁금해서요. 있는지 없는지만 대답해 줘요.]나는 당
한참 동안 기다리니 주해진과 김진호가 나타났다.그동안 늘 거만하던 김진호는 기세가 한풀 꺾여 줄곧 고개를 숙인 채 주해진 뒤를 따랐다.우리는 서로 소개를 한 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주해진이 건넨 계약서를 확인해 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때문에 나는 형빈도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그 말에 주해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다섯씩이나? 주주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형빈은 주주에만 가입할 뿐이지 경영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야. 게다가 천수당의 경영과 관리는 나와 민우한테 맡기기로 했잖아. 두 사람 목적은 돈 버는 거 아니야? 돈만 벌게 해주면 되잖아.”그때 계속 침묵하던 김진호가 입을 열었다.“형, 나도 한의학 지식이 있고 의술을 아니 나도 같이 경영에 참여하는 건 어때요?”나는 바로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너도 경영에 참여한다면 협력은 없던 일로 해.”김진호는 워낙 우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만약 그도 경영에 참여하면 앞으로 분명 문제가 끊이지 않을 거다.주해진은 급히 김진호의 말을 잘랐다.“넌 끼어들지 마. 네가 경영에 참여하면 내가 네 뒷수습하고 다녀야 할 게 뻔해.”“그리고 수호 동생, 파트너 더 끌어들이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분은 본인들이 알아서 나눠. 우리 지분은 나눠줄 수 없으니까.”“오케이.”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러자 주해진은 이내 싱글벙글 웃었다.“그렇다면 문제없네. 사인해.”주해진의 목적은 단지 돈 버는 거였기에 본인 이익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바로 동의했다. 이번 협상은 매우 순조로웠다. 우리는 계약서에 사인한 뒤 바로 현장에서 돈을 이체했다.이후의 식사는 말할 것도 없이 화기애애했다. 어쨌든 이제 운명 공동체가 되었으니 천수당을 일으켜 세워 잘 운영해 그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었으니.그날 밤, 현성은 또 술김에 우리 집에서 지내겠다고 고집부렸다. 결국 나는 그 뒤처리를 민우한테 맡겼다. 나는 오늘 밤 사장님 댁에 가야 했으니까.윤미화는 매일 본인 일로 바쁜 터라 사모
나는 그날 나와 몸을 섞었던 사람이 사모님일까 봐 두려워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내가 아무리 사모님처럼 우아하고 고귀한 분위기의 미녀를 좋아한다지만, 그날 밤 여인이 사모님이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나는 사장님께 미안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사장님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곧장 욕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절대 내가 생각한 게 아니기를 기도했다.오늘 밤 사모님 몸매를 본 뒤로 나는 더 조마조마하고 심란해졌다. 심지어 내 추측이 들어맞을까 봐 사모님과 접촉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아닐 거라고 요행을 바랐다. 나는 그날 밤 사모님의 반응을 떠올렸다. 내 알몸을 본 사모님은 무척 부끄러워했었다. 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사장님을 제외한 이성의 몸을 본 적 없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렇게 부끄러워했던 거고. 만약 사모님이 아니면 하정현일 가능성밖에 없다. 다만 하정현은 용천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반응이 늘 똑같았고 이상할 게 없었다.나는 결국 내 추측을 다시 한번 뒤엎었다.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지는 기분이었다.두 사람 모두 가능성 있을 것 같다가도 자세히 생각하면 모두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면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닐까? 그게 그저 꿈이었을지도 모르잖아?’‘하.’어쩜 생각할수록 더 심란해지기만 하는 건지.’“수호 씨.”내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사모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나는 너무 당황해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났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사모님의 얼굴은 발그스름해서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하지만 시선이 내 정중앙에 닿은 숙나 부끄러운 듯 이내 고개를 돌렸다.“뭐, 뭐 했던 거예요?”고개를 숙여 확인한 순간 나는 너무 난감했다.방금 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내 그곳은 어느새 발딱 서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걸 사모님께 들키다니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나는 너무 당황해 다급히 해명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저 나쁜 짓한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내가 여색을 밝히는 건 맞지만 나도 정도라는 게 있다.사장님이 나한테 얼마나 고마운 분인데, 사장님께 미안한 짓을 하겠나?내 설명이 통했는지 당황함이 가득하던 사모님의 눈빛은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나한테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그럼 앞으로 주의해요. 특히 내 앞에서 다시는 그러지 마요.”사모님은 말하면서 내 가운데를 가리켰다.나는 너무 난감해 황급히 그곳을 가렸다.“알았어요. 약속할게요. 앞으로 절대 이러지 않을게요.”말을 마친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내가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에 사모님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이토록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나는 민망함을 감추려고 커다란 외투를 걸친 뒤 사장님을 부축하러 욕실로 향했다.“수호 씨, 날도 더운데 뭐 하러 외투를 입고 있어?”사장님은 내 이상한 옷차림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이 상황에 사실대로 말했다가 사장님이 나를 잡아먹으려 할지도 몰랐기에 나는 대충 변명을 지어냈다.“방금 실수로 바지가 젖었는데 갈아입을 옷이 없어 외투로 가린 거예요.”“내 잘못이네. 수호 씨를 집에 불러들였으면서 갈아입을 옷도 준비하지 못했어.”“유미야, 전에 내 옷 두 벌 새로 샀던 거 아직 옷장에 있잖아. 그거 수호 씨한테 갖다줘.”사모님은 방으로 들어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 옷을 찾으려고 옷장을 열었다.그 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거절했다.“필요 없어요. 날이 더워서 바로 말라요.”무엇보다 사장님 옷은 모두 비싼 거라 아무렇지도 않게 받기 너무 민망했다.하지만 사모님은 벌써 옷장을 열어 새 옷 두 벌을 꺼냈다.“수호 씨 사장님이 주는 거니까 입어요.”사모님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이내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사모님은 나더러 연기를 끝까지 하라는 뜻이었다.나는 결국 마지못해 옷 두 벌을 받았다.“그, 그럼 전 돌아가서 옷 갈아입을게요.”나는 옷을 챙겨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외투를 풀
사모님은 성적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다.너무나도 모순되는 생각에 괴로워진 사모님은 결국 변기 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사모님은 남편이 꼭 괜찮아질 거라고 굳게 믿었다. 게다가 혼자 해결하는 것보다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사모님은 단순한 요구 해소보다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었다.그걸 알 리 없는 나는 방 안에 숨어 욕구를 해소하느라 바빴다.그러다 거의 절정에 도달할 때쯤 문밖에서 갑자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정수호, 문 열어!”그건 다름 아닌 윤미화의 목소리였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문을 열지 않았다. 이제 절정까지 한 발만 남은 터라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윤미화는 미치기라도 한 듯 문을 부술 것처럼 두드렸다.“정수호, 안에서 뭐 해? 설마 나쁜 짓하고 있는 거야? 당장 문 열어.”“그만 두드려. 그러다 우리 남편 깨겠어.”그때 마침 사모님이 나서서 나를 도와줬다.하지만 윤미화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나 정수호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정수호 뭐 하는 거야? 당장 문 열어.”쾅쾅거리는 소리에 나는 겁이 나는 한편 스릴감이 느껴졌다. 결국 얼마 뒤 나는 겨우 절정에 도달했다. 나는 주위를 신속히 정리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대체 뭐 한 거야? 왜 이렇게 늦게 문 열어?”윤미화의 눈빛은 나를 나무라는 듯했다.하지만 나도 이제는 점점 뻔뻔해져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거짓말했다.“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아무리 잠들어도 내가 그렇게 높게 문 두드렸는데 못 들었다고?”윤미화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나는 서둘러 해명하는 대신 나른하고 귀찮은 듯 말했다.“안 믿겠으면 믿지 마요. 저는 무슨 일로 찾았는데요?”윤미화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시트부터 확인했다.다행히 나도 이제는 이런 쪽으로는 도
윤미화는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꿍꿍이를 꾸미는 듯 뭐라 중얼거리며 말했다.그러던 그때 내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그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운미화는 한발 앞서 내 핸드폰을 빼앗아 확인했다.“베터리가 없다고? 80퍼센트나 남았으면서 이게 베터리가 없는 거야?”거짓말이 단번에 폭로된 나는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핸드폰 이리 줘요.”“베터리가 남아 있으면서 왜 없다고 했어?”“잘못 기억했나 보죠.”“이제 빌려줄 수 있지? 잠금 해제해.”“사모님 핸드폰을 빌리면 되잖아요. 왜 꼭 제 걸 빌려야 하는데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윤미화는 왜 항상 내가 난감해하는 꼴을 보지 못해 안달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때 윤미화가 나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연기 그만해. 방금 뭘 했는지 유미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나랑 거래 하나만 해.”나는 약간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반박할 수 없어 한동안 침묵했다.그때 윤미화는 내 핸드폰을 흔들며 싱긋 웃었다.“싫으면 까발릴 거야.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핸드폰 잠금 해제하는 거 나한테 식은 죽 먹기야.”윤미화의 신분을 떠올리는 나는 문득 겁이 났다.만약 이 자리에서 모든 게 까발려지면 사모님 앞에서 유지했던 내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 거다.“진짜 독하네요.”나는 결국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윤미화는 나한테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사모님을 향해 말했다.“이제 아무 일 없으니 가 봐.”“수호 씨 괴롭히지 마. 도움받으려고 사람을 집에 끌어들였는데 언니가 이러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윤미화는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대충 얼버무렸다.“알았으니까 얼른 가기나 해.”사모님은 그제야 뒤돌아 안방으로 사라졌다.사모님이 떠난 뒤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윤미화를 바라봤다.“뭐 하자는 거예요? 저 사장님 직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장이 직원을 협박할 수 있어요?”“협박하면 뭐? 나 정말 볼일 있어서 그래.”“그럼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
하지만 형수는 너무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에 반해 양춘옥은 힘이 넘쳐나 손쉽게 형수를 제압했다.형수는 순간 폭발해 버렸다.“당, 당신 뭐 하는 거야?”양춘옥은 얼른 아들에게 말했다.“아들, 뭐 해? 얼른 밧줄을 찾아오지 않고. 이 여자 윗몸만 움직일 수 있고 아래는 못 움직여. 너한테 마침 좋은 기회잖아.”양춘옥의 아들은 얼른 벨트를 풀더니 형수의 손을 묶으려고 다가갔다.그 순간 나는 방으로 쳐들어가 그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양춘옥은 그 순간까지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양춘옥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나는 양춤옥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뺨을 후려갈겼다.형수는 위험한 순간에 나타난 나를 보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 역시 형수가 깨어난 걸 보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형수!”“수호 씨, 타이밍 너무 좋았어요. 이 둘은 인간도 아니에요! 감히...”형수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얼른 형수의 두 손을 꼭 잡았다.“알아요. 다 알아요. 형수, 걱정하지 마요. 이 사람들이 한 짓 내가 모두 찍었어요. 지금 경찰에 신고할게요.”양춘옥은 경찰에 신고한다는 내 말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마구 달려들어 내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했다.나는 또다시 양춘옥의 뺨을 내리쳤다.그러자 이번에는 양춘옥의 아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모자 둘이 달려들어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양춘옥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그제야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정 사장님, 제발 신고하지 말아 주세요. 제 아들이 이제 막 출소했는데 또 잡히면 이번에는 끝장이에요.”나는 이를 악물며 양춘옥을 바라봤다.“당신 아들 생각하기 전에 우리 형수는 생각했어? 내가 마침 집에 오지 않았다면 당신과 당신 아들이 형수한테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거잖아.”“내가 아줌마를 얼마나 믿었는데, 이렇게 보답하는 거야? 정말 악독하기도 하지. 오늘 당신도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거야.”“안 돼요. 정 사장
“뭐요?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에요?”“까다로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얌전하지 않은 여자인 것 같아. 남편과 잘 지내지 않고 별 같잖은 남자랑 바람이 났어. 정수호라는 사람인데, 매일 이 여자 몸을 닦아주러 와서 이 여자를 형수라고 불러...”“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이 여자도 참 뻔뻔하네요.”아들의 말에 양춘옥이 말했다.“그러니까 내가 널 불러온 거잖아. 이 여자도 워낙 얌전하지 않은 여자니까 너도 욕구나 풀어보라고. 아들, 너 이제 막 감방에서 나와 많이 쌓였을 거 아니야?”“밖에서 아가씨 찾기보다 이 여자한테 욕구를 푸는 게 더 나아. 적어도 이 여자는 깨끗하잖아.”고태연은 두 모자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일어나 양춘옥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하지만 결국 그녀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그녀가 혼자 집에 있을 때 말이다.이런 상황에서 당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를 거다.고태연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심지어 이 두 모자에게 이토록 모욕당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 시각 양춘옥과 아들의 대화를 들은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안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나는 우선 거실에 설치했던 감시 카메라를 찾았다. 그랬더니 카메라는 어느새 구석으로 옮겨졌다.‘이 아줌마가! 나는 그래도 믿고 매일 카메라를 돌려보지 않았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나는 핸드폰 녹화 기능을 켜고 방 안을 몰래 촬영했다.탐정 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된 이후로 나는 뭐든 증거싸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남자가 형수 몸에 바짝 붙어 다리에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았다.“냄새 좋다. 식물인간한테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다니. 피부도 이렇게 좋고. 대박, 몸매도 완전 끝내주잖아.”양춘옥은 옆에서 키득거렸다.“당연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자는 깨끗해. 아들, 얼른 하지 않고 뭐 해?”“헤헤. 그럼 엄마는 밖에서 망 좀 봐...”양춘옥은
“나 그만 놀려요. 내가 보고 싶은데 왜 애교 누나 집에 와서 혼자 술을 마셔요?”나는 아직 어려 정치계 판을 잘 모른다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남주 누나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우리 푸들 많이 똑똑해졌네? 예전처럼 타격감이 좋지 않아. 하지만 점점 더 귀여워.”나는 자꾸만 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남주 누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말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일에 무슨 문제 생겼어요?”“응. 이 세상에서 날 괴롭힐 수 있는 건 일밖에 없어.”“왜죠? 왜 혼인이나 가정 문제는 될 수 없어요?”“헛소리 아니야? 혼인과 가정이 나보다 중요할 리 없잖아.”‘맞다. 누나도 가정보다 자기 지위가 우선인 여자였지. 백연우처럼.’“그래서 일은 해결됐어요?”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후회했다. 해결되었으면 술로 기분을 달랠 리 없을 테니까.하지만 남주 누나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해결된 셈이지. 하지만 강등됐어.”“얼마나요?”“아무 실권도 없는 말단직으로. 그래도 괜찮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내 약점을 잡고 나 협박하는 사람 없을 테니까.”남주 누나는 강등된 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아마도 자기 위로일 수 있었다.“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시간도 아까운데 계속 즐겨볼까?”남주 누나는 또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심지어 리듬 있는 음악을 틀어 놓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나에게 또 충격을 안겨주었다.나와 남주 누나는 그사이 애교 누나가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몰랐다.애교 누나는 내가 걱정되어 직접 와 봤다. 하지만 방에서 들리는 나와 남주 누나의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남주였네. 다른데 좀 가지. 왜 우리 집에서 수호 씨를 꼬시는 거야?”애교 누나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나와 남주 누나는 한밤중까지 몸을 섞고 피곤한 몸을 한 채 잠이 들었다.오랜만에 푸는 욕구에 우리 둘 다 너무 흥분해 버린 탓이었다.심지어 남주 누나는 열정적이다 못해 심지어 내가 지금 동영상 촬영 현
남주 누나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정수호네. 이리 와, 와서 한잔해.”나는 남주 주나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봤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와인 두 병 중 한 병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남주 누나도 이미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했다.“누나, 혼자 이렇게 마신 거예요?”남주 누나는 똑바로 앉아 내 팔을 감싸안았다.“너 아니면 애교를 불러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요즘 바쁘다고 해서 안 불렀어. 그런데 마침 이렇게 와 버렸네? 나랑 한잔해.”나는 지난번 남주 누나를 봤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누나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데 아마도 일 때문인 것 같았다.그런데 이번에 이토록 취해 있는 걸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나는 남주 누나 손에 있는 와인을 빼앗았다.“그만 마셔요. 취했어요. 부축해 줄 테니 방에서 휴식해요.”“정수호, 예전에 너한테 장난치던 때가 그리워. 도 장난칠 테니까 내 장난 받아줘. 응? 나도 기분 좀 좋아지게.”남주 누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게 대체 뭐가 그립다는 건지.’나는 그때 너무 단순해 항상 남주 누나한테 농락당했다. 심지어 몇 번이나 나를 유혹하는 남주 누나를 눈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며 마음을 졸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가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을 때면 마음대로 하는 지금이 더 좋다.“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남주 누나는 내 목을 끌어안고 취한 말투로 말했다.누나의 완벽한 몸매를 보니 나도 솔직히 몸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남주 누나는 지금 많이 취한 상태고, 기분도 안 좋아 보이니 몸을 섞는다고 즐겁지는 않을 거다.“됐어요. 누나 지금 취했어요. 부축해 줄 테니 방에서 자요.”“나 많이 안 마셨어. 그냥 조금 알딸딸한 정도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있잖아. 나 요즘 너무 바빠서 남자 만날 시간도 없었어. 그러니 오늘 너 땡잡은 거야.”남주 누나는 말하면서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나는 술에 취한
“정 사장님, 물 바꿔드릴까요?”내가 형수의 팔을 닦아주는 동안 양춘옥이 방에 들어와 열정적으로 물었다.그 모습에 나는 간단히 말했다.“아니에요. 거의 다 닦아요.”나는 형수가 뭘 걱정하는지 몰랐다. 무엇보다 양춘옥이 문제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때 양춘옥이 목적성이 다분한 질문을 했다.“정 사장님, 요즘 안 보이시던데 바쁘셨나요?”“네. 요즘 일이 바빠서 매일 오지 못해요. 그러니 이모님이 우리 형수님 잘 돌봐주세요. 참, 요즘도 제가 바쁘니 부탁드릴게요.”양춘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싱긋 웃었다.“정 사장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무조건 잘 돌봐드릴게요.”“형수, 다 닦았어요. 형수가 깨끗한 걸 좋아하는 거 알고 특별히 피부 관리하는 스킨로션도 발라줬어요.”나는 형수를 돌본 뒤 옆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고아연이 돌아온 뒤에야 떠났다.고아연은 나를 집 앞까지 마중하며 물었다.“요즘 바빠?”“네, 왜 그래요?”“아니, 별 건 아니고. 지난번에 찍는다던 영상을 안 찍었길래 바쁜가 해서.”“요즘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이건 단순한 오락이라 돈을 버는 것에 비하면 당연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그래. 그럼 앞으로 안 찾을게. 내 연락처 삭제해.”고아연은 갑자기 말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여자들은 다 이래요? 심심하면 연락처 삭제하고? 이런 거 엄청 예의 없는 거 알아요?”고아연은 팔짱을 낀 채 웃었다.“우리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도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바빠서 영상 찍을 시간도 없다는데 내가 네 연락처를 왜 남겨? 난 원래 이래. 연락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삭제해. 수호 씨도 마찬가지야.”나는 일부러 고아연에게 맞섰다.“그럼 형수가 지금 이러니까 형수도 삭제했겠네요?”“그래.”“흥. 누가 믿을 줄 알고.”“믿든 말든.”고아연의 모습은 거짓 같지 않았다.나는 이 순간 고아연을 또다시 봤다.“바쁜 일 다 처리하면 도와줄게요. 연락처 삭제하지 마요. 앞으로 또다시 추가하
애교 누나 얘기를 언급하니 내 기분은 저절로 다운되었다.“난 누구랑 결혼할지도 모르겠어.”“왜? 애교 누나랑 사이가 틀어졌어?”민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애교 누나랑 나는 결혼할 사이가 같지 않아. 애교 누나가 나한테 너무 관대하고 너무 풀어줘. 그래서 너무 진실감이 없어.”“헐. 여자 친구가 풀어주는 게 얼마나 좋은데? 네가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도 뭐라 안 하고 오히려 응원해 준다며? 그렇게 좋은 여자 손전등 켜고 찾아도 없어.”현성과 민우는 나를 부러워했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똑같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애교 누나는 너무 좋고 너무 관대하여 질투도 하지 않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가끔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생각도 들곤 한다.그에 반해 윤지은은 또 나에게 너무 현실을 체감하게 해준다. 좋아할 때도 질투할 때도 있어 오히려 더 커플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정수호, 너 진짜 쓰레기네. 너 설마 애교 누나 버리려고 그래?”현성이 갑자기 물었다.“헛소리. 내가 언제 버린다고 했어?”“그럼 아까 발언 무슨 뜻인데?”“난 그냥 애교 누나가 너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지 버리겠다는 뜻 아니야. 함부로 누명 씌우지 마.”나는 바로 현성을 반박했다.하지만 그때 민우가 바로 끼어들었다.“사실 나도 네가 좀 쓰레기 같아. 아마 네가 만난 누나들이 다 너 같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나 보다.”“젠장. 내가 너희들한테서 무슨 좋은 말을 듣겠냐?”그날 저녁 퇴근 후 나는 형수네 집에 들렀다.그동안 너무 바빠 형수를 보러 오지도 못하고 몸을 닦아주지도 못했기에, 나는 얼른 따뜻한 물을 담아 형수 몸 곳곳을 닦아주었다.형수는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지만 뺌은 여전히 발그스름하고 피부도 백옥 같은 피부에 핑크빛이 감돌았다.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잠자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내가 형수의 몸을 닦아주는 동안 형수의 가슴은 사실 콩닥콩닥 북을 쳤다.‘수호 씨가 이제야 날
“이 얘기는 이쯤에서 하고. 말해요, 서나연 씨 일 외에 다른 볼 용건 있어요?”나는 화제를 다시 끌어왔다.그러자 소여정은 내 턱을 잡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있지 그럼. 너 놀리러 왔어. 내가 너 놀리는 거 오랜만이잖아.”“미쳤어요?”나는 다급히 소여정의 손을 쳐냈다.“날 미친X 취급해? 내가 진짜 너 가만 안 둔다?”“못 믿겠어요. 나 이제 임천호도 안 두려운데 소여정 씨를 두려워하겠어요?”나는 소여정에게 계속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소여정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오호라. 며칠 새에 많이 컸네? 그런데 그런 모습 점점 더 좋아지는데?”소여정은 정말 역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번 나타났다 하면 나에게 귀찮은 일을 던져주곤 한다.물론 내가 이제 임천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그저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내가 소여정을 무시하자 소여정도 나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스스로 가게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결국 몇 가지 선물 세트를 골랐다.소여정이 계산하려고 할 때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선물 세트 사서 누구한테 주려고요?”“이젠 임천호 안 두렵다며? 내가 누구한테 주든 무슨 상관이야? 아니면 내가 이 선물을 가져갔다가 이 가게에서 샀다는 걸 들킬까 봐 그러는 거야?”소여정은 마치 내 배에서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빠삭하게 알았다.“찾아오겠으면 찾아오라고 해요. 소여정 씨는 정상적인 소비예요.”나는 말발로 소여정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바로 뒤돌아 떠나갔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후들거렸다.소여정은 물건을 구매한 뒤 가게에서 택배로 보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질문에 점원 한 명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소여정은 주소 하나를 남기고 직원더러 선물 세트를 주소에 적인대로 보내달라고 당부했다.소여정이 떠난 뒤 나는 그 위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주소는 H시로 되어 있고, 받는 이는 ‘소원규’로 되어 있었다.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한참을 떠
“누구한테 들었어?”“그건 상관하지 마요.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요.”나는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다.다행히 소여정은 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맞아. 나도 예전에 윤지은과 임유미처럼 잘 사는 집 딸이었어. 안 그러면 우리 넷이 왜 친구가 됐겠어?”하긴. 소여정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뭐 하나만 물을게.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강북에 있지?”“그걸 어떻게 알아요?”나는 흠칫 놀랐다.그 말에 소여정이 대답했다.“어떻게 알았는지는 알려고 하지 마. 맞는지 아닌지만 말해.”소여정이 이렇게 묻는다는 건 이미 단서를 찾았다는 뜻이기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맞아요. 임천호 아내가 강북에 와서 요즘 유미 사모님과 같은 동네인 백조의 호수에 살아요.”“백조의 호스? 보아하니 나도 그곳에 집을 마련해야겠네.”소여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 말에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지금 제정신이에요?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데 멀리 숨지는 못할망정, 같은 동네에 살겠다고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설마 서나연 씨를 쫓아내고 본인이 임천호 아내가 되려고 그래요?”소여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안돼? 임천호가 얼마나 대단해. 나한테도 잘해주고.”“대단하긴 무슨. 부시장님과 윤 회장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만.”나는 내가 임천호 뒷담화를 하는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소여정은 나를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정수호, 대단하네. 임천호를 그렇게 말하고. 임천호가 안 뒤 죽이려고 할까 봐 두렵지 않아?”“내가 임천호 산하의 대출 회사도 무너뜨렸는데, 임천호를 무서워하는 거로 보여요?”나도 비록 내가 너무 잘난체 한다는 걸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이 세상에 허영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게다가 이건 내가 평생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일이기도 하다.소여정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아주 어깨뽕이 하늘로 치솟는구먼? 그 대출 회사 임천호한테 엄청 중요한 회사인 건
“오, 오빠가 뭘 하려는지 알아요. 만약 하고 싶으면 날 오빠한테 줄 수 있어요.”주선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옷자락을 잡고 긴장한 표정으로 고백했다.이건 현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현성은 너무 설레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두말없이 주현영을 와락 끌어안았다.그러자 주현영이 이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여, 여기서는 안 돼요. 우리... 호텔 가요.”“그래, 바로 가자.”나는 현성과 주현영이 손잡고 뛰쳐나오는 걸 본 순간, 현성이 오늘 소원을 이룰 거라는 걸 알았다.나는 싱긋 웃으며 현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파이팅.”“당연하지.”현성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이윽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기쁜 얼굴로 떠나갔다.나는 얼른 이 기쁜 소식을 민우에게 알려주려고 전화했다.[수호야. 왜 그래? 나 지금 바빠.]민우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그 목소리에 나는 의아했다.“너 지금 뭐 해? 가게 보는 거 아니었어?”[설아가 점심에 나 찾아와서 지금 설아랑 호텔에 있어.]“헐, 너 뭐야? 임설아랑 결실을 보는 거야?”‘왜 친구들한테 버림당해 혼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민우는 헤실 웃었다.[이만 끊어. 설아가 샤워하러 갔다가 지금 나와. 우리 오늘 마지막까지 갈 거거든.]민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대충 음식을 먹고 가게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하지만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을수록 기분이 안 좋았다.예전에는 내가 민우와 현성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는데, 현재는 내가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 꼴이 되었으니.하지만 윤지은과 애교 누나한테는 연락할 엄두도 나지 않고 형수는 아직 혼미해 있으니 누구를 찾아야 할지 고민이었다.나는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 않다고 이렇게 외로이 혼자 남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정수호 몰락했네. 몰락했어!’내가 속으로 감개무량해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직원 한 명이 나를 불렀다.“정 사장님, 누가 찾아왔어요.”“알았어요. 내려